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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흑태자 김준혁#1-
5개의 영패가 린디웨 주변을 위성처럼 돌고 있었다.
린디웨 앞에는 리쉬옌이 양손에 반투명한 방패를 하나씩 든 채 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배면계에 있을 당시 같이 소환당했던 이들이 모두 죽고 남은 최후의 2인이었다.
단둘이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기에, 그만큼 둘만 있을 때 가장 호흡이 잘 맞았다.
“아파트, 아파트로 넘어간다!”
실내 체육관과 그 덩치가 비슷한 거대한 코끼리 1마리가 도로를 넘어 아파트 단지로 가고 있었다.
“먼저 가겠습니다!”
리쉬옌이 단단해진 목소리로 외치며 두 발에 힘을 주었다.
바람 같은 질주와 함께 리쉬옌은 순식간에 코끼리를 따라잡고 그 앞을 막아섰다.
팔비상(八鼻象), 코가 8개나 되는 괴상망측하게 생긴 거대한 코끼리 괴물이었다.
영수급의 괴물이었는데, 이놈은 리쉬옌과 린디웨가 잡아 본 적이 있었다.
“옹(甕)!”
린디웨의 곁을 지난 영패까지 거두어 10개의 영패를 모두 쏟아부은 ‘옹’이 펼쳐졌다.
새하얀 우윳빛의 반투명한 성벽이 호선을 그리며 팔비상의 앞을 막아섰다.
콰앙-!
성벽은 팔비상을 감싸듯 반원을 그리는 형태였다.
항아리라는 뜻의 옹(甕)으로, 흔히 철옹성이라고 말할 때의 그 ‘옹’이었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내 앞을 막아서느냐?
팔비상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꺄아아악!”
“살려 줘!”
“엄마-!”
도로 건너의 아파트에서는 아직까지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의 아비규환이 그려졌다.
경찰이 출동했는지 사람들을 인솔하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정리가 되려면 시간이 걸릴 듯 보였다.
-버텨! 내가 해 볼 테니!
-알았어!
리쉬옌은 이를 악문 채 팔비상을 노려보았다.
그 덩치가 커다란 건물만 한 탓에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고개를 격하게 꺾어야 할 정도였다.
팔비상의 거대한 발이 땅을 뒤흔들며 엄청나게 큰 몸뚱이가 다시 한 번 돌진했다.
꽈아앙-!
굉음이 울려 퍼지며 터져 나온 충격파에 가로수가 휘청였다.
뿌우우우-!
팔비상의 얼굴에 돋은 8개의 코가 일제히 나팔 소리 같은 소음을 뿜어냈다.
그와 동시에 방사형으로 펼쳐진 코끝에서 거대한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화르르르!
무시무시한 열기가 리쉬옌을 향해 뻗쳐 왔다. 하지만 리쉬옌이 펼친 ‘옹’은 팔비상의 화마에 무너지지 않고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린디웨가 도착했다.
“폭류(暴流)!”
20여 개의 술석이 팔비상의 머리 위에서 번쩍 푸른빛을 토했다.
그와 동시에 새파란 스파크가 하나의 물길이 되어 팔비상의 거대한 몸뚱이를 휘감았다.
“젠장! 배면계라는 곳에는 저따위 괴물들이 득시글하다는 말이잖아!”
유민섭이 치를 떨며 외쳤다.
저 멀리 걸어가는 거대한 사슴 괴물의 뒷모습을 보며 한 말이었다.
사슴 괴물은 잠실 종합 운동장 옆을 흐르는 탄천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머리 높이만 무려 50미터에 달하는 괴물이었는데, 걸을 때마다 발자국에서 거센 물줄기가 뿜어져 올라왔다.
유민섭의 말을 받은 사람은 장민호였다.
“헤헤! 우리 형님은 언제나 대단하시죠!”
‘언제부터 네 형님이었다고! 나이도 네가 더 많잖아!’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처음 김준혁을 만났을 당시에 벌벌 떨던 모습을 생각하면 기도 안 찼다.
그런데 거기에 한 사람 더 끼어들었다.
“흑태자 님의 위대함을 오늘 직접 생 라이브로 보내 줄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습니다!”
강이찬이었다.
많은 사람이 망각하고, 가끔은 본인조차 잊어버리는 사실이지만 그는 A급 각성자였다.
당연히 사면오공의 정신 공격에 당하지 않았고, 지금은 신이 나서 액션 캠을 든 채 뛰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의 채팅방은 지금 난리가 나고 있을 터였다.
최유나는 언제나 그랬듯 입을 꾹 다문 채 달렸다.
그 외에도 함께 달리는 팀원들의 면면이 화려했다.
무훈 길드장 강태웅, 중국의 천룡방주 쓰자오밍, 일본 정검회장 하시모토 타츠야(橋本竜也) 등 S급 헌터들을 필두로 S급과 A급 30여 명으로 이루어진 팀이었다.
그들 모두 아시아 국가 소속이었는데, 인구가 많은 만큼 중국의 헌터들이 가장 많았다.
다른 2개의 팀도 각각 북미와 남미 국가가 한 팀, 유럽과 아프리카 국가 출신 헌터들이 한 팀을 이루고 있었다.
급박한 상황에서 팀을 짜다 보니 아무래도 지리적으로 교류가 많은, 같은 대륙의 헌터들끼리 팀을 짜게 된 것이었다.
-그놈 이름은 ‘괴사불상(怪四不像)’입니다. 물을 잘 쓰는 놈이고, 약점은 뿔입니다. 뿔만 부러트리면 나머지는 쉬워요!
유민섭의 머릿속으로 리쉬옌의 생각이 전해져 왔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룡방주 쓰자오밍이 흠칫한 표정으로 외쳤다.
“스부샹(四不像)?”
유민섭이 급히 영어로 물었다.
“저놈에 대해 뭔가 알고 있습니까?”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부샹이라는 동물과 매우 닮았습니다. 사슴, 소, 당나귀, 말과 각각 닮은 것 같으면서 안 닮아서 스부샹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발음을 들어 보니 리쉬옌이 말한 괴사불상의 사불상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물을 잘 쓰는 놈이라고 합니다. 약점은 머리의 뿔! 모두들 염두에 두고 계십시오!”
그렇게 유민섭을 필두로 한 아시아팀이 마침내 괴사불상의 꽁무니를 잡았다.
“원딜들 퍼부어요!”
‘더 커맨더’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유민섭이었다. 그런 유민섭의 명령이라 그런지 아시아팀은 군말 없이 움직였다.
슈아아아-!
콰아앙!
날카로운 화살과 마법이 휘몰아치며 괴사불상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탱커 앞으로!”
유민섭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괴사불상이 멈칫하며 뒤로 돌았다.
쓰자오밍이 말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말의 얼굴에 사슴의 뿔, 몸뚱이는 당나귀와 비슷했고, 발굽이 소의 굽이었다.
탱커들이 앞으로 나서는 사이, 유민섭이 양손을 뻗으며 외쳤다.
“그래비티 컨트롤! 널 사이트! 블리딩 아이비! 뱀피릭 리커버리!”
가지고 있는 보조 스킬을 모조리 쏟아 부었다. 그에 따라 다른 서포터 포지션의 마법사들 역시 갖고 있는 마법을 몽땅 들이부었다.
유민섭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앞을 막은 탱커들에게 일일이 손을 뻗었다.
“프로텍션 돔, 프로텍션 돔, 프로텍션 돔, 프로텍션…….”
탱커들의 온몸을 감싸는 반투명한 돔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서 하얀 빛무리가 떨어져 내렸다.
사제인 장민호의 축복이었다.
만반의 준비가 끝난 순간, 괴사불상이 움직였다.
-하찮은 인간들의 잡기가 이상하게 변했구나.
괴사불상의 입장에서는 던전 시스템 각성자들의 스킬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나온 반응이었다.
-죽어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으로 회색의 영력이 퍼져 나갔다.
콰아아아-!
거센 물소리가 들리는가 싶은 순간, 무시무시한 압력이 아시아팀을 덮쳤다.
쾅, 콰앙-!
“끄으윽!”
탱커들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결과가 나쁘지는 않았다.
모두들 한두 걸음 물러서기는 했지만, 괴사불상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모두들 S급인 데다 온갖 버프로 도배를 한 덕분이었다.
“쓰자오밍!”
“근딜들, 따라와!”
유민섭의 외침에 쓰자오밍이 반응하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바람처럼 몸을 날린 쓰자오밍이 순식간에 괴사불상의 배 아래에 도착했다.
“크아앗!”
뒤따라 나선 딜러들의 날붙이가 빛을 번쩍이며 괴사불상의 다리를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쓰자오밍은 땅을 박차고 수직으로 솟아올랐다.
꽈아앙-!
빛으로 물든 주먹으로 괴사불상의 배를 쳐올린 쓰자오밍이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날렵하게 몇 번 튀어 오른 쓰자오밍은 어느새 괴사불상의 등판에 올라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괴사불상의 등판에 올라선 이는 다름 아닌 최유나였다.
괴사불상의 등판 위를 내달린 최유나의 롱 소드가 날카로운 횡의 궤적을 그려 냈다.
스거걱!
‘된다!’
최유나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는 이 상황에서도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기본 검술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준혁의 지시를 철저하게 이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온힘을 다해 지른 검격이 괴사불상의 가죽을 베어 냈다.
뭉클 피어오르는 영력을 보며 최유나가 움찔 몸을 떠는 순간, 쓰자오밍이 그 옆을 스치며 말했다.
“훌륭한 검!”
그렇게 외치는 쓰자오밍의 두 눈에는 희망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인간을 초월한 듯한 김준혁이 아닌, 자신들도 이런 괴물을 상대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괜찮은데?’
준혁은 저 멀리 헌터들이 영수를 상대하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면계 영수의 힘은, 준혁이 만난 카이르무스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헌터들에게는 벅찰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S급을 위주로 한 30여 명이 한 팀으로 움직이니 그런 놈들도 상대할 수가 있었다.
‘문제는 신수 놈들인데…….’
그게 걱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 자리에 신수급이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하나씩 준비하는 수밖에.’
몸을 일으킨 준혁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 먹었지?”
커엉-!
크하앙!
삐익-!
청랑, 흑호, 백효가 큰 소리로 울어 댔다.
세 환수가 방금 전 하던 것은 다름 아닌 강식이었다. 준혁이 때려잡은 머리 5개의 거대한 뱀의 몸뚱이를 통해 성장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었다.
시체를 모두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강함을 섭취하기 위해 한 점씩만 삼키면 되기 때문이었다.
-네 이놈!
-저놈부터 잡아라!
준혁을 향해 4마리의 영수가 한꺼번에 달려오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고 협공을 하러 오는 듯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준혁이 백효의 시야 공유를 통해 주변을 살폈다.
당장 민가에 피해를 줄 수 있는 놈은 보이지 않았다.
리쉬옌과 린디웨는 뛰어난 콤비 플레이로 팔비상을 두드려 패고 있었고, 3개의 헌터팀은 각각 1마리씩 영수를 맡아 잘 싸우고 있었다.
이제 이쪽으로 달려오는 영수 4마리만 처치하면 일단 안전은 확보된다고 볼 수 있었다.
‘4마리면 좀 귀찮을 거 같으니… 빠르게 끝내 볼까?’
그렇게 생각한 준혁이 무상곤을 들고 외쳤다.
“물아일체.”
준혁의 손에 들린 무상곤이 검은 연기로 변해 준혁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
“헉, 헉헉!”
유민섭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땅바닥에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유민섭만이 아니었다. 괴사불상을 상대한 아시아팀 헌터 모두가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드러누워 있었다.
그만큼 싸움은 격렬하고 위험했다.
헌터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는 네 사람은 모두 사제들로, 헌터들의 부상을 치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아직 텐션이 떨어지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다.
“보셨습니까? 배면계의 괴물들도 우리 헌터들이 잡을 수 있습니다. 물론 흑태자 님이 최고죠. 혼자서 6마리나 쓰러트렸으니까요. 하지만 헌터들도 힘을 모으면 배면계 괴물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
강이찬의 방송은 현재 시청자 수가 터져 나가기 직전이었다.
전투 현장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방송은 강이찬의 개인 방송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국적을 불문한 전 세계의 시청자가 강이찬이 보내는 전투 장면을 보고 환호를 터트렸다.
그리고 그 많은 시청자 수에 강이찬은 지친 기색조차 보이지 않으며 떠들고 있었다.
“너무 위험해서 가까이 가지는 못했습니다만, 중간에 흑태자 님이 괴물을 4마리나 상대하는 것도 보셨죠? 크아! 역시 흑태자 님이 최곱니다. 어? 그런데 저 사람들은?”
강이찬이 멘트를 하다 말고 멈칫하며 어디론가 시선을 돌렸다.
손에 들린 액션 캠의 앵글도 자연스레 강이찬의 시선을 좇았다.
그곳에선 20여 명의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던전 관리청 긴급 대책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