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30장. 신수(神獸)#1-
크허엉!
갑작스러운 포효와 함께 검푸른 동체 하나가 달려들었다.
“큭!”
“청랑!”
짧게 튀어나온 신음은 오경희의 것이었고, 반가이 청랑을 부른 것은 리쉬옌의 목소리였다.
맞붙어 있던 리쉬옌과 오경희 사이를 갈라놓은 청랑이 또 한 번 거센 포효를 터트렸다.
크허엉-!
짙게 퍼진 영력이 날카로운 바람을 일으켰고, 청랑의 스킬인 ‘돌개바람’이 발동되었다.
나선을 그리는 바람의 궤적이 하나의 점으로 모이며 날카로운 송곳처럼 오경희를 향해 들이닥쳤다.
굉음과 함께 오경희가 한참을 뒤로 밀려났다.
“후우!”
리쉬옌은 그제야 여유를 찾고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오경희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통에 조금도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뒤를 돌아보니 최유나가 혼원 길드와 백호 길드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일단 내보내야겠어.’
오경희가 일으키는 영력은 배면계 괴물들만이 가지는 짙은 회색을 띠고 있었다.
게다가 그 위력을 생각하면 최소한 영수급이고, 어쩌면 신수급의 영력일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이들이 함께 있는 것은 오히려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 뿐이었다.
‘어떡하지?’
리쉬옌이 고민하며 오경희의 상태를 살폈다. 그런데 지금까지 영력을 앞세워 무식하게 밀어붙이던 오경희가 가만히 선 채 이쪽으로 오지 않고 있었다.
기회는 이때뿐이었다.
리쉬옌이 급히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다들 밖으로 나가요, 당장!”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반발한 사람은 백호진이었다.
“경희를 두고 갈 수 없습니다!”
“이미 늦었어요.”
“늦었다니?”
리쉬옌은, 눈을 끔뻑이며 순진하게 되묻는 백호진의 모습에 갑자기 숨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당장 나가요! 더 이상 제가 지켜 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 불쑥 백호진의 앞에 선 사람은 최유나였다.
“나가요.”
“아, 아니 최유나 헌터님, 아무리 그래도 길드원을 두고 나가라는 건…….”
길드원이 아니다. 적이다. 무언가가 씐 괴물일 뿐이다.
할 말은 많았지만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빠악!
단번에 뒤통수를 두드린 최유나의 손날에 백호진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길드장님!”
기겁한 안유정이 황급히 달려왔지만 최유나는 태연했다.
“나가요.”
안유정이 보니 백호진은 단순히 기절했을 뿐이다.
그것까지 확인한 안유정이 최유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거칠기는 해도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백호진의 우직한 성격상 절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을 터. A급 딜러를 순순히 끌고 나가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는 걸 단번에 깨달은 것이었다.
유민섭이 앞장서서 양쪽 길드원들을 모두 끌고 간 직후였다.
끼이이익!
갑작스러운 소음에 시선을 돌린 최유나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경희가 커다란 장궁의 빈 시위를 당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궁의 활대가 부러질 듯 한계까지 휘고, 시위가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리고 그 순간, 시위를 당기는 오경희의 손에서 짙은 회색의 영력이 뿜어져 나와 1대의 화살을 빚어냈다.
리쉬옌은 눈을 부릅뜬 채 문제의 그 화살을 노려보았다.
아주 낯선 감각이었다.
‘뭐지?’
정확하게는 낯설다기보다는 이질적인 느낌이라고 말하는 쪽이 정확했다.
‘영력은 분명한데…….’
영력으로 빚은 화살이 분명한데, 거기에 무언가가 뒤섞여 아주 이질적인 ‘기운’으로 거듭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조심!”
뭔가 이상하다고 판단한 리쉬옌이 외쳤다.
파아앙-!
공기를 터트리며 이쪽을 향해 쇄도하는 영력의 화살.
리쉬옌이 한껏 안력을 돋우어 그것을 노려볼 때였다.
문제의 화살이 사라졌다.
섬뜩한 무언가가 정수리에 꽂혀 척추를 타고 내리는 느낌을 받은 것도,
“간(干:방패 간)!”
리쉬옌이 본능적으로 영패을 띄워 머리 위에 ‘간’을 만든 것도 정확하게 같은 순간이었다.
꽈아앙-!
‘간’이 폭음과 함께 불길에 휩싸이는 순간, 리쉬옌은 빠르게 바닥을 굴러 폭발의 여파에서 벗어났다.
“리쉬옌!”
최유나가 기겁한 목소리로 리쉬옌을 향해 발을 뻗었다.
“떨어져요!”
하지만 되돌아온 리쉬옌의 외침에 발을 멈칫하는 순간,
파앙!
어느새 쏘아진 오경희의 영력 화살이 불쑥 튀어나와 최유나의 앞을 스치듯 날아갔다.
“발을 멈추지 말아요! 무작위로!”
빠르게 내려진 리쉬옌의 오더에 최유나가 바쁘게 발을 놀렸다.
파바밧!
팡, 파파팡!
좌우와 전후, 대각선 방향과 점프, 그리고 바닥을 구르는 것까지 가리지 않고 최유나가 몸을 날렸다.
그런 최유나의 주위로 쉴 새 없이 화살이 날아들었다.
시위를 떠난 즉시 사라진 화살은 갑자기 최유나 주위에서 공간을 열고 튀어나왔다.
하지만 리쉬옌의 적절한 오더 덕에 단 1대의 화살도 최유나를 맞추지 못했다.
영력 화살이 공간을 초월하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위치를 선정할 뿐 사람을 쫓아다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단번에 꿰뚫어 본 덕분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리쉬옌과 청랑 또한 쉴 새 없이 발을 놀려 위치를 바꾸고 있었다.
저 화살이 언제 어느 곳에서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탓이었다.
‘어떻게 한다?’
바쁘게 움직이는 중에도 리쉬옌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사고를 회전시켰다.
지금은 공격이 단조로우니 피하기가 쉬웠다. 하지만 언제 다른 패턴이 나올지, 또 다른 스킬이 나올지 알 수가 없다.
그 전에 반격을 해야 한다.
컹!
그 순간 리쉬옌의 귓전에 박힌 것은 청랑의 외침이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청랑이 땅을 박차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뭐 해?
-나, 맡겨, 지켜.
단편적인 청랑의 생각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 순간,
크허어엉!
허공으로 솟구친 청랑이 사납게 앞발을 휘둘렀다.
쉑, 쉐쉐쉑!
파앙!
청랑의 ‘바람칼’과 오경희의 영력 화살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리쉬옌의 눈에서 안광이 번뜩인 것은 그 순간이었다.
“탄(呑:삼킬 탄)! 토(吐:토할 토)!”
청랑을 향해 날아가던 영패가 한데 뭉쳤다.
청랑의 뒤쪽에 3개, 그리고 앞쪽에 3개.
후우웅-!
청랑 앞뒤에 자리 잡은 3개씩의 영패 앞에 하얀빛이 타원형 테두리처럼 뻗치더니, 내부의 타원형 공간이 나선형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거의 동시에 오경희의 영력 화살이, 공간을 뛰어넘어 청랑의 뒤를 노리고 쇄도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영력의 화살이, 리쉬옌이 만든 하얀빛의 테두리를 통과하는 순간 또다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청랑 앞에 자리 잡은 하얀 테두리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와 그대로 오경희를 향해 쇄도했다.
‘탄’과 ‘토’. 한 쌍으로 이루어진 방어 스킬의 효용이었다.
‘탄’은 날아오는 투사체를 가상의 공간으로 보내고, ‘토’는 가상의 공간에 있는 투사체를 뱉어 내는 스킬이었다.
블랙홀과 화이트홀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사라진 투사체가 공간을 뛰어넘어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오는 모습은, 지금 오경희가 화살을 날리는 스킬과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경희처럼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저 날아오는 투사체를 통과시키는 스킬이라고 보면 되었다.
다만, 지금은 오경희의 화살이 청랑의 뒤에서 나타났기에 그 진행 방향에 있는 청랑을 통과하고 오경희를 향해 날아간 것이었다.
먼저 날아간 청랑의 ‘바람칼’이 오경희의 전면을 난도질했다.
콱, 콰콰콱!
아직 완전한 성장을 하지 못한 청랑의 ‘바람칼’은 오경희의 영력에 막혀 둔탁한 소음을 뿌리며 허무하게 흩어졌다.
그 직후 영력 화살이 오경희를 향해 쇄도했다.
“흡!”
한발 늦게 그것을 확인한 오경희가 황급히 영력을 끌어올리며 몸을 뒤로 날렸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공격에 발이 꼬였고, 그 순간 영력 화살이 오경희의 전면을 두드렸다.
콰앙-!
“끄윽!”
폭음과 함께 오경희가 신음을 뿌리며 튕겨 나갔다.
그리고 리쉬옌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유나 씨, 지금!”
던전 공략에 있어서 리딩은 탱커의 몫이었고, 최유나는 탱커의 리딩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훈련된 근접 딜러였다.
최유나는 땅을 박차며 오경희를 향해 들이닥치는 동시에 큰 소리로 스킬을 입에 담았다.
“광전사!”
준혁이 아직은 스킬을 쓰지 말라고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퍼엉!
최유나를 중심으로 광포한 마나가 퍼져 나갔다.
까앙-!
최유나의 손에 들린 1자루의 롱 소드, 기사의 신념이 폭발할 기세로 뻗친 마나를 머금은 채 날카로운 궤적을 그렸다.
“크윽!”
충격에 휩쓸린 오경희였지만, 가까스로 최유나의 공격에 반응했다.
마나를 품은 롱 소드와 영력을 품은 2자루의 단검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부딪쳤다.
굉음과 함께 서로의 힘에 상쇄된 마나와 영력의 파편이 난폭하게 터져 나갔다.
‘이럴 리가 없는데?’
오경희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최유나를 보았다.
최유나가 SS급이 되었다 해도 오경희는 그보다 훨씬 더 강한 영력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싸움의 양상은 오히려 오경희가 밀리는 상태.
오경희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힘 자체가 아무리 강해졌다 해도 그것을 다루는 이는 B급 패스파인더인 오경희였다.
클래스와 등급의 차이가 크게 작용했다.
강한 힘을 가졌지만 운용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탓에, 훨씬 더 강한 힘을 갖고도 고전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최유나가 개방한 ‘광전사’도 한몫했다.
[광전사]
근력과 순발력, 감각이 400퍼센트 증가한다.
지구력과 마나가 절반으로 줄어든다.
줄어든 마나와 지구력으로 버틸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스킬이 종료된다.
스킬 종료와 동시에 기절한다.
근력, 순발력, 감각이 400퍼센트 증가해도 신수의 영력을 품은 오경희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절대적인 차이를 어느 정도 좁히는 것은 가능했다.
좁힌 격차와 SS급의 운용 능력을 더해 최유나는 오히려 우세를 점했다.
크허어엉!
틈이 날 때마다 청랑이 오경희의 뒤에 나타나 스킬을 펼쳤다.
청랑의 힘으로 오경희의 영력을 뚫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운용 능력이 떨어지는 오경희는 작게 신경을 건드리는 공격만으로도 집중력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 틈에 최유나의 날카로운 공격이 파고드니 순간순간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하는 것이었다.
리쉬옌은 최유나와 오경희의 싸움을 예리한 눈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조금 전 생각으로 준혁과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신수가 통제권을 장악하는 순간이 올 거야. 그때가 되면 당장 최유나부터 빼.
-신수가 통제권을……? 그러면 어떻게 되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신수의 본래 능력을 사용할 거야. 오리지널에 비해서는 다운 그레이드 되겠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야.
-유나 씨가 쓰는 스킬이 좀 위험해 보이는데… 괜찮을까요?
-타이밍 재 보고 미리 빼.
-알았어요.
-그때가 되면 내가 상대할 테니, 던전에서 완전히 물러나.
-오케이!
그리고 얼마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문제의 일이 터졌다.
과르르릉-!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땅이 거대한 울음을 토해 냈다.
리쉬옌이 준비하고 있던 스킬을 펼친 것도 동시였다.
“완(完:완전할 완)!”
최유나의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10개의 영패가 동시에 빛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