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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장. 신수(神獸)#3-
“최유나!”
“네!”
“얘 데리고 튀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유나가 몸을 날렸다.
“청랑아, 엄호해!”
커엉!
청랑이 빠르게 최유나의 뒤를 쫓았다. 달려가는 최유나의 품에는 기절한 듯 두 눈을 감고 있는 리쉬옌이 안겨 있었다.
그리고 준혁의 시선이 화과, 아니 오경희에게로 향했다.
“허!”
준혁의 입에서 처음으로 놀란 듯한 실성이 터져 나왔다.
충충교처럼 온통 새까만 눈이 아닌, 흰자와 검은자가 명확히 구분되는 눈이 준혁을 쏘아보고 있었다.
핏발이 선 눈, 턱이 도드라질 정도로 악다문 이는 분명 ‘분노’라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정확히 준혁을 향해 내쏘는 분노였다.
준혁은 슬쩍 시선을 돌려 충추교를 보았다.
수많은 벌레를 뭉쳐 만든 몸뚱이 위에 얹힌 충충교의 얼굴. 그 얼굴에 떠오른 새까만 눈과 감정이 일절 배제된 표정까지 확인했다.
오경희와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안 먹혔다고?’
신수가 본래의 힘을 개방했음에도 오경희는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유지하고 있었다.
황도형이 충충교에게 정신을 완전히 먹힌 후 신수의 힘이 개방된 것과는 전혀 다른 경우였다.
“후우!”
짧게 숨을 고른 준혁은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던전 내부의 환경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신수들만이 가진 이능.
자연을 제 뜻대로 부리는 그 힘에 의한 변화였다.
준혁이 밟고 있는 땅은 잡목과 키 큰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는 늪지대였다.
잡목과 풀의 끝에는 처음 보는 꽃과 과일들이 매달려 있었고, 곳곳에 물웅덩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곳곳에는 하늘의 구름 사이를 뚫고 내려온 햇빛에 환하게 빛나는 양지까지 있었다.
벌레가 서식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식물이 자라기에도 최적의 공간이었다.
애초에 배면계 신수 중 독특한 위치에 있는 충충교와 화과는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도울 수 있는 상생의 관계였다.
다만,
“살다 보니 신수끼리 짝짜꿍하는 것도 보게 되네? 내가 어이가 털린다, 진짜!”
애초에 신수라는 존재들은 다른 신수의 존재까지 인정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리고 지금 준혁의 눈앞에서 그것이 깨졌다.
준혁은 오른손에는 무상곤을, 왼손에는 금문묵룡삭을 쥔 채 정면을 향해 치달았다.
득달같이 달려들며 무상곤을 휘둘렀다.
하지만 갑자기 거대한 과일들이 날아들며 무상곤의 궤적에 끼어들었다.
펑, 퍼퍼펑!
그대로 터져 나간 과일들이 사방으로 시커먼 과즙을 흩뿌렸다.
치익, 치이익!
땅이 타들어 가며 시커먼 연기가 솟구치고, 지독한 악취가 코끝을 때렸다.
“더러운 새끼!”
하지만 준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배면계의 모든 신수를 겪어 보았고, 어찌 대응할지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쪽 세계로 넘어오면서 힘이 약화된 상태이기에, 시커먼 과즙이 만들어 낸 독기 따위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거침없이 장애물을 쳐 날린 준혁은 순식간에 오경희의 앞에 도착했다.
호쾌한 몽둥이질에 오경희의 몸뚱이가 저만치 날아갔다.
하지만 준혁의 표정은 별로 개운하지가 않았다.
제대로 된 타격감이 아닌 물먹은 스펀지를 때린 것 같은 감각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경희는 멀쩡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죽어! 부모님의 원수!
“부모님?”
콰앙!
폭음이 울렸다. 방금 전까지 준혁이 서 있던 자리에 거대한 넝쿨이 박혔다.
물론 준혁은 이미 그 자리를 벗어나 오경희에게 쇄도하고 있었다.
-잠실 사건을 벌써 잊은 거냐? 너 때문에 부모님이 죽었어!
오경희 또한 쉴 새 없이 준혁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포탄처럼 동그란 과일들이 쏘아졌고, 넝쿨들이 쉴 새 없이 준혁을 향해 쏟아졌다.
“아아…….”
오경희의 공격을 피하고, 그러는 와중에도 반격을 날리고 있는데도 준혁은 평온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 갔다.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잠실에 영수들이 난입했을 당시 민간의 피해는 극히 미약했지만, 조금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경희의 부모도 아마 그 상황에 휩쓸렸으리라.
“그래서?”
-뭐?
어느새 두둥실 날아온 포자가 주변을 뒤덮더니 회색빛의 영력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준혁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어느새 날려 올린 30자루의 금문묵룡비가 빛살처럼 움직여 모든 포자를 일일이 잘라 냈다.
힘의 폭풍이 사방으로 터져 나가며 던전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대화는 이어졌다.
“나보고 어쩌라고?”
오경희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네가 거기서 포럼을 열지만 않았어도… 네가 그 괴물과 거기서 싸우지만 않았어도…….
“내가 죽였냐?”
-네놈 때문이잖아!
절규하듯 외치는 오경희의 핏발 선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준혁도 사람이었다.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일에 마음 아파할 줄도 알았다.
하지만 허투루 감정을 허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건 진짜 어디서 튀어나온 광년이냐? 미친년아, 그렇다고 니네 부모 죽인 놈들이랑 손을 잡냐?”
-뭐?
오경희의 얼굴이 또 한 번 충격으로 뒤흔들렸다.
전혀 몰랐다는 반응이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새삼 의구심과 함께 조금은 안쓰러운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저런 사람에게 감정을 소모하는 것은 아까운 일이었다.
“답도 없네. 어차피 늦었으니 그냥 뒈져!”
황도형의 경우를 보면 어차피 신수를 받아들인 이상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다.
깔끔하게 처리해 주는 쪽이 서로에게 최상의 결말이었다.
싸움의 양상이 치열해질수록 오경희의 외양은 점점 인간의 모습을 잃어 갔다.
처음에는 온몸에서 새잎이 돋았고, 피부가 초록색으로 변해 가더니 온몸이 넝쿨처럼 변했다.
급기야는 새잎이 자라 새로운 줄기가 되고, 마침내 얼굴을 제외한 온몸이 넝쿨로 이루어진 괴물로 변해 있었다.
바뀐 외양에 따라 전투의 양상도 변해 갔다.
처음에는 주변에 성장시켜 놓은 넝쿨과 꽃, 과일들을 동원하더니, 몸집이 커지자 직접 몸으로 부딪쳐 왔다.
그럴수록 주변의 지형지물은 포탄이라도 떨어진 듯 엉망진창으로 부서져 갔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부서질 때마다 터져 나간 땅이 다시 화과와 충충교에게 최적화된 환경으로 순식간에 변해 버린다는 점이었다.
쾅, 콰콰쾅!
폭음이 난무했다.
주변 지형은 쉴 새 없이 파괴되고, 파괴되는 즉시 환경이 변해 버리는 난장판에 휘말렸다.
하지만 거대한 공세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준혁의 두 눈은 단 한 번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굉황 때와는 확실히 달라.’
준혁은 더할 나위 없이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차가운 눈과 논리적인 머리로 상황을 살폈다.
확실히 굉황이 등장했던 당시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힘의 차이가 커.’
준혁의 체감에 따르면, 당시 굉황이 드러낸 힘은 배면계에서 겪었던 것의 50퍼센트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 충충교와 화과는 본래 힘의 겨우 30퍼센트 남짓을 발휘하고 있을 뿐이었다.
준혁은 그런 차이를 불러오는 이유를 단번에 짚어 냈다.
‘몸뚱이!’
굉황은 카이르무스의 몸뚱이를 억지로 꿰어 맞춰 제 본래의 모습인 ‘용’의 형태를 취했었다.
하지만 충충교와 화과는 그러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인간의 작은 육체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없는 곳에서 신수가 인간의 몸에 씐 채 나온다면?’
지금까지 상황을 살피고, 나름의 데이터를 수집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다른 곳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필요한 헌터 공격대의 규모를 산정하기 위해서였다.
준혁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분석을 마쳤다.
‘이 정도 수준이면 린디웨와 리쉬옌 둘만으로도 제압이 가능하긴 한데. 던전의 헌터들이라면? 일반 헌터로는 답이 없고, SS급이라면 15명 정도면 가능하겠는데?’
당장은 SS급이 최유나 1명밖에 없지만,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준혁이 보기에 현존하는 S급들은 모두 SS급으로 발돋움할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라면 SS급에서 또 한 단계 올라가는 건데…….’
거기까지 생각한 준혁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또 하나 봐야 할 게…….’
준혁은 얼굴을 제외한 온몸이 신수화되어 있는 오경희를 쳐다보았다.
‘저런 상태를 지속하면 어떻게 변하는 거지?’
전혀 예기치 못한 특수한 경우가 생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일단 얘는 사로잡아 볼까?’
생각을 마무리한 준혁이 왼손에 든 금문묵룡삭을 들어 올렸다.
-나도 있다, 도살자!
충충교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갑자기 싸움판에 끼어들었다.
부우우웅!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은 벌레 떼가 준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시작은 금강문이었다.
금강석만큼이나 단단한 침을 가진 모기들이 소나기처럼 준혁을 향해 쏟아졌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준혁의 온몸에서 울려 퍼졌다. 하지만 준혁은 조금의 피해도 받지 않았다.
묵린갑을 확장해 전신을 감쌌기 때문이다.
얼굴 보호도 문제가 없었다. 매구탈을 쓰고 있는 덕분에 가장 큰 약점일 수 있는 눈까지도 완전한 방어가 되었다.
준혁도 맞아 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뇌호강전!”
스킬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시퍼런 뇌전으로 빚은 거대한 호랑이의 포효에 사방으로 스파크가 방사되었다.
여름철 전기 살충기에서 나는 모기 타는 소음이 콩 볶는 소리처럼 요란하게 울렸다.
타 버린 금강문의 잔해가 일대의 바닥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뒤이어 들이닥친 것은 두 종류의 벌레 떼였다.
사람 머리통만 한 크기의 거대한 벌과 꽁무니에 열기를 품은 반딧불이였다.
부우, 부우우~
거대한 벌, 환사봉(幻思蜂)의 날갯짓에서 퍼지는 기묘한 음파와 꼬리의 독침에서 분무하는 독기가 뒤엉켜 준혁의 귀를 어지럽히고 뇌를 뒤흔들었다.
칙, 치이익!
무시무시한 열기를 품은 반딧불이, 융형(融螢)이 준혁을 향해 육탄으로 돌격했다.
융형이 부딪친 곳곳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 연기를 뿜는다.
하지만 묵린갑은 용의 비늘로 만든 갑옷.
한낱 날벌레의 공격에 녹을 수준이 아니었다.
“빙경낙월(氷鏡落月)!”
허공에 또 하나의 술식진이 떠올랐다.
뒤이어 술식진을 통과해 허공에 떠오른 것은 시리도록 새하얀 만월이었다.
쩌저정!
만월에서 쏟아진 빛에 닿은 모든 것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사방은 순식간에 새하얀 서리가 내린 창백한 공간으로 변해 버렸다.
환사봉과 융형이 그대로 얼어붙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네 번째로 날아든 것은 해함충이었다.
펑, 퍼퍼펑!
해함충들이 허공에서 저들끼리 부딪치며 풍선 터지는 소리를 연달아 울려 댔다.
그 자리에 등장한 것은 시커먼 물을 품은 거대한 물방울이었다. 그리고 찰나의 지체도 없이 그대로 준혁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퍼어엉-!
폭음과 함께 준혁이 서 있던 자리가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거대한 구덩이가 팼다.
해함충은 바다를 품었다는 이름 그대로 어마어마한 무게의 물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구덩이에 순식간에 더러운 물이 차오르고, 수생식물들이 솟구쳐 올랐다.
수생식물의 뿌리가 물웅덩이 속을 난폭하게 휘저으며 물속에 있을 준혁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해함충의 물 덩어리가 곤두박질치는 순간, 준혁은 이미 그 자리를 벗어난 후였다.
‘무극’을 이용해 거대한 넝쿨 덩어리로 변해 버린 오경희에게 바싹 붙어 있었다.
그런 준혁의 손에 들린 것은 금문묵룡삭이었다.
뱀처럼 제 스스로 움직인 금문묵룡삭이 순식간에 오경희를 휘감았다.
그리고 준혁이 영력을 뿜어내며 외쳤다.
=잠.들.어.
금문묵룡삭을 통해 구현된 카이르무스의 힘, 용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