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
-28장. SS급#2-
-무슨 준비요?
-뒷사람들 보호할 준비요.
-네?
이해 못한 유민섭의 되물음에 리쉬옌이 끼어들었다.
-폭주할 겁니다.
-폭주?
-벽을 깰 거예요.
낯선 표현에 유민섭은 다시 한 번 멈칫했다.
‘벽을 깨?’
벽을 깬다는 게 어떨 때 쓰는 표현인지 유민섭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헌터들 중에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은 지금껏 단 한 사람도 나온 적이 없었다.
그러니 낯설게 다가올 수밖에.
유민섭이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S급을 뛰어넘을 거다?
준혁이 설명을 부연했다.
-맞습니다. 지금 최유나는 컵에 물이 가득 찬 상탭니다. 물이 넘치는 데 딱 한 방울 부족합니다.
하지만 유민섭이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폭주는 왜 하는데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리쉬옌이 해 주었다.
-벽을 깨게 되면 스탯이 일시에 폭발적으로 상승하게 됩니다. 갑작스러운 변화라서 힘을 컨트롤할 수 없고, 그 주체할 수 없는 힘이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요?
-어디까지나 배면계의 이야기입니다만, 아마 이쪽도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A급에서 S급으로 올라가거나 했을 때는 그런 게 없는데요?
-스탯으로 보건대, S급이 배면계로 치면 율지(律地)급일 겁니다. 그다음이 지천(至天)급인데, 이때부터 인간의 한계를 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각성한 순간 이미 인간의 한계는 넘기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군요?
-맞습니다.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하자면 종의 한계를 깨는 거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 현상이 던전 시스템의 각성자에게도 생긴다면……. 이쪽 시스템에서는 아직까지 S급의 벽을 깬 사람이 나온 적이 없다는 의미가 되는군요.
한국을 한정으로 보자면 긴급 대책반장이었던 황도형이 SS급이라 불렸었다.
하지만 황도형이 저런 경험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아마 그럴 겁니다.
그렇게 대답한 준혁이 슬쩍 고개를 돌려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뭐지?’
아까부터 신경에 거슬리는 음습한 기운이 느껴졌다. 모두가 던전에 들어온 직후부터 준혁의 감각에 걸려든 기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최유나에게 집중할 때였다.
시선을 바로 한 준혁이 리쉬옌을 향해 물었다.
-네가 할래?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어도 괜찮나요?
-안 되지.
-그럼 제가 하면 안 됩니다.
-알았다. 근데 너도 이제 슬슬 천원급 깰 때 안 됐냐?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그래.
당황한 유민섭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죽여? 불구로 만들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지만 준혁과 리쉬옌은 피식 웃기만 할 뿐,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다시!’
최유나는 똑같은 말을 속으로 수없이 되뇌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살면서 가장 높은 집중력을 발휘하는 상태다.
잠깐 맛보았던 그 감각에 대한 집착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훈련의 성과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욕심이었다.
성장에 대한 목마름이었고, 지독하기 짝이 없는 훈련을 버텨 드디어 맛본 결실에 대한 집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단순히 그 감각에 대한 목마름이었다.
긴 훈련 기간 동안 머릿속으로 그려 왔던 완벽한 검격. 그로 인해 상대의 몸뚱이를 가를 때 손끝을 타고 전해지던, 검이 마치 자신의 몸이 된 것 같았던 그 느낌.
그것은 희열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그리고 또 한 번 그 느낌을 맛보고 싶은 욕구가 머릿속에서 폭발할 지경이었다.
최유나는 스스로 깨닫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조금씩… 시나브로 미지의 영역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점점 고조되는 집중력에 하나씩 감각이 닫혀 나갔다.
미각에서 시작해 후각, 촉각, 청각을 거쳐 마침내 시각까지 감각이 사라졌다.
하지만 최유나는 자신의 감각이 모두 닫혔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모든 감각이 닫혔음에도 최유나는 주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눈으로 던전의 탁한 흙냄새를 맡고, 귀로 바람에 섞인 끈적한 공기를 맛보고, 코로 갑옷 괴물의 거칠한 갑옷의 질감을 느꼈고, 혀로 날아드는 칼날의 궤적을 보았으며, 피부로 날카로운 금속의 마찰음을 들었다.
감각이 온통 뒤엉킨 채였다.
감각은 닫혔는데, 해당 기관으로 파악할 수 없는 감각을 느끼는 모순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작 최유나는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감각은 점점 더 복잡한 조합으로 뒤엉키며, 모든 감각이 완전한 일원화를 향해 나아갔다.
각각의 감각기관이 각자 오감을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어느새 받아들이는 오감이 완전한 하나가 되어 새로운 감각으로 뇌에 각인되었다.
육감(六感).
종의 한계를 깨는 첫 번째 관문인 육감의 개화에 들어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무아지경에 빠진 최유나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녀의 검에서 더 이상 쇳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거대한 파도처럼 밀고 들어오는 갑옷 괴물의 군세가 최유나의 롱 소드에 소리 없이 잘려 나갔다.
쿵, 쿠쿵!
잘려 나간 갑옷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만이 전장을 가득 메웠다.
“이게 무슨…….”
옵서버로 참석한 백호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끝을 맺지 못하고 입 안에서 허무하게 맴돌다 사그라졌다.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뒤쪽에 있는 백호 길드 알파팀의 얼굴 역시 백호진의 표정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대한민국 내 길드들을 서열로 줄 세울 때, 백호 길드는 약간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톱티어로 분류하기에는 부족하고, 2진급으로 보기에는 차고 넘치는 전력이었다.
S급이 없는 탓에 그런 포지션이 된 것이었다.
그 때문에 백호 길드는 S급 헌터를 초빙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지금 최유나 같은 모습을 보인 S급은 단 1명도 없었다.
국내 최강이라 알려진 황도형조차도 저 정도 위력은 보여 주지 못했었다.
알파팀의 부팀장이자 알파팀 리딩을 맡고 있는 안유정이 말했다.
“오늘 어쩌면 역사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르겠는데요?”
오랜 헌터 생활로 잔뼈가 굵은 안유정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백호진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역사적인 장면이라니?”
경험이 많기는 하지만, 센스가 좀 부족한 편인 백호진이었다.
“세계 최초로 S급이 SS급으로 성장하는 광경이요.”
“SS급?”
팀원들의 일부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일부는 백호진처럼 놀란 표정으로 최유나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때,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났다.
지이이잉-!
검을 휘두르는 최유나의 온몸에서 강렬한 기파가 휘몰아쳤다.
실체화된 에너지가 세찬 바람을 일으키며 최유나 주위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물러서!”
버럭 소리를 지른 사람은 준혁이었다.
동시에 유민섭이 황급히 뒤로 몸을 날렸고, 리쉬옌이 장민호의 뒷덜미를 잡고 몸을 뺐다.
그와 동시에,
콰르르!
폭음에 가까운 소음과 함께 최유나의 온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터져 나갔다.
그리고 그런 최유나에게 달려드는 한 사람이 있었다.
준혁이었다.
콰앙-!
거대한 압력이 터져 나가며 돌풍이 되어 휘몰아쳤다.
주변에 있던 갑옷 괴물들이 일시에 터져 나가고, 헌터들이 발을 지익 끌며 우악스럽게 밀려났다.
준혁의 무상곤, 그리고 최유나의 애병인 ‘기사의 신념’이 충돌한 결과였다.
“더 물러서요!”
유민섭의 외침에 헌터들이 일제히 몸을 날리는 사이, 준혁과 최유나가 제대로 맞붙었다.
굉음과 함께 마나와 영력의 파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롱 소드 1자루가 횡으로 수평의 궤적을 그렸다.
곧게 뻗은 양날의 검신과 조금은 투박한 형태의 손잡이, 겉모습만 보아서는 그저 평범한 롱 소드에 지나지 않지만 실은 ‘기사의 신념’이라는 이름이 붙은 최상급 무기였다.
지이이잉-!
검신이 잘게 떨며 묵직한 소음을 토했다. 흔히 검의 울음소리라 부르는 검명(劍鳴)이었다.
묵직한 검명과 함께 검신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순간 기사의 신념이 그린 궤적은 더 이상 단순한 칼질이 아니었다.
과아아앙-!
공간을 과격하게 우그러트린 칼날이 눈앞에 있는 준혁의 목을 잘라 갔다.
불쑥 튀어나온 무상곤이 롱 소드의 궤적을 막아섰다. 하지만 2자루의 무기가 부딪치기도 전에 롱 소드의 궤적이 날카롭게 꺾였다.
당연히 준혁의 무상곤도 방향을 비틀었다.
잠깐 거리를 벌렸다가 다시 좁히는 두 사람.
최유나의 롱 소드가 종횡무진 공간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찌르는가 하면 베고, 베는가 하면 꺾인다.
그간 치열한 훈련으로 몸에 완전히 새긴 충실한 기본기와, S급을 넘어서는 순간 폭발적으로 솟구치는 기운이 한데 어우러졌다.
기본에 충실한 칼질을 하면서도 그때그때 본능적으로 검격에 변화를 줬다.
쿵, 쿠쿵!
쉴 새 없이 그것을 막아 내는 준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무식하게도 했네.’
준혁이 최유나에게 요구한 사항들은 솔직히 불가능에 가까운 내용들이었다.
그런 무리한 것들을 요구한 이유는 그것에 충실할수록 빠른 성장이 가능했고, 성장 후에 얻게 될 스탯이 훨씬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중간중간 실수로 스킬을 사용하더라도 넘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최유나는 준혁의 말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우직하게 준혁이 요구한 내용에 충실했고, 그 덕분에 지금의 수준까지 올 수가 있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리쉬옌이라는 최고의 방어형 투사의 공이 컸다.
리쉬옌이 최유나를 안전하게 지켰고, 거의 매일 훈련시켰기에 이런 성과가 만들어진 것이다.
긍, 그긍!
굉음이 점점 더 묵직하게 변했다. 그럴수록 최유나의 검격이 한층 과격하게 변했다.
검신을 물들이는 새하얀 빛무리는,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도 무기에 마나를 실을 수 있게 되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 빛이 점점 더 광량을 늘려 갔다.
-좀 더 물러나요!
준혁이 최유나의 과격한 공격을 일일이 막아 내며 유민섭에게 생각을 전했다.
이제 곧 힘의 완전한 개방이 찾아올 터. 그 순간 터져 나가는 기운은 주변의 지형을 변화시킬 정도다.
-네! 지금도 계속 물러서고 있습니다!
-알았어요!
짧은 대화를 마친 그 순간이었다.
기사의 신념의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폭사되었다. 그것은 검신의 길이를 벗어나 5미터 길이의 빛으로 이루어진 검이 되었다.
최유나 역시 온몸이 새하얀 빛으로 뒤덮였다.
휘이이잉!
주변의 공기가 광포하게 요동치며 빛의 검 주위에서 날카로운 소음을 울렸다.
“후웁!”
준혁이 빠르게 숨을 고르며 영력을 끌어올렸다.
지금 최유나는 이성이 날아간 상태였다. 검신의 길이를 몇 배나 늘일 정도로 마나가 폭주하고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이럴 때 어설프게 공격을 받아 내면, 준혁은 괜찮아도 최유나는 심각한 내상을 당할 수도 있다.
리쉬옌이 나서지 않겠다고 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풀썩!
뿜어져 나온 묵색의 영력이 무상곤을 휘감았다.
그와 동시에 최유나의 롱 소드가 준혁을 쪼갤 기세로 떨어졌다.
콰앙!
거세게 한 발 앞으로 내디딘 준혁이 무상곤을 비스듬히 들고 최유나의 검격을 받았다.
무상곤에서 넓게 퍼져 나간 영력이 길어진 검신을 휘감았다.
묵색의 영력이 마치 그림자처럼 검신의 빛을 잠식해 들어갔다.
순식간에 영역을 넓힌 묵색의 영력은 검 손잡이를 타고 최유나의 양팔을 지나 어깨까지 휘감았다.
빠르게 발의 위치를 바꾼 준혁의 오른손이 최유나의 두 손을 그러쥐며 힘의 방향을 비틀었다.
고오오!
순간 주변이 진공 상태가 된 듯 먹먹해지는가 싶더니, 준혁의 인도를 받은 최유나의 롱 소드가 전방의 공간을 갈랐다.
그리고 마침내 땅을 두드리는 무시무시한 검격.
무지막지한 마나가 전면을 향해 방출되었다.
지면이 뒤흔들리고, 내뿜어진 마나가 땅바닥에 길고 긴 흔적을 남기며 크레바스처럼 지면을 쪼갰다.
“커헉!”
그리고 최유나의 입에서 토해진 탁한 숨소리 한 줄기.
동시에 최유나를 감싸고 있던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쉬어라.”
뒤이은 준혁의 말에, 어느새 초점을 찾은 최유나의 시선이 준혁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최유나는 무너질 듯이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고, 준혁이 그런 최유나를 받았다.
기절한 듯 쓰러진 최유나를 내려다보며 준혁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축하한다.”
던전 시스템의 헌터 중 최초로 SS급이 탄생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