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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장. SS급#1-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준혁이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어, 형.”
(바쁘냐?)
“와, 이쯤 되면 고민 좀 해 봐야겠는데?”
(무슨 고민?)
“우리 길드 오늘 던전 들어간다는 거 몰라? 신문에 도배됐는데?”
(어? 그랬냐? 바빠서 뉴스 읽을 틈도 없었다.)
“동생 일에 그만큼이나 관심이 없는 거겠지.”
(뭘 또 삐치고 그러냐? 어이구, 우리 귀여운 혁이 삐쳤어요?)
불쑥 장난을 치는 김준석의 말에 준혁이 정색을 하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무슨 일이야?”
(나 합격했다.)
“합격?”
(무훈 길드 입단 시험.)
“응?”
(뭐야? 기억 안 나냐? 저번에 분명 말했었는데?)
“그랬나?”
준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아, 저번에…….’
재판 직전쯤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게 얼핏 기억났다.
한동안 여러 가지 일로 바빠서 미처 신경을 못 쓰는 바람에 한 번 듣고 흘려버렸던 것이다.
(와, 이 자식 형한테 이렇게 관심이 없어?)
그대로 복수하는 김준석의 말에, 준혁은 입맛을 다시며 대화를 이어 갔다.
“아무튼 무훈 길드 합격이라고? 오올, 우리 형, 쫌 하는데?”
(니네 형 원래 쫌 했다. 크흐흐.)
“그래. 축하. 그래도 항상 조심해야 하는 거 알지?”
(알았다. 너도 오늘 던전 들어가서 몸조심해라.)
“알았어.”
통화를 마친 준혁을 향해 유민섭이 갑자기 어깨에 힘을 팍 주며 말했다.
“제가 힘 좀 썼습니다.”
“무슨 힘?”
“김준석 씨 무훈 길드 합격이요.”
“하! 그렇다고 기준 미달을 뽑은 건 아닐 텐데요? 내가 무훈 길드를 모를 거라고 생각하시나?”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기준치 충족한 사람 중에 김준석 씨를 뽑은 건 제 영향력이죠.”
“알고 보니 비선 실세셨네요? 하아! 이런 적폐는 진짜…….”
결국 본전도 찾지 못한 유민섭이었다.
“진짜 뭔 말을 못해.”
“크큭! 농담입니다. 고맙습니다.”
“뭐, 알면 됐습니다.”
그때 밴을 운전하던 장형준이 입을 열었다.
“대표님.”
“네?”
“방금 분석팀에서 들어온 소식인데, 새벽에 서울 외곽 던전에서 막공 하나가 전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조사 후 보고하겠다고 합니다.”
혼원 길드의 분석팀은 국내 던전의 정보를 전방위적으로 수집하고 있었다.
무명회 놈들이 언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네. 최대한 빨리 정보를 모아 달라고 전하세요.”
“알겠습니다.”
짧은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동시에 밴이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오케이. 그럼 갑시다.”
유민섭을 필두로 혼원 길드 공략팀이 밴에서 내렸다.
준혁이 미리 말한 대로 린디웨는 빠진 터라, 오늘은 5명만 던전 공략에 참가했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쫓아오던 또 1대의 밴에서 강이찬이 내려 공략팀을 향해 달려왔다.
“보고 계십니까? 오늘 정말 오랜만에 혼원 길드가 공식 활동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게이트 돔 진압이 아닌 던전 공략입니다. 백호 길드의 요청으로 던전 공략에 나서게 됐다고 합니다.”
강이찬은 앵글을 돌려 공략팀을 화면에 담으며 멘트를 이어 갔다.
“그런데 오늘 하나의 빅뉴스가 있습니다. 오늘 공략은 다른 때와 다른 방식으로 간다고 하죠. 뭐냐고요? 어제 ‘얼음여왕의 재발견’ 편에서 말씀드렸지만, 다시 한 번 알려 드리겠습니다.”
급격히 줌을 당겨 카메라에 최유나를 원샷으로 담았다.
“오늘 던전 공략의 메인 딜러는 다름 아닌 얼음여왕 최유나 헌터입니다! 이 소식을 얼음친위대에 다시 한 번 널리 퍼트리십시오. 두 번 강조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캠을 든 채 혼원 길드 공략팀을 ‘배경’으로 두고 혼자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그새 강이찬이 제 인벤토리에서 10개의 카메라를 꺼냈다.
그리고 캠을 셀카 찍듯 들고 카메라를 보여 주며 말했다.
“오늘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이 10개의 카메라를 전부 소모해서 우리 여왕 폐하의 활약상을 담아 오겠습니다! 네? 흑태자 사진은 없냐고요? 하하! 왜 없겠습니까? 이거 보이십니까?”
강이찬이 인벤토리에서 새롭게 10개의 카메라를 꺼냈다.
“이것도 준비했죠.”
그런 강이찬의 모습을 보며 준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캐릭터 참 일관성 있다.’
언제나 생각했던 부분이지만, 볼 때마다 새삼스러운 점이기도 했다.
“일단 관리소로 가시죠.”
유민섭의 말에 일행들이 다 함께 걸음을 옮겼다.
관리소는 새하얀 천막이었는데, 내부에 각종 편의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외부에 용역을 주던 무훈 길드와 달리 백호 길드는 직접 던전을 관리하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백호 길드의 길드장 백호진입니다.”
이름의 영향인지 커다란 덩치에 호랑이를 연상시키는 인상의 남자가 준혁 일행에게 인사를 했다.
백호 길드의 길드장인 A급 헌터 백호진이었다.
“네, 반갑습니다. 이렇게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네요. 혼원 길드의 유민섭입니다.”
“이, 이렇게 요청에 응해 주셔서 가문의 영광입니다. 오시느라 피곤할 텐데 자, 잠시 쉬었다가 진행할까요?”
그런데 성격이나 말하는 게 커다란 덩치와는 정반대였다.
유민섭이 애써 당황한 표정을 숨기며 말했다.
“곧바로 진행하시죠.”
“알겠습니다.”
혼원 길드의 공략팀이 마련되어 있는 자리에 앉자, 내부 조명이 꺼지고 프로젝터가 스크린에 화면을 쏘며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던전의 이름은 ‘강철의 전장’으로, 10급 던전입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금속 성질을 가진 몬스터들이 주로 출몰하는 곳입니다. 갑옷 괴물, 강철 골렘, 플라잉 소드…….”
괴물 이름이 나올 때마다 스크린에 해당 괴물을 상세하게 그린 그림이 떠올랐다.
강이찬을 제외하면 던전 내부에서 사진 촬영은 불가능하기에, 대부분은 이렇게 그림으로 도감을 작성하는 편이었다.
브리핑이 끝나고 다시 전등이 밝혀지자 백호진이 제 길드원들을 일으켜 세웠다.
“이쪽은 오늘 던전 공략을 참관할 저희 길드의 알파팀입니다. 혼원 길드의 전투를 보며 절차탁마하려고 합니다.”
백호진이 1명씩 알파팀 팀원들을 소개했고, 뒤이어 유민섭이 혼원 길드의 공략팀을 소개했다.
의례적인 과정이기는 하지만, 백호진의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친분을 만들려는 목적이 있기에 유민섭도 맞장구를 쳐 준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준혁의 신경을 건드리는 이가 있었다.
‘뭐야?’
꽤 매서운 눈초리로 준혁을 노려보는 여자가 1명 있었다.
‘처음 보는데?’
마치 묵은 원한이라도 있는 듯한 모습에 잠시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안면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애초에 준혁은 일반적인 헌터들과 거의 인연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준혁은 이내 신경을 거두었다.
‘상관없지.’
저 눈빛이 원한이든, 질투든 준혁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느새 천막 밖,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한 백호진은 자신의 길드원 1명에게 타박을 당하고 있었다.
“길드장님, 진짜 좀 똑 부러지게 하시라고요.”
“해, 했는데?”
“가문의 영광? 절차탁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 백호 길드예요.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다고요. 제발 어깨 좀 펴요.”
“유정아, 화 좀 내지 말고…….”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그, 그러니까. 응?”
“하아! 정말 믿음이 좀 가게 해 줘요. 네?”
두 사람은 나름 소리가 새는 것을 방비한 채 이야기했지만, 준혁은 그 대화를 선명하게 듣고 있었다.
‘나름 재미있는 곳이네?’
그렇게 작은 소란이 끝난 후, 본격적인 던전 공략이 시작되었다.
혼원 길드 공략팀이 먼저 게이트를 통과했고, 그다음은 백호 길드의 알파팀이었다.
그 직후 게이트에서 희미한 일렁임이 생겼다가 사라졌지만, 그 현상은 누구도 확인하지 못했다.
***
수평으로 뉜 1자루의 롱 소드가 횡으로 공간을 갈랐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횡 베기였다. 하지만 그 단순함에 실린 무게는 예사롭지 않았다.
까앙-!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단단해 보이는 갑옷의 흉갑이 반으로 잘려 나갔다.
터엉-!
속이 빈 채 갑옷만 살아서 움직이는 몬스터가 요란한 소음과 함께 무너졌다.
그와 동시에 질책이 날아들었다.
“힘이 제대로 안 실리잖아!”
“네!”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한 이는 최유나였다.
속이 텅 빈 채 갑옷만 살아서 움직이는 몬스터, 갑옷 괴물이라 불리는 놈들이 득달같이 최유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최유나의 온몸에 시커먼 날붙이가 쇄도했다.
캉, 카캉!
하지만 쇳소리와 함께 모든 날붙이가 튕겨 나갔다.
뒤쪽에 서 있는 리쉬옌의 스킬이 철저하게 최유나를 보호하는 덕분이었다.
“후우, 후!”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이며 스킬을 사용하는 리쉬옌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원래의 포메이션이라면 탱커 포지션인 리쉬옌이 가장 앞에서 몬스터를 맞이해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준혁의 특별한 지시가 있었기에 기형적인 포메이션을 하고 있었다.
근접 딜러인 최유나가 가장 선두에 서고, 탱커인 리쉬옌이 그 뒤에 자리한 것이다.
그렇다고 최유나가 마냥 몬스터들의 공격을 맞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열심히 회피와 방어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장 선두에서 공격을 맞이한 경험이 없기에 리쉬옌의 보호가 필요했다.
그리고 세 번째 자리에 선 장민호 역시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언제든 최유나가 다치면 치료하기 위해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전방을 지켜봤다.
쉭, 쉬쉭!
종횡으로 거침없는 궤적을 그리는 최유나의 롱 소드는 확실히 과거와는 큰 차이를 보였다.
그만큼 노력했고, 노력한 만큼 발전한 것이다.
물론 준혁에게는 여전히 성에 차지 않는 모습이었다.
“산만하잖아! 주변을 모두 눈에 담으랬지, 산만하게 고개 돌리랬냐?”
쉴 새 없이 질책이 날아갔다.
“네!”
최유나는 여전히 씩씩하게 대답하며 묵묵히 롱 소드를 휘둘렀다.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인 전방의 세 사람과 달리, 뒤쪽에 있는 이들은 관람이라도 나온 듯 한가한 모습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가해 보이는 사람은 준혁이었다.
입으로는 쉴 새 없이 최유나를 가르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가장 안락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거 편합니까?
유민섭이 언제라도 최유나를 지원하기 위한 준비를 한 채 준혁에게 물었다.
-왜요?
-불편해 보이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라도?
-승마 같은 게 엄청나게 체력이 필요한 거라고 들었습니다. 단순히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아니라고요.
유민섭은 그렇게 말하며 슬쩍 준혁을 돌아보았다.
준혁은 청랑의 등에 올라타 있었다. 청랑의 몸길이가 3미터에 달하는 데다, 다리가 길쭉해서 마치 말에 올라앉은 듯한 모습이었다.
-거기다 지금 준혁 씨는 안장도 없이 앉아 있잖아요.
-소파에 앉은 것처럼 편안합니다. 흔들림이 없죠.
-그래요?
-왜요, 부럽습니까?
-뭐, 조금?
헌터들은 던전에 들어오면 무조건 걸어야 했다.
자동차 같은 현실의 물건은 들고 들어오면 바로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기승수 같은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준혁이 편안하게 청랑을 타고 다니니 조금은 부러운 마음도 들었다.
-술 좀 마셨다고 구박할 때는 언제고?
-와, 그때는 나도 잠깐 흥분해서 그랬던 거죠.
-뭐… 태워 줄 수는 있는데…….
크르르르!
준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청랑이 고개를 홱 돌려 유민섭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청랑이 싫다고 하네요?
-허! 내가 아끼는 술을 다 내줬거늘……. 배은망덕한 술랑이네요.
그때였다.
스걱-!
둔탁한 듯하면서도 깔끔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준혁의 시야에 최유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쉐엑!
날카롭게 공간을 가르는 바람 소리와 함께 롱 소드가 갑옷 괴물의 투구를 갈랐다.
스걱!
또 한 번 들린 문제의 소음.
“좋아! 지금 그 감각, 절대 까먹지 마라.”
처음으로 준혁의 입에서 칭찬이 터져 나왔다.
까앙-!
하지만 이내 들린 소리는 앞서 들렸던 요란한 쇳소리.
“그게 아니고!”
가차 없이 떨어지는 준혁의 질책에 최유나가 이를 악물었다.
‘지금 네 피지컬로 제대로 힘 실어서 베면, 쇠를 잘라도 쇳소리가 안 날 거다.’
어제 훈련받으면서 준혁에게 들었던 말이다.
그리고 조금 전, 준혁이 말한 현상이 실제로 일어났다.
쇠로 만든 투구를 자르는데 마치 두부를 자른 듯 칼날에 걸리는 저항감이 없었다.
‘방금 그 감각!’
정신없이 칼을 휘두르는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조금 힘을 뺏었나?’
의식하지 않았는데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그 감각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어차피 단숨에 되지는 않으리라.
긴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었다.
‘조급해하지 마라.’
최유나는 스스로에게 당부하듯 외치며 롱 소드를 휘둘렀다.
조금 전의 그것도 운 좋게 일어난 것이었다.
그렇다면 또다시 운 좋게 그런 때가 올 것이다. 그때를 대비하고, 그것을 몸에 각인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차근차근. 천천히.’
최유나는 머릿속으로 그 말을 수없이 되뇌며 칼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순간 준혁은 유민섭을 향해 생각을 전달하고 있었다.
-준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