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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장. 양대장#4-
결론부터 말하자면, 준혁의 촉은 정확하게 맞아 들었다.
‘괜찮…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대박인데?’
유민섭은 놀란 마음을 숨기기 위해 힘겹게 표정을 관리했다.
“훌륭하군요.”
유민섭은 솔직한 심정을 말하며 불과 2시간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갑자기 무슨 작전팀입니까?’
‘필요하죠. 배면계에 있을 때 내가 죽을 뻔한 일이 얼마나 많았는데. 내가 거기서 살아 돌아온 건 진짜 천운이었다니까? 이제 신수 새끼들 상대하려면 제대로 된 작전이 필요해요.’
‘지금까지는 그런 말 없었잖아요.’
‘그거야 지금까지는 나 혼자 다 했었으니까.’
‘허! 거기에 대해선 할 말이 없네. 인정.’
‘아무튼 이제는 최유나도 성장했고 다른 헌터들도 훈련시키고 있으니까, 이제 팀 단위로 신수를 상대할 준비를 해야죠.’
그리고 테스트해 본 결과 양태군의 실력은 진짜였다.
유민섭의 칭찬에, 양태군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긴장감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양태군 앞의 모니터에는 ITO의 레이드 시뮬레이션이 실행되고 있었다.
화면 한가운데에 강렬한 필체로 떠올라 있는 글귀는 ‘Perfect’.
유민섭이 넣은 조건의 공략 대상은 다름 아닌 골드 드래곤 ‘카이르무스’였다.
공격대 구성은, 유민섭이 무훈 길드에 있을 당시 골드 드래곤의 레어를 공략했을 때 그 멤버 그대로였다.
카이르무스의 데이터와 공격대의 데이터를 한참 살펴본 양태군은 공략 계획을 작성했고, 그 시뮬레이션 결과는 퍼펙트였다.
유민섭은 괜히 바보가 된 느낌에 잠시 멍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이래서 고정관념이 무섭다니까?’
유민섭은 깊이 반성하는 마음으로 양태군을 보았다.
양태군에 대해서는 유민섭도 소문 정도는 들었다.
D급인데 7급 면허를 가진 공대장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대단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공략 계획을 수립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고정관념이었다.
아무리 그래 봐야 D급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유민섭은 나름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등급의 한계까지 초월하기는 힘들었다.
각성자들의 사고가 등급이라는 틀에 갇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프로그램 다루는 게 매우 능숙하시네요.”
“평소에 자주 쓰니까요.”
양태군은 양태군대로 꽤 즐거운 시간이었다.
A급, S급 헌터들의 데이터를 다뤄 보았기 때문이다.
단조롭고 고만고만한 D급, E급의 데이터와 높은 능력치, 다채로운 스킬이 포함된 데이터는 다루는 데 있어서 그 즐거움이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좀 더 이것을 즐기고 싶었다.
유민섭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아하, 대단하십니다.”
막공의 공대장이 레이드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유민섭의 진심 어린 칭찬에 양태군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기는 했다.
비밀 수사국의 수사관을 찾으려고 비밀 수사국을 염탐하고 있던 때가 오전이었는데, 뭔가 일이 폭풍처럼 몰아치더니 어느새 혼원 길드에서 테스트를 받았다.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오히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양태군을 향해 유민섭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자, 계약서 작성하시죠. 특별히 원하는 조건 같은 게 있습니까?”
***
‘난 누구? 여긴 어디?’
김준석은 진심으로 그것이 궁금했다.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벽이 보였다.
뒤를 돌아보아도 마찬가지, 벽이 보였다.
정면에 문 하나가 보일 뿐이었다.
겨우 2평 남짓의 작은 방.
똑같은 구조의 오른쪽 옆방에는 혼원 길드의 장민호가, 또 그 옆방에는 유민섭이 앉아 있다.
왼쪽 옆방도 마찬가지다.
무훈 길드, 팀 히어로, 백호 길드의 이름 쟁쟁한 마법사들이 각자 방 하나씩 잡고 들어앉아 있었다.
다만, 그 쟁쟁한 네임드 속에 겨우 D급 서포터인 자신이 끼어 있는 게 이해가 안 갈 따름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멍하니 있을 일이 아니었다. 이건 어마어마한 기회였다.
혼원 길드에서 직접 실시하는 마법사 트레이닝 프로그램이었다.
얼마 전 입사한 무훈 길드에서도 네임드 마법사들 사이에서 참석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던 자리였다.
그런 곳에 지금 D급인 김준석이 와 있는 것이다.
당연히 지인 찬스다. 동생 준혁이 직접 지목해서 밀어 넣은 자리다.
그래도 여전히 정신이 멍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천장의 스피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부터 모든 빛을 차단합니다. 이유야 말 안 해도 알겠지만, 하나의 감각이 차단되면 다른 감각들이 더 예민하게 변하기 때문입니다.』
린디웨의 목소리였다.
뒤이어 영어로도 방송이 흘러나온 직후 대기 시간도 없이 그대로 전등이 꺼졌다.
그리고 공간은 완전한 암흑으로 물들었다.
“음!”
짧게 신음을 흘린 김준석은 호흡을 고르며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감각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양손을 앞으로 뻗으며 외쳤다.
“그리스!”
김준석의 손끝에서 옅은 빛이 반짝이며 스킬이 펼쳐졌다.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정면의 바닥이 일시적으로 미끄럽게 변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준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나 흐름을 감지한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김준석만이 아닌, 지금 각자 방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모든 마법사들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자신의 마나를 느끼는 것. 그것이 마법사들이 성장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준혁이 김준석을 굴리듯 육체적인 훈련으로 등급을 올리는 것도 가능했다.
등급이 오르면 닫혀 있던 스킬이 개방될 때가 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마나까지 성장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으로는 1등급, 많아야 2등급이 한계였다.
마법사가 진정으로 성장하려면 가장 근본이 되는 마나에서 시작해야 한다.
“훕!”
김준석은 짧게 숨을 고르며 또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마법사들은 그나마 형편이 나았다. 육체 계열 헌터들은 말 그대로 죽을 맛이었다.
“끄으으…….”
바닥에 쓰러진 헌터의 입에서 간헐적으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직 살아 있다고 강변이라도 하는 것인지 간간이 꿈틀거리기도 했다.
그런 헌터가 무려 30명이었다.
개개인은 간헐적인 신음과 드문드문 하는 꿈틀거림이지만, 30명이 한 공간에서 그러고 있으니 트레이닝 룸 안의 신음은 끊이지 않고 꿈틀거림 또한 쉴 틈이 없다.
그 기괴한 듯하면서도 우스운 광경 한가운데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최유나였다.
S급의 벽을 뛰어넘은 탓인지 최유나의 미모는 한층 빛을 발했다.
거기에 얼음여왕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냉막한 표정이 한 겹 덧씌워지니, 그렇잖아도 아름다운 얼굴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초월적인 미모를 뿜어냈다.
시체가 되기 직전인 30명의 헌터들 무더기 한가운데에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서 있는 최유나의 모습은 역설적이기까지 했다.
그런 최유나가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일어나.”
움찔!
최유나의 발치에 쓰러져 있던 헌터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그뿐, 더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일어나.”
거듭 말하는 최유나의 목소리에 풀풀 냉기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지목당한 헌터는 더 이상 어깨조차 움찔하지 않았다.
완벽하게 기절한 듯한 모습. 그러나 최유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일어나!”
억양의 고저가 없던 최유나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감정이 실렸다.
그와 함께 풀풀 뿜어져 나온 냉기가 쓰러진 헌터를 향해 폭포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일종의 살기였다. 정확하게는 투기.
최유나가 마나를 방출하는 순간 싸우고자 하는 의지를 띠자, 마나가 그 의지를 품고 상대를 압박한 것이었다.
마나의 수발이 자유롭고, 마나에 단순한 감정만이 아닌 어느 정도의 의지마저도 실을 수 있는 경지.
그것이 S급의 벽을 넘은 순간 최유나가 다다른 경지였다.
그리고 쓰러져 있던 헌터는 그 압박감에 더 이상 기절한 척할 수 없었다.
“유나야!”
“억!”
“크억!”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킨 헌터가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그런 그의 발길에 쓰러져 있던 다른 헌터들이 짓밟히며 비명을 질러 댔다.
“우, 우리 말로 하자!”
“준비.”
“아니, 말로 하자니까? 일단 상황을 차근차근…….”
“준비.”
최유나의 말은 다시 원래의 그것, 고저 없는 억양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받아야 하는 헌터, 강태웅은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젠장!’
뜬금없이 과거의 어떤 장면이 머릿속에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유나야, 혹시 문장이 무슨 말인지는 아냐?’
‘SOV라는 게 있어. 이게 주어, 목적어, 동사의 순서인데, 보통 말을 할 때는 말이지……. 근데 이 말, 이해는 하니?’
‘야, 너 혹시 주어를 말해야 한다는 걸 까먹은 건 아니지?’
‘내가 죽기 전에 소원이 하나 있다. 유나 너하고 제대로 된 문장으로 대화를 나누는 거. 혹시 들어줄 수 있겠냐?’
죽음 직전에 찾아오는 주마등? 아니다. 눈앞에 있는 얼음귀신을 놀리며 했던 말들이었다.
“준비.”
그리고 재차 던져지는 문장이 아닌 단어가 오늘따라 이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조금만 놀릴걸…….’
후회는 언제 해도 늦은 법이다.
빠악!
방패를 들자마자 시야에서 최유나가 사라졌다.
대신 들고 있던 방패에 무시무시한 압력이 가해졌고, 그것에 밀려난 방패가 그대로 강태웅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끄억!”
아팠다.
하지만 죽을 정도는 또 아니었다.
“일어나.”
뒤이은 최유나의 명령에, 후들거리는 무릎에 힘을 주며 몸을 일으켰다.
“후우, 후!”
거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밀릴 수는 없다. 김준혁은 옷깃도 스치지 못했지만, 최유나한테까지 그러는 건 굴욕이었다.
방패와 워 해머를 든 양손에 바짝 힘을 주었다.
“흐아아앗!”
비명 같은 기합을 내지르며 최유나를 향해 돌격했다.
빠아악, 텅!
돌격한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튕겨 나간 강태웅이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일어나.”
반사적으로 또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하나.
‘아, 그래도 같은 길드에서 한솥밥 먹었다고 신경 써 주는 건가?’
강태웅은 뛰어난 헌터다. 그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세계 최고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들 중에는 강태웅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헌터가 최소 서너 명은 있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강태웅 자신이 가장 오래 버티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최유나가 자신을 신경 써 주는 거 아닐까?
까득!
이를 악물었다. 친하던 동생이 이렇게 신경을 써 주는데, 마냥 징징대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끝까지 가 보자!”
용기백배한 강태웅이 힘차게 최유나를 향해 돌진했다.
타격음과 비명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최유나의 냉막한 분위기로도 어찌할 수 없는 열기가 트레이닝 룸에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30여 분이 지났을 때, 강태웅은 깨달았다.
“이…….”
강태웅은 벽에 반쯤 걸쳐져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였다.
벌겋고 퍼렇게 물들고, 째지고 팅팅 부어오른 얼굴 탓에 발음도 분명치가 않았다.
그런 상태로 강태웅은 있는 힘껏 자신의 말을 마무리했다.
“이…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강태웅이 놀라울 정도로 오래 버틴 것은 당연히 최유나의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단번에 기절하지 않을 정도로만 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강태웅이 착각한 배려가 아니었다.
단순한 복수였다.
그저 좀 더 오랫동안 쥐어 패기 위한 힘 조절이었다.
자박자박!
가볍게 발걸음을 옮긴 최유나가 강태웅을 향해 다시 말했다.
“일어나.”
“으아아아아악!”
강태웅의 비명이 트레이닝 룸에 한가득 차올랐다.
“으아아아악!”
복도 가득 메아리치는 비명 소리에 양태군은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나란히 걷던 준혁도 발을 멈추고는 양태군을 향해 물었다.
“방금 그 소리는…….”
“육체 계열 헌터들이 훈련하는 소리입니다.”
“네?”
“에이, 왜 이러십니까? 훈련이 쉬울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체계적으로 훈련하니까.”
그렇게 말한 준혁이 다시 앞장서 걸었고, 양태군이 뒤를 따랐다.
“끄아악!”
복도 끝의 문 너머에서 또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 소리가 한 번 나올 때마다 양태군은 발에 거대한 무게 추를 하나씩 매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복도는 끝이 있었다.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고, 트레이닝 룸 안의 광경이 양태군의 눈앞에 펼쳐졌다.
후끈 밀려오는 열기, 방 안을 가득 메우는 신음, 은근히 풍기는 피비린내가 양태군을 압박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압권은 최유나였다.
천장을 향해 들어 올린 최유나의 손에, 멱살을 잡힌 강태웅이 대롱대롱 매달려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오늘부터 여기서 함께 훈련을 받으면 됩니다.”
양태군은 질끈 두 눈을 감았다.
그제야 준혁이 낙장불입을 조건으로 넣은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눈에 뻔히 보이는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슬쩍 돌아보니 김준혁이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양태군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그 미소가 그렇게 사악해 보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