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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흑태자 김준혁#2-
‘타이밍 끝내주네.’
저 멀리서 다가오는 황도형의 모습을 확인한 준혁이 몸을 일으키며 걸음을 옮겼다.
청랑과 흑호가 준혁의 뒤를 따랐다.
두 환수는 예전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백효 역시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었다.
영수급 10마리의 시체를 통해 ‘강식’을 한 덕분이었다.
준혁이 2마리의 환수를 이끌고 향한 곳은 미국의 헌터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미스터 블랙……. 아, 이게 아니군요.”
반가운 얼굴로 준혁을 맞이하던 개런이 갑자기 말을 끊고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우아하게 손을 내리며 새롭게 인사를 했다.
“미천한 소인이 태자 전하를 알현합니다.”
‘아놔, 강이찬 이 자식.’
준혁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물들었다. 진짜 이럴 때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이러다 진짜 수치사 하겠다.’
준혁은 진심으로 사람이 수치심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황급히 고개를 털어 낸 준혁이 악수를 청했다.
“김지후입니다.”
“리처드 개런입니다. 리키라고 불러요.”
“네, 리키. 반갑습니다.”
“포럼에서 볼 때는 그냥 그랬는데……. 하하! 싸우는 모습에 진짜 말이 안 나오더군요. 그 모습을 보고 다짐했습니다.”
“다짐……?”
“미스터 김과 친구가 되겠다고요. 하하하!”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딱히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친구… 나쁘지 않겠네요.”
“그나저나 영어가 능숙하신 거 같기는 한데… 입 모양이 좀 다르게 보이는 것이, 혹시 스킬입니까?”
준혁은 ‘영화’를 사용해 이야기하고 있었기에 리얼 더빙의 현상이 일어난 것이었다.
“맞습니다.”
“그렇군요. 신기한 스킬도 다 있네요. 미스터 김… 아니,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BP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순간 그 말의 의미를 단번에 깨달은 준혁은 저도 모르게 와락 인상을 구길 뻔했다.
BP가 블랙 프린스, 즉 흑태자의 이니셜이라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놓고 블랙 프린스라고 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 같기도 했다.
“그러시죠.”
“와우! 화끈하시군요. BP와 BF라, 뭔가 재미있고 좋군요.”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던지는 개런의 모습에, 준혁이 과장되게 뒷걸음질을 치며 말했다.
“BF? 설마 boy…….”
“왓 더 퍼…….”
“크흐흐! 농담입니다. 베프라고 하시죠. 베프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베프? 한국에서는 그렇게 부릅니까?”
“절친도 좋고.”
“저얼… 조얼……. 음, 그건 좀 어렵군요. 베프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개런이 슬쩍 주변을 살피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목소리까지 낮추며 물었다.
“그런데 BP의 베프가 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은데요?”
준혁이 피식 웃었다.
실없는 농담을 막 던지는데 은근 눈치가 빠르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제가 아는 거라면 뭐든지.”
“당신의 대통령과 잘 알고 지내나요?”
“예스. 대통령은 나의 친구가 아니지만, 백악관의 주인은 나와 가까운 사이죠.”
개인적인 친분은 없다. 하지만 대통령이 누구든, 그 자리에 앉은 사람과 어느 정도 긴밀한 사이라는 의미였다.
미국에서도 최고라고 평가받는 ‘팀 히어로’의 캡틴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 백악관의 주인과 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는 당신의 대통령이 되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대통령, 즉 김준혁의 대통령. 다시 말해 김준혁을 미국의 시민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는 뜻이었다.
준혁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 표정을 본 개런이 준혁을 따라 미소 지으며 물었다.
“이 정도면 조건은 충족했나요?”
“만족스러운 대답이군요.”
“오케이. 그럼 베프 확정이군요.”
환하게 웃어 보인 개런이 갑자기 뒤로 돌았다. 그리고 오늘 팀을 이뤘던 헌터들을 향해 선언하듯 소리쳤다.
“이 몸이 블랙 프린스의 기사가 되었도다! 앞으로 나를 블랙 나이트라 부르도록!”
그러고는 다시 뒤로 돌아 준혁을 향해 한쪽 무릎을 쾅 찍으며 꿇어앉아 외쳤다.
“Your imperial highness!”
결국 그렇게 장난을 쳤다. 얼굴 가득 매달린 장난스러운 표정의 의미는 명백했다.
준혁이 흑태자라는 별명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눈치 빠르고 재미없는 장난을 치는 친구였다.
준혁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그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에 유민섭과 강이찬이 준혁 앞에 도착했다.
“무슨 일입니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유민섭이 물었지만, 준혁의 시선은 강이찬에게 향해 있었다.
준혁이 강이찬을 향해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풍선 좀 벌까?”
“네?”
“알면서 모른 척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설마…….”
“응. 대가리 박아.”
“네!”
강이찬은 또다시 머리를 심었고, 풍선 후원이 폭발했다.
그렇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느긋하게 걸어온 긴급 대책반이 도착했다.
황도형이 조금은 딱딱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이거 얼굴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보는군요.”
“네, 그러네요. 민간 피해 상황은 어떻습니까?”
앞으로 나선 사람은 유민섭이었다. 포럼의 주최자가 유민섭이었기에 그가 대표로 나서는 것이 맞았다.
유민섭의 물음에 황도형이 뒤를 돌아보았고, 부하 하나가 대답했다.
“주택가나 학교 쪽은 피해가 없는데, 종합 운동장 내부 시설에 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현재 확인 중입니다.”
갑작스러운 기습이었다.
괴물들은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쳤고, 그 시간에 잠실 종합 운동장 내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운명을 달리했으리라.
유민섭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후우, 그렇군요.”
본인의 책임은 아니지만,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일단 여기도 정리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황도형은 그런 분위기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제 목적을 들이밀었다.
“정리?”
“일단 현장에 있던 헌터들은 사고 경위 확인을 위해 모두 던전 관리청 본청으로 가 주셔야겠습니다. 따로 차를 불렀으니 탑승하시고…….”
“잠깐!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말씀드렸을 텐데요?”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잖습니까? 헌터들 피해는 없는지, 후송해야 할 환자는 없는지, 그런 것부터 확인하는 게 우선 아닙니까?”
“절차는 절차입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괴물 사체들도 일단은 던전 관리청에서 수거해 가겠습니다.”
마지막에 말한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으리라.
“그놈의 절차. 진짜 너무하시네. 던전 관리청이라고 해서 헌터들을 이렇게 대해도 되는 겁니까?”
예전이었으면 별 소리 안 했을 유민섭이었다.
하지만 지난번 준혁에게 들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세세하게 살펴보니 확실히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난리가 났는데.’
큰 사고였다.
잠실 종합 운동장에 있던 시설물은 물론 경기장들까지 모조리 터져 나갔다.
10마리의 거대 괴물이 등장했고, 헌터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
게다가 이곳 도로만 건너면 민가와 상가가 밀집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모든 괴물 사냥이 끝난 후에야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던전 관리청 본청은 종로에 있었고, 대책반이 헬기를 타고 왔다면 벌써 도착해서 뭔가 일을 했어야 맞다.
‘다급한 느낌도 전무하고.’
설사 어쩔 수 없이 늦게 도착했다고 해도, 도착한 후에는 서두르는 게 인지상정이 아닌가.
‘내가 멍청했네.’
괜한 자책감이 몰려왔다.
대책반의 이런 모습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수없이 보아 왔는데 이제야 실체를 파악한 것은 확실히 실수였다.
하지만 이는 유민섭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길드장인 유민섭은 던전 관리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딱히 이상한 점을 찾으려고 노력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뒷북 대책반.’
괜히 그런 별명으로 불리는 게 아니었다.
항상 현장에 늦게 도착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우리는 뭐 절차대로 행동할 뿐입니다. 그러니 대책반의 통제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고압적인 자세로 말하는 모양새가 새삼 역겹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뒤로 뭔 짓을 하는 거야?’
분명 무언가 있으니 이러고 다니는 것일 터.
“뭐야? 무슨 일인데?”
“Captain Yoo, what happened?”
다른 곳에 있던 혼원 길드의 길드원들과 헌터들이 우르르 몰려와 질문을 던졌다.
유민섭은 그들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 양해를 구한 후, 다시 황도형을 향해 말했다.
“세계에서 모인 헌터들입니다. 자칫하면 국제적인 문제로 번질 우려가 있습니다. 괜한 짓은…….”
“그러니까 우리가 절차대로 처리하겠다는 겁니다! 길드가 관리청 절차를 막아서서 좋을 게 없을 텐데요?”
황도형의 말 속에 짙은 짜증이 묻어 나왔다.
“절차도 좋습니다만…….”
유민섭이 뭐라고 다시 설득하려 할 때였다.
“아, 왔네.”
유민섭의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약간은 날 선 대화 사이에 뜬금없이 뛰어 들어온 그 소리에 유민섭과 황도형의 대화가 멎었다.
궁금함에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다른 굉음이 귓전을 두드렸다.
구아아아앙-!
거센 엔진 소리였다.
두 사람은 그 소리가 이쪽을 향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준혁이었다.
“준혁 씨, 방금 무슨……?”
저 엔진 소리와 연관이 있으리라.
“아, 제가 불렀습니다. 저 영수들 사체 옮기라고요.”
“네? 언제요?”
“괴물 잡자마자 연락했는데요?”
혼원 길드의 길드장은 어디까지나 유민섭이었다. 하지만 길드 내 서열은 두 번째이며, 실질적으로 1인자라 할 수 있는 준혁이 길드의 자원을 부리는 게 힘들 리가 없었다.
문제는 이유였다.
“미리 말씀이라도 해 주셔야…….”
유민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도형이 불쑥 끼어들었다.
“지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 사체를 가져가겠다고?”
“그럼 안 가져갑니까?”
“던전 관리청 허락도 없이 저걸 가져가는 건 불법입니다. 엄연히 절차라는 게 있습니다.”
“절차? 지랄하네.”
순간 정적이 맴돌았다. 전혀 예기치 못한 과격한 언사에 황도형은 물론 유민섭까지 멍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지, 지랄?”
“응, 지랄.”
“이 사람이 지금! 절차를 무시한 걸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준혁이 황도형의 말을 끊었다.
“말년 병장이냐?”
“그게 무슨……?”
“말년은 일 터져도 짱 박히잖아. 앞으로는 황 말년이라 불러 드려야겠어. 아우, 이거 무슨 욕 같네. 욕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말고.”
황도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굳은 얼굴로 준혁을 노려볼 뿐이었다.
준혁이 다시 말했다.
“그럼 말해 봐.”
“말? 무얼……?”
“그 절차라는 거 읊어 보라고.”
또 한 번 정적이 흘렀다. 황도형은 두 눈에 살기까지 번들거리며 준혁을 노려보았다.
그 정적 속에서 유민섭이 물었다.
-어쩌자고 이러는 겁니까? 관리청이랑 척을 지면…….
-저번에는 길드장님 얼굴 봐서 그냥 넘어갔습니다.
-네?
-그러니 이번에는 저한테 맡겨 주세요.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뭔가 이유가 있을 터. 유민섭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황도형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까지 무시당한 적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일개 헌터가 감히 던전 관리청의 긴급 대책반을 무시하고 있었다.
긴급 대책반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권력을 지닌 곳이었다.
국내 던전 관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대책반의 경찰권이었다.
대책반은 현장 지휘자의 판단에 따라 유사시 경찰권을 행사할 수 있다.
요약하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누구든 체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경찰은 아니지만 경찰과 다름없는 지위가 대책반의 지휘자였다.
괴물 같은 힘을 가진 헌터들 사이에서 막대한 이권이 담긴 던전의 관리권을 통제하기 위해 주어진 권한이었다.
그리고 황도형은 지금이 그 경찰권을 발동해야 할 순간이라고 판단했다.
황도형이 품에서 수갑을 꺼내더니 전광석화와 같은 솜씨로 준혁의 손목에 채웠다.
“김지후 씨, 당신을 2029년 6월 12일 17시 30분부로 던전 관리법 위반 및 공무집행 방해로 영장 없이 긴급 체포합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와 변명의 기회가 있습니다. 체포구속적부심을 법원에 청구할 권리도 있습니다. 지금 한 말 무슨 소린지 알아들었죠?”
황도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협하듯 뇌까렸다.
그에 준혁이 대답했다.
“아니.”
“뭐?”
꽝-!
황도형의 신형이 저만치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