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16장. 시스템의 차이#1-
리쉬옌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둘레 곽(廓)이었다.
둘레, 외성, 요새를 감싼 큰 울타리라는 뜻을 품은 단어.
그리고 그 외침에 반응하듯 폭사된 하얀 영력이 2팀 전체를 둥글게 감싸며 2미터 높이의 반투명한 성곽으로 변했다.
콰콰콰쾅!
굉음이 몰아친 것은 그때였다.
“뭐, 뭐야?”
유민섭은 자신들을 감싼 반투명한 성곽 바깥쪽으로 화염이 몰아치는 것을 보며 두 눈을 치떴다.
폭발의 여파였다.
정확하게는 2팀이 죽인 좀비 떼의 잔해가 갑작스레 폭발한 여파였다.
“죽은 좀비가 폭발?”
이 또한 지금까지 없던 이상 현상 중 하나였다.
‘도대체 시스템이 어떻게 변해 가고 있는 거야?’
유민섭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당혹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던 중이었다.
“어, 어억!”
유민섭이 갑자기 놀란 듯한 소리를 내며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청랑아, 왜 그래?”
청랑이 유민섭의 바짓단을 물고 흔들어 댄 탓이었다.
-아직, 위험!
“아직 위험하다고?”
유민섭이 당황한 나머지 목소리를 내 말했고, 그 말에 모두들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자세를 고쳤다.
-위험, 큰 적.
청랑과는 제대로 된 의사소통은 힘들었다. 단편적인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 한계.
“이게 지금 무슨…….”
린디웨가 급히 말했다.
“팀장, 그 녀석 우리하고 생각 연결시켜!”
“응? 아!”
‘지휘권’은 그것을 발동한 유민섭과 생각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은 물론, 그렇게 이어진 피지휘자들끼리도 생각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피지휘자가 서로 연결될 경우, 과도한 생각의 범람으로 혼란을 빚을 우려가 컸다.
그런 이유로 평소에는 유민섭만이 모두와 생각을 이을 뿐, 나머지 연결은 끊어 놓은 편이었다.
“알겠습니다.”
유민섭이 빠르게 의사소통의 통로를 확장시켰다.
그 직후 청랑과 린디웨가 서로 마주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한 사람과 한 마리가 나누는 생각의 교환이 당연히 유민섭의 머릿속으로도 흘러들어 왔다.
-무슨 일이야?
-컹, 컹컹! 위험! 위험!
-그러니까 뭐가 위험하냐고?
-왕, 냄새, 와앙! 위험.
-강자의 냄새가 난다고? 매우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달려온다 이거지?
유민섭의 두 눈동자가 갑자기 공허하게 변했다.
‘저걸 어떻게 알아들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청랑과 린디웨는 대화를 이어 갔다.
-컹컹, 컹! 크엉!
-당장 피하라고?
-왕!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와앙!
-일단 지켜봐, 인마.
유민섭의 눈동자에 결국 현타가 찾아왔다.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하지만 나갈 수도 없었다.
‘배면계 출신들은 다 저런……?’
리쉬옌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유민섭은 그 생각을 잇지 못했다.
리쉬옌에게도 이런 생각들이 전해지고 있을 텐데, 리쉬옌은 전혀 못 알아들은 표정으로 멍하니 있는 탓이었다.
하지만 이내 입을 여는 린디웨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잔뜩 깃들어 있었다.
“대비하세요. 뭔가 큰 게 옵니다.”
긴장감이 빠르게 퍼져 나가고, 2팀 중에서 리쉬옌이 가장 빠르게 반응했다.
하얀 기류가 풀썩 피어오르며 리쉬옌의 양손에 영력이 맺혔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강이찬은 리쉬옌과 린디웨의 움직임만을 좇고 있었다.
‘독특하네? 탱커인데도 갑옷이 중장갑이 아니란 말이야.’
처음부터 의아해하던 부분이었다.
리쉬옌의 갑옷은 준혁의 묵린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준혁은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묵린갑을 풀 플레이트 아머처럼 변형시키고 있는 탓에, 강이찬은 그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어쨌든 평상복을 입었고, 그 위에 부위별로 나뉜 호신갑을 착용한 것이 묵린갑과 흡사했다.
대신 무기는 달랐다.
리쉬옌은 허리의 가죽띠로는 모자란지 왼쪽 허리춤에서 오른쪽 어깨를 거쳐 왼쪽 등허리로 이어지는 가죽띠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허리춤에 다양한 무기를 매달고 있는 준혁과 달리, 리쉬옌은 허리와 상반신의 가죽띠에 모두 똑같은 물건을 걸어 놓고 있었다.
아까 최유나를 구했던, 어른 손 크기의 작은 사각 방패처럼 생긴 금속판 10개였다.
그리고 공략 중에는 저 미니 방패를 허공에 띄워, 자유자재로 조종하며 방어에 사용했다.
쿵!
리쉬옌이 가볍게 발을 굴렀을 뿐인데 밟고 있는 지면이 들썩였다. 작은 체구를 보면 절대 떠올릴 수 없는 강력한 힘이었다.
그와 동시에 뽑아서 허공에 던진 10개의 미니 방패가 팀원들이 모인 곳을 둥글게 감싼 채 위성처럼 돌기 시작했다.
리쉬옌의 몸에서 새어 나온 실낱같은 하얀 기류가 각각의 방패와 이어져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광경은 일순 경이롭기까지 했다.
청랑이 갑자기 하늘을 보며 경고성을 토했다.
커엉!
하늘을 향하던 팀원들의 두 눈이 경악으로 흔들렸다.
무언가 떨어지고 있었다.
너덜거리는 팔다리를 가지며 쏟아지는 무언가.
거의 동시에 리쉬옌이 준비하고 있던 스킬을 발동했다.
“포(包)! 성(城)!”
콰콰쾅!
폭음이 고막을 뒤흔들었다. 화염이 휘몰아쳤고, 땅이 뒤집혔다.
파헤쳐진 땅의 흙더미와 돌덩이들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폭격이었다.
하늘에서 갑자기 좀비 시체가 쏟아져 내리며 그것들이 쉴 새 없이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끄아아아악!”
가장 큰 비명을 질러 댄 것은 역시나 강이찬이었다.
하지만 땅이 뒤집힌 충격에 중심을 잃고 넘어졌을지언정 외피 하나 다친 사람이 없었다.
리쉬옌의 스킬 덕분이었다.
[포(包)]
사용자와 영력으로 이어진 영패(靈牌)를 이용해 단단하게 만든 영력으로 대상 하나를 완전히 감싸 보호한다.
영패 1개당 하나의 대상을 보호한다.
한꺼번에 10개의 ‘포’를 동시에 펼칠 수 있다.
[성(城)]
사용자와 영력으로 이어진 3개의 영패(靈牌)를 이용해 범위 안에 영력의 성채를 세운다.
3개의 영패 사이의 거리가 좁을수록 성채가 단단해진다.
‘성(城)’으로 팀 전체를 보호하고, ‘포(包)’로 팀원들 각각을 다시 한 번 보호한 것이었다.
모든 폭격이 끝나고 초토가 되어 버린 땅 위에는 시체 타는 냄새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시체를 이용한 폭격은 겨우 전초전일 뿐이었다.
컹컹!
한층 거세게 짖는 청랑의 외침이 끝난 직후, 갑자기 땅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청랑의 시선을 좇던 유민섭이 기겁한 표정으로 외쳤다.
“저건!”
말을 타고 달려오는 5기의 인마가 눈에 들어왔다.
해골 전마 위에는 검은 연기 같은 형체의 기사들이 올라타 있었다.
“데스나이트?”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곳 ‘망자의 전장’에 등장하는 데스나이트는 보스 몬스터 켈카두스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데스나이트가 등장했으니 기겁할 수밖에.
하지만 유민섭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가벼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내 차례네.”
린디웨였다.
“리쉬옌!”
“네!”
린디웨의 부름에 리쉬옌이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그 손짓을 따라 허공에 있던, 영패라 불리는 10개의 미니 방패 중 4개가 움직였다.
각각 2개씩의 영패가 청랑과 린디웨의 주변을 위성처럼 맴돌기 시작했다.
“가자, 청랑!”
“컹!”
1명과 1마리가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갔다.
“같이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유민섭이 묻자 리쉬옌이 다시 허공을 가리켰다.
저 멀리 거대한 새 떼가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두 발로 또다시 좀비의 시체를 움켜잡고 날아오는 새들이었다.
“저는 여기서 팀원들을 보호합니다.”
“가라, 청랑!”
린디웨의 명령에 청랑이 지면을 파헤치며 세차게 달려 나갔다.
마주 달려오는 5기의 데스나이트가 손에 연기처럼 기다란 랜스를 만들어 냈다.
아우우-!
긴 하울링과 함께 묵색의 영력이 피어올라 청랑의 온몸을 휘감았다.
청랑의 몸을 감싼 영력이 소용돌이처럼 휘돌더니, 어느새 앞이 뾰족한 형태로 변해 주변의 바람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던 린디웨가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작은 구슬들, 술석(術石)을 앞으로 내쏘았다.
“벽우(霹雨)!”
청랑을 넘어 데스나이트를 향해 날아간 5개의 술석이 허공에서 푸른빛과 함께 깨져 나갔다.
뒤이어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갑자기 새파란 스파크가 튀었다.
콰르릉!
‘벽우(霹雨)’라는 이름의 스킬. 그 이름 그대로 벼락의 비가 쏟아졌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벼락에 맞서 데스나이트들이 다급히 랜스를 머리 위로 회전시켰다.
팟, 파팟!
검은 연기 같은 형태의 랜스와 푸른 벼락이 부딪칠 때마다 검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청랑이 도착했다.
크아앙!
거센 포효와 함께 땅을 박찬 청랑이 데스나이트의 몸뚱이로 육탄공세를 날렸다.
청랑의 몸을 휘돌고 있던 날카로운 소용돌이가 데스나이트의 몸통을 꿰뚫었다.
그 직후, 청랑이 허공을 향해 앞발을 밀어내듯 내밀었다.
턱!
둔탁한 소음이 울리는 사이, 청랑의 뒷발마저 허공을 디뎠다.
네 발로 벽을 짚은 것처럼 순식간에 방향을 바꾼 청랑이 보이지 않은 벽을 박차며 방향을 바꿔 몸을 날렸다.
콰직!
갑자기 거대해진 청랑의 주둥이가, 또 다른 데스나이트가 타고 있던 해골 전마의 다리뼈를 그대로 으스러트렸다.
땅에 내려선 청랑의 몸뚱이 위로 해골 전마의 사나운 발굽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청랑은 이미 땅을 박차고 해골 전마의 범위에서 벗어난 후였다.
청랑에게 꿰뚫려 어깨가 통째로 터져 나간 데스나이트가 휘청거리면서도 빠르게 터져 버린 어깨와 팔을 복구했다.
하지만 그사이에 생긴 빈틈으로 벼락이 내리꽂혔다.
콰앙!
폭음과 함께 데스나이트의 머리가 터져 나가더니, 해골 전마가 갑자기 힘을 잃고 와르르 무너져 뼈 무더기로 변했다.
그리고 뒷다리를 잃고 비틀거리는 해골 전마 위에서 가까스로 중심을 잡던 또 다른 데스나이트 역시 똑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회전시키는 랜스의 방향이 틀어지는 순간 빈틈을 놓치지 않고 쏟아진 벼락에 온몸이 터져 버린 것이었다.
그사이 ‘벽우’의 효과가 끝이 났다. 남은 3기의 데스나이트가 지체 없이 거리를 좁혔다.
살짝 아래로 향한 랜스의 뾰족한 끝이 정확하게 린디웨와 청랑을 노리고 쇄도했다.
텅, 끼이익!
하지만 둘 앞에 영패를 매개로 펼쳐진 반투명한 방패가 그것을 막아 냈다.
저 뒤에서 리쉬옌이 펼친 ‘간(干)’이라는 스킬이었다.
기묘하게 방향이 비틀린 랜스가 방패를 긁으며 옆으로 비켜 나갔다.
청랑과 린디웨는 그렇게 만들어진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아우우우!
“광격(光擊)!”
***
바크론의 아래턱이 연달아 움직이며 쉴 새 없이 따닥거리는 소리를 울려 댔다.
얼굴의 절반은 이미 땅에 파묻힌 채였고, 몸의 왼쪽은 뼈들이 사라져 오른쪽 팔과 다리만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개골 위로 거대한 망치가 아름다운 아치를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꽈앙!
박살 난 두개골 뼈가 사방으로 터져 나가며 그렇게 세 번째 바크론이 소멸되었다.
쏴아아아-!
바크론의 두개골이 있던 자리에 날카로운 회색 창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준혁은 이미 몸을 피한 후였다.
“후우, 후!”
준혁이 조금은 힘겹게 숨을 고르며 손에 든 망치를 무상곤의 형태로 바꾸었다.
그리고 남아 있는 2기의 켈카두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성가신 새끼들. 이제 우리 메인이벤트 들어가자. 응?”
준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다른 이상 현상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