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
-24장. 대립각#1-
-미리 의논이라도 좀 하라고요!
유민섭이 다급하게 생각을 전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봐요.
-뭘요?
-길드장님이 만날 가면을 쓰고 살면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면 어떤 기분일 것 같습니까?
-아니, 그거야…….
준혁이 이름 때문에 고민한 지는 꽤 되었다. 그리고 지난번 갑작스러운 게이트 다운 이후 심각할 정도로 세상에서 떠들 때, 그 고민은 극대화됐었다.
그러다 지금 이왕 일이 커진 김에 진짜 신분까지 밝히고 한꺼번에 해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이전에는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정체를 숨기는 쪽을 택했었지만, 흑호와 백효를 소환한 이상 그럴 위험은 없다고 봐도 되었다.
무슨 일이 터져도 흑호와 백효의 스킬만 있으면 형네 가족들만큼은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둘의 스킬을 연계하면 순식간에 위험 지역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준혁도 배면계에 있을 당시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돌겠네.
유민섭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한마디였다.
놀란 사람은 유민섭만이 아니었다.
강이찬의 두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래져 있었다.
“지, 지금 보셨습니까? 방금 흑태자, 김지후 헌터 얼굴이 변했어요!”
얼굴이 변하더니 무늬가 없는 하얀 가면으로 바뀌었고, 그 가면을 벗으니 다른 얼굴이 나왔다.
“그런데 이 얼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말이죠.”
강이찬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자신의 방송을 열었다.
채팅창은 난리가 나 있었다.
<김준혁이다!>
<맞네, 김준혁! 창원 웨일즈 유격수 김준혁.>
<뭐야? 그럼 김준혁 각성자였던 거냐?>
<야구 선수 이름임?>
<국민 유격수 김준혁 모르냐?>
<그깟 공놀이 알 게 뭐야?>
<요즘도 야구 보냐?>
<와! 김준혁 각성자. 명불허전 각김쓰.>
<진짜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속이냐? 감김쓰 2.>
<감김쓰 x, 각김쓰 o.>
<각김쓰가 뭐냐?>
<각성자 김준혁 쓰레기.>
<채팅창에 야구팬이 왜 이리 많아? 야구 그까이 거 뭐가 중요하다고?>
<그래. 아까 흑태자 싸우는 거 못 봤냐?>
<주변 학교랑 아파트 단지로 가는 괴물 막은 사람이 누군지 기억 안 남?>
<대가리가 빡대가리냐?>
<영웅이라고 불러도 시원찮을 판에 쓰레기? 레알 도른자.>
<지금 그거보다 관리청이랑 흑태자 싸우는 게 더 볼만하지 않냐?>
<팝콘각이다.>
강이찬도 그제야 준혁의 얼굴을 기억해 냈다.
“맞네요. 작년 말에 은퇴 선언했던 김준혁 선수 맞는 거 같습니다. 저도 방송 화면으로만 봤었는데…….”
강이찬이 슬쩍 준혁에게 시선을 던지며 눈빛으로 사실 여부를 물었다.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작년까지 창원 웨일즈에서 뛰었던 김준혁입니다.”
준혁의 확인에 강이찬은 반사적으로 고민에 잠겼다.
‘이거 어떡하지? 채팅창 분위기를 보아하니 백 퍼 인성 논란각인데?’
그래서는 안 된다.
혼원 길드, 리쉬옌과 린디웨, 그리고 흑태자는 강이찬 최고의 콘텐츠였다.
괜한 논란에 휩싸이면 강이찬의 방송도 거기에 끌려 들어갈 게 뻔했다.
그리되면 시청자는 늘어도 풍선 수입은 줄어들 가능성이 컸다.
‘절대 안 되지!’
강이찬의 두뇌가 유례없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이 사태를 자연스럽게 좋은 쪽으로 이미지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한편으로는 다른 방향으로도 생각했다.
‘차라리 흑태자를 까?’
그러면 다른 방향의 지지자들이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오래 못 가.’
논란이라는 건 들불처럼 번지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빠르게 꺼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흑태자를 까는 건 황금 알을 낳는 거위 배를 째는 셈이지.’
자낳킹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그건 분명 자충수였다.
방금 전에 제발 자신도 끼워 달라고 부탁까지 하면서 한 발 걸친 상황이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다른 무엇보다 강이찬의 그 생각에 제동을 건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흑태자에 대한 호감이었다.
‘게이트 돔을 없애 주는 영웅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흑태자를 까도 나는 그러면 안 돼.’
그러는 사이 빠르게 회전하던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이 문제는 맞고 틀리고를 따질 만한 게 아니었다.
옳고 그름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결국은 다수가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의 문제였다.
강이찬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제가 야구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보이네요. 하지만 여러분! 보십시오! 누가 게이트 다운을 단신으로 막았습니까? 방금 전 보셨던 거대한 괴물들을 없애고, 학생들과 시민을 구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이런 헌터가 지구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영웅으로 포장한다.
큰 ‘공’으로 작은 ‘과’를 덮는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공과’가 있다. 작은 과를 그런 느낌으로 희석하는 방법이 최고였다.
“조금 전에는 던전 관리청 긴급 대책반의 횡포에 맞서기까지 했습니다. 보셨죠? 대책반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어떤 억지를 부렸는지 말입니다. 국내에서 가장 이름 높은 유민섭 헌터나 김지… 아니, 김준혁 헌터 앞에서도 그런 태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는 더 심한 일도 많을 거라고 봐야 합니다.”
국가 권력을 악역으로 만들기 딱 좋은 제물이었다.
법을 어기기는 했지만, 그와 별개로 선악 구도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이미지를 세탁하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한다.
“저답지 않게 진지한 물음을 하나 던져 보겠습니다.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과 야구를 하면서 약간의 잘못을 한 것. 어느 쪽이 커 보입니까? 제 생각에는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뭐? 그래서 지금 한국시리즈 거짓 우승이 잘못이 없다는 거냐?>
<와, 강이찬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런 식으로 핥아 주기냐?>
<야구팬들이 왜 이리 날뛰냐? 내가 봐도 야구보다 헌터로 사람들 지키는 일이 훨씬 커 보이는데.>
<요즘 야구 인기도 없잖아?>
<관중석 반도 못 채움.>
<스포츠 인기 한물간 게 언제 적 얘긴데 야구팬들이 떠드냐?>
<보기 싫으면 나가라.>
<잘한 건 잘한 거지. 그런데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말해야지.>
<그래서 그 잘못 때문에 사람이 죽었냐, 국가 경제가 흔들렸냐?>
‘일이 의외로 간단하게 풀릴지도 모르겠는데?’
슬쩍 휴대폰으로 방송을 틀어 채팅창 반응을 살핀 유민섭은 보이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논란이 생길 경우, 아무래도 처음 내뱉은 말이 그 반론보다 힘을 얻는 게 쉽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그럴싸한 이야기 하나만 흘리면, 여론을 확실히 이쪽으로 끌고 올 수 있다.’
거기까지 생각한 유민섭이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일단 길드로 돌아갑시다. 이찬 씨도 같이 갑시다.”
“네? 저요?”
“일단 방송부터 마무리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강이찬이 액션 캠을 셀카 방향으로 잡고 말했다.
“여러분, 조금 정리가 된 후에 방송 재개하겠습니다. 방금 들으셨죠? 저는 이제 혼원 길드로 갑니다. 가장 빠른 소식은 저의 채널에서! 그럼 잠시 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충성!”
강이찬이 방송을 종료한 직후 유민섭이 말했다.
“여기 혼자 남아 있으면 반드시 체포될 겁니다. 일단 저희하고 같이 움직이는 게 제일 안전합니다.”
“알겠습니다. 아, 그런데…….”
“그런데?”
“거기 가서 방송은 해도 되죠?”
“물론입니다. 단, 시간과 장소는 허락을 받고 하세요.”
“당연하죠!”
“그럼 가시죠.”
빠르게 이야기를 끝낸 혼원 길드 일행은 곧장 길드 사옥으로 향했다.
그리고 현장에는 긴급 대책반이 어정쩡한 자세로 멍하니 서 있었다.
***
“내 분명 마찰 없이 처리하라고 했잖아!”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의 입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남자는 현직 던전 관리청장 박영만이었다.
그리고 박영만의 호통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긴급 대책반장 황도형이었다.
긴급 대책반은 던전 관리청 소속 기관이었으나, 황도형은 박영만 앞에서 조금도 주눅 든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상을 찡그리며 대거리를 했다.
“헌터 새끼 하나가 미쳐 날뛰는데, 청장님까지 그 새끼 눈치를 보면 어쩌자는 겁니까?”
되돌아오는 대답에 박영만은 인상을 와락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이 꼴통 같은 놈!’
기관의 장은 박영만이 분명했으나, 던전 관리청 안에서 가장 강력한 파워를 가진 사람은 오히려 아래 직급인 황도형이었다.
통합안전부가 지금까지 별다른 마찰 없이 헌터와 던전을 관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산하 기관인 던전 관리청 소속의 황도형이라는 존재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SS급으로 불리는 넘사벽급 각성자가 던전 관리청에 존재하기에, 헌터들이 통안부에 함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던전 관리청장이라 해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 황도형이 관리청을 나가게 된다면, 오히려 문책을 받을 사람은 관리청장이기 때문이었다.
최고위급 각성자란 국가 기관 내에서도 그만큼 귀한 존재였다.
다만, 그 귀한 인력이 말 안 통하는 인간이라는 점은 역대 던전 관리청장의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중도 하차한 역대 던전 관리청장들의 해임 원인이기도 했다.
황도형이 사고를 하나 칠 때마다 던전 관리청장이 책임을 지고 사퇴한 탓이었다.
지금도 절대 물러서지 않는 그 태도를 보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박영만도 오늘만큼은 쉬이 물러서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래서 전 국민 앞에서 겨우 한 사람에게 얻어맞으면서 아무것도 못했던 건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놈이었습니다. 전력을 다해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당당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박영만이 걱정하는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김지후, 아니 김준혁은 국가에 꼭 필요한 인재야. 그런 사람과 척을 져서 어쩌자는 거야?”
“꼭 필요한 인재? 제 힘만 믿고 날뛰는 쓰레기일 뿐입니다.”
“쓰레기? 그럼 시민들을 지킨 그 행동은 뭐라고 할 건가?”
“괴물 사체를 독차지하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청장님 말대로 훌륭한 인물이라면, 그 사체들은 일단 국가에 반납했어야 하는 겁니다.”
“하아!”
말이 안 통했다. 무슨 말을 해도 제 마음대로 해석하고 믿어 버릴 위인이니, 애초에 설득할 마음도 먹지 않았다.
“그래도 너무 척지지는 마. 이후에도 국내에 그런 괴물들이 나올 경우를 생각하면 좋게 지내야지.”
“걱정 마십시오. 못 보셨습니까? 그 괴물들, 헌터들만으로도 충분히 잡을 수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강한 괴물도 있다잖아.”
“보지도 못했는데 어찌 압니까? 분명 제 주가를 올리기 위한 허세일 겁니다.”
이 정도면 정말 답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건가?”
“어쩌긴요? 놈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 개인이 아무리 강한 힘을 갖고 있어도 결국 국가 권력 앞에서는 무릎을 꿇게 되어 있지요. 이번에는 제가 당했습니다만, 반드시 그놈 잡아다 감옥에 처넣을 겁니다.”
그 말에 박영만이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러지 좀 마!”
“그렇게 물렁하면 안 되는 겁니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결국 박영만이 두 손을 들었다.
“하아! 알아서 해.”
박영만이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고, 황도형은 인사도 없이 청장실을 나섰다.
그리고 박영만은 책상 서랍을 열어 봉투를 하나 꺼냈다.
사퇴 입장문 초안이 들어 있는 봉투로, 역대 던전 관리청장들 사이에서 대물림하는 문건이었다.
청장실을 나선 황도형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영감님, 오랜만입니다. 별일 없으시죠? 아, 그거요? 별거 아닙니다. 몸도 이상 없고요. 아무튼 시간 괜찮으면 잠시 보시죠? 네. 늘 만나던 거기에 예약해 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