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받고 각성 더!-82화 (8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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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장. 거대한 반향#1-

“허어…….”

늘어난 카세트테이프 같은 실성이 흘러나왔다.

준혁의 앞에서 오경희가 고목처럼 바짝 말라 잿빛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일어난 일이었다.

독특한 케이스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던 준혁으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오히려 이쪽이 더 핵심적인 정보라고 봐야지.’

오경희의 소멸이 시작되던 순간 준혁은 확실하게 느꼈다.

정확하게는 오경희가 게이트를 통과한 그 시점이었다.

오경희의 몸속에 존재하는 화과의 영력이 불안정한 파장을 흘리며 요동치기 시작했었다.

그것은 고통에 의한 것이었다.

던전 안에서는 안정적이던 영력이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리고 잠깐 주변의 공기가 바뀌는 것 같은 위화감이 엄습해 왔을 때, 화과의 영력이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때 느꼈던 위화감, 그리고 화과의 영력이 사라질 때의 느낌을 준혁은 정확하게 잡아냈다.

‘배면계… 배면계의 공기였다. 그리고 화과는 소멸이 아니라 배면계로 사라진 거…….’

이것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이 짐승 놈들이 이쪽 세계와 뭔가 맞지 않는다는 거겠지?’

그렇기에 고통에 몸부림치다 달아났으리라.

하지만 여전히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들이 있었다.

‘잠실에서 들이닥친 영수들은 멀쩡했는데? 그리고 황도형도, 경희라는 이 여자도 게이트 밖에서 신수 놈들의 영력을 품고 있었을 텐데, 그때는 멀쩡했던 거 같고…….’

준혁이 혼자 생각에 잠겼을 때, 게이트 쪽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겨, 경희야!”

뒤늦게 게이트 밖으로 나오다가 오경희가 소멸하는 모습을 본 백호진의 외침이었다.

득달같이 달려온 백호진이 이제 얼굴만 남은 오경희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 어떻게……. 야, 너 이렇게 가면 어쩌자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백호진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준혁을 노려보았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였어야 합니까!”

“오, 오빠! 아냐!”

황급히 백호진을 붙잡은 사람은 안유정이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슬픈 건 알겠는데, 저 사람한테 따질 문제가 아니라고.”

하지만 감정에 매몰된 백호진의 이성은 이미 멎은 상태였다.

“비켜!”

백호진의 손길에 안유정이 힘없이 밀려났다.

안유정도 A급 탱커이기는 했지만, A급 중에서는 수위에 드는 딜러인 백호진이 조절하지 못하고 밀어낸 완력을 감당하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노기에 찬 백호진이 준혁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지만 그런 그의 앞을 최유나가 막아섰다.

“비키세요.”

그리고 최유나의 입이 열렸다.

“그 여자의 부모는 잠실 사태 때 괴물에게 죽었다. 부모가 죽은 것을 김준혁 헌터 탓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김준혁 헌터를 죽이기 위해 배면계 신수의 힘을 받아들였다. 제 부모를 죽인 진짜 적의 힘을 받아들인 거다. 자업자득이다.”

“뭐?”

“길드장이 그것도 몰랐다면, 자격이 없다.”

“그, 그게 무슨!”

백호진은 조금 전까지 분노로 뜨거웠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식어 버린 느낌이었다.

그는 오경희의 부모님 빈소에 당연히 갔었다. 하지만 오경희가 끝내 입을 열지 않았기에 당신들의 사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충격을 받을 수밖에.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은 백호진이 고개를 푹 숙이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에서 후드득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흐윽, 흑! 경희야, 미안하다. 내가 모자란 놈이라 그런 것도 모르고…….”

백호진은 허무하게 사그라진 오경희에 대한 애도의 넋두리를 흘릴 뿐이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유나는 짧게 숨을 고른 후 길드원들 곁으로 돌아갔다.

안유정이 김준혁을 향해 다가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대로 상황 파악도 못하고 일을 진행하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커졌습니다.”

하지만 김준혁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상황이 수습되면 정식으로 찾아가서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네.”

짧은 대화 후, 안유정이 백호진을 부축해 백호 길드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일행들 곁으로 돌아온 최유나는 유민섭의 뜨거운 시선을 받고 있었다.

“왜…….”

그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은 최유나가 그렇게 운을 뗐고, 유민섭의 입에서 그에 대한 대답이 나왔다.

“유나 너… 그, 그렇게 길게 말을 할 수 있었던 거냐?”

최유나는 무뚝뚝해 보이는 성격에, 극단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유민섭이 지금까지 들었던 것 중 최유나가 가장 길게 말한 것은 두 문장이 한계였다.

그런 최유나가 딱딱 끊어지는 말투이기는 해도 몇 문장이나 한꺼번에 쏟아내는 것을 보았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잘못 없는 김준혁 헌터를 탓하는 걸 참을 수 없었습니다.”

“우와! 또 길게 말했어.”

이어지는 감탄에, 최유나의 얼굴에 언뜻 홍조가 번졌다가 사라졌다.

사람들의 이런 반응이 익숙지 않은 탓이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최유나였기에 이 역시도 유민섭에게는 신선한 광경이었다.

“이야, 얼굴도 빨개졌어. 오늘 신기한 구경 많이…….”

유민섭이 몇 번 더 장난을 시도했지만,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온 최유나는 그저 무뚝뚝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다 큰 어른이 애 데리고 뭐 하는 짓입니까?”

불쑥 끼어든 사람은 준혁이었다.

“워낙 신기해서…….”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는 알겠는데, 지금 싸패처럼 보이니까 적당히 하시라고요.”

“어? 흠흠, 티 났습니까?”

“예. 티 납니다.”

백호 길드에서 생긴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괜히 분위기가 무거워지니, 그것을 풀어 보려고 장난을 친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이코패스는 좀 너무했네.”

무안해진 유민섭이 괜히 한 번 툴툴거리고는 대기하고 있는 밴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

“무슨 일?”

린디웨가 길드 회의실로 들어서며 물었다.

“일단 앉아 봐.”

준혁의 말에 린디웨는 빈자리에 앉은 후 일행들을 쓱 훑어보았다.

준혁은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유민섭은 평소와 달리 아주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린디웨가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어? 최유나?”

최유나의 수준이 급격히 올라간 것을 뒤늦게 인지한 것이었다.

“지천급이네? 아, 여기 방식으로는 SS급? 더블 S급?”

린디웨의 호들갑에도 최유나는 가만히 고개만 한 번 끄덕일 뿐이었다.

아까 유민섭이 친 장난이 아직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탓이었다.

“이야, 드디어 땅에서 벗어났네? SS급은 최초 아닌가? 공개되면 지구가 들썩이겠는데?”

배면계 시스템의 등급 명칭은 천지인(天地人)을 베이스로 한다.

S급에 대응하는 등급이 율지(律地), SS급은 지천(至天)이었다.

땅의 법도를 아는 것(律地)을 넘어서서 하늘에 닿은(至天) 경지가 되었기에, 이를 두고 땅을 벗어났다고 표현하는 것이었다.

“기분은 어때? 세상이 완전 다르게 보이지? 각성했을 때랑은 또 느낌이 다를…….”

계속되는 린디웨의 수다를 준혁이 빠르게 끊어냈다.

“잡담은 나중에 하고.”

“아, 쏘리!”

장난스럽게 손을 들어 보이는 린디웨의 모습에, 준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스템 아바타 맞나? 하는 짓 보면 인간이 맞는 거 같은데…….’

하지만 지금으로선 중요하지 않은 생각이었기에 얼른 고개를 털었다.

“일단 있었던 일부터 이야기해 줘야 대화가 진행되겠지?”

“그렇지. 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래서 무슨 일이야?”

“일단 던전 안에서…….”

준혁이 차분한 목소리로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간추려 이야기해 주었다.

귀 기울여 이야기를 듣는 린디웨의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되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는 꽤 차분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약하자면 신수 놈들이 인간에게 영력을 빌려줄 수 있다. 경우에 따라 빙의 형태로 몸을 빼앗아 쓸 수 있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지구 환경에서는 버티지 못한다.”

“전제로 할 건 ‘현재’의 일이라는 거지. 시간이 지나면 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고.”

린디웨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시스템 통합이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은 거라고 볼 수 있겠지? 시스템이 통합됐다면 신수 놈들이 빙의 같은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아마 그렇겠지.”

“문제는 그 시스템 통합까지 얼마나 남았는가 하는 거야. 그리고 시스템이 통합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신수 놈들이 던전에 본신으로 출현할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런 게 아니라면 시스템을 통합할 이유가 없어.”

“내 생각도 그래. 무명회의 그놈이 한 말대로라면 세상에 신수를 풀어 놓는 게 최종 목표니까.”

“근데… 그 무명회라는 놈들 하는 짓이 좀 이상해.”

“이상하다고?”

“신수가 드래곤이나 인간한테 빙의하면 무지막지하게 강하잖아?”

“그렇지.”

“그런데 내가 있는 곳에서만 그런 일이 벌어진단 말이야. 다른 나라, 아니 우리나라에서도 다른 곳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난 예가 없어. 이유가 뭐지? 지구 전체에 빙의 상태로만 인간을 풀어놔도 난장판이 될 텐데?”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한번 생각해 볼 문제였다.

유민섭이 조심스레 말했다.

“신수를 불러들이는 데 제약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으음…….”

준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가장 그럴싸한 추측인데도 이상하게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준혁의 표정에 린디웨가 곧장 물었다.

“왜 그래? 뭐 걸리는 일이라도?”

“효율.”

“효율?”

“나를 공격하는 것보다, 다른 곳에 신수를 푸는 게 훨씬 효율적이잖아.”

가장 먼저 의미를 읽은 사람은 역시나 유민섭이었다.

“아아, 준혁 씨를 공격하는 것보다, 지구 반대편에 신수를 푸는 게 시스템 통합을 앞당기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거죠?”

“그거죠. 지난번 포럼에서 우리가 발표한 그 내용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시스템 통합을 방해하고 있단 말입니다. 신수 한 놈만 풀어도 그 모든 방해를 제거할 수 있는데, 굳이 그러지 않았다는 건 생각해 볼 일이죠.”

다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준혁을 공격하는 것보다 그쪽이 훨씬 더 효율적이다.

리쉬옌이 조심스러운 의견을 개진했다.

“혹시 신수들은 술석을 손에 쥘 수 없다거나?”

“그것도 말이 안 되지. 술석 자체는 동행인을 구해서 그 사람이 들도록 하면 끝날 일이잖아.”

“그러네요.”

다들 미간에 짙은 주름을 접으며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다른 단서가 없는 한 아무리 고민해 봤자 답은 나오지 않았다.

준혁이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일단 그 문제는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일단 오늘 알게 된 사실만 먼저 정리를 해 봅시다. 첫 번째, 신수 놈들은 몬스터만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빙의가 가능하다.”

“두 번째, 현재로서는 지구의 환경에서 버틸 수 없는 어떤 제약이 존재한다.”

“첨언하자면, 영력만 빌려줄 때는 지구의 환경에서도 문제가 없다.”

“세 번째는 시스템 통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미 한 번 했던 이야기이지만, 입으로 되뇌며 다시 한 번 정보를 정리했다.

언젠가부터 당연하다는 듯 혼원 길드의 회의까지 참석하고 있는 강이찬이 회의 상황을 동영상으로 녹화하고 있었다.

준혁이 회의실을 한 번 훑어본 후 질문을 던졌다.

“자,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린디웨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무명회 놈들 솎아 내기?”

“아니.”

“그럼?”

준혁이 씩 웃으면서 최유나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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