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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장민호#2-
‘부러진 데는 없지?’
장민호는 제 상태를 확인했다.
시야는 여전히 암전된 채였다. 아직 눈을 뜨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눈을 뜨기 싫어서, 정확하게는 정신을 차리고 싶지 않았다.
장민호는 벌써 10분 전에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눈을 뜨면 그 무서운 얼굴을 또 보게 될 거 같아 그대로 기절한 척하고 있었다.
그때 장민호의 귓속으로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 자식, 정신 차린 거 같은데?”
“어? 그래요?”
김지후와 유민섭의 목소리였다.
“정신 차린 거 맞네. 야, 눈 떠라. 방금 움찔하는 거 다 봤다.”
‘싫다.’
“어쭈? 이제 대놓고 고개까지 젓고 있네?”
이젠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일어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 김지후라는 악마 같은 남자가 자신을 그냥 두고 갈 것 같지도 않았다.
“후!”
짧은 한숨과 함께 눈을 뜬 장민호의 시야에 흐릿하게 누군가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리고 점차 선명해지는 시야.
“하아!”
다행히 장민호 자신의 얼굴은 아니었다. 김지후는 다시 원래의 그 잘생긴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정신 차렸냐?”
자신을 향해 씩 웃는 김지후의 얼굴에, 장민호가 반사적으로 누워 있던 소파에서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바닥을 내리찍은 것은 장민호의 두 무릎.
“살려 주세요!”
준혁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장민호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언제 너 죽인다고 했냐?”
“잘못했습니다!”
“뭘?”
“그냥, 전부 잘못했습니다!”
“일단 거기 소파에 앉아라.”
“넵!”
벌떡 일어난 장민호가 재빨리 소파에 앉았다. 정확하게는 소파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릎 꿇지 말고 그냥 앉아.”
“네!”
그제야 장민호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쉰 준혁이 유민섭을 향해 고갯짓을 하자, 유민섭이 계약서 1장을 내밀었다.
“아까 말씀하신 조건에 맞춘 계약서입니다. 아, 김지후 헌터에게 절반을 준다는 조항은 뺐습니다. 길드 법무팀 검토는 끝났는데, 확인이 필요하시면 따로 확인한 후에 사인해도 됩니다.”
장민호가 빠르게 계약서를 훑었다. 일반적인 길드 가입 계약서와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장민호는 쉬이 사인을 하지 못했다. 준혁을 힐끔거리며 입술만 달싹거릴 뿐이었다.
그 모습에 조금 답답해진 준혁이 물었다.
“왜?”
“음… 그, 그게…….”
“말해.”
“그, 야, 약속을…….”
“무슨?”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뭐?”
되돌아오는 준혁의 목소리가 살짝 뾰족하다.
장민호가 황급히 시선을 테이블로 처박았다. 하지만 입까지 다물지는 않는다.
“그, 그게, 저도 최소한…….”
“최소한? 최소한, 뭐?”
“최소한 밥은 제대로 먹고, 걱정 없이 잠도 좀 자고 싶고…….”
“그래서? 약속을 해 달라?”
“약속보다는… 계약서에 명시를 좀…….”
준혁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면서도 제 할 말은 끝까지 다 하는 장민호였다.
그 모습에 준혁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픽 터트리고 말았다.
“이거 생각보다 희한한 캐릭터네? 알았다. 까짓것, 해 준다.”
장민호의 고개가 전광석화의 속도로 올라왔다.
“정말입니까?”
“이리 줘 봐.”
준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민호가 계약서를 쭉 밀었다.
그리고 준혁은 펜을 들여 계약서 끝부분에 새롭게 무언가를 적었다.
“됐냐?”
되돌아온 계약서를 읽는 장민호의 시선은 아까처럼 대충 훑는 게 아니었다. 글자 하나, 아니 자소까지 낱낱이 해체할 기세로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역시나 주저하는 표정으로 준혁을 바라봤다.
“왜?”
“이게… 그, 내용이…….”
24조. 신변의 보호
1. ‘을’은 의문의 침입자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아니한다.
2. 1의 내용은 ‘갑’과의 계약이 유지되는 동안 유효하다.
3. ‘을’의 고의 혹은 실수에 의한 잘못이 발생했을 때, 해당 조항은 일시적으로 무효하다.
4. 잘못의 가부는 ‘갑’의 판단에 의거한다.
혼원 길드에 속해 있을 때만 유효하고, 뭔가 잘못을 했을 때는 또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그게 잘못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계약서상 ‘갑’인 혼원 길드의 판단이다. 아마 혼원 길드가 아닌 김지후의 개인적인 기준일 가능성이 컸다.
정황으로 보면 이건 노예 계약서나 다름없었다.
우물거리는 장민호를 보며 준혁이 싸늘한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싫어?”
“아뇨, 싫다는 것까지는 아닌데…….”
준혁이 대뜸 계약서를 도로 집어와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럼 하지 마.”
찌익!
“하겠습니다!”
절규에 가까운 장민호의 외침이 터지자마자 준혁의 손이 멈췄다. 계약서는 벌써 절반이 찢어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할 거야?”
“예!”
단호하게 대답한 장민호가 계약서를 되돌려 받았다.
뒤이어 유민섭이 장민호에게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접착용 투명 테이프였다.
결국 장민호는 직접 투명 테이프로 이어붙인 노예 계약서에 직접 사인을 해야 했다.
세상은 갑의 의지에 따라 굴러간다는 걸 새삼 실감한 장민호였다.
물론 그 이전에 자신이 갑이었다는 사실 따위는 장민호의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계약서 사인까지 마무리한 후, 장민호가 준혁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런데요…….”
“왜? 또 할 말이라도?”
“도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뭘?”
“그날, 저한테, 왜……? 도대체 저의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드셨는데요?”
계약을 한 후라 그런지 더 이상 말을 우물거리지 않는 장민호였다. 여전히 두 눈에 두려움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꽤나 당당해진 태도였다.
‘이거 캐릭터 진짜 신기하네?’
생각해 보니 장민호는 그날 밤, 그렇게 뼈가 부러지던 중에도 빠릿빠릿하게 무릎을 꿇고 이등병 같은 태도를 유지했었다.
“궁금해?”
“예, 진짜 궁금합니다.”
“흐음…….”
잠시 고민하던 준혁이 피식 웃었다.
“하긴 이 정도는 알려 줘야지.”
말을 마친 준혁이 쓰고 있던 매구탈을 벗었다. 드러난 준혁의 진짜 얼굴에, 장민호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삿대질까지 하며 외쳤다.
“어! 다, 당신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병원에서 형을 고쳐 달라고 했던 사람이었다. 나중에 그가 야구선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었다.
“그, 그…….”
“그? 그 뭐?”
“그 혹시 그때 그 형님이라는 분이 혹시?”
준혁이 앙심을 품을 만한 일이라고는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살았지.”
“네? 그, 그런데 왜?”
“내가 살렸다, 인마. 엘릭서 구해다가.”
“그럼 저한테는 왜 그러신 겁니까?”
“네 말 믿고 일주일 있었으면 우리 형 진짜 죽을 뻔했거든. 이틀 만에 사람이 죽을 것처럼 변하더라.”
“아, 아니, 그게…….”
“그게 뭐?”
“그렇게 일주일을 버텼을 수도 있잖아요.”
“그게 내가 알 바냐? 당장 형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게 문제지.”
장민호의 얼굴에 억울함이 떠올랐다. 하지만 장민호로서도 그 당시 김준석이 일주일을 버틴다는 확신은 없었다. 그저 대충 그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말했던 것뿐이다.
“어쨌든 지금은 무사하신 거죠?”
“당연하지. 우리 형 잘못됐으면 네가 지금 두 눈 멀쩡히 뜨고 돌아다닐 수 있을 거 같냐?”
준혁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장민호에게는 그렇게 섬뜩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다행입니다.”
“그럼. 다행이지.”
“아, 그런데 그 형님 말인데요.”
“우리 형이 왜?”
“실례가 안 된다면 헌터 등급 좀 알려 줄 수 있을까요?”
준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은 길드거나 함께 던전을 공략하는 게 아니라면 등급을 묻는 건 실례였다.
그런데도 묻는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뭐, 해코지는 못할 테니까.’
준혁이 10년의 시간을 보낸 배면계는 극한의 환경이었다. 그런 곳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이 사람이 가진 본성이었다.
당연히 별의별 사람을 다 겪어 보았다.
그러다 보니 준혁은 직감적으로 사람을 읽어 낼 수가 있었다.
이 사람이 내 뒤통수를 칠 사람인지, 무조건 복종할 사람인지, 혹은 진심으로 친구로 지내다가 어느 순간 마음이 바뀌어 다른 꿍꿍이를 품는지까지 잡아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장민호는 준혁에게 무시무시한 공포를 품고, 그것을 바탕으로 복종하는 상태였다.
“F급.”
당시의 김준석은 F급이었기에 그렇게 대답했다.
“음…….”
“왜?”
“사실 병원에서 보았을 때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높은 등급의 헌터라면 제가 어지간하면 알고 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왜?”
“저주의 등급이 너무 높았습니다. 낮은 등급의 헌터가 들어갈 만한 던전 수준이 뻔한데, 그런 던전에서 당할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음?”
준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민섭을 돌아보았다.
기민한 유민섭은 잠깐의 대화로 두 사람의 이전 상황을 파악한 듯 곧장 입을 열었다.
“F급 서포터가 던전 공략 중에 저주를 당했다. 그런데 그 저주가 A급 사제가 풀 수 없는 수준이었다. F급 서포터가 들어갈 던전에서 그런 저주를 걸 정도로 강력한 몬스터는, 적어도 제가 아는 한에서는 없습니다.”
준혁의 표정이 변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말이 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한 준혁이 장민호를 향해 물었다.
“그 정도 저주를 걸 수 있는 몬스터가 나오는 던전은 몇 급이냐?”
“최소 10급입니다.”
던전은 공략 난이도를 급수로 나누는데, 1급이 가장 낮은 등급이었다.
던전이 최초로 등장한 이래 시간이 흐를 때마다 등장하는 던전의 공략 난도가 올라갔기 때문에 1급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장민호의 대답에 준혁은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이 그럴 리가 없는데?’
골드 드래곤의 레어가 11급 던전이었다.
10급 던전이라면 반드시 S급이 포함되어야 공략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F급 헌터가 들어갈 수 있는 던전이 아니었다.
준혁이 아는 자신의 형, 김준석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김준석은 누구보다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남자였다.
가족들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몸이 바스러지도록 일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일에 끼어든 적은 없었다.
그런 불의의 사고가 가족들에게 무엇보다 큰 상처라는 걸 이미 어린 시절에 겪어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준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 위험한 일에 휘말렸다고 봐야 했다.
“길드장님.”
“예, 김지후 헌터.”
옆에 있는 장민호가 준혁의 정체를 알고 있음에도 유민섭은 ‘김지후’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항상 그렇게 부르는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혹시 낮은 등급 헌터들 중에 그런 식으로 저주에 걸려 죽은 헌터들이 있는지 조사를 좀 해 줄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최우선으로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형한테 물어보고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시에 두 사람은 생각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그 일 때문인 것 같습니까?
-확신은 없어요. 그런데 우리 형이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할 위인이 아니거든?
-그렇게 들으니 더 이상한데요?
-그래도 너무 그쪽으로만 생각하고 파고들지는 맙시다. 그런 생각으로 조사하면 모든 게 그렇게 보일 테니까.
-그런 건 조심해야죠. 아무튼 알겠습니다.
빠르게 의견 조율을 마친 후 준혁이 장민호를 향해 말했다.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지 마라.”
“옙! 여부가 있겠습니까?”
“좋아. 눈치 빠른 게 마음에 들어.”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준혁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고, 장민호는 살살거리는 표정으로 준혁과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유민섭은 기가 찬 표정으로 장민호를 보았다.
‘예전에는 돈 밝히는 거 외에 이상한 놈이 아니었는데…….’
유민섭이 보기에도 확실히 캐릭터가 희한해진 것 같았다.
유민섭은 일단 지금의 자리를 마무리하기 위해 접객실의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정 비서님.”
(네, 길드장님.)
“장민호 헌터님 방 준비 끝났죠?”
(기본적인 가구와 전자기기들은 배치가 끝났습니다.)
“좋군요. 지금 갈 테니 안내 좀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유민섭이 장민호를 향해 말했다.
“계약 마무리할 겸 해서 집무실 좀 둘러보시죠.”
“아, 그거 좋죠.”
계약도 하기 전에 방부터 준비했다는 말에 장민호는 내심 조금은 우쭐한 기분이 되었다. 어쨌든 자신과 계약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물론 마주 앉은 김지후의 얼굴을 본 순간, 그 기분은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유민섭과 장민호가 접객실을 나간 후, 준혁 또한 급히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