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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준비#1-
새끼일 때 귀엽지 않은 동물은 없다.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동물은 새끼일 때 아주 귀엽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제일 예쁘다는 속담이 있지만, 실제로 고슴도치도 새끼일 때는 귀엽다.
그 범주에는 호랑이와 수리부엉이도 들어간다.
준혁이 소환한 흑호와 백효도 귀여웠다.
둘 다 앙증맞은 새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흑호는 일반적인 호랑이의 누런색 털이 있는 부분이 새까맣고, 검은색 무늬가 짙은 회색을 띠고 있었다. 거기에 짤따란 다리와 동글동글하면서 커다란 머리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백효는 아예 동그랗고 하얀 털 뭉치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둘 역시 A급 헌터의 스탯을 지니고 있었다.
“얘들은 청랑하고 어떤 게 다릅니까, 형님? 그리고 흑호는 알겠는데 백효는 무슨 뜻입니까?”
“형님?”
갑작스러운 호칭 변화에 준혁이 멈칫했다.
“사회 나오면 10년 차는 친구라는데, 형님이 안 될 건 또 뭐 있겠습니까?”
“안 되겠는데?”
“예?”
“너한테 형님이라고 불리니까 내가 늙어 보이잖아.”
“에이, 왜 이러십니까? 제가 좀 동안입니다.”
준혁이 저도 모르게 멈칫하며 장민호를 보았다.
확실히 동안은 동안이었다.
그에 반해 준혁의 원래 얼굴은 살짝 노안이기는 했다.
운동선수 경력 때문이었다. 항상 햇빛을 보고 야외에서 뛰는 것이 직업이었던 탓에 실제 나이보다 좀 더 들어 보였다.
운동선수, 특히 실외 스포츠 선수의 비애였다.
그 당시에는 영력이 없는 일반인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젠장…….”
인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래, 내가 형님이다. 흑호랑 백효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마라.”
준혁은 절대 마음 상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옙!”
그리고 장민호는 준혁 ‘형님’의 말에 토를 다는 법이 없었다.
흑호와 백효는 헌터 클래스로 치면 둘 다 패스파인더 쪽이었다.
좀 더 세분화하면, 흑호는 은신과 순간 이동 같은 기술을 가진 암살자 타입이었다.
그리고 백효는 하늘 높은 곳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곳들을 정찰하고, 준혁에게 시야를 공유해 주는 기술을 가진 정찰에 특화되어 있었다.
준혁은 이 둘을 통해 가족들, 특히 지유를 중점적으로 밀착 경호할 계획이었다.
이런 정보는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기에 말을 멈춘 것이었다.
“그런데 길드장은 왜 안 와?”
“글쎄요? 출근길에 던전 관리청장 만나고 온다던데, 이야기가 길어지는 모양입니다.”
“아, 거기 처리한다고 했었지. 린디웨랑 리쉬옌은?”
“리쉬옌은 최유나 헌터 훈련시킨다고 지하 훈련실에 내려갔고, 린디웨는 그 구슬을 좀 더 연구한다고 실험실에 틀어박혔습니다.”
“흐음…….”
준혁은 옅은 한숨과 함께 팔짱은 끼고 생각에 잠겼다.
‘린디웨…….’
그녀는 뭔가 좀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특히 준혁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술석의 복제였다.
‘엄청 어려운 거라고 들었는데?’
준혁이 아는 선에서, 천원급의 술사가 다른 술사의 술석을 복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위인 천강급, 그중에서도 상위 수준에 올라야만 술석의 복사가 가능했다.
그런데 린디웨는 그 어려운 술석의 복제를 해냈다.
‘실력을 숨기고 있나?’
잠시 그런 생각을 떠올려 봤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천강급이라 해도 혼원급인 준혁의 눈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론이 훨씬 강한 타입?’
그것도 이상했다. 배면계는 이론과 실기가 동시에 발전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항상 짐승들과 부딪쳐야 하기에, 차분히 이론을 파고들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뭘까?’
그러고 보면 신갈 JC 게이트 돔 진압 후 청랑도 린디웨를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구련환으로 묶어 놨으니 엉뚱한 짓은 안 하겠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일단은 지켜보는 수밖에.’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한 준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넌 뭐 알아서 쉬어. 난 위에 좀 올라갔다 올게.”
“옙! 다녀오십쇼!”
장민호의 인사를 받은 준혁은 흑호와 백효를 데리고 복도를 따라 걸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도착한 곳은 상층부에 있는 숙소. 김준석의 세 식구가 지내고 있는 곳이었다.
김준석이 반가운 얼굴로 준혁을 맞이했다.
“어, 왔냐? 얼른 들어와.”
“지유는?”
“아직 자고 있다. 어제 놀라기도 많이 놀랐고, 피곤했잖아.”
“청랑이는?”
“지유가 껴안고 자서 못 나와.”
준혁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흑호가 냉큼 달려와 준혁의 무릎 위에 두 팔을 얹고 그 위에 웅크리듯 엎드렸다.
하는 짓이 영락없는 고양이였다.
“이 녀석들은 새로 부른 소환수들이냐?”
“여기 호랑이가 흑호고… 이 녀석은 백효.”
백효는 준혁의 어깨 위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목을 잔뜩 웅크리는 바람에 그렇잖아도 솜뭉치 같은 모습이 완전한 구체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안방에 있던 이세연이 거실로 나오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준혁이 왔네? 자주 좀 와. 지유가 만날 삼촌 언제 오느냐고 보챈단 말이야.”
“알았어요. 일단 형수도 좀 앉아 봐요.”
“응? 왜?”
“형이랑 형수님한테 할 말 있어요.”
평소와 달리 진지한 표정을 짓는 준혁의 모습에 두 사람은 자신들도 모르게 허리를 폈다.
평소에는 안 그런데, 이상하게 저렇게 진지한 표정을 지을 때면 저도 모르게 긴장하는 두 사람이었다.
“형, 우리 이사 갈까?”
“이사?”
“방 많은 데로 가서 내 방도 넣고 그랬으면 하는데?”
김준석 가족이 혼원 길드 사옥 내의 숙소로 옮긴 가장 큰 이유는 안전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흑호와 백효를 소환하면서 그 문제를 해소할 수 있기에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준석의 반응이 조금 더디게 나왔다.
“이사? 같이 살게? 그럼 나는 좋은데…….”
김준석이 말꼬리를 흐렸다.
“왜 그래?”
“좀 기다렸다 옮기면 안 될까?”
“응?”
“지금 돈 모으고 있거든.”
김준석은 현재 중소 길드에 들어가 있었다.
혼원 길드의 숙소에 살면서 다른 길드에서 일한다는 게 일견 이상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D등급인 김준석의 수준으로는 혼원 길드에 자리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예전보다 훨씬 더 안전하면서 많이 벌고 있으니까, 좀 기다리면 번듯한 집을 장만할 수 있을 거 같다.”
D등급이라 해도 서포터 포지션이기에, 중소 길드에서는 B등급과 C등급이 섞여 있는 팀과 호흡을 맞춘다.
이는 그만큼 들어오는 수익도 크다는 이야기였다.
준혁이 대답이 없자 김준석이 바로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지금까지 네 도움 많이 받았잖냐. 이제는 형이 장만한 집에서 네가 좀 편하게 지냈으면 싶어서 그런다.”
“흐음, 그래?”
“나도 형 노릇 좀 하자.”
“흐음…….”
준혁이 즉답을 하지 않은 채 묘한 소리를 입에 물었다. 그 모습에 김준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그래?”
“이사 어디로 갈 건데?”
“평수 넓은 아파트 1채는 구할 수 있을 거 같다.”
“안 되는데?”
“응?”
준혁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고, 김준석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스카이 타워 들어갈 거야.”
“뭐?”
“스카이 타워.”
“야, 이 미친놈아!”
격렬한 반응이 되돌아왔다.
스카이 타워,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초고층 주상 복합 아파트였다.
헌터 길드가 잔뜩 모여 있는 종로에 세워진 마천루로, 높은 등급의 헌터와 연예인 등이 주로 입주한 곳이었다.
등급이 오른 김준석이 꽤 많이 번다지만, 엄두도 못 낼 곳이었다.
“내가 좀 많이 벌었거든.”
골드 드래곤의 레어를 공략하면서 번 돈은 고스란히 준혁의 통장에 들어 있었다.
두 번의 게이트 돔 진압도 큰돈이 되었다. 진압하는 것만으로도 던전 관리청을 통해 받는 돈이 있었고, 거기서 나온 마나석과 부산물을 처분해 버는 돈도 엄청났다.
특히 보스 처리의 지분이 100퍼센트 준혁에게 있었기에, 현재 그의 통장에는 어마어마한 거금이 잠자고 있었다.
“우리가 거길 어떻게 들어가냐, 인마.”
“맞아. 거긴 우리한테 너무 과해.”
두 부부가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준혁은 고개를 저었다.
“국내 최고의 보안 체계가 갖춰진 곳이야. 그 정도는 돼야 나도 마음이 편하단 말이지.”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유 길드장 집도 거기고, 나도 으리으리한 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도 있고.”
“그래도 거긴 너무 과해. 지금도 충분히 좋은 아파트 사서 들어갈 수 있는데, 그렇게까지…….”
말을 하는 김준석도, 옆에 있는 이세연도 얼굴에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지유를 생각하자고.”
“지유?”
“형, 우리 얘기했던 거 생각나?”
“무슨 얘기?”
“나중에 커서 아이를 낳으면 뭐든 최고로 해 주고, 보살펴 주자고 했던 거.”
김준석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아주 어릴 적, 친척집을 전전했던 두 형제가 나눴던 다짐이다.
우리 자식은 이렇게 크게 하지 말자. 뭐든 최고로 해 주자. 서로 여유가 있으면 조카를 돌봐주자.
이런 이야기들이었다.
“난 그 약속 지키는 거야.”
“그래도…….”
김준석이 뭐라 항변하려 했지만, 준혁이 바로 그 말을 끊었다.
“어우, 좀! 사람이 이렇게까지 말하면 못 이기는 척하고 그냥 좀 받아라. 내가 좋아서 하겠다는데.”
짐짓 화를 내는 척하며 말하는 준혁의 모습에, 김준석이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거기 가면 단지 안에 유치원부터 각종 학원, 놀이 시설도 다 있어. 보안 체계도 최고 수준에, B급 각성자 2명이 항시 대기한다더라.”
모두 유민섭에게 들은 것이었다. 준혁의 지인 중 그런 쪽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유민섭이었다.
“쯧, 알았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김준석의 얼굴에는 미안한 표정이 한가득이었다.
그때 이세연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준혁아.”
“예, 형수님.”
“일단 이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겠다.”
“어떤 거요?”
“준혁이 네 명의로 사는 거지?”
“어?”
준혁이 흠칫 놀라 눈을 홉떴다. 몰래 김준석의 이름으로 등기를 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세연이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이럴 거 같아서 물었어. 이거 하나만 확실하게 하자. 절대 준혁이 네 명의로 해. 우리는 그 정도 고급 아파트에 살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이세연이 입술을 앙다문 채 준혁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준혁은 이 문제는 절대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제야 이세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고마워. 우리 좀 더 얹혀살아도 되지?”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가족인데 같이 사는 거죠. 형수님이야말로 제가 같이 산다고 불편해하지 마세요.”
“내가 왜?”
“나 귀 엄청 밝은 거 알죠? 두 사람 금슬 좋은 건 알지만, 같은 집에서는 자제하면서 삽시다.”
하지만 이런 농담에 얼굴을 붉힐 이세연이 아니었다.
“네가 온종일 집에 있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아, 네…….”
괜히 말 꺼냈다.
그때 안쪽 방문이 열리며 지유가 나왔다.
“삼촌~”
제 엄마, 아빠보다 준혁을 먼저 부른다.
“응, 우리 지유, 삼촌 왔어.”
“안녕하세요, 삼촌! 파랑이도 빨리 삼촌한테 인사!”
지유의 말에 청랑이 고개를 푹 수그리며 인사를 했다.
왕왕!
작은 주인의 말도 주인님의 말만큼 잘 따라야 했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 순간, 청랑과 흑호의 눈이 마주쳤다.
-파랑이? 크흐흐! 강아지 놈, 아주 좋은 이름이구나. 말도 잘 듣고. 그새 개가 다 됐는데?
청랑의 두 눈이 굴욕으로 물들었다.
그때 지유가 한층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삼촌, 그거 뭐야?”
지유가 가리킨 것은 준혁의 무릎에 앉은 흑호와 어깨에 올라가 있는 백효였다.
“얘는 흑호, 그리고 얘는 백효.”
지유의 발걸음이 갑자기 전광석화처럼 변했다.
청랑은 그렇게 버림받았다.
지유가 쪼르르 달려와 흑호를 덥석 껴안았다.
“삼촌! 얘도 나 줘!”
그 소리에 흑호가 번쩍 고개를 들며 준혁을 보았다. 설마 하는 눈빛으로 준혁을 바라봤지만, 준혁은 가차 없었다.
“그래.”
커흐르으.
개, 아니 청랑이 웃었다.
“대신 파랑이처럼 가끔 삼촌이랑 어디 갔다 올 거야. 괜찮지?”
“응, 응! 쟤도! 쟤도 줘!”
이번 타깃은 백효였다.
“그래!”
뺙!
백효가 자지러지게 울음을 뱉었지만, 준혁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의 백효를 내려서 지유의 품에 안겨 주기까지 했다.
“부드러워! 뽀송해! 근데 이름이 흑코, 배쿄야?”
이미 한 번 경험이 있던 준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 지유 좋은 이름 붙여 줘.”
“그래도 돼?”
“그럼~”
“움~ 그러면…….”
지유는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흑호와 백효는 불안한 눈으로 그런 지유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이 났다.
“얘는 뽀송이. 털이 뽀송뽀송해서 기분 좋아!”
뺙, 삐익!
백효가 비명을 질러 댔으나, 그 모습이 지유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뽀송이도 그 이름 좋대!”
커흐르르, 커흘, 컹!
청랑이 다시 한 번 웃어 댔고, 흑호의 눈은 한층 더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얘는 야옹이!”
-크하하하하! 작은 주인이 확인해 주셨다! 너는 고양이였다!
컹, 커허어, 컹, 커흐르!
청랑은 아예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웃어 댔다. 하지만 뭔가 묘하게 허전한 느낌이 드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안녕. 난 지유야, 김지유. 야옹이랑 뽀송아, 잘 부탁해~”
지유는 청랑 쪽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흑호와 백효에게 집중했다.
그렇게 흑호와 백효는 강제 개명의 굴욕을 당했다.
그리고 지유가 1시간 넘게 흑호와 백효만을 보는 바람에 청랑은 묘한 소외감을 느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