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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흑태자#1-
현장에 도착한 준혁은 청랑이 갑주를 차려 입은 오크의 목을 끊어내는 걸 볼 수 있었다.
보아하니 오크는 아무래도 중간 보스쯤 되는 놈인 듯했다.
‘무리 소환까지 한 건가?’
‘무리 소환’은 많은 영력을 소모하는 탓에 청랑의 성장 상태의 퇴화가 일어난다.
실제로 청랑의 덩치는 지난번에 성장한 상태보다 작아져 있었다.
알래스칸 말라뮤트 정도의 크기였는데, 지금은 진돗개 덩치 정도였다.
사람으로 치자면 생명력, 혹은 수명을 대가로 바친 셈이었다. 다만, 청랑은 소환수였기에 생명력이 아닌 성장치를 대가로 내놓은 것뿐이었다.
나중에 다시 회복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청랑으로서는 꽤 손해를 본 셈이었다.
‘어쩔 수 없지.’
게이트 다운이 일어나면 그 내부의 몬스터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온다.
헌터들은 이를 웨이브라 불렀는데, 그 웨이브를 단신으로 막기는 무리가 있으리라.
“잘했어. 무리 소환까지 하는 바람에 힘들었겠구나, 청랑… 아니, 파랑이.”
끼이잉.
순간 청랑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준혁은 그것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일단 지유한테 가 있어.”
왕!
청랑이 대답과 동시에 소형화하며, 소환했던 무리를 환계로 되돌려 보냈다.
그리고 준혁은 곧장 게이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묵룡갑은 이미 풀 플레이트 아머 형태로 바뀌어 있었고, 무상곤도 검정색 롱 소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차차창!
금문묵룡비가 떠오르며 30자루의 비수로 나뉘고, 그것이 자유로운 죽음의 비행을 시작했다.
그때 청랑에게 죽은 오크와 똑같은 얼굴과 복장을 한 오크가 4마리 더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공략이 한 번도 안 된 상태에서 게이트 다운이 일어나는 바람에 많은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모양이었다.
물론 준혁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30자루의 금문묵룡비가 일반 몬스터들의 몸뚱이를 꿰뚫으며 마구 피를 뿌리는 사이, 준혁은 4마리의 중간 보스들과 거리를 좁혔다.
슈아아악!
꿰에엑!
스킬도 필요 없었다.
간결하게 휘두르는 검정색 궤적에 4마리의 중간 보스가 그대로 썰려 나갔다.
오크가 테마인 던전이기는 해도, 처음 진압했던 ‘영웅의 성지’ 게이트 돔보다는 등급이 현저히 낮은 것 같았다.
게이트를 중심으로 쉴 새 없이 몬스터의 시체가 쌓였다.
몇 사람이 준혁을 향해 다가왔다.
“프론티어 길드입니다. 합류하겠습니다.”
“팀 세이버입니다. 돕겠습니다!”
게이트 다운 소식을 듣고 다른 길드들이 합류한 모양이었다.
준혁이 몇 걸음 물러서며 손짓으로 직접 금문묵룡비를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지금 도착한 헌터들을 향해 말했다.
“일단 게이트는 제가 맡겠습니다. 반경 50미터 정도로 포위망 구축하고, 내가 놓치는 놈들 위주로 처리해 주세요. 나중에 도착하는 길드들은 주민 대피에 합류시키십시오!”
“알겠습니다!”
“오케이. 부탁드립니다!”
준혁에게 다가온 이들은 인근에 있던 길드의 길드장들이었는데, 모두 5명이었다.
그중 3명은 대답과 동시에 제 길드원들을 이끌고 흩어졌지만, 2명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뭐 합니까? 안 움직여요?”
준혁의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그리 고운 내용이 아니었다.
“거 너무하시네. 이런 상황에 몬스터 독식하려고?”
“사람들이 흑태자네 뭐네 하면서 띄워 주니까 세상이 만만해 보이나 보지? 혼원 길드, 그렇게 날뛰다가 당하는 수가 있어요.”
오는 말이 곱지 않은데 가는 말이 고울 수가 없다.
“뭐야, 이 병신들은?”
“뭐?”
“지금 무슨!”
이상 게이트였다. 등장과 동시에 게이트 다운 현상이 일어나는 건 세계 최초의 현상이었다.
그 덕에 아직 게이트 돔이 형성되지 않았고, 헌터들의 스탯 저하 현상도 발생하기 전이었다.
이런 흔치 않은 상황은 확실히 기회이기는 했다.
대부분의 게이트 다운은, 다른 길드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게이트 돔이 형성된 이후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때에 나서서 몬스터를 잡으면, 길드 이름값도 올리고 몬스터 부산물과 마나석도 쏠쏠하게 챙길 수 있다.
그러니 어떻게든 한 발 걸치겠다는 속셈이었다.
“야, 침 묻는다.”
“뭐요?”
“숟가락 치우라고. 아, 드럽게 진짜 어디 침 묻은 숟가락을 들이밀어?”
“이 사람이 진짜!”
그리고 준혁은 그런 놈들과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꺼져!”
단 두 음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준혁이 비어 있는 손을 휘둘렀다.
꽈광!
“크아악!”
두 놈이 비명과 함께 저만치 날아가 꼴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무슨 짓입니까!”
“지금 먼저 공격한 겁니까?”
저만치 날아간 두 길드장과 함께 온 길드원들이 반사적으로 악을 써 댔다.
하지만 준혁은 이미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게이트 입구에 바짝 붙어 롱 소드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 대신 준혁의 금문묵룡비 몇 자루가 세차게 날아와 헌터들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헙!”
“어어억!”
몇몇은 황급히 뒷걸음질 쳤고, 나머지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금문묵룡비가 위협적으로 검신을 떨며 헌터들을 압박했다.
그리고 준혁은 다시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데 집중했다.
“크윽! 두고 보자!”
“후회하는 날이 올 거다!”
전형적이고 찌질한 한 마디씩을 남기고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나는 헌터들.
당연하지만 준혁은 그 소리조차 듣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두 마리씩 새는 놈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다지 강한 놈들이 아니었기에, 바깥에 포위망을 형성한 길드에 몬스터 처리를 맡겼다.
문제는 점점 더 강한 놈들이 나오고 있다는 점.
그때 준혁의 귓속 이어폰형 통신기로 유민섭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훈 길드가 주민들 대피시키고 있습니다. 이제 합류합니다.)
거리가 너무 멀어지면 지휘권을 통한 생각 전달로 대화를 나눌 수 없기에 전자 장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혼원 길드의 다른 길드원들은 주민 대피를 시키고 있었다.
게이트 돔 형성 전에 보스까지 처리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했으나, 그래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형님들! 보이십니까? 지금 최초로 헌터의 싸움을 라이브로 보내 드리고 있습니다. 크아! 역시 흑태자 님이십니다. 혼자서 게이트를 막고 있죠.”
거리가 아주 멀었지만, 싸움을 위해 감각까지 극대화시킨 준혁의 귀에는 그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저놈 또 왔네.’
강이찬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 그리고 가끔은 본인조차 망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강이찬은 각성자였다. 그것도 A급 마법사 클래스였다.
아무런 제재 없이 현장에 드나들 수 있고, 여차하면 도망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러니 게이트 다운이 일어난 현장까지 와서 방송하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 게이트 돔이 형성되지 않아서 전자 장비가 멀쩡하게 작동한다는 점도 한몫했다.
이런 장면을 동영상으로 담을 기회는 흔치 않기 때문이었다.
“좀 더 가까이 가라고요? 아이, 왜 이러십니까? 저는 위험한 곳에 안 갑……. 어이쿠! 풍선을 1천 개나 쏘셨네요. 감사합니다. 네, 가야죠! 당연히 가겠습니다. 흑태자의 싸움을 라이브로! 보다 선명하게 보여 드립니다! 초극대하이퍼퀄리티 화질로 갑니다. 이건 후원 때문이 아니라 사명감입니다. 아, 닥치고 움직이라고요? 넵! 차니, 차니, 이차니~ 이키마쓰!”
빠르게 거리를 좁힌 강이찬이 다른 길드들의 포위망 바로 바깥까지 도착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그냥 두는 게 낫겠네.’
일종의 보험이었다.
‘그나저나…….’
한두 마리 새기는 하지만 아직 여유가 있었다. 좀 강한 놈들이 밖으로 새면 금문묵룡삭을 쓰면 될 일이었기에 문제가 없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준혁은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식이면 지유나 형, 형수한테 언제 무슨 위험이 생길지 모른다는 말인데? 이럴 때 흑호(黑虎)랑 백효(白鴞)가 있으면 좋은데…….’
그때 포위망을 뛰어넘으며 유민섭과 최유나, 리쉬옌, 린디웨, 장민호가 도착했다.
“린디웨, 자리 바꾸…….”
준혁이 뭐라 하려 했지만, 유민섭이 말을 잘랐다.
-준혁 씨가 계속 맡아요.
-예?
지금은 게이트 다운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였다.
이럴 때는 술사인 린디웨가 범위 공격을 하고, 그걸 버티고 나오는 센 놈들을 준혁이 잡는 게 효율적이었다.
그런데 그걸 막으니 이상할 수밖에.
게다가 가까이 붙어 있는데도 생각 전달로 말하는 것도 이상했다.
-이참에 이미지 메이킹 최종화를 찍읍시다. 영웅 한번 돼 보세요.
-영웅?
-게이트 다운을 단신으로 막은 국민 영웅 김지후! 어때요, 끝내주지 않습니까? 그러면 길드 주가도 오르고 좋잖아요.
-겨우 그거 때문에요?
-여론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다는 건 다방면으로 이득을 가져다줍니다.
-그럴까요?
준혁이 조금은 못 미더운 뉘앙스로 되물었다.
여론의 지지라는 건 원래 허상과 비슷한 것이다.
좋을 때는 한없이 좋다가도, 아주 작은 것 하나로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어허, 저를 좀 믿어 봐요. 적어도 던전과 몬스터 문제 관련해서는 한 번 쌓은 여론의 지지는 쉽게 안 무너집니다.
-그럽시다, 그럼.
딱히 나쁠 것 없는 이야기였다.
그때 허공에서 무언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슬쩍 시선을 돌려 보니 10여 대의 드론이 날아와 허공에서 이쪽을 촬영하고 있었다.
개인이 사용하는 드론이 아닌, 방송국 촬영 전용 헬리 캠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강이찬의 것도 있었다.
저 멀리서 강이찬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저의 촬영용 헬리 캠이 늦게 왔는데, 그 틈에 방송국들이 숟가락을 들이밀고 있네요. 하지만 아시죠? 제가 가장 먼저 이 라이브를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구독과 좋아요! 눌러 주세요. 혼원 길드, 특히 흑태자 관련은 어디든 제가 가장 빠릅니다.”
여러 각도에서 촬영하는 헬리 캠 아래에서 준혁은 말 그대로 미친 듯한 포스를 내뿜기 시작했다.
유민섭의 의도에 맞춰 주기 위해 금문묵룡삭까지 꺼내 들었다.
아예 새어 나가는 몬스터가 1마리도 발생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우와! 보고 계십니까, 여러분? 흑태자의 신형 아이템인 모양입니다. 저 밧줄 위력이 무시무시하네요!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아, 날아다니는 칼날들이 더 무섭다고요? 뭐요? 핀 판……? 아차, 저작권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그런 거 함부로 언급 안 합니다. 아무튼 그거랑 비슷하다고요?”
강이찬이 신이 나서 마구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게이트 주위에는 몬스터의 시체가 과장 하나 안 보태고 작은 동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때 하늘에서 헬리콥터 1대가 날아오더니, 준혁의 머리 위 상공에서 호버링했다.
뒤이어 문이 열리며 20여 개의 인영이 쏜살같이 뛰어내렸다.
쿵, 쿠쿠쿵!
유민섭이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크게 외쳤다.
“대책반, 멈춰!”
통일된 모양의 갑옷과 투구를 쓴 그들은 던전 관리청 소속 긴급 대책반이었다.
늦어도 너무 늦은 등장이었다.
때마침 저 멀리서 강이찬의 외침도 들렸다.
“던전 관리청 소속 뒷북 대책반이 이제야 도착했네요. 설마 다 끝났는데 숟가락 들이밀지는 않겠죠? 저 강이찬이 두 눈 똑바로 뜨고, 캠코더 렌즈도 깨끗이 닦고 그 모습 그대로 중계해 드립니다!”
그리고 때마침 던전 보스가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