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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예상 밖의 등장#1-
게이트에서 빛이 새어 나온다는 것은 게이트가 활성화되었다는 뜻이다.
터져 버린 게이트가 다시 활성화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더욱 이상한 점은 게이트를 물들인 색깔이었다.
던전 게이트가 불길한 검붉은 색으로 물든 채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던전 게이트의 색깔은 3가지다.
푸른색은 입장 가능, 붉은색은 입장 불가, 검정색은 리젠 중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검붉은 색이라니?
유민섭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검붉은 색으로 소용돌이치는 던전 게이트를 보았다.
‘이런 사례가 있었나?’
과거에 그가 길드장으로 있던 무훈 길드는 대한민국에서 1위를 놓친 적이 없고, 세계에서도 항상 20위권에 이름을 올려놓는 길드였다.
그런 만큼 세계 수위권의 길드장들과 교류도 많았고, 각종 포럼이나 세미나에도 자주 참석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례를 들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준혁이 조금은 포기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죠?”
던전과 헌터가 일상에 스며든 세상이니 만큼, 준혁도 일반적인 상식선에서의 지식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일반적인 상식선의 내용일 뿐, 깊이는 없었다.
그러니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어본 것이다.
“아닙니다. 이런 사례는 들어 본 적이 없어요.”
고개를 끄덕인 준혁이 생각으로 의사를 전했다.
-그럼 이건 아무래도 그쪽일 것 같습니다만?
-그쪽? 설마?
-네. 양쪽 시스템의 문제.
최유나, 장민호, 강이찬에게 배면계에 대해서는 말해 줬지만, 시스템 이상에 대해서는 아직 조심스러웠기에 생각으로 전한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이럴 때는 직접 들어가 봐야죠.
“네?”
깜짝 놀란 유민섭이 생각으로 대화하는 것도 잊은 채 육성으로 놀람을 표시했다.
하지만 준혁은 이미 검붉은 색의 던전 게이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유민섭이 황급히 준혁을 붙잡았다.
“안에 뭐가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죠!”
하지만 준혁은 부드럽게 그 손을 밀어냈다.
“아뇨. 이럴 때는 그냥 몸으로 부딪쳐서 알아봐야 하는 겁니다. 시간 끌다가 진짜 큰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
각자의 시스템에서 살아온 방식의 차이였다.
준혁은 배면계에서 언제나 몸으로 부딪쳤고, 모든 위험을 극복하고 결국 살아남았다. 그러니 모르는 것이 있을 때는 직접 부딪쳐 본다는 게 당연한 행동 지침이었다.
“잠깐만요! 그래도 어느 정도 준비는……. 아놔, 제기랄!”
유민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준혁은 검붉은 색의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다급해진 유민섭이 게이트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게이트에 발을 들이기 직전에 팀원들을 향해 말했다.
“저만 따라가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다들 여기를 지키고 계세요.”
린디웨가 대표로 대답했다.
“그게 낫겠네. 다녀와.”
고개를 끄덕인 유민섭이 게이트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리고 게이트의 소용돌이가 사라졌다. 내부에서 게이트를 닫았다는 뜻이다. 다만, 색깔은 여전히 검붉은 색이었다.
“어? 어어! 여기는?”
게이트를 넘어온 유민섭의 입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눈에 비친 풍경은 낯선 듯하면서도 낯익은 것이었다.
‘골드 드래곤의 레어’, 그 던전의 풍경과 같았다. 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골드 드래곤의 레어’에 들어가면 보이는 동굴이었다. 그런데 똑같은 동굴이라 해도 그 환경이 괴이하게 변해 있었다.
동굴 벽은 검붉은 색으로 불길한 빛을 뿜고 있었고, 그 동굴 벽에 시커먼 넝쿨이 잔뜩 뒤엉켜 꿈틀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희미한 안개까지 끼어 분위기를 한층 음습하게 만들었다.
츠츠츠츠!
땅속인 게 분명한 동굴의 벽과 천장, 그리고 바닥 너머에서 음습한 소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준혁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지금부터는 지휘권 스킬을 통해 생각으로만 말을 주고받는 겁니다.
-그, 그러죠. 그런데 이거 환경이 왜…….
-배면계입니다.
-네?
-동굴 모양은 우리가 들어왔던 ‘골드 드래곤의 레어’ 속 그 동굴이 맞습니다. 그런데… 식생이라고 해야 하나요? 배면계의 동굴 환경 중에 이런 곳이 있었습니다.
유민섭의 시선이 동굴 벽과 천장 등을 한 차례 쓸었다. 뒤이어 준혁의 당부가 이어졌다.
-그리고 벽에 있는 넝쿨은 절대 건드리지 마세요.
-넝쿨?
-네. 건드리지 마세요.
-왜요?
-음…….
유민섭의 물음에 준혁이 동굴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무언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유민섭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준혁의 대답을 기다렸다.
-안 알랴줌.
-에?
어이없어하는 유민섭을 향해 준혁이 피식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유민섭이 곧장 그 뒤를 따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생각을 전했다.
-아니, 나이가 몇 살이에요? 무슨 10년 전… 아니, 한 20년은 된 개그를 칩니까?
-아무튼 건드리지 마세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이, 두 사람은 어느새 문제의 동공에 다다랐다.
유민섭이 준혁을 따라 자연스레 발을 멈추며 물었다.
-여기도 변화가 있겠죠?
-그렇겠죠. 제가 먼저 들어갈 테니 여기서 기다려요.
-예? 아니, 그래도 정찰이라도…….
탁!
준혁이 곧장 땅을 박차며 동공으로 튀어 들어갔다. 뒤이어 준혁의 생각이 유민섭의 머릿속으로 전해졌다.
-음?
-왜 그래요?
-별로 바뀐 게 없는데요?
유민섭이 재빨리 동공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동공의 반대편에서 이쪽을 향해 달려드는 거대한 몬스터 무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갑니다!
-잠깐!
-버프나 줘요!
달려 나가는 준혁의 손에는 이미 무상곤에서 변화한 거대한 칼이 쥐어져 있었다.
유민섭은 하릴없이 버프를 넣어 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진짜 버프 셔틀인가?’
괜히 강이찬이 했던 말이 떠오르는 유민섭이었다.
휘이잉-!
횡으로 크게 그은 거대한 칼날의 궤적에 몬스터들이 마구잡이로 썰려 나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몬스터 사체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준혁이 거침없이 몬스터들을 쓸어 날리며 유민섭에게 생각을 전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렇네요. 환경이 바뀌어서 몬스터도 뭔가 변화가 있을 거 같았는데, 조금도 변화가 없군요.
-제길! 뭔 조짐이라도 있어야…….
-아, 잠깐만요!
-왜요?
-잠깐만요.
유민섭이 서둘러 몬스터의 사체로 다가가 인벤토리에서 꺼낸 도구로 곧장 가슴팍을 갈라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없네요.
준혁이 살아 있는 오우거의 발목을 붙들고 사방으로 휘두르며 물었다.
-뭐가요?
쿠워어어!
오우거가 비명을 지르며 손에 든 거대한 몽둥이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그리고 몽둥이에 맞은 몬스터들이 그대로 으깨지며 죽음을 맞이했다.
살아 있는 탓에 훨씬 더 강력한 흉기로 변한 오우거였다.
-마나석. 마나석이 없습니다.
-으음!
-무슨 일일까요?
-알 수 없죠. 일단은 이 던전을 클리어해 보는 수밖에.
그러는 동안에도 몬스터들은 쉴 새 없이 쓸려 나가고 있었다.
동공의 몬스터들을 끝내고 동굴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주변 환경부터 살폈다.
확실히 던전의 원래 모습과 똑같은 지형이었다. 다만, 이번에도 식생과 다른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하늘은 밤이라도 된 듯 새까맸다. 바닥의 흙도 재를 뿌려 놓은 듯 탁한 검은색이었다.
곳곳의 바위들은 동굴에서와 마찬가지로 넝쿨에 휘감긴 채 검붉은 빛을 뿜고 있었으며, 나무들은 하나같이 앙상한 가지만을 남긴 채 기이한 형태로 비틀려 있었다.
-이게 배면계의 환경입니까?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우중충해지는 광경에 유민섭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런 음습한 환경에서 산다면 조증 환자도 우울증에 걸리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준혁은 겨우 17살 나이에 이런 곳에서 10년을 보냈다고 들었다. 괜히 안쓰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뭐, 전 지역이 그런 건 아니고… 정상적인 곳도 있습니다. 주로 그런 곳에 베이스캠프를 차렸었고.
-그렇군요.
끼아아아아-!
대화를 끊는 고음의 울부짖음.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는 와이번의 포효였다. 이 역시 이전 던전의 진행 상황과 똑같았다.
그리고 준혁 역시 이전 던전 진행 때처럼 와이번을 때려잡았다.
산을 올랐고, 이어지는 몬스터들의 공격 또한 똑같았다. 준혁의 반응 또한 마찬가지.
그렇게 드래곤 나이츠까지 완전히 끝낸 후, 다시 산길을 따라 오를 때였다.
준혁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요?
-잠깐만요.
손을 내밀어 유민섭의 말을 막은 준혁이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살짝 외로 꼬았다.
유민섭이 긴장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려 할 때였다.
“피해!”
버럭 소리를 지른 준혁이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끅!”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압박감에 유민섭이 답답한 신음을 토했다. 어느새 그는 준혁의 어깨에 얹혀 허공을 날고 있었다.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유민섭은 상체가 준혁의 등 쪽으로, 하체가 가슴팍 쪽으로 향한 채 들쳐 메진 상태였다. 고개를 들면, 도약해서 허공을 뛰어넘은 준혁의 뒤쪽을 주시하게 되는 방향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든 유민섭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저, 저거!”
거대하고 시커먼 무언가가 하늘에서 이쪽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기겁한 유민섭이 악을 쓰며 외쳤다.
“더! 더 빨리!”
동시에 유민섭은 온몸에 거대한 중력이 얹히는 것을 느껴야 했다.
“끄아아아아!”
입에서는 무작정 비명만 터져 나왔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지면이 멀어지고 있었다.
몸에 걸린 거대한 중력은 급격한 수식 상승으로 인해 걸린 부하였다.
준혁이 ‘천천’을 펼친 것이었다.
애초에 이 스킬은 갑작스러운 공격을 피하기 위한 회피 스킬이었고, 지금 정확하게 그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이, 아저씨, 정신 좀 차리지?”
귓전에 준혁의 호통이 터진 후에야 유민섭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느새 두 사람을 옥죄던 중력이 일순간 사라졌다. 도약의 정점에 오른 순간이었다.
“후!”
짧게 숨을 고른 준혁이 지면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준혁이 있던 곳에서 자욱한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라 있었다.
“혼자 내려갈 수 있죠?”
준혁의 물음에 유민섭이 기겁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대답도 하기 전에 추락이 시작되었다.
“크읍!”
유민섭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자신의 스킬 중에 이 정도의 추락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었는지 빠르게 고민해 보았다.
그리고 찾았다.
“가능합니다!”
“오케이!”
말이 끝나는 동시에 유민섭의 앞섶을 틀어쥔 준혁이 투창하듯 그의 몸을 수평으로 던졌다.
“끄아아아아~”
유민섭의 비명이 길게 꼬리를 늘어트리며 그가 운석처럼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진짜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에이, 안 괜찮은 거 같은데?
-괜찮다고요!
-그런 사람이 그렇게 비명을 지르시나?
-괜찮습니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전하는 방식이지만, 대화를 하는 것처럼 어감을 느끼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지금 유민섭의 목소리는 꽤 단단했다.
그 정도 반응이라면 충분히 혼자 착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준혁은 그제야 지상에 있는, 저 거대한 먼지구름을 피워 올린 무언가를 노려보았다.
그사이 먼지가 가라앉고 그 무언가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드래곤이었다.
저 형체와 거대한 몸뚱이는 분명 드래곤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황금색 비늘로 뒤덮여 있던 카이르무스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온몸을 윤이 나는 검은 비늘로 뒤덮은 새까만 드래곤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드래곤의 온몸이 회색빛 안개에 휘감겨 있었다. 마치 준혁의 영력과 비슷한 형태.
‘이 느낌은…….’
익숙한 느낌이었다. 아니 준혁의 기억 속에 있는 기운이었다.
준혁은 황급히 9년 전, 배면계를 누비던 10년의 기억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익숙한 기운의 주인을 기억해 냈다.
‘이게 말이 돼?’
무시무시한 낙하 속도로 인해 순식간에 가까워진 검은 드래곤의 고개가 치켜 올라가 준혁을 마주 노려보았다.
준혁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이름 하나가 튀어나왔다.
“굉황(轟荒)!”
-오랜만이군, 엽사 김준혁. 아니…….
이름이 들리는 순간 준혁은 자신의 직감이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굉황이라 불린 검은 드래곤이 말을 이었다.
-도살자 김준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