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받고 각성 더!-54화 (54/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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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준비#2-

유민섭은 점심시간에 길드에 모습을 드러냈다.

준혁과 유민섭은 구내식당에서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던전 관리청에서는 뭐래요?”

“3분의 1.”

“음?”

“우리 권리는 그 정도까지만 인정하겠답니다.”

그 말에 밥을 입에 떠 넣으려던 준혁이 저도 모르게 숟가락을 멈췄다.

“칼만 안 들었지, 강도네.”

“무허가 공략을 눈감아 주는 대신이라더군요.”

“그럼 다음에 기회가 있겠네요.”

유민섭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기회?”

“이런 일이 또 생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잖습니까? 그때 우리는 민간인 대피에 집중하도록 합시다. 터진 게이트는 저들이 알아서 하겠죠, 뭐.”

“그게 낫겠네요. 똥줄이 타 봐야 고마운 걸 알지.”

“거 밥 먹는데 똥 얘기는 하지 마시고.”

툭 던지는 시답잖은 농담에 유민섭도 피식 웃어 보였다.

준혁이 화제를 돌렸다.

“포럼은 어떻게 진행할 겁니까?”

“그 전에 준… 아니, 김지후 헌터가 해야 할 게 있습니다.”

“뭔데요?”

되묻는 준혁의 말에 유민섭이 양쪽 입꼬리를 한껏 말아 올렸다.

그리고 준혁은 또 한 번 저도 모르게 숟가락을 멈췄다.

이거 뭔가 위험한 느낌이었다.

***

유민섭의 작업은 언론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돌발적인 게이트 다운 현상, 사상자 0. 김지후 헌터의 업적.>

<위기 상황에서 더욱 빛난 김지후 헌터의 위업.>

<흑태자 김지후, 진정한 영웅상을 그리다.>

그 기사 속에 던전 관리청에 대한 비판도 양념처럼 집어넣었다.

<불법적인 던전 공략? 그렇다면 혼원 길드는 무엇을 해야 했는가?>

<모든 몬스터를 제압했는데 지분은 3분의 1? 어떤 계산법인가?>

준혁의 가명인 ‘김지후’는 이미 게이트 돔 진압으로 하나의 브랜드가 된 지 오래였다.

유민섭이 한 일은 거기에 좀 더 금칠을 하는 것이었고, 이는 원래 갖고 있던 좋은 이미지와 시너지를 일으켜 여론의 지지를 수직 상승시켰다.

『안녕하세요. 금주의 이슈 진행자 정유미입니다. 오늘은요, 흑태자 스페셜이라는 제목으로 1시간을 가득 채울 예정입니다.』

TV 프로그램이 제작되었다.

『형님, 누님들! 제가 그동안 안 풀고 있던 흑태자 님 사진을 좀 풀려고 합니다. 뭐라고요? 묻어 가냐고요? 당연하죠.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겁니다. 그럼 사진과 함께 오늘의 썰을 좀 풀어 보겠습니다.』

강이찬을 이용해 흑태자를 성층권까지 띄웠다.

“하아! 적당히 좀 하시죠?”

그리고 준혁은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유민섭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부족합니다.”

“부족?”

“저하고 TV 출연 한번 하시죠?”

“네? 왜요?”

“포럼 준비에 필요합니다.”

“그럼 혼자 나가면 되지.”

“이슈의 중심이 우리 흑태자 님인데, 나 혼자 나가면 안 되죠.”

“아오, 그 ‘흑태자’ 소리 좀 안 하면 안 됩니까?”

“왜요? 좋기만 한데. 멋지잖아요.”

“멋은 개뿔……. 내가 요즘 정체성에 혼란까지 느낀다니까요?”

“정체성?”

되묻는 유민섭의 말에 준혁이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뭐, 그냥 농담.”

하지만 아닌 게 아닌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하도 많이 보다 보니 정신이 멍해질 때가 있었다.

‘흑태자 김지후’라는 글과 말을 하도 자주 접한 탓이었다.

흑태자 김지후, 흑태자는 김준혁인데? 아니, 그러면 나 스스로 흑태자라고 말하는 건데? 아니, 나는 흑태자도 아니고 김지후도 아니고…….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까지는 아니어도 가끔 혼자만의 생각에 빠질 때가 있었다.

사실 불리는 이름이라는 건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이름은 한 인간을 ‘규정’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다.

그리고 그 이름이라는 것은 타인이 자신을 불러 줌으로써 성립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진짜 이름을 두고 항상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면?

별것 아닌 거 같지만,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차근차근 스트레스가 쌓인다.

항상 가명을 사용하는 이들 중에는 정체성 혼란으로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는 이도 가끔 나올 정도였다.

배면계에서 10년의 세월을 버틴 준혁은 그 정도로 멘탈이 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은근히 쌓이는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유민섭이 상념에 잠긴 준혁을 일깨웠다.

“아무튼 TV는 같이 한번 나가요. 헌터 전문 채널인데, 이번 게이트 이상 현상 이야기도 하고, 포럼에 대한 밑밥도 깔 생각입니다.”

“하아, 알았습니다.”

***

준혁이 출연한 TV 프로그램은 시청률 대박을 터트렸다.

준혁, 아니 김지후 헌터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지표였다.

방송은 나쁘지 않았다.

예능과 전문 지식을 반씩 섞어서 진행하는 형식이라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마냥 즐기기만 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다만, 도우미라며 함께 출연한 강이찬이 주접을 떤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방송을 이용해 세상의 시선을 완전히 빨아들인 유민섭은 마침내 정식으로 포럼 개최를 발표했다.

희망하는 길드는 규모와 상관없이 길드장은 무조건 참석이 가능한, 거대 규모의 포럼이었다.

그 덕분에 유민섭은 잠도 거의 못 잔 채 포럼 준비에 매달렸다.

“괜찮겠어요?”

유민섭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리고 준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괜찮을 이유가 있습니까?”

두 사람은 지금 강릉 게이트 돔 앞에 서 있었다.

유민섭이 포럼 준비를 하는 동안 게이트 돔을 하나 더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평소와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준혁과 유민섭, 최유나, 그리고 준혁의 소환수 3마리만 현장에 모여 있었다.

장민호와 리쉬옌, 린디웨는 자리에 없었다.

유민섭이 괜찮겠냐고 물은 이유이기도 했다.

오늘 준혁은 소환수 3마리만 데리고 단신으로 게이트 돔을 공략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함께 온 최유나는 성장을 위한 견학 목적으로 온 것이었다.

준혁이 단신으로 게이트 돔을 공략하는 데는 2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청랑과 흑호, 백효의 성장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활개 치며 강식을 통해 성장시키려는 목적이었다.

다른 하나는 포럼과 관계가 있었다. 좀 더 이슈를 모아서 포럼에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이번 포럼은 중요했다.

게이트, 던전이 변화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어떤 음모를 꾸미는 집단이 끼어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기 때문이었다.

“안 괜찮을 이유가 없다고요?”

유민섭의 반문에 준혁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사실 지금까지 게이트 돔 진압도 내 지분이 95퍼센트는 될 거 같은데?”

“우와! 사람이 이렇게 사람을 무시할 수가 있나? 그래도 내가 길드도 만들고…….”

유민섭이 뭐라 항변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저 멀리서 요란한 목소리가 들여왔다.

“으하하하! 당연하죠. 제가 안 오면 누가 옵니까? 전에도 말씀드렸죠? ‘강이찬’ 하면 흑태자. 저만큼 흑태자 님을 잘 아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친하냐고요? 당연히 친합니다.”

오늘도 사진 촬영과 방송을 위해 찾아온 강이찬이었다.

“가서 인사해 보라고요? 제가 못할 것 같습니까?”

강이찬이 너스레를 떨며 이쪽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왔다.

“흑태자 님, 흑태자 님~”

호들갑을 떨며 달려오는 강이찬의 모습에, 준혁은 저도 모르게 발끈하는 표정을 지었다.

준혁이 느끼는 쪽팔림의 가장 큰 지분 소유자니 당연했다.

“하하! 제가 왔습니다! 이차니가 왔어요!”

오늘도 하이텐션의 강이찬이 깡충거리며 준혁 앞으로 달려왔다.

그 모습에 갑자기 그동안의 원한이 새록새록 피어오른 준혁이 강이찬을 향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내가 오늘 풍선 대박 좀 터트리게 해 줄까?”

“엇! 진짭니까? 어떻게요?”

“심어.”

“에?”

준혁이 제 머리를 툭툭 치며 다시 말했다.

“심어.”

“머리를…….”

“안 어울리게 눈치 없는 척하네?”

“아니, 그게 아니라…….”

결국 준혁이 명확하게 말해 주었다.

“대가리 박아.”

“네?”

여전히 상황을 이해 못한 강이찬이 되묻자 준혁이 손가락을 들었다. 그러고는 강이찬의 머리를 가리킨 후 쭈욱 아래로 내려 바닥을 가리키고는 다시 말했다.

“대가리 박아.”

“아니, 흑태자 님! 원산폭격이라뇨? 그건 정말 구시대의 잔재이며, 군대 똥군기의 악습으로…….”

“심을래, 집에 갈래?”

“심겠습니다!”

강이찬이 그대로 땅바닥에 머리를 심었다.

액션 캠의 앵글을 머리 박는 자신에게 맞추는 걸 잊지 않는 프로 정신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방송 채팅창은 늘 그랬듯 난리가 났다.

<ㅋㅋㅋ, 강이찬 대가리 잘 박네.>

<흑태자 님의 참교육.>

<블랙 나이츠 운영자의 실체.jpg>

<흑태자 님 잘생겼어.>

<‘비차니’ 님이 풍선 1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우윳빛깔 김지후.>

<차니 힘내라.>

<‘이찬바라기’ 님이 풍선 3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옆에 있는 다른 소환수도 소개시켜 주세요!>

<‘dbswlruaqkqh’ 님이 풍선 99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준혁은 풍선 대박이라고 한 자신의 말을 지켰다.

“그럼 갑니다.”

“흑태자 님, 저도 데려가야죠!”

강이찬이 황급히 뒤따랐다.

게이트 돔 공략은 의외로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준혁은 무상곤을 변형한 롱 소드만을 든 채 몬스터를 차근차근 정리해 나갔다.

오히려 대단한 활약을 보인 것은 준혁의 3마리 소환수였다.

하늘 높이 떠오른 백효는 자신의 시야를 준혁과 청랑, 흑호에게 공유해 주었다.

하지만 정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하강하며 몬스터를 휩쓸었다.

그 작은 부리에 몬스터의 몸뚱이가 꿰뚫렸고, 삐죽 튀어나온 날개가 몬스터 떼를 사정없이 쳐 날렸다.

청랑과 흑호의 전투는 극과 극이었다.

청랑은 쉴 새 없이 네 발과 주둥이를 휘두르며 화려하게 전투를 했다. 전사의 싸움법이었다. 정면으로 달려들어 손발을 주고받으며 데미지를 쌓고 결정타를 날렸다.

그에 반해 흑호의 싸움은 원샷원킬이었다.

소리도 없이 은밀하게 다가가 목을 꺾었고,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와 심장을 꿰뚫었다.

청랑이 전사라면, 흑호는 암살자라는 평가가 어울렸다.

그리고 최유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조금 거리를 벌린 채 뚫어져라 준혁만을 보았다.

‘기본기.’

준혁이 싸우는 모습을 보는 동시에 지난번의 돌발적인 게이트 다운 당시를 떠올렸다.

준혁이 게이트에서 밀려나오는 오크들을 학살하는 광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만큼 당시 준혁의 모습은 최유나에겐 충격이었다.

준혁은 오크들을 학살하면서 단 한 번도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다.

흑태자 콘셉트를 유지하기 위해 롱 소드를 들고 휘두르기만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지금 당장 다시 떠올리고 있을 정도로 최유나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간결한 동작, 그러면서도 최고의 효율로 쓸어내는 모습은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리고 지금껏 최유나의 머릿속에서 모호하게만 떠올라 있던 기본기라는 것의 이미지를 명확하게 만들어 주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저번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보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지난번에는 ‘왜 저런 식으로?’라고 생각했던 동작들이 이제는 그 이유가 눈에 보였다.

‘죽도록 훈련한다.’

그렇게 다짐하는 최유나의 머릿속에는 새삼스럽게도 처음 준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칼 쥐는 법부터 배워.’

손에 쥔 롱 소드의 감촉이 사뭇 새롭게 다가왔다.

그렇게 게이트 돔 진압이 마무리되었다.

이번에는 특별한 이상 현상이 없었다. 무난한 공략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얻은 것은 무난하지 않았다.

완전히 리미트를 해제하고 마구 날뛴 소환수 3마리의 성장이 특히 눈에 띄었다.

환계에서 불러내는 소환수의 성장 방법은 2가지였다.

하나는 상대를 죽이면서 자연스럽게 축적되는 에너지였고, 다른 하나는 강식이었다.

청랑은 그동안 유민섭을 보호하면서 싸웠기에, 싸움을 통해서는 거의 성장하지 못했었다.

게이트 돔 안의 몬스터를 대부분 준혁이 처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오히려 소환수들이 더 많은 몬스터를 잡았기에 그 결과가 달랐다.

거기에 강식까지 한 덕분에 청랑의 크기는 몸길이가 거의 2미터에 달할 정도로 커졌다.

흑호와 백효도 마찬가지였다.

흑호는 골든 레트리버 정도의 크기까지 성장했고, 백효는 까마귀 정도로 커졌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을 때, 준혁은 단신으로 게이트 돔 진압으로 또 한 번 이슈를 빨아들였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흘러 마침내 포럼 개최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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