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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장. 마스터#1-
“닳아요.”
“네?”
“얼굴 닳으니까 그만 보라고요.”
“아니, 이 사람아!”
결국 유민섭이 참지 못하고 밴 내부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를 질렀다.
준혁으로서는 기자회견장을 벗어난 직후부터 자신을 빤히 보는 유민섭의 시선에 신경이 쓰여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유민섭으로서는 또 거하게 폭탄을 던져 버린 준혁이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성질 좀 죽입시다. 처음 봤을 때는 참 여유로운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하아!”
준혁의 말에 이를 악문 유민섭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고함을 한숨으로 바꿨다.
“왜 그런 겁니까?”
생각해 보면 준혁의 행동에는 늘 이유가 있었다.
행동이 앞서는 게 문제지, 아무런 생각도 없는 것은 아닐 터. 일단은 그 이유부터 들어야 했다.
“뭘요?”
“거기서 왜 헌터들 기를 죽였느냐고요. 처음 목적은 헌터들한테 의욕을 심어 주자는 거 아니었습니까?”
“의욕 심어 줬잖아요.”
“기죽인 걸 잘못 말한 거 아닙니까? 만 단위 헌터를 한꺼번에 무릎 꿇려 놓고, 의욕? 나도 지금 오금이 저릴 정도인데 의욕이라고요? 의욕? 의요오오옥?”
“거참, 진정 좀 하시고.”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후우!”
“하아!”
준혁이 과장스럽게 내쉰 한숨에, 유민섭이 전염이라도 된 듯 길게 숨을 뱉었다.
“어차피 솎아 내는 작업은 필요합니다.”
“솎아 내다니요?”
“재능.”
“재능?”
“재능 있는 인간만 신수와 싸울 수 있습니다. 그게 안 되는 놈들은 처음부터 떨궈 놓는 게 차라리 평화로워요.”
“아, 아니! 그래도 헌터들이 모두 강해지면 좋은 거 아닙니까? 사람마다 성장의 한계가 다르기는 해도, 어쨌든 강해지면 좋은 거잖아요.”
열변을 토하는 유민섭의 모습에 준혁이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지금 내 말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오해는 무슨 오해요? 성장할 수 있는 사람만 성장시키겠…….”
“내가 보지도 않고 누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아니, 모르면 솎아 내니 마니 하는 건 더욱더 안 해야……. 어?”
말을 하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말을 뚝 끊고 입을 벌린 채 멍한 표정을 짓는 유민섭을 보며 준혁이 물었다.
“방금 내 말 오해한 거 맞죠?”
“그런 거 같은데요?”
“내가 말한 재능은 헌터로서, 더 높은 곳까지 가는 재능을 말한 게 아닙니다.”
“그러게요?”
유민섭은 미리 언질도 없이 일을 벌인 준혁에게 화가 나 있던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재능’이라는 말을 들으니 혼자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가 엉뚱한 오해를 하고 만 것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유민섭이 다시 물었다.
“그럼 재능은 뭘 말하는 겁니까?”
“오기.”
“오기?”
“혹은 호승심? 경쟁심? 향상심이나 반발심도 좋습니다. 아무튼 오늘 내가 내보인 힘 정도에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놈은 강해져도 도움이 안 돼요. 트롤링이나 안 하면 다행일 정도죠.”
“설명이 너무 듬성듬성한데요?”
“유 길드장은 처음 굉황 그 새끼랑 맞닥트렸을 때 겁은 별로 안 먹었죠?”
“그랬죠. 기겁하기는 했어도…….”
“그래서 유 길드장은 내 말을 이해 못할 수도 있습니다. 보통은 신수 앞에 서면 숨 쉬는 것도 힘들어집니다.”
“그래요?”
“동물로서의 본능입니다. 놈들이 괜히 신수(神獸)라고 불리는 게 아니에요. 격을 초월한 무언가가 있어요. 그리고 신수와 싸우려면 본능적인 공포를 억누를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그게 반발심이나 호승심 같은 겁니까?”
“맞아요. 훈련을 빡세게 해서 천원급, 천강급이 돼도 신수한테 덤빌 마음을 먹지 못하면 오히려 아군한테 피해만 끼칩니다. 그런 인간을 미리 솎아 낸 겁니다.”
“그래도… 모두가 강해지면 던전 공략이나 게이트 다운 사태에 대비하기가 훨씬 수월할 텐데요?”
준혁은 반박하는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요.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의욕까지 꺾어 가면서…….”
“오늘 내 힘에 겁먹은 사람들도 훈련을 하기는 할 겁니다. 그런데 내 힘을 보고 자극을 받은 사람들은 훨씬 더 노력하겠죠. 그 사람들이면 충분할 거라 생각합니다.”
유민섭은 여전히 이해를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이왕이면 모두 같이 최선을 다하는 게 좋을 텐데요?”
“그건 뭐 유 길드장이 알아서 하세요. 난 떨거지들은 관심 없어요.”
“어우, 재수 없어.”
“어차피 훈련법은 공개할 예정이니 각자 알아서 하겠죠. 결정적으로…….”
준혁이 잠시 말을 끊었다.
밴에 함께 타고 있던 이들이 궁금증에 더욱 귀를 기울이자 준혁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솎아 낸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걸 내가 하는 건 아니잖아요? 스스로 솎아 냄을 당하는 거지. 겁먹은 놈은 겁먹은 대로, 따라잡겠다고 마음먹는 놈은 또 그놈대로. 각자가 알아서 할 몫 아닙니까?”
그 어느 쪽이든 준혁이 강제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앞서 말했던 오기나 향상심 같은 걸 느꼈다면 남들보다 일찍, 그리고 더욱 열심히 훈련에 임할 것이다. 당연히 겁만 집어먹고 좌절한 이들은 늦을 것이다.
준혁이 그렇게 겁을 준 것은 각각의 헌터에게 그들만의 계기를 마련해 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뒤이어 준혁이 말을 덧붙였다.
“사실 다른 목적도 하나 있기는 합니다.”
“다른 목적?”
“힘을 보여 주는 겁니다.”
“네?”
“내가 얼마나 강한지 알려 주는 거라고요.”
“힘자랑?”
설마 하고 묻는 유민섭을 향해 준혁이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무슨 애도 아니고 거기서 힘자랑을 합니까?”
어이없다는 얼굴로 묻는 유민섭과 달리 준혁의 표정은 진지했다.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사실 제 진짜 목적은 이쪽이기도 하고요.”
“필요? 진짜 목적?”
“지난번에 미국을 이용했던 일이 내가 ‘동원할 수 있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 줬던 거라면, 오늘은 ‘내가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 준 겁니다.”
“그러니까 왜요?”
“덤비지 말라고요.”
“네?”
“함부로 덤비면 죽는다. 우리 편 그 누구도 건드리지 마라. 들이대면 뒈진다. 뭐, 그런 거죠.”
“아…….”
유민섭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실성을 흘렸다.
확실히 효과는 있을 것 같았다.
적당히 강한 힘을 가진 자는 도전을 받게 된다. 전력을 보강하거나, 계획을 짜거나, 혹은 함정을 파는 방법 등을 동원해 어떻게든 이겨 보려고 한다.
하지만 준혁이 보여 준 것처럼 압도적인 힘은 다르다.
감히 덤빌 엄두를 내지 못한다. 어떤 방법을 써도, 어떻게 시뮬레이션을 해 봐도 자신이 죽는 결말만이 나오기 때문이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던 유민섭이 갑자기 뭔가에 생각이 미친 듯 급히 물었다.
“그놈들, 무명회라는 그놈들은 안 덤빌까요?”
“덤비겠죠. 사실 그것도 기대하고 한 짓입니다.”
“네?”
“어설픈 놈들은 우리한테 못 덤빌 것이고, 그러면 덤비는 놈은 일단 무명회 놈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죠. 그러면 추적이 오히려 쉬워질 거 아닙니까?”
“그건 그런데… 위험해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놈들은 항상 배면계 짐승들이 움직였어요. 지금까지 우리가 직접 대면한 건 그 목장에서 함정을 파고 기다렸던 놈밖에 없잖아요. 근데 그놈은 사실상 버리는 패였죠. 즉, 던전이 아니면 덤빌 일 자체가 없다고 보면 됩니다.”
“추측일 뿐이잖습니까?”
“아뇨. 놈들한테 뭔가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게 아니면 신수 두 놈이 덤볐을 때 최소한 확인이라도 하러 왔어야 맞아요. 그런데 그조차 없었죠.”
“흐음…….”
가만히 기억을 더듬은 유민섭이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준혁의 말대로였다. 던전 외부에서 놈들이 먼저 공격을 해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방비는 해 둬야겠네요.”
“그런 건 필요하죠.”
두 사람의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듯하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강이찬이 불쑥 끼어들었다.
“흑태자 님!”
“응?”
“질문 있습니다.”
“어떤 거?”
“기자회견장에서 헌터들 겁 준 거 말입니다.”
준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 말해 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그게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흑태자 님의 무시무시한 카리스마를 실감했을 텐데… TV로 본 사람들도 그럴까요?”
준혁이 픽 웃으며 말했다.
“그 자리에 있던 S급이 몇 명쯤 되던?”
“S급이요? 에… 음… 못해도 100명은 되지 않을까요?”
“그렇지? 그 S급들이 각자 자기네 동네에서 얼마나 왕처럼 군림하겠냐?”
“아아!”
강이찬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탄성을 터트렸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그 수많은 S급들이 찍소리도 못하고 눈 까는 거 보면… 크흐흐, 역시 우리 흑태자 님입니다!”
제 일도 아닌데 뭐가 그리 좋은지 강이찬은 쌍따봉을 날리며 연신 히죽거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부다다다!
갑자기 요란한 엔진 소리가 달리는 밴 옆으로 따라붙었다.
거대한 할리데이비슨 1대가 다가와, 일행이 타고 있는 밴과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뭐야?”
밴 안에 있는 이들은 모두가 각성자였다. 이미 멀리서부터 바이크가 다가오는 소리는 들었지만, 자신들이 목적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까만 헬멧에 가죽 재킷을 걸친 남자가 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연신 손짓을 했다.
“어떻게 할까요?”
운전하는 장형준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냥 갑시다.”
“네.”
장형준 역시 C급의 각성자였다.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난 감각과 피지컬을 갖고 있기에, 둔한 밴 차량도 날렵하게 몰 수 있었다.
부아아아앙-!
밴이 속도를 올렸고, 뒤이어 할리데이비슨도 함께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밴이 달리고 있는 도로는 시내의 일반 도로였다. 즉, 신호가 존재했다.
신호등에 빨간 불이 들어오자 어쩔 수 없이 밴이 멈춰 섰고, 그 순간 할리데이비슨이 밴의 앞을 막아섰다.
“음?”
바이크에서 내리는 남자를 보던 준혁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일행들이 왜 그러나 하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마침 남자가 헬멧을 벗었다.
“어?”
“저 사람이 왜 갑툭튀해요?”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팀 히어로의 캡틴인 리처드 개런이었다.
다짜고짜 달려와 밴의 뒷문을 열어젖힌 개런이 큰 소리로 외쳤다.
“블랙 프린스!”
“응?”
“마스터! 나의 마스터가 되어 주십시오!”
“뭐, 뭔 소리야?”
“당신의 제자가 되겠어요. 나만이 아닌 우리 팀 전부! 우리를 받아 주십시오!”
득달같이 튀어나온 말에 밴 안의 모든 이가 멍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내 준혁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고, 유민섭은 탄성을 터트렸다.
“헐… 진짜였어…….”
준혁이 말한 공포의 극복과 향상심 고취라는 목적이 지금 눈앞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개런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팀원 모두 만장일치로 생각한 겁니다. 팀 이름도 블랙 나이츠로 바꿀 거예요!”
“안 돼!”
갑작스레 튀어나온 절규에 가까운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것은 강이찬의 외침이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채 강이찬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블랙 나이츠는 내 건데…….”
강이찬이 운영하는 흑태자 팬 카페 이름이 블랙 나이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