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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장. 엽사#2-
검은 무상곤과 검붉은 무상곤이 연달아 충돌했다.
“아무개새끼? 그건 욕인 것 같습니다만?”
“닥치고 붙자니까?”
“알겠습니다.”
짧은 문답이 끝난 직후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폭음과 쇳소리가 쉴 새 없이 울리고, 거대한 구덩이가 쉴 새 없이 패며 흙먼지가 비처럼 쏟아졌다.
굉음으로 소란스럽기 짝이 없는 정적 속에서 두 사람의 무상곤이 쉴 새 없이 격돌했다.
존 도우의 손에 들린 무상곤이 시시각각 형태를 바꾼다.
바스타드 소드에서 롱 소드, 창, 양손 검, 철퇴 등등.
그렇게 바뀌는 무기 하나하나를 다루는 솜씨까지도 최상급의 수준이었다.
존 도우의 무상곤이 바람을 가를 때마다 검붉은 색의 짙은 영력이 기류를 타로 휘돌았다.
반면 준혁의 무상곤은 단 한 번도 형태를 바꾸지 않았다.
처음부터 육모방망이 형태를 유지한 채 바꾸지 않았다.
사람을 상대할 때의 준혁은 무기로 항상 이 육모방망이를 들었다.
준혁은 다루지 못하는 무기가 없었지만, 그 중에서도 인간을 상대할 때는 이 육모방망이가 딱 손에 맞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길이는 어중간함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완벽하게 무기를 다루는 준혁에게는 긴 무기와 짧은 무기의 장점을 동시에 발휘할 수 있는 길이였다.
카이르무스가 인간으로 폴리모프 했을 당시에 준혁이 육모방망이를 쥐고 싸운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까가가강!
존 도우의 손 놀림은, 천변만화하는 무상곤의 변화만큼이나 화려함의 극치였다.
찌르고, 베고, 찍고, 휘두르고, 비틀고, 당긴다.
화려함을 넘어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로 현란하다.
반면 준혁의 손에 들린 육모방망이는 오직 한 가지 움직임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휘두름.
휘두른다는 동작 하나만으로 모든 공방을 소화하고 있었다.
취향과 스타일의 차이도 있기는 하지만, 두 사람의 수준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정교한 방어의 틈을 뚫고 들어간 육모방방이가 존 도우의 옆구리에 깊숙이 박혔다.
과앙-!
묵직한 쇳소리가 울렸다.
존 도우가 입고 있던 갑옷을 풀 플레이트 아머 수준으로 바꾼 탓에 울린 쇳소리다.
그렇지만 모든 충격을 해소할 수는 없었는지 존 도우의 신형이 주르륵 밀려 나갔다.
그리고 준혁은 상대에게 여유를 주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 편이었다.
밀려나는 존 도우에게 빠르게 따라붙으며 육모방망이를 휘둘렀다.
두 자루 무상곤의 충돌이 거듭될수록 충격의 여파가 터져나갔다.
그리고 준혁의 육모방방이가 존 도우의 무상곤을 뚫고 들어가는 횟수도 점점 올라갔다.
순식간에 백여 합이 교환되었다.
“큽!”
존 도우의 입에서 짓씹는듯한 신음이 튀어 나왔다.
호흡이 달리고, 그것이 행동의 둔화를 불렀다.
그 순간이 준혁에게는 기회였다.
쾅!
충돌과 동시에 검붉은 철퇴가 격하게 튕겨 나가고, 존 도우의 가슴팍이 크게 열렸다.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존 도우의 왼손이 가슴팍으로 향한다. 왼팔의 갑옷이 방패처럼 펼쳐지며 전면을 방어한다.
하지만 준혁의 육모방망이가 더 빨랐다.
상박을 두드리는 충격에 존 도우의 왼팔마저 튕겨 나가고, 완벽하게 활짝 열려버린 가슴팍.
꽝!
준혁의 왼 주먹이 존 도우의 가슴팍을 후려갈겼다.
“컥!”
답답한 신음이 터진다.
하지만 겨우 한 방으로 끝낼 준혁이 아니었다.
첫 방은 주먹이었지만 그 다음은 육모방망이였다.
쾅, 콰콰콰쾅!
육모방망이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존 도우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쩌저적!
존 도우의 흉갑에 순식간에 균열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준혁의 눈동자 또한 한층 날카롭게 빛을 뿜었다.
‘빨리 꺼내 봐라!’
허공에서 영력 화살을 통과시킨 그 스킬을 기다리고 있었다.
똑같은 엽사였다.
그리고 준혁은 엽사의 정점을 찍은 상태였다.
그런 준혁도 모르는 스킬이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쾅, 쩌적!
흉갑의 균열이 벌어지고 부서진 파편이 튀어 올랐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격렬하게 흔들리는 존 도우의 눈동자.
거대한 영력을 머금은 육모방망이가 다시 한번 흉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지금!’
준혁의 마음 속 외침이 신호라도 된 듯 존 도우의 온몸에서 미세한 변화가 일어났다.
부우웅-!
그대로 존 도우의 몸뚱이를 통과해 버린 육모방망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존 도우의 몸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존 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준혁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뭐지?’
당황스러웠다.
존 도우가 스킬을 발현했는데 아무런 낌새도 알아챌 수가 없었다.
준혁의 감각 스탯은 1,999였다. 더는 성장할 수도 없는 수치다.
극도로 예민한 그의 감각으로도 알아차릴 수 없는 기운이라니.
당황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하지만 싸워야 할 적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법.
“잔재주가 제법 재미있는데?”
짐짓 여유를 부리는 준혁을 향해 존 도우가 빙글 웃으며 말했다.
“그랬습니까?”
“어, 재롱이 아주 귀여워.”
“재미있었다니 다행이군요. 그럼 다음 만남을 기약할까요?”
“벌써 가려고?”
“이기지도 못할 텐데 계속 덤비는 건 바보짓이죠.”
“내가 놔 준대?”
“그런 일 정도는 능력껏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준혁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진행했다.
‘사로잡는 건 힘드려나?’
존 도우가 사용하던 묘한 스킬과 지금 내보이는 자신감을 고려하면 몸을 뺄 방법이 있다는 뜻이다.
‘뭐, 상관 없지.’
사로잡을 수 없다. 그 묘한 스킬을 생각하면 죽이는 것도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 잘 가.”
“어? 진심입니까?”
“내가 그렇게 신뢰가 없는 사람이 아닌데?”
“거짓말 잘하잖습니까? 야구 경기도 그렇고.”
“한 마디를 안 지네?”
“지는 걸 워낙 싫어해서요.”
“그래, 아무튼 잘 가라.”
지금은 차라리 보내주는 게 이득이었다.
“그럼 다음에 뵙지요.”
말을 마친 존 도우가 가볍게 바닥을 박찼다.
“음?”
그 모습을 보던 준혁이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존 도우의 머리 위 공간이 갑자기 비틀렸다.
‘저거 설마?’
준혁이 멈칫하는 순간 비틀렸던 공간은 내부에 검붉은 빛의 소용돌이가 치는 타원으로 바뀌었다.
게이트였다.
존 도우의 모습은 눈 깜짝할 사이에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고, 게이트 또한 언제 거기 있었냐는 듯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준혁의 머릿속에는 다른 것이 떠올라 있었다.
‘저 게이트…….’
검붉은 색의 게이트.
게이트 돔 안에 나타났던, 굉황을 만났던 그 게이트의 색이 저렇게 검붉은 색이었다.
‘그러고 보니…….’
싸울 때 존 도우의 영력은 검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검붉은 색의 영력을 가진 이가 존 도우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검붉은 색의 게이트까지 보고도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건 오히려 개연성이 맞지 않는다.
‘무명회의 대장이거나, 핵심이라는 뜻인데…….’
순간적으로 놈을 잡지 못한 것이 아쉬워졌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존 도우를 보내준 건 아니었다.
“흑호.”
준혁의 부름에 은신으로 몸을 숨기고 있던 흑호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표식은?”
준혁의 물음에 흑호가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표식]은 추적 대상에게 마킹을 해 놓는 흑호의 스킬이었다.
암살 계열의 여자 각성자를 쫓아갔던 흑호가 자리를 비우고 준혁에게 올 수 있었던 이유도 [표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의 여자 암살자에게 [표식]으로 마킹을 해 놓았던 것이다.
문제는 존 도우였다.
“표식이 안 먹혔단 말이지?”
흑호를 통해 존 도우에게 미리 [표식]을 펼쳐놓았기에 순순히 놓아주었었다.
그런데 무슨 방법인지는 모르지만 흑호는 존 도우의 종적을 놓쳤다.
“네가 수고 좀 해야겠다. 일단 길드로 돌아가자.”
반사적으로 입을 크게 벌리며 포효하려던 흑호가 흠칫 몸을 떨더니 고개만 주억거렸다.
“긴장하자, 응?”
시무룩하게 고개를 주억거린 흑호가 슬그머니 준혁에게 몸을 붙였다.
‘번거롭지만 어쩔 수 없지.’
흑호의 [표식]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해도 플랜B가 있었다.
다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크르르.
흑호가 허락을 구하는 듯 준혁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 가…….”
말을 꺼내던 준혁이 갑자기 뭔가 떠올라 말꼬리를 흐린다.
‘이거 어째…….’
국내에 있는 배면계 귀환자들을 잡아들이는 일이 자꾸 미뤄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일의 우선순위는 어쩔 수 없었다.
“가자.”
준혁의 허락이 끝나는 동시에 흑호가 공간의 문을 열었다.
***
“야!”
버럭 소리를 내지른 사람은 린디웨였다.
“왜?”
“여자 방에 이렇게 불쑥 들어오는 건 어디서 배워 먹은 매너야?”
준혁이 흑호를 이용해 린디웨의 개인 집무실에 불쑥 나타난 탓이었다.
준혁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 시스템 아바타가 별 걸 다 따지…….”
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린디웨가 그 말을 끊는다.
“이보세요, 김준혁 씨.”
“응?”
“나는 시스템 아바타인 동시에 린디웨이기도 하거든?”
“응?”
“시스템 아바타인 동시에 린디웨라고.”
“아니, 그러니까 린디웨는…….”
“이봐요, 무신경한 아저씨.”
“응?”
린디웨가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톡톡 치며 말했다.
“사람의 기억은 뇌에 저장되지?”
“그렇겠지?”
“그리고 인격을 형성하는 데 기억이라는 게 차지하는 비중은 어마어마할 거야. 안 그래?”
“그것도 뭐 그렇겠지?”
“그러면 지금 나는?”
“음…….”
“그냥 린디웨의 인격에 시스템 아바타가 겹쳐 있는 상태란 말이다.”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시스템 아바타라고는 해도, 인격은 린디웨라고 보는 게 옳은 관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준혁이 조금 민망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인다.
“쏘리.”
“뭐,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다. 이 무신경한 인간아. 그러니 연애를 못 하지.”
순간 준혁이 발끈한 표정으로 외쳤다.
“안 한 거지, 못 한 거 아니거든!”
“아, 그러셔?”
“와, 내가 운동할 때 나 좋다고 연락하던 여자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한국에는 이런 말이 있더라.”
“이런 말?”
“우리집에 금송아지 있다.”
“허, 진짜! 와, 내가 진짜…….”
사실이었다.
준혁은 국내 최고의 프로야구 선수였다. 얼굴도 나쁘지 않은 편이라 호감을 보인 연예인이나 방송인이 꽤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준혁은 운동 외에 다른 일에는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형네 가족들을 챙기는 데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증명할 길이 없었다.
철저한 자기 관리 덕분에 흔한 스캔들 한번 없었기에 우기는 것도 불가능했다.
“아, 예예. 알겠습니다. 그러니 온 이유나 말해.”
“진짜라니까?”
“아무튼 인간은 이럴 때 보면 다 똑같다니까?”
“뭐?”
“옛날에는 다들 잘 나갔다더라.”
“아니, 아니. 그건 아니지.”
“뭐가?”
“난 진짜 인기 많았다고!”
“아, 아 네. 알겠습니다. 믿어 줘야지 어쩌겠어.”
물론 조금도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준혁은 한 층 더 억울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저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스캔들이라도 만들어 놓을 것을.
“후우~”
결국 준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흑호.”
린디웨를 찾아온 용건을 말하기 위해 흑호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