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받고 각성 더!-34화 (34/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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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손님#2-

안개와도 같은 묵색의 기운이 풀썩 피어올라 준혁의 온몸을 감쌌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여자가 기겁을 하며 외쳤다.

“어? 자, 잠깐! 싸우러 온 거 아니야!”

여자가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양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준혁의 뒤쪽에서도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여기서 싸웠다가는 난리 나는 거 몰라요?”

“굳이 엽사한테 안 덤벼도 자살할 방법은 많다고! 그것도 배면계 사상 최강의 괴물한테!”

앞쪽의 여자가 한 번 더 외친 후에야 준혁은 영력을 거둬들이며 뒤를 확인했다.

뒤쪽에 나타난 사람도 여자였는데, 이쪽은 오른손에 새하얀 영력을 뭉쳐 들고 있었다.

준혁은 방향을 틀고 뒷걸음질 쳐 두 여자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곳까지 물러선 후에야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우선은 얘기부터 좀 나눴으면 하는데?”

그리고 뒤늦게 두 여자가 ‘영화’를 이용해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앞쪽에 나타났던 푸른 영력의 여자는 피부색부터가 짙은 흑인이었고, 뒤쪽에서 나타난 하얀 영력의 여자는 준혁과 같은 동북아시아 계열이었다.

“일단 소개부터. 내 이름은 ‘린디웨’고, 직업은 술사.”

흑인 여자가 먼저 말했고, 동북아시아 계열의 여자가 뒤이어 제 이름을 말했다.

“저는 ‘리쉬옌(李詩姸)’이에요. 편하게 ‘리’라고 불러요. 직업은 ‘투사’고, 방어 계열입니다.”

준혁은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방금 말했잖아. 얘기 좀 하자고.”

“무슨 얘기?”

“지금 시스템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모르지는 않잖아?”

준혁의 눈이 두 여자를 꿰뚫어 볼 듯 살폈다.

‘둘 다 아무리 높아도 천원급(天元級). 못 이길 건 없다.’

배면계 시스템에서는 혼원급 아래가 천강급(天綱級)이고, 그 아래가 천원급이었다. 즉, 두 사람 다 준혁보다 두 단계 아래 수준이라는 뜻이었다.

‘일단 얘기를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어.’

애초에 혼원 길드를 만든 이유 중에 배면계 시스템에서 귀환한 동료 혹은 적을 끌어들인다는 목적도 있었다.

상황만 보자면 그 목적대로 일이 풀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따라와.”

준혁이 먼저 앞장섰고, 린디웨와 리쉬옌이 그 뒤를 따랐다.

‘음?’

그때 문든 준혁의 발걸음을 잡는 무엇인가가 머릿속을 스쳤다.

‘뭐지?’

갑작스레 위화감이 몰려왔다.

‘굳이 엽사한테 안 덤벼도 자살할 방법은 많다고! 그것도 배면계 사상 최강의 괴물한테!’

린디웨가 준혁이 거는 싸움을 피하면서 외쳤던 그 말.

뭔가 이상한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뭐가 이상한지는 알 수 없었다.

‘뭐지?’

괜히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듯한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가 없어 그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린디웨가 기다리지 못하고 물었다.

“왜 그래?”

“응? 아, 아니.”

당장 명확하지 않은 느낌에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겨우 천원급인 두 사람을 상대하면서 괜한 걱정을 하는 게 오히려 시간 낭비였다.

***

“그래서 할 얘기라는 건?”

준혁이 린디웨와 리쉬옌을 데리고 간 곳은 선수 시절 사용하던 실내 훈련장이었다.

강태웅에게 부탁해, 김준석이 무훈 길드의 개인 훈련장을 사용하게 된 후부터 찾지 않은 곳이었다.

입을 연 사람은 린디웨였다.

“지금 시스템 상황 어디까지 알고 있어?”

“내가 찌개냐? 어디서 간을 봐? 갖고 있는 패부터 까고 시작하자. 응?”

“성질머리하고는…….”

“말이나 해.”

“하아! 알았어.”

린디웨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배면계에서 복귀한 건 1년 전이야.”

“1년 전?”

“응. 작년 4월 경.”

“배면계에 강제 소환 당한 건?”

“그건 재작년 12월이었고.”

“으음…….”

준혁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해 보았다.

현실과 배면계의 시간은 흐르는 속도가 달랐다.

과거 준혁은 배면계에서 10년의 세월을 보냈지만, 현실에서는 겨우 2개월 정도가 지났을 뿐이다.

즉, 현실의 1개월이 배면계의 5년 정도라고 볼 수 있었다.

“내가 배면계에서 복귀한 게 9년 전 2020년 9월이었고, 재작년이면 2027년 12월이지?”

2020년 9월부터 2027년 12월까지는 총 87개월이다.

현실에서 87개월이 흐르는 동안 배면계에서는 435년 정도가 흘렀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린디웨와 리쉬옌은 현실에서 4개월 정도 후에 복귀했으니 배면계에서는 20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 셈이었다.

그렇게 계산하니 문득 드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배면계 시간으로 따지면 나하고 너희 사이에 400년 넘는 시간 차이가 있는 거잖아?”

“그렇지.”

“그럼 내가 나오고 너희가 들어가기 전에 들어간 사람이 또 있어?”

“아마 있을 거야. 배면계의 신수라는 괴물들의 봉인은 언제 풀릴지 알 수 없으니까.”

“역시…….”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아무튼 그렇게 복귀했고, 그다음 이야기는 뭐야?”

“그런데 우리는 배면계의 신수들을 모두 봉인하고 복귀한 게 아니야.”

“뭐?”

준혁의 얼굴에 짙은 불신이 번졌다.

그 지독한 배면계 시스템이 임무도 끝내지 못했는데 돌려보내 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린디웨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가정하에 내릴 수 있는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시스템이 엉키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였다는 건데.’

준혁의 그런 생각을 눈치라도 챈 듯 린디웨가 입을 열어 말했다.

“시스템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게 아마 그때부터인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그렇다고 봐야지.”

“아무튼 복귀한 당시에는 영력이 봉인돼 있었어. 그러다가 갑자기 영력이 되돌아왔는데…….”

“작년 11월?”

“맞아.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어. 그렇게 영력이 돌아온 후에 리쉬옌과 연락이 닿았고…….”

살짝 말끝을 흐린 린디웨가 리쉬옌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리쉬옌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도 그 전의 과정은 비슷해요. 그렇게 영력을 되찾았고, 린디웨에게 연락을 했죠. 아, 배면계에서는 우리 두 사람이 마지막 생존자라 서로 의지하며 지냈거든요. 어쨌든 그래서 린디웨가 있는 마잉타와로 건너갔어요.”

“마잉타와는 내 조국인데… 우리나라가 던전 등장 후에 무정부 상태가 되는 바람에, 힘만 있으면 꽤 편한 곳이 됐거든.”

“그렇게 넘어가서 린디웨랑 같이 던전을 공략하면서 지냈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준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들은 공략 끝난 후에 게이트가 이상해지는 걸 못 겪은 건가? 나는 한 던전만 꾸준히 공략해서 그랬던 걸 수도 있으니…….’

그리고 두 사람의 이야기가 본론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다가 이상한 놈을 만났어.”

“이상한 놈이라니?”

“마잉타와는 무정부 상태다 보니 각성자 등록 같은 절차도 따로 없거든. 그래서 아무렇게나 사람 모아서 마구잡이로 공격한단 말이야. 물론 그 나름의 규칙 정도는 있지만, 그리 빡빡하지도 않고.”

“그런데?”

“던전 공략이 끝날 쯤에 같이 들어간 놈 하나가 다른 헌터한테 이상한 걸 던지더라?”

“음?”

이 이야기는 준혁이 이곳에 오기 직전에 던전에서 겪은 바로 그 상황이었다.

“그래서?”

“저게 뭔가 싶어서 지켜봤는데, 던전 안에 변수가 생기는 거야.”

“변수?”

준혁은 형의 경우를 떠올렸다.

김준석은 갑자기 새로운 몬스터가 나타나 저주를 걸었다고 했다.

“보스 몬스터의 강화형이 허공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그 뭔가를 맞은 헌터를 대뜸 죽이더라고.”

“그냥 죽였다고?”

준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던전에 따라 다른 변수가 생기는 건가? 아니면 다양한 종류의 작업을 하는 건가?’

다음 이야기는 리쉬옌이 이었다.

“그런 후에 갑자기 나타났던 그 몬스터도 허공으로 꺼지듯 사라졌어요.”

“사람 하나를 죽이고 사라졌다?”

“이상한 건 그다음이에요.”

“또 있어?”

준혁이 바짝 긴장하며 한층 귀를 기울였다. 어쩌면 이 이야기가 가장 중요할 것 같았다.

“죽은 헌터의 시체가 분해되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연기처럼 변해서 흩어져 버렸어요.”

“연기?”

리쉬옌의 말 중 귀에 와 닿는 단어 하나.

준혁은 그 말을 한 번 입에 담고는 머릿속으로도 그 단어를 계속 되뇌었다.

‘잠깐! 연기? 설마?’

준혁이 흠칫한 표정으로 린디웨와 리쉬옌을 보았고, 두 사람은 곧장 고개를 주억거렸다.

답은 린디웨가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거, 영력 맞아.”

“헌터의 몸이 분해되었는데 영력이 되어 흩어졌다?”

“단순히 영력이 아니야. 마나와 섞인 영력이었어.”

“마나와 섞여? 아니, 그보다 마나를 느낄 수 있어?”

준혁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유민섭이 스킬을 사용할 때나 최유나가 덤빌 때 이질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었다.

막연하게 그것이 마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위화감과, 마나를 감지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내가 술사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몰라. 아무튼 나는 마나가 느껴져. 그리고 그 연기에는 마나와 영력이 반죽처럼 섞여 있었어.”

“그래서 그게 어떻게 됐는데?”

이어진 준혁의 물음에 린디웨가 처음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몰라.”

“모른다고?”

“응. 그렇게 흩어진 후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거든.”

“쯧! 똥 싸다가 중간에 끊는 것도 아니고.”

“놈이 던진 물건이 뭔지 직접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어.”

“그렇군.”

준혁은 문제의 그 물건을 하나 들고 있었지만, 일단 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역시 한국에서만 일을 벌이는 게 아니었어.’

그러면서 또 한 번 심각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기혁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들었다는 부분이었다.

‘조만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꽤 불길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 얘기에, 준혁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린디웨와 리쉬옌을 보았다.

‘충분히 전력이 될 것 같기는 한데 말이지.’

배면계에서 천원급은 최소 한 가지 스탯이 999에 이르러야 얻을 수 있는 등급이었다.

즉, 눈앞의 두 사람이 어지간한 S급 헌터는 가지고 놀 수 있는 수준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이 어쩌면 흑막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존재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준혁이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는?”

“TV를 통해 봤어. 화려하게 데뷔하신 ‘흑태자’ 님을 말이야.”

“아, 그 별명은 좀 넣어 두는 걸로 하고.”

준혁이 와락 인상을 구기며 하는 말에, 린디웨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게이트 돔에서 찍힌 사진을 보고 바로 알았지. 이 남자 ‘엽사’구나, 하고 말이야.”

“엽사라면 이 현상에 대해 알고 있을 것 같아서 찾아온 겁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이 현상이 던전을 떠나 큰 위협이 되는 거라면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요.”

준혁은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표정만으로 뭔가를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나도 아는 거 없는데?”

준혁의 말에 리쉬옌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없다고요?”

“어. 뭐, 던전 쪽의 시스템과 배면계의 시스템이 엉키고 있는 느낌이다. 딱 여기까지밖에 모른단 말이지.”

아직은 그 이상한 구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가 아니었다.

당연히 유민섭에 관한 이야기나 던전 게이트가 깨질 때의 현상, 게이트 돔의 이상 상태도 말하지 않았다.

“젠장! 괜히 왔네.”

린디웨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 사이, 준혁은 두 사람을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피아 구분이 안 되면…….’

같이 움직이는 건 위험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복종시키면 그뿐.’

그런 후에 좀 더 자세한 얘기를 하는 게 안전했다.

“내가 제안 하나 하자.”

“제안?”

“내 밑으로 들어와.”

“뭐?”

“그럼 나도 알고 있는 것들을 좀 더 풀어 볼 생각이 있거든.”

“뭐야? 그럼 지금 우리한테 거짓말한 거야? 우리는 전부 말했는데?”

“전부 말했는지 안 했는지 내가 알 수 없잖아? 그러니 선택해. 내 손을 잡든가, 여기서 뒈지든가.”

준혁의 온몸에서 짙은 영력이 폭풍처럼 거세게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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