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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예상 밖의 등장#3-
꾸드드드득!
굉황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드래곤의 형태를 하고 있던 굉황의 몸뚱이에서 뭔가 터지는 듯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굉황, 정확히는 굉황이 뒤집어쓴 카이르무스의 육체에 괴악한 변화가 찾아왔다.
온몸의 비늘이 터져 나가고, 가죽이 갈라졌다. 근육이 뜯겨 나가고, 뼈가 부러져 몸 밖으로 튀어나와 짓눌리듯 꺾이며 으깨졌다.
준혁은 재빨리 뒷걸음질을 쳤다.
지금 바로 공격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일단은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당장 굉황의 본체가 이곳에 나타난다면 위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본체가 넘어왔을 놈이니, 그럴 위험은 없다고 생각해도 되었다.
그리고 굉황은 분명 ‘인사’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그렇다면 크게 위협은 되지 않을 터.
어쩌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시스템의 이상 현상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엉망으로 으깨지며 형태가 무너지던 새까만 드래곤의 육체가 마침내 변화를 멈췄다.
“하, 이 미친 뱀 새끼. 안 본 사이에 취미가 열라 고상하게 변했다?”
물론 반어법이었다.
준혁의 눈앞에 펼쳐진 굉황의 모습은 농담으로라도 고상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드래곤의 몸뚱이를 해체해 용의 형태로 재구성한 모습이었다. 당연히 내장에서 시작해 뼈와 근육, 가죽과 비늘까지 어느 것 하나 멀쩡한 부분이 없다.
온전한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은 목과 머리, 그리고 꼬리뿐이었다.
나머지 부분은 온통 내장과 살점, 그리고 뼈가 뒤엉킨 그로테스크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준혁의 얼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떠올랐다.
준혁이 10년간 배면계를 떠돌며 깨달은 절대적인 법칙 하나.
생명체는 그 본연의 모습을 갖고 있을 때 가진 힘을 극대화할 수 있다.
인간이라면 인간의 모습일 때 갖고 있는 모든 힘을 쓸 수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굉황이 드래곤의 몸뚱이를 억지로 용의 그것으로 짜 맞춘 것은 바로 그 이유.
‘뭔가를 하겠다는 말인데…….’
하지만 이상했다.
드래곤도 무시무시한 생물이기는 하지만, 굉황과 같은 신수보다는 격이 낮다. 드래곤의 몸을 용의 형태로 바꾸었다고 해도 본연의 힘을 100퍼센트 발휘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본체가 넘어온 것도 아니고 빙의의 형태로 넘어온 상태다.
저 상태로는 아무리 용을 써도 준혁에게 의미 있는 피해를 주는 것이 힘들다. 그리고 굉황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렇게 변했다는 것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었다.
‘나를 노리는 게 아니라면?’
결론은 금방 나왔다.
-재회의…….
‘무극!’
-…선물이다.
굉황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준혁이 스킬을 펼쳤다.
동시에 준혁의 등판에 무언가가 찰싹 달라붙었다.
“어, 어어!”
등 뒤에서 들린 것은 유민섭의 기겁한 외침.
[무극(無隙)]
기술 사용자와 대상 사이의 거리를 0으로 만든다.
사용자와 대상 중 중량이 가벼운 쪽이 무거운 쪽으로 순간 이동한다.
사용 가능 거리:1킬로미터
굉황이 노리는 것은 유민섭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챈 준혁이 ‘무극’을 사용해 유민섭을 끌어당긴 것이었다.
“이, 이거 뭡니까?”
유민섭의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멀리서 준혁과 굉황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거리도 벌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마법사를 통해 텔레포트를 할 때 느꼈던 그 감각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준혁을 백허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당황하는 게 당연한 일.
유민섭이 황급히 준혁의 등판에서 떨어지려 했다.
하지만 준혁의 행동이 더 빨랐다. 갑자기 뒤로 홱 돌더니 유민섭을 끌어안고 급히 스킬을 펼쳤다.
‘천천!’
[천천(穿天)]
순간적인 도약으로 허공으로 떠올라 위급 상황에서 탈출한다.
도약 가능 높이:2킬로미터
씨이이잉-!
귓전을 스치는 세찬 바람 소리와 함께 온몸에 얹히는 강력한 중력. 유민섭은 처음 공격을 피했을 때와 같은 상황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콰르르르!
저 멀리서 아스라이 들리는 굉음에 실눈을 뜨고 소리가 들린 쪽을 보았다. 그리고 실눈이었던 유민섭의 눈이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은 갈라져 있고, 지반은 뒤집혀 있었다. 그리고 그 갈라진 틈에서 시뻘건 용암이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준혁에게 끌려오기 전에 유민섭이 서 있던 그 장소였다.
자연을 왜곡시키는 굉황의 힘이었다.
유민섭이 아는 한 드래곤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마법을 이용해 온갖 자연 현상을 다 만들 수 있었지만, 자연 자체를 저렇게 왜곡시키지는 못했다.
그런데 귓전으로 스치는 준혁의 말이 가관이었다.
“뱀 새끼, 많이 약해졌네.”
유민섭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저게 약해진 거라고?’
유민섭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준혁을 보았다.
이 사람은 그 배면계라는 곳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던 것일까?
그때 굉황의 고개가 하늘로 향하며 준혁을 보았다.
-여전히 쥐새끼 같구나!
“지랄하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굉황의 두 눈에서 새하얀 섬광이 폭사되었다.
-아까처럼 혼자 내려갈 수 있죠?
-물론입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혁이 유민섭을 던졌다.
우르르릉!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스듬하게 저 멀리 추락하던 유민섭은 또 한 번 눈을 의심했다.
시커먼 구름이 한 곳에 뭉치고, 벼락과 천둥이 울리는 듯하더니 갑자기 구름 사이로 땅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땅이 열리며 이번에는 용암의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유민섭은 황급히 2가지 스킬을 동시에 펼쳤다.
[프로텍션 돔]
[그래비티 컨트롤]
반투명한 반구가 나타나 유민섭의 위쪽을 감쌌고, 동시에 낙하하는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준혁 역시 스킬을 사용했다.
‘무극!’
이번 대상은 유민섭이 아닌 굉황. 당연히 중량이 훨씬 적은 준혁이 순간이동 되었다.
철퍽!
시뻘건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무극으로 순간이동 되어 들러붙은 곳은 굉황의 변형된 몸뚱이의 한가운데.
하필이면 내장과 살점이 한데 뒤엉켜 있는 위치였다.
“제길!”
짜증스러운 외침과 함께 준혁은 재빨리 등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고상한 취미가 생긴 모양이군.
시뻘건 살덩어리에 들러붙은 준혁을 비웃듯이 툭 내뱉는 굉황의 입꼬리가 또 한 번 삐죽 올라갔다.
아까 준혁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준 것이었다.
“그만 떠들고 이제 가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혁의 무상곤이 거대한 칼의 형태로 바뀌었다.
지금 상대하는 적은 신수였다. 아무리 빙의의 형태라 해도 영력을 사용하는 이상, 마무리를 지으려면 스킬을 사용해야 했다.
그나마 빙의였기 때문에 육체는 드래곤의 그것이었다.
켈카두스를 상대할 때처럼, 혹은 배면계에서 신수를 상대할 때처럼 목숨 걸고 싸울 필요까지는 없었다.
두우우웅-!
칼과 굉황의 몸뚱이에 둘려진 검은색과 회색의 영력이 부딪쳤다.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한가?
굉황이 놀리듯 묻는다. 하지만 준혁은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은 채 쉴 새 없이 칼을 휘두를 뿐이었다.
둥, 두두둥!
낮은 음역대의 거대한 북소리 같은 것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진다. 사방에 터져나간 영력의 파편으로 뿌옇게 변할 쯤이었다.
‘영박!’
준혁이 준비했던 스킬을 전개했다.
순간 굉황의 몸 곳곳에 있는 그림자가 갑자기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영박(影縛)]
기술 사용 대상의 그림자가 대상의 움직임을 묶는다.
유지 시간:10초
그림자는 단순히 땅바닥에만 지는 게 아니다. 태양을 등지고 선 사람의 얼굴과 앞면에는 당연히 그림자가 진다. 그리고 영박 스킬의 대상이 되는 그림자는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꾸드드드득!
스스로 길게 늘어지기 시작한 그림자가 기나긴 굉황의 온몸을 옮아 매기 시작했다.
-기억에 있는 잔재주로군.
굉황의 입에서 감상이 새어 나왔다.
어차피 오늘 이곳에 나타난 것은 말 그대로 인사를 위해서였다.
자신들이 봉인에서 풀려 나왔고, 당한 것을 되갚아 줄 거라는 걸 알려 주기 위한 인사.
그렇기에 굉황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았다. 잠시 빌려 쓰는 몸뚱이에 문제가 생기는 건 대수롭지 않았다.
“원래 처 맞은 기억은 오래가는 거야. 뼈에 새겨 주잖아.”
짙어진 그림자가 굉황의 온몸에 칭칭 휘감기고, 어느 순간 굉황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영력이 옅어졌다.
서서히 지면으로 내려앉는 굉황의 머리를 향해 준혁이 힘껏 땅을 박찼다.
‘태산인!’
머리위로 들어 올린 거대한 칼에 짙은 영력이 뭉치며 결정을 이루어 냈다.
쩌저저적!
마치 얼음이 얼듯 기체와 같은 형태의 영력이 고체로 변하며 흑요석처럼 빛나는 칼날로 변했다.
[태산인]
쑤아아아앙!
검은 결정을 이룬 영력의 칼날이 공간을 갈랐다.
공간과 함께 굉황의 머리가 잘려 나갔다.
쿠웅!
거대한 머리의 절반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큰 소리를 울렸다.
하지만 굉황의 몸은 여전히 천천히 내려앉는 중이었다.
-인사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하지만 머지않아 돌아오도록 하지.
“뱀 새끼, 뒈지는 순간까지 말 많네!”
-기대해도 좋다, 도살자여.
그 말을 끝으로 굉황의 긴 몸뚱이가 꿈틀거리더니, 회색의 영력이 순식간에 옅어졌다.
뒤이어 용의 형태로 짜깁기된 몸뚱이가 새까맣게 변하며 재가 되어 푸스스 흩날렸다.
마지막까지 희미하게 빛나던 드래곤 하트마저 재가 되어 사라졌을 때, 던전 속 세상에 변화가 찾아왔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울렸다.
멀리 있던 유민섭이 굉황의 죽음을 확인하고 빠르게 준혁 옆으로 다가왔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진동과 함께 산봉우리가 갑자기 꺼지듯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나무며 바위 같은 것들이 뒤집어지고, 곳곳에 땅이 갈라졌다.
“뭘 어떡해요?”
“예?”
“나갑시다, 당장!”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준혁이 내달리기 시작했고, 유민섭 역시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게이트를 통과해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다른 팀원들의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괜찮아?”
린디웨가 대표로 물었다.
“괜찮습니다. 밖에는 별일 없었습니까?”
“여기는 뭐 그대로야.”
대답하던 린디웨가 갑자기 유민섭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유민섭이 린디웨의 시선을 좇았다.
“원래대로 돌아왔네요.”
조금 전까지 있던 던전 게이트가 불이 꺼지듯 검게 변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린디웨의 물음에 준혁이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나중에 얘기해 줄게.”
그리고 유민섭이 다른 팀원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여기서 있었던 일은 일단 비밀입니다.”
“걱정 마세요.”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사람은 강이찬이었고, 유민섭이 강조하듯 말했다.
“이찬 씨가 제일 걱정입니다.”
“헐! 나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보긴요?”
사실을 은폐한다는 게 좋은 결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공개해도 증명할 방법조차 없었다.
자료로 만들고 정리해 두더라도 일단은 덮어 두어야 했다.
“일단 나갑시다.”
그렇게 말한 유민섭이 게이트를 후려쳤다.
파사삭.
게이트가 모래성처럼 그대로 허물어져 흩어졌다.
치이잉-!
거대한 땅을 둘러싸고 있던 짙은 회색의 돔도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서서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