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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장. 신수(神獸)#4-
오경희의 몸에서 뻗어 나와 사방을 휘젓던 넝쿨이 갑자기 축 늘어졌다.
-무슨… 짓거리를…….
오경희가 힘겹게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신수의 영력을 빌려 사용하고 있는 덕분인지 용언에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인간의 몸을 빌린 탓인지, 굉황에 비하면 저항력이 미약한 수준이었다.
“훕!”
짧게 호흡을 끊은 준혁은 곧장 넝쿨로 뒤엉킨 오경희의 몸뚱이에 발을 올렸다.
소음과 함께 거목처럼 뻗은 넝쿨을 밟고 수직으로 달릴 수 있는 것은 ‘전뢰보’의 효과였다.
-엇!
꼭대기에서 마주친 오경희의 얼굴에 경악스러운 표정이 번졌다.
쉑, 쉐쉐에에엑!
사방에 퍼져 있던 꽃의 꽃잎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날아들었다.
작은 과일들이 총알처럼 준혁을 향해 쏘아졌고, 떨어져 내리는 꽃의 향기에 섞인 독기가 찡하게 코끝을 때렸다.
충충교 또한 새롭게 만들어 낸 벌레들을 총동원해 준혁을 공격했다.
하지만 준혁이 입은 묵린갑과 매구탈은 애초에 충충교와 화과에게는 완전히 상극인 방어구였다.
온몸으로 충충교와 화과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는 와중에도 준혁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무상곤은 원래의 형태인 육모방망이 상태 그대로 오경희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빠아악!
호쾌한 타격음이 연달아 울리며 오경희의 고개가 쉴 새 없이 좌우로 돌아갔다.
-끄악, 끄아악!
신수의 영력을 빌린 상태에서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오경희가 비명을 질러 댔다.
그렇게 후려치기를 10여 차례.
-크륵!
금문묵룡삭을 통한 용언과 준혁의 몽둥이질에 온힘을 다해 저항하던 오경희는 결국 기절하고 말았다.
준혁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금문묵룡삭을 조종해 오경희를 완전히 옭아맸다.
넝쿨로 변한 오경희의 몸 곳곳에서 나무줄기가 짓이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미 정신을 잃고 금문묵룡삭의 용언에 제압당한 오경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몸에 씌었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이렇게 손쉽게 제압하지는 못했으리라.
이제 남은 것은 충충교 하나.
준혁은 빠르게 바닥으로 내려서며 무상곤의 형태를 바꿨다.
어느새 준혁의 손에 들린 것은 새까만 장궁 하나.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에는 영력으로 만든 10대의 화살이 걸려 있었다.
활대를 한껏 치켜든 준혁은 지체 없이 시위를 놓았다.
콰아아!
10대의 화살이 게걸스럽게 바람을 집어삼키며 하늘을 꿰뚫을 기세로 솟구쳤다.
그 순간 준혁은 다시 10대의 영력 화살을 만들어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렸다.
쉬지 않고 시위를 당긴 준혁은 10번째가 되어서야 행동을 멈췄다.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 화살은 모두 100대.
열 묶음, 10대의 화살이 솟구치던 속도를 잃고 정점에 도달한 것은 정확하게 같은 순간이었다.
그렇게 되도록 준혁이 힘을 조절하여 화살을 쏘아 올렸던 것이다.
100개의 화살이 전부 방향을 틀어 화살촉이 지면을 향하며 자유낙하가 시작되는 그 타이밍에 또 한 번의 변화가 찾아왔다.
파앙-!
새롭게 추진력이라도 얻은 듯 화살들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지면을 향해 쏟아졌다.
단순한 자유낙하가 아니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이라도 된 듯 100개의 화살이 각각 어지러운 궤적을 수놓으며 지면으로 쏘아졌다.
‘천라시’, 그리고 ‘추종시’.
화살을 쏘며 준혁이 발동한 2개의 스킬이었다.
[천라시(天羅矢)]
영력 화살을 쏘아 사용자가 기억하는 특정한 영력을 탐색한다.
10개 이상의 영력 화살을 쏴야 발동한다.
영력 화살들 사이를 영력으로 연결해, 범위 안에 있는 모든 영력을 감지한다.
사용자는 범위 안에 있는 영력 중 경험한 적이 있는 영력의 정확한 위치를 탐색할 수 있다.
쏘아 낸 영력 화살의 개수가 많을수록 범위가 넓고, 정확도가 상승한다.
[추종시(追從矢)]
복수의 영력 화살을 쏘아 사용자가 지정한 목표를 명중시킨다.
목표가 움직일 경우, 목표의 움직임을 쫓아간다.
사용자의 임의대로 궤적을 수정할 수 있다.
‘천라시’, 영력 화살들이 촘촘한 그물을 만들어 충충교의 위치를 탐색했다.
배면계에서 이미 한 번 충충교와 싸웠고, 봉인한 경험이 있는 준혁이었다.
충충교의 특징에 대해서는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특징은 크기였다.
벌레가 모태이기 때문인지 육안으로는 찾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크기가 작았다.
먼지와도 같은 크기로 신수의 영력을 품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느낄 정도였다.
지금은 직접 넘어온 것이 아니라 빙의의 형식을 취했으니 본체는 이곳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영력을 품고 본체의 역할을 하는 무언가는 있을 터였다.
황도형의 머리만 남긴 채, 벌레를 뭉쳐 몸뚱이를 만들어 유지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러니 지금은 본체 역할을 하는 그것을 찾아 공격해야 했다.
그래서 사용한 스킬이 ‘천라시’였다.
배면계에서는 처음 싸우는 상황이었기에 ‘천라시’를 사용할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조건이 충족되는 만큼 손쉽게 정확한 위치를 잡을 수가 있었다.
쉬릭, 쉬리리릭!
하늘에 떠 있던 100개의 화살이 어지러운 비행 끝에 충충교를 향해 날아갔다.
화살들이 쉴 새 없이 방향을 틀어 댔다.
상황을 파악한 충충교가 빠르게 이동하는 탓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화살들이 더 이상 방향을 틀지 않고 한 점을 노리고 날았다.
그 순간, 준혁은 와락 인상을 구겼다.
“이 망할 벌레 새끼!”
추종시로 펼친 100개의 화살이 동시에 오경희에게로 향한 탓이었다.
충충교가 오경희의 거대한 넝쿨 사이로 몸을 숨겼다는, 다시 말해 오경희를 방패막이로 사용했다는 의미였다.
외침과 함께 ‘전뢰보’를 펼치는 준혁의 손에 쥐어진 무상곤은 1미터 길이의 바늘처럼 얇은 창으로 변해 있었다.
‘추종시’를 통해 날아가는 화살들의 궤적 또한 손을 보았다.
360도 모든 방향에서 한 점을 향해 날아가던 화살들이 일제히 방향을 비틀어, 준혁의 뒤쪽에 일렬종대로 늘어섰다.
‘전뢰보’를 이용해 오경희와의 거리를 절반쯤으로 줄인 순간, 묵색의 바늘 같은 창이 준혁의 손을 떠났다.
순식간에 오경희의 넝쿨 더미를 관통하는 바늘 창.
과격한 힘을 싣고 날아갔으나, 오경희의 넝쿨 더미 사이에 난 구멍은 말 그대로 바늘이 관통한 것 같은 크기였다.
슈슈슉!
그 바늘 같은 구멍 안으로 100개의 영력 화살이 빨려들듯 틀어박혔다.
영력 화살 역시 그 두께가 바늘처럼 가늘게 변한 상태.
100개의 화살이 순차적으로 넝쿨 더미 속에 숨은 충충교를 관통했다.
-크아악!
뇌를 뒤흔들 정도로 강렬하게 울려 퍼지는 충충교의 비명.
그럼에도 오경희의 넝쿨 더미에는 여전히 바늘구멍 수준의 관통상밖에 남지 않았다.
신기에 가까운 준혁의 영력 컨트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살자.
충충교가 준혁을 향해 말을 걸었다.
“지난번처럼 찌질하게 다음에 두고 보자는 소리 말고 다른 할 말이라도 있냐?”
-어차피 우리가 이곳으로 나올 것이다.
“그래서?”
-그때 네놈의 세상을 완전히 부숴 주마.
“쯧! 결국 한다는 소리가 두고 보자는 거밖에 없냐? 아무튼 건설적인 얘기가 없다니까.”
-다음에는 정말 다를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충충교의 영력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화과와 충충교에 의해 변형되었던 자연 환경도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준혁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육체가 감당할 수 있는 허용치가 높을수록 끌어다 쓸 수 있는 영력이 많아진다는 건 확실한 것 같고…….”
굉황과 오늘 만난 충충교, 화과의 차이를 보면 이는 어느 정도 확신이 서는 부분이었다.
“문제는…….”
준혁은 고개를 돌려 기절해 있는 오경희를 보았다.
과연 저 존재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인간과 신수의 끔찍한 혼종?’
답이 없는 물음을 던지니 시답잖은 생각만 떠올라 준혁은 얼른 고개를 털었다.
지금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 존재를 끌고 던전 밖으로 나가도 되는가? 이 존재가 던전 밖으로 나가면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닌가?
황도형도 그렇고, 이 여자도 던전 밖에서 게이트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왔으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때는 어디까지나 신수의 영력을 품고 있었을 뿐, 이렇게 신수에게 먹힌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니 인간일 때와는 달리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아니, 그 전에 가장 큰 문제는 이 존재의 거대한 덩치였다.
빽빽하게 뭉친 넝쿨 더미는 직경만 무려 5미터, 높이가 20미터에 달하는 거목과 같았다.
“일단은 게이트 입구까지 끌고 가……. 어?”
홀로 중얼거리던 준혁이 멈칫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꾸드득, 꾸드드득!
쿵, 쿠쿵!
오경희의 몸뚱이 격인 거대한 넝쿨들이 바깥에서부터 말라비틀어지더니 부서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금문묵룡삭이 친친 동여맨 채 압박을 가하고 있는 탓인지 바스러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 상태가 거듭될수록 넝쿨 더미는 점점 부피가 줄어들어, 높이가 4미터쯤 되었을 때야 진행이 멈췄다.
“화과가 잠들어서 그런 건가?”
화과는 죽지 않았는데도 자연환경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끌고 나가기 편하겠네.’
좋은 게 좋은 거.
준혁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한 후 금문묵룡삭을 조종해 오경희를 끌고서 왔던 길을 되짚었다.
“준혁 씨!”
“경희야!”
게이트에 도착하니 앞서 대피했던 일행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민섭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준혁의 상태를 훑었다.
“아, 아까 그놈들! 지난번에 봤던 굉황인가 괴랄인가 하는 그놈이랑 같은 놈들이죠?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준혁은 뚱한 표정으로, 혹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사람으로 보입니까?”
“하긴, 패는 거면 모를까, 맞고 다닐 사람은 아니죠.”
“어? 그렇게 말하니까 어째 듣기가 좀 거시기 합니다만?”
“하, 우리 사이에 뭘 또 그렇게 예민하게 구실까?”
“우리 사이가 뭔 사인데요?”
“뭐라고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깊은 관계죠.”
“하아! 이 사람 점점 드립이 바닥을 치네. 거기다 눈치도 없고.”
준혁이 한숨을 푹 쉬며 하는 말에 유민섭이 발끈한 표정으로 외쳤다.
“뭐, 뭐라고요?”
준혁은 유민섭의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뒤에 기다리고 있는 거 안 보여요?”
힐끔 뒤를 돌아본 유민섭이 그제야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등 뒤에서 백호진이 불안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미안합니다.”
“괘,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경희는 어떻게 된…….”
준혁에게 끌려온 오경희를 보는 백호진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그리고 준혁은 감정이 일절 섞이지 않은 표정으로 냉정하게 말했다.
“포기하세요.”
“네?”
“저거 더 이상 사람 아니에요.”
“그, 그게 무슨……? 아니, 흑태자 님! 방법이 없을까요? 쟤 정말 불쌍한 애라고요. 부모님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준혁은 굳이 오경희의 어리석은 선택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위로하거나 마음을 다독이는 일에는 재주가 없는 준혁으로서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나갑시다.”
“아니, 김준혁 헌터님!”
백호진이 버럭 소리 지르며 준혁을 쫓으려 했으나, 그의 손목을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멈칫하며 돌아보니 안유정이었다.
뒤돌아보는 백호진과 시선을 맞춘 안유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가망이 없다고,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고 한 준혁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후우…….”
긴 한숨을 내쉬는 백호진의 얼굴에 자책의 빛이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