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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장. 세계 헌터 포럼#3-
“이건 뭐야?”
유민섭이 기겁한 얼굴로 창밖으로 바라보았다.
조금 전 괴물의 괴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창밖이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뭔가가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
조금 전, 준혁이 리쉬옌과 린디웨에게 피하라는 말도 했었다.
상황의 판단은 빨랐고, 행동은 더욱 빨랐다.
“모두 숙여요!”
한국말이었다. 하지만 벽에 붙어 온몸을 잔뜩 웅크리며 터트리는 외침을 못 알아들을 사람은 없었다.
멀쩡하게 서 있는 이들은 모두 S급과 A급 헌터.
일사불란하게 몸을 날린 헌터들이 벽에 붙어 몸을 웅크렸다.
콰아앙-!
그리고 폭음이 터져 나왔다.
실내 체육관이 통째로 뒤흔들렸고, 건물의 철골이 쉴 새 없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토했다.
쌓여 있던 먼지와 터져 나간 벽의 파편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건물이 격렬하게 흔들리기는 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어느새 창밖을 메우고 있던 붉은빛은 사라진 후였다.
붉은빛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짙은 먼지였다.
“크, 이게 무슨 일…….”
그때였다.
-크하하하하!
-그워어어어!
-흑, 흐으으윽!
-깔깔깔깔!
괴물의 괴성이 또 한 번 실내 체육관을 흔들었다.
“끄아아악!”
비명을 터트리며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이들은 아직 기절하지 않은 B급 헌터들.
그들의 얼굴이 괴악하게 변했다.
부릅뜬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피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으으으.”
턱이 빠질 듯이 쩍 벌린 입에서는 괴성이 새어 나왔다.
뻣뻣하게 변한 팔다리를 앞으로 뻗으며 마구 휘저어 대는 모습이, 마치 죽은 시체가 일어나 발광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새로운 변화를 보였다.
“크아아악!”
괴상한 고함을 토하더니, 바로 옆에 있는 A급 헌터를 향해 몸을 날렸다.
“흡!”
A급 헌터가 슬쩍 몸을 비틀어 피하는 그 순간, 다른 이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손발을 마구 내뻗으며 거친 공격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난리는 한 곳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기절하지 않은 헌터들이 주변의 멀쩡한 헌터들을 향해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인벤토리의 무기도 꺼내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손발을 휘두르는 모습이, 완벽하게 이성이 날아간 듯 보였다.
-준혁 씨, 이거 뭡니까?
대답은 곧장 돌아왔다.
-조금만 버텨요! 이 지네 새끼 죽이면 괜찮아집니다!
-서둘러요!
유민섭은 준혁에게 당부하는 동시에 헌터들을 향해 말했다.
“가급적 피하면서 버티세요! 조금만 기다리면 괜찮아질 겁니다. 가능하면 사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노력하세요!”
이번에는 한국어로 한 번, 영어로 한 번 말했다.
통신기는 기능을 잃었지만, 다들 그 뉘앙스를 알아듣고 신중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쩌어어엉-!
날카롭게 떨어진 대도가 4개의 얼굴을 한꺼번에 세로로 쪼갰다.
-끄아아아악!
사면오공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일단 저 대가리들은 처리했지만…….’
사면오공이 뿜어내는 소리는 인간의 정신을 좀먹는 공격이었다. 그 얼굴들을 모두 쪼갰으니 더는 그런 소리를 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끝나지는 않았다.
이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사면오공이 죽기 전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준혁 씨, 이거 뭡니까?
유민섭의 다급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조금만 버텨요! 이 지네 새끼 죽이면 괜찮아집니다!
-서둘러요!
그나마도 린디웨의 ‘거궤’가 한 차례 막았기에 이렇게 유민섭이 준혁에게 말이라도 걸 여유가 있는 것이다.
그조차 없었다면 정신 공격을 받은 사람들은 제 몸뚱이를 쪼개면서까지 발광을 했을 것이다.
“청랑!”
준혁의 외침에, 준비하고 있던 청랑이 초토화된 바닥을 내달렸다.
아우우우-!
우렁찬 하울링과 함께 청랑이 온몸에서 영력을 뿜어내며 사방에 얽혀 있는 지네 다리를 공격했다.
그리고 준혁은 사면오공의 등판 위로 올라섰다.
꼬리 쪽에서 시작된 질주는 이내 ‘전뢰보’로 변했고, 순식간에 사면오공의 머리 위에 도착했다.
‘무극!’
준혁이 ‘무극’을 펼친 상대는 한쪽 구석에 은신한 채 웅크리고 있는 흑호였다.
준혁 바로 뒤로 끌려온 흑호가 몸체의 투명화를 유지한 채 앞발을 들어 올렸다.
칼날처럼 길게 뻗어 나온 발톱에 영력이 엉기기 시작했다.
스아아악!
암살자 타입의 흑호는 한 번의 공격에 필살의 힘을 담는다.
머리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흑호의 발톱이 노리는 것은 사면오공이 가진 100쌍의 다리.
청랑은 아래쪽에서 물어뜯었고, 흑호는 위쪽에서 끊어 냈다.
하나둘 지네 다리가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잘려 나간 부위에서는 마치 출혈이라도 일어난 듯 영력이 뭉클 새어나왔다.
심각한 타격을 주지는 못해도 사면오공의 정신을 분산시키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광풍에 나부끼는 갈대처럼 사면오공의 100미터 길이의 몸뚱이가 쉴 새 없이 요동쳤다.
그 사면오공의 머리 위에 준혁이 두 발을 단단하게 붙인 채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는 온 정신을 집중하며 한 가지 스킬을 준비했다.
-죽어라, 저열한 짐승 놈들!
사면오공의 몸마디 사이 틈이 갑자기 쩍 벌어지더니, 그곳에서 수없이 많은 촉수가 뻗어 나왔다.
준혁이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영박!’
대상의 그림자로 대상을 묶어 버리는 스킬인 ‘영박’은 그림자의 면적이 넓을수록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저렇게 수천 개의 촉수를 뻗으면, 그 숫자만큼 그림자의 면적이 넓어질 수밖에 없다.
늘어진 사면오공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올라와 그 몸뚱이를 친친 휘감았다.
-그워어어어!
사면오공이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거대한 몸뚱이를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았다.
가볍게 땅으로 착지한 준혁이 양손을 앞으로 뻗으며 외쳤다.
“금륜천전!”
술식진을 통과해 튀어나온 것은 황금의 수레바퀴.
꽝!
사면오공의 대가리를 그대로 찍어 누른 금륜이 격렬한 회전을 시작했다.
콰콰콰콰!
금륜이 사면오공의 기다란 몸뚱이 위를 굴렀다. 등판이 터져 나가며 짙은 영력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크악, 크아아악!
사면오공의 입에서 쉴 새 없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준혁은 또 한 번 훌쩍 튀어 오르면 절반쯤 터져 나간 사면오공의 머리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태산인’으로 펼친 칼질이었다.
쩌엉-!
그렇게 사면오공이 완전한 죽음을 맞이했다.
신수급으로 강하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그 본질은 영수였다. 신수와도 격렬하게 싸웠던 준혁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준혁이 무상곤을 갈무리하는 순간, 거리를 벌렸던 청랑과 흑호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사면오공의 몸뚱이를 뜯어먹었다.
멀리 하늘에 떠 있던 백효 역시 사면오공의 대가리에 부리를 처박았다.
“헉, 헉헉!”
유민섭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실내 체육관에 있는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힘겨운 얼굴로 서 있는 사람들과 기절해 쓰러진 사람들.
쓰러진 이들은 사면오공의 정신계 공격에 당했던 이들이고, 서 있는 이들은 A급과 S급 헌터들이었다.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짙은 피로가 매달려 있었다.
단순히 싸우는 거라면 이렇게 힘들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죽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밀어내기만 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겨운 일이었다.
-이제 괜찮아졌죠?
머릿속으로 전해져 온 것은 준혁의 목소리였다.
-예. 이제 괜찮습니다.
-이제 팀 짜서 밖으로 나가요. 아직 영수들이 남아 있습니다. 상대할 수는 있지만, 숫자가 많아서 민간의 피해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젠장! 알겠습니다. 드래곤급이라고 말했었죠?
-예.
-알겠습니다!
유민섭은 호흡을 고르며 서 있는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드래곤급이라…….’
유민섭은 이미 골드 드래곤 카이르무스를 상대해 본 경험이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가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 당시에 카이르무스의 사냥을 성공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의 팀보다 훨씬 더 강한 전력을 짤 수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유민섭이 큰 소리로 박수를 한 번 치며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이제 밖으로 나가서 괴물을 잡아야 합니다. 놈들이 주택가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S급과 A급 헌터들이 유민섭 앞으로 모여들었다.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남은 괴물은 9마리. 하나하나가 드래곤급이라고 합니다. 해서 3개의 팀으로 구성할까 합니다.”
좀 더 빡빡하게 나눈다면 네 팀까지 나올 것 같지만, 안전을 기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불만은 없었다. 다들 경험이 많은 만큼 지금은 최대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유민섭의 지시에 의해 빠르게 팀이 구성되었고, 그들은 조금도 지체 없이 실내 체육관을 나섰다.
***
“이게 뭐야?”
던전 관리청 긴급 대책반 반장 황도형은 입을 쩍 벌린 채 불신 가득한 눈으로 전방을 살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잠실 종합 운동장이 초토화되었다.
운동장이 있던 블록은 온통 재로 뒤덮였고, 완전히 평평한 들판으로 변해 있었다.
남아 있는 건물이라고는 실내 체육관 하나밖에 없었다.
올림픽 주경기장을 비롯해 수영장, 잠실 야구장, 주차장, 보조 경기장 등등 모든 건물이 있던 자리가 평지로 변해 있었다.
간간이 부는 바람에 재만 휑하니 날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들판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대한 괴물들이었다.
하나같이 덩치들이 드래곤만큼이나 거대했다.
코끼리를 닮은 괴물, 호랑이를 닮은 괴물 등등 생김새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괴상한 형태로 변형된 모습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대책반원 하나가 급히 물었다.
“자, 잠깐만.”
황도형이 손을 들어 부하의 말을 막고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후우~”
길게 담배 연기를 뿜으며 최대한 냉정하게 현재의 상황을 가늠해 보았다.
‘실내 체육관에는 S급 헌터들도 많이 있었고, 그 건물이 멀쩡하면 안에 있던 헌터들도 멀쩡하다는 뜻.’
다시 한 번 괴물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20명으로 이루어진 대책반은 모두 A급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헌터들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S급 중에서도 SS급이라고 불리는 실력자.
목숨 걸고 상대한다면 1마리 정도는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마침 실내 체육관 옆 도로 너머로 거대한 코끼리가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그 너머는 학교와 아파트 단지가 잔뜩 들어서 있는 곳이었다.
‘막아야 하나?’
생각을 떠올리는 즉시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다. 실내 체육관의 헌터들이 나올 터. 우리는 일단 기다리는 게 낫다.’
그렇게 결정한 황도형이 부하들을 향해 은밀하게 말했다.
“보이지 않게 몸을 숨기고 상황을 살펴.”
그 말에 부하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신속하게 몸을 움직였다.
사람을 구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 따위는 없었다.
그들은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다.
던전 관리청의 긴급 대책반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들이 아닌 자신들의 안위였다.
때마침 실내 체육관에서 헌터들이 우르르 달려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3개의 무리로 나눠 괴물들을 향해 달려갔다.
저 멀리 김준혁이라는 재수 없는 놈이 잠실 야구장 옆 도로 너머의 학교 방향으로 달려가는 모습도 보였다.
황도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중요한 일은 저놈들한테 맡겨. 영웅이 될 기회를 주는 거지.”
“크흐흐!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절차’대로 일 처리만 하면 되는 거죠.”
대책반원 모두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