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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린디웨, 술석#2-
“파악이 끝났어?”
준혁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시스템 문제의 유일한 단서인 저 구슬에 대한 파악이 끝났다면, 그 일에 대한 조사에도 진전이 있을 터였다.
린디웨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혼자는 도저히 답이 안 나와서 끙끙대다가, 혹시나 해서 길드장한테 도와 달라고 했거든.”
“길드장?”
유민섭이 대답했다.
“하아! 그 덕에 정작 나는 휴가를 몽땅 날렸단 말이죠.”
“어차피 휴가 기간에 할 일도 없었잖아요.”
“없긴 뭐가 없습니까?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할 일이라고 해봐야 뻔하죠. 모아 놓은 슈퍼 카 타고 고속도로에서 300 밟고 달리거나, 원룸에서 몰트? 뭐 그거 빈티지 어쩌고 하는 거나 마시고 있었겠죠.”
“헙!”
“뭐, 개인 취미야 내가 뭐라고 할 건 아니지만… 어째 전부 혼자 노는 거야.”
“내 취향입니다.”
“완전 한량이시네, 한량이야. 아주 그냥 타고났어. 부러워 죽겠네.”
유민섭이 뭔가 분한 표정으로 준혁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준혁은 유민섭이 뭐라고 하기 전에 재빨리 분위기를 돌렸다.
“자, 진지한 이야기 하던 중이니까 농담은 여기까지만 합니다. 린디웨, 말해 봐. 그 구슬 뭐야?”
유민섭의 얼굴에 한층 더 짙은 억울함이 어렸지만, 린디웨가 말을 꺼내는 바람에 반격의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이거 ‘술석’이야.”
술석은 배면계 술사들이 술법을 쓰는 매개체였다.
영력을 받아 술사가 만든 공식에 반응해 술법을 일으키는 물건이었다.
준혁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예상은 했지만 진짜 술석이야? 이렇게 큰 게?”
준혁이 배면계에 있을 당시 일행 중에도 술사가 있었다. 그렇기에 술석을 어떤 식으로 만드는지 알고 있었다.
술석의 크기가 클수록 술식을 새겨 넣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배면계의 상식이었다.
그런 이유로 준혁은 술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크기 때문에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린디웨가 설명을 이었다.
“술석은 보통 2가지가 있어. 아니, 정확하게는 술사가 술법을 일으키는 2가지 방법이 있어.”
첫 번째는 영력과 공식에 대응해 반응하는 술석이었다. 이 경우 술석에 자신의 영력을 불어 넣는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영력을 불어 넣고 술식을 새겨 넣은 술석이었다.
이 술석의 경우 따로 영력이나 공식이 필요 없었다.
술석에 새기는 술식 자체가 술법을 펼치는 공식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던지는 것만으로 술법이 발현되는 물건이었다. 다만, 만드는 데 시간과 공을 많이 들여야 했다.
이런 술석은 크기가 클수록, 새겨 넣는 술식이 많을수록 제작 난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테이블에 올려놓은 술석은 그중 두 번째 경우였다.
“일단 여기 새긴 술석에 대해서 설명을 해 줄게. 맞은 사람 몸에 영력을 밀어 넣는 게 2개, 신체 구조를 느슨하게 만들어서 시체를 빠르게 분해시키는 술식이 1개.”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는 지난번에도 들었던 내용이다.
문제는 지난번에 반만 알아냈던 것과 전혀 모르는 것 2개였다.
“그리고 남은 것 중 하나는 맞은 사람 몸에 폭탄이 아닌 마나를 심는 거였어.”
“마나?”
“그래, 마나. 그거 때문에 내가 정확하게 파악 못했던 거야. 길드장이 도와준 부분이 그거였고.”
“그럼 나머지 둘은?”
“후우! 듣고 놀라지 마라.”
깊이 숨까지 내쉬는 린디웨의 모습에,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시스템.”
“뭐?”
“배면계 시스템 조각.”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시스템 조각을 어떻게 술식으로 새겨?”
준혁의 얼굴에 짙은 불신의 감정이 번졌다.
하지만 린디웨의 목소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사실이야. 복제해서 실험까지 해 봤기 때문에 아는 거야.”
“복제? 그걸 복제했다고?”
준혁은 더 이상 놀라는 것도 힘들다는 듯 오히려 담담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길드장, 말 좀 해 주지?”
린디웨의 말에 유민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면 준혁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너, 생각보다 재능이 넘치는 모양인데? 술석 복제가 제일 어려운 거라고 알고 있는데 말이야. 엄청나게 크고 술식도 6개나 되는데 복제를 했다니.”
“뭐, 그런 건 오히려 사소한 일이지. 아무튼 배면계 시스템 조각이 맞아.”
린디웨가 장담하듯 말했지만, 준혁은 이 부분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배면계 시스템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낸 건데?”
“그거까지는 내가 설명할 방법이 없어. 그런데…….”
“잠깐!”
준혁이 린디웨의 말을 막고 홀로 생각에 잠겼다.
‘이거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의외로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여전히 배면계 시스템 조각이란 게 존재한다는 것도 믿기 힘들고, 린디웨가 그것을 어떻게 알아봤는지도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통해 원인을 되짚으면 이상하게도 들어맞는 이야기였다.
시스템이 엉키는 현상은 준혁이 직접 겪었고, 현재 진행형인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처음 준혁의 영력이 돌아온 것부터 시작해 최근에 굉황이 빙의의 형태로 등장한 사실은 2개의 시스템이 점점 더 깊이 엮이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누군지 모를 ‘그놈들’은 세계 곳곳에서 저 술석을 이용해 사람들을 죽여 왔다.
‘구슬을 이용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많아질수록 시스템이 깊이 엉키고 있다고 생각하면?’
저 술식에 배면계 시스템 조각이 들어 있다는 린디웨의 말이 맞는다고 볼 수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준혁이 린디웨에게 물었다.
“2개가 배면계 시스템 조각이라고 했지?”
“응.”
“그럼 그 2개는 각각 내용이 다른 거냐?”
“정확해.”
“그렇다는 건… 간단하게 말해서 그놈들이 배면계 시스템을 수천 조각으로 나눠서 던전 시스템에 침투시켰고, 그 조각들이 모두 침투해서 합쳐지면?”
“그렇지. 던전 시스템과 배면계 시스템이 융합되는 거야.”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그러면 지금 원래의 배면계 시스템은 사라진 거?”
“아니. 여기에 새겨져 있는 시스템 조각은 복제품이야.”
“복제품? 그러니까 똑같은 복제품을 만들어서 그걸 조각조각 잘랐다는 뜻?”
“맞아.”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준혁의 두 눈에 의심이 깃들었다.
린디웨의 말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린디웨의 정체를 의심하는 것이었다.
“넌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아는데?”
“믿기 힘들겠지만 ‘느낌’이야.”
“느낌?”
“배면계 각성자들 중에 술사가 시스템과 가장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는 건 알고 있잖아? 이게 복제품이라는 감이 왔어.”
“그 말을 믿으라고?”
린디웨가 고개를 몇 번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믿기 힘들다는 거 알아. 그런데 생각해 봐. 청랑을 소환했잖아?”
“그랬지.”
“환수 소환은 시스템이 어설픈 상태로는 불가능해. 그러니 원래의 시스템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볼 수밖에.”
“흐음…….”
이 역시도 이미 일어난 일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었다.
준혁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다면 이걸 막을 방법은?”
린디웨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없어.”
“없다고? 그럼 이대로 손 놓고 기다리고 있자고?”
“늦출 수는 있어.”
“어떻게?”
린디웨가 테이블에 놓은 술석을 집어 들었다.
“이거… 만드는 데 최소한 한 달은 걸릴 거야.”
“한 달? 넌 복제했다며?”
휴가 기간은 겨우 일주일이었다. 린디웨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난 천재거든.”
“헐!”
“아무튼 지금이라도 수상한 놈들을 찾아서 이걸 뺏으면 돼. 그럼 그만큼 늦춰질 거야. 이렇게 제작이 힘든 걸 최소 천 개는 만들어야 한다고 예상하면 여분을 만들 여유는 없었을 테니까.”
의외로 그럴싸한 방법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지난번 분석팀이 만들어서 정리해 놓은 자료가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어 있었다.
준혁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시스템이 완전히 엉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예상하고 있겠지만…….”
말꼬리를 흐리는 린디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던전에 배면계의 괴물들이 등장하겠지. 괴수, 영수는 물론 신수들까지.”
“그 말은… 게이트 다운이 일어나면 그 짐승 새끼들이 세상으로 나온다는 뜻이지? 그리고 게이트 돔이 있어도 놈들은 영향을 안 받을 가능성이 크고. 맞아?”
“응.”
그때 준혁의 머릿속에 요란한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야, 잠깐!”
“왜?”
“그 술석, 그거 던졌던 놈들이 그게 마지막이라고 말했어.”
유민섭이 급히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네?”
“일단 김지후 헌터가 만난 그 놈들만 마지막이고, 다른 곳에서는 아직도 진행 중일 가능성도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대책을 논의하죠.”
“대책이라?”
“우선은 제가 아는 길드장들한테 연락 돌려서 수상한 놈들을 감시하라고 할게요. 이상한 구슬 같은 걸 던지면 가로채라는 이야기도.”
“그런데 그때 파악한 건 국내 헌터들만 파악한 거 아닙니까?”
“이미 한 번 목록을 만들었고, 자료는 데이터베이스에 정리되어 있으니 빠르게 명단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서두릅시다.”
“어차피 그 일은 나만 할 수 있으니, 김지후 헌터는 저기 두 사람한테 다시 설명 좀 해 주세요.”
유민섭은 세계적으로도 막강한 파급력을 가진 헌터였다.
그리고 세계 각국의 S급 헌터들이, 황당한 얘기라도 속는 셈치고 한 번쯤은 따르도록 할 정도의 인망은 가지고 있었다.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유민섭이 황급히 회의실을 나섰다.
***
“하아!”
유민섭은 녹초가 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아침부터 지금 시각까지 분석팀을 닦달했다.
그리고 리스트가 나올 때마다 해당 국가의 친분 있는 S급 헌터나 길드장에게 연락을 했다.
다들 처음에는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유민섭이 간절한 목소리로, 이상한 소리로 들리더라도 제발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자 선선히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 과정을 온종일 반복한 탓에 엄청난 피로가 누적된 것이었다.
S급 각성자니 육체적으로 피곤할 일은 없었지만, 쉴 새 없이 전화를 하고 설득하는 과정은 정신적으로 산더미 같은 피로를 누적시켰다.
터벅터벅 복도를 따라 걷던 유민섭이 한 오피스텔 현관 앞에 섰다.
유민섭이 개인적인 취미를 즐기기 위해 바로 꾸며 놓았던 그 오피스텔이었다.
비밀번호를 열고 짧은 음악과 함께 잠금이 해제되자 유민섭의 눈빛이 조금 맑아졌다.
얼마 전에 구했던 새로운 빈티지 시리즈를 오늘 개봉할 생각을 하니 괜히 생기가 도는 기분이었다.
원래는 휴가 기간에 맛볼 생각이었는데 린디웨에게 잡혀 있던 바람에 이제야 온 것이었다.
“음?”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유민섭의 감각을 자극하는 것이 있었다.
짙은 주향.
‘도둑?’
기겁한 유민섭이 황급히 내부 전등을 켰다.
“이, 이게 뭐야!”
기겁한 유민섭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바닥 곳곳에 술병이 마구잡이로 널려 있었다.
죄다 뚜껑이 열린 채 쓰러져 바닥에는 술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청랑이 배를 깐 채 대자로 뻗어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청랑, 이 개새끼야!”
유민섭의 절규가 오피스텔 안에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