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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장. 낯선 상황#2-
분명 영력이었다.
그것도 매우 높은 수준의 영력.
‘누구지?’
준혁은 백효의 시야를 공유한 채 일단 주차장으로 가 차에 올랐다.
부르르릉!
넓게 퍼지는 세찬 엔진 소리에, 공유하고 있는 시야 속 남자의 고개가 이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아닌데?’
준혁을 감시하던 중이었다면, 계속 준혁을 주시했거나 아예 시선을 주지 않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한다.
하지만 문제의 남자는 ITO 한국 지부만 뚫어지라 보다가 갑작스러운 엔진 소리에 잠깐 신경이 분산된 듯한 모습이었다.
‘얼굴을 바꾸고 온 게 다행이군.’
본래 얼굴로 밖을 나다니다가는 무수한 인파가 몰리기에 매구탈로 얼굴을 바꾸고 왔다.
당연히 늘 사용하던 이순신 장군의 얼굴이었다.
물론 황소 엠블럼에 12기통 자연 흡기 엔진을 얹은 슈퍼 카 역시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하지만 준혁의 맨 얼굴과는 비교가 안 된다.
준혁은 백효가 전해 주는 광경 속에서 남자의 얼굴을 거듭 확인했다.
어두운 갈색 머리에 밝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백인 남자.
당연히 준혁이 가진 한국의 배면계 귀환자 명단에는 없는 얼굴이었다.
‘무명회…….’
준혁과 리쉬옌, 린디웨를 제외한 배면계의 귀환자는 일단 무명회 소속일 가능성이 컸다.
‘아닐 수도 있지만…….’
저렇게 몸을 숨기고 한 곳을 감시하듯 쳐다보는 모습은 일단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한다?’
잠시 고민한 끝에 준혁은 차를 몰아 ITO 한국 지부를 빠져나왔다.
과격한 엔진 소리를 계속 울려 대면 시선만 받을 뿐이니, 일단은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게 먼저였다.
백효와는 여전히 시선을 공유한 채였다.
꽤 거리를 벌린 준혁은 적당한 건물 지하에 주차한 후, 다시 한 번 매구탈로 얼굴을 바꿨다.
이번에는 만 원짜리 지폐의 세종대왕 얼굴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젊게 컨버전한 얼굴이다.
준혁은 빠르게 왔던 길을 되짚었다.
대로가 아닌, 건물 뒷골목 등의 으슥한 경로를 통해 움직인다.
몸을 숨기고자 마음먹으니 ‘엽맥’이 자연스레 발동되어 일종의 은신 효과도 덧씌워졌다.
이 은신의 효과가 모습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존재감을 옅게 만드는 효과다.
인지 범위 안에 있으면서도 시선을 끌지 않도록 해 주었다.
마음먹고 보면 당연히 보이지만, 신경 쓰지 않을 때는 준혁의 존재를 잊게 만드는 것이다.
준혁은 뒷골목을 따라 달리고, 장애물이 나오면 그대로 뛰어넘으며 순식간에 ITO 한국 지부 인근에 도착했다.
발을 멈춘 곳은, 문제의 남자 뒤쪽에 있는 높은 빌딩의 옥상이었다.
‘뭔가를 꾸민다면 사무총장이 목표인가?’
ITO는 그 자체만 놓고 보면 크게 중요한 국제기구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ITO 본부가 아닌 한국 지부라면 더욱더 중요도는 낮아진다.
그런 곳을 감시한다면, 그 안에 있는 볼런트 라일을 노린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그때 ITO 한국 지부의 현관을 열고 누군가 등장했다.
동시에 감시하던 남자가 슬쩍 몸을 낮췄다.
‘음?’
준혁의 얼굴에 의혹이 서렸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남자.
청바지, 회색 티셔츠, 큰 렌즈의 선글라스, 깊이 눌러 쓴 야구 모자 차림의 남자는 다름 아닌 볼런트 라일이었다.
준혁과 이야기를 나눴던 당시에는 타이를 뺀 정장 차림이었다.
그런데 굳이 옷차림을 바꿨다는 건 뭔가 목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연신 야구 모자의 챙을 내리누르는 모습이 정체를 숨기고 싶어 하는 모양새였다.
게다가 평소에 데리고 다니던 수행원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뭐지, 도대체?’
갑자기 옷을 갈아입고 얼굴을 숨기려는 볼런트 라일, 그리고 숨어서 라일을 주시하는 남자.
ITO 한국 지부에 올 때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사이 주차장으로 걸어간 볼런트 라일이 낡은 중형차에 올랐다.
이 역시 준혁이 보았던 볼런트 라일의 자동차가 아니었다.
감시하던 남자도 자리를 벗어나 구석진 곳에 주차해 놓았던 자동차에 올랐다.
‘일단은…….’
감시하던 남자가 영력을 품은 놈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마음먹지 않았을 것이다.
볼런트 라일의 행동이 여상스럽지는 않지만, 그 정도는 개인적인 비밀 정도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볼런트 라일의 자동차가 차도에 들어서고, 감시하던 남자의 자동차가 조심스레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준혁은 백효를 먼저 보내 시야를 공유한 채 맨몸으로 움직였다.
백효가 지켜보는 한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심스레 미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채 1킬로미터도 움직이지 않아 새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또?’
느긋하게 뒤를 따르던 준혁이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백효가 공유해 주는 시야에 제3의 인물이 등장한 탓이었다.
그것도 준혁과 같은 방법, 즉 뛰어난 신체 능력으로 건물을 타고 넘으며 2대의 차량을 쫓는 자가 있었다.
‘이게 도대체 뭐야?’
이번에 나타난 추격자는 여자였다.
‘각성자, 최소 A급, 패스파인더, 암살 계열?’
준혁은 빠르게 대상에 대한 파악을 마쳤다.
최고의 감시자라 할 수 있는 백효의 시야에서도 간간이 모습을 감추는 것을 보면, 패스파인더 중에서도 암살 계열 각성자가 분명했다.
‘이거 하나로 안 되겠군.’
잠시 걸음을 멈춘 준혁은 백효에게 추적을 지시한 후,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준혁아, 안 그래도 지유가 뽀송이 없어졌다고, 보고 싶다고 난리 났어.)
준혁의 형수, 이세연이 전화를 받자마자 그 말부터 꺼냈다.
‘뽀송이’는 지유가 백효에게 붙인 또 다른 이름이었다.
백효를 데리고 나올 때 이세연에게만 설명했기에 지유는 상황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제가 데려갔다고 말했어요?”
(하긴 했는데… 지유가 애들한테 집착이 좀 있잖아.)
청랑과 흑호, 백효는 평소 소형화한 상태로 형네 집에서 지내는 편이었다.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준혁이 보낸 것인데, 조카인 지유가 이 3마리의 환수를 너무 좋아하는 것이 문제였다.
가끔 성장 때문에 데리고 나올 때도 지유가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1시간이나 하는 바람에 애를 먹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떡하죠?”
(뭘?)
“야옹이도 잠깐 데려와야겠는데?”
(야옹이도? 파랑이는?)
“파랑이는 괜찮아요.”
청랑까지 자리를 비우는 건 준혁이 불안해서 안 될 일이었다.
(지유 오늘 하루 종일 시무룩하겠네. 알았어.)
“그럼 설명 잘해 주세요.”
통화를 마친 준혁이 곧장 흑호를 호출했다.
그와 동시에 준혁 옆의 공간이 열리며 새까만 새끼 고양이 1마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니아앙-!
순간 준혁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고양이 놀이에 너무 심취한 거 아니냐?”
준혁의 말에 흑호도 그제야 흠칫하더니, 갑자기 털을 잔뜩 부풀리며 온몸을 떨었다.
그리고 채 1초도 지나지 않아 본래의 묵색 호랑이, 흑호의 모습을 갖췄다.
크허…….
“쉿!”
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준혁의 표정이 매섭기 짝이 없었다.
“이게 빠져 가지고…….”
준혁의 중얼거림에 흑호가 또 한 번 흠칫하며 황급히 제 존재감을 지웠다.
백효가 최고의 관찰자라면, 흑호는 최고의 추적자 혹은 암살자였다. 그런데 대뜸 포효를 내지르려 하니 준혁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다.
“긴장 좀 하자. 응?”
그르르르.
흑호가 극히 낮은 소리로 그렁대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준혁은 백효에게 흑호와 시야를 공유하게 한 후, 나중에 합류한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저 여자 미행해.”
그르르!
한층 더 낮게 그렁댄 흑호가 온몸을 투명하게 만든 후 뛰쳐나갔다.
그리고 준혁도 다시금 추적에 나섰다.
볼런트 라일이 차를 몰아 서울 시내를 빠져나온 후 들어선 도로는 강변북로였다.
자세하게는 강변북로 서쪽 방향 차선이었다.
갈색 머리의 백인 남자는 가급적 거리를 벌린 채 자동차로 미행했고, 암살 계열 각성자인 여자는 한강변을 따라 달리며 뒤를 쫓았다.
준혁은 암살계 각성자와 1킬로미터 정도 거리를 유지한 채 느긋하게 뒤를 따랐다.
그들은 여전히 백효의 시야에 잡혀 있었고, 바짝 붙어 있는 흑호가 있기에 돌발 상황에 어느 정도 대처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는 준혁이 마음만 먹으면 한 호흡에 줄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볼런트 라일의 차량이 마침내 자유로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 순간 변화가 생겼다.
‘이건 또 뭐 하는 짓이야?’
또 한 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볼런트 라일이 자유로로 들어서는 순간 백인 남자는 길가에 임시 정차했고, 암살계 각성자 역시 발을 멈췄다.
그리고 두 사람이 동시에 한 일은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것.
‘끙!’
준혁은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감시 대상은 물리적으로 그곳에 갈 수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주 감시 대상 볼런트 라일을 후보군에서 제외합니다.”
각자 어딘가로 보고하는 듯한 내용이었다.
‘이거 진짜 뭔 상황이야?’
두 사람 다 한국어가 아닌 말로 통화했지만, 백효를 통해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준혁은 ‘영화’를 통해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다.
하지만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을 뿐, 상황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물리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그곳? 후보군 제외?’
준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말을 곱씹는 사이, 문제의 두 사람이 움직였다.
백인 남자는 차를 버리고 도로 난간을 넘어 어딘가로 달리기 시작했고, 암살계 각성자 역시 방향을 바꿔 왔던 길을 되짚었다.
‘음!’
준혁 또한 빠르게 다음 행동을 결정했다.
쫓을 대상은 셋, 그리고 이쪽의 추적자도 셋이었다.
-백효는 볼런트 라일을 계속 주시하고, 흑호는 여자를 쫓아가.
준혁의 선택은 당연히 백인 남자였다.
영력을 쓰는 놈이니만큼 무명회와의 관련 가능성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흐음…….”
준혁은 미간에 짙은 주름을 잡은 채 옅은 신음을 흘렸다.
‘사람 당혹스럽게 만드네?’
ITO 한국 지부에서 나와 겪은 일은 충분히 낯선 경험이었다.
ITO 사무총장인 볼런트 라일의 수상한 행동과 서로 관련이 없는 2명의 추격자만 해도 쉬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준혁이 눈으로 보고 있는 상황은 그보다 훨씬 더 낯설고 이상했다.
지금 준혁은 서울 파이낸스 센터 옥상의 헬기 착륙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을 중심으로 그 주변 일대를 세밀하게 관찰했다.
‘세 그룹.’
3개의 무리였다.
이순신 장군 동상을 중심에 두고 감시, 그리고 호위하듯 세 무리의 각성자들이 넓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대치 상황도 희한했다.
2개의 무리는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듯 쉴 새 없이 시선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은 하나의 그룹은 다른 두 그룹의 존재를 인식하고 감시하면서도 자신들의 존재는 들키지 않고 있었다.
그 마지막 그룹의 각성자들 때문에 지금 준혁이 보고 있는 상황이 더욱 희한했다.
마지막 그룹의 각성자들은 영력을 품고 있는 배면계 각성자였기 때문이다.
점입가경으로 그 배면계 각성자들은 하나같이 한국인이 아니었다.
당연히 준혁의 명단에는 없는 이들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길드장이랑 이야기를 좀 해 봐야 할 것 같…….’
“엇!”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준혁이 갑자기 실성을 토했다.
“저 새끼 뭐야?”
세 그룹 각성자들의 중심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앞.
그곳에서 한 남자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단순히 방향이 이쪽인 게 아니었다. 남자는 정확하게 준혁을 쳐다보고 있었다.
300미터나 떨어진 거리, 파이낸스 센터의 건물 높이까지 고려하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불어 준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은신 효과까지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준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심지어 피식 미소까지 지었다.
바짝 긴장한 준혁이 빠르게 무장을 착용했다.
한껏 끌어올린 영력이 풀썩 피어올라 준혁의 온몸을 감싸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준혁이 두 눈을 치떴다.
‘이건!’
고층 빌딩 옥상의 세찬 바람이 갑자기 멈췄다.
바람만이 아니라 시간조차 멈춘 듯한 느낌이었다.
찰나의 찰나를 다시 쪼개고 쪼갠, 인간의 감각인 인지 영역을 초월해 버린 그 순간의 정지 상태.
준혁이 익히 아는 감각이었다.
[무극]
상대와의 거리를 0으로 만드는 스킬, 그 ‘무극’을 사용할 때의 감각이었다.
하지만 준혁은 ‘무극’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연히 방금 준혁과 눈이 마주친 남자가 사용한 스킬이라는 뜻.
준혁은 손에 든 무상곤을 단검으로 바꾸고 정면을 겨누었다.
쩌어엉-!
칼날을 타고 되돌아오는 묵직한 충격.
그리고 격하게 휘어진 검붉은 색의 곡도(曲刀)를 쥔 남자가 튕기듯 뒤로 물러서며 자세를 고쳤다.
“처음 뵙겠습니다.”
준혁은 남자를 노려보며 무상곤의 형태를 환도로 바꾸며 무게중심을 조정했다.
남자의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가 번지고, 준혁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눈앞의 남자는 ‘무극’을 사용했다.
배면계 각성자 중에서 ‘무극’을 사용할 수 있는 클래스는 하나밖에 없었다.
‘엽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