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받고 각성 더!-28화 (28/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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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장민호#1-

‘하! 이런 기분 진짜 얼마 만이냐?’

햇살이 이렇게나 맑았던가.

내딛는 걸음이 이렇게나 가벼울 수 있을까.

가로수 가지에서 파릇파릇 올라오는 새순이 더없이 싱그러웠다.

‘벌써 봄이었네?’

계절마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문득 걸음을 멈춘 장민호는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의 풍경을 찬찬히 살폈다.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줄곧 감상했는데도 거듭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잠을 푹 자서 그런가?’

이토록 깊은 잠에 빠진 게 얼마 만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장민호는 고개를 저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건 숙면을 해서가 아니었다.

‘후후… 흑태자.’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는 흑태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곧 김지후를 만나기 때문이기도 했다.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는단 말이야.’

강이찬이 공개한 사진은 그만큼이나 아름다웠다.

흑검으로 몬스터를 일도양단하는 순간, 보스 몬스터인 크락크토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리는 그 순간, 호랑이 형태의 뇌전을 흩뿌리는 그 순간까지.

김지후의 강함은 장민호에게는 말 그대로 한 줄기 구원이었다.

심지어 휴대폰 배경 화면도 칠흑 같은 전신 판금 갑옷을 입은 김지후의 전신 샷이었다.

“후우, 후!”

몇 번이나 호흡을 고른 후에야 장민호는 건물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지난밤, 유민섭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길드 가입 건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다는 것과 김지후도 장민호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쫌 하긴 하지.’

최근 상태가 조금 안 좋기는 하지만, 장민호는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힐러였다.

“크흐흐흐!”

장민호는 저절로 솟구치는 입꼬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발길을 옮겼다.

사실 무엇보다 장민호를 설레게 만든 것은 김지후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사인을 받을까? 같이 사진 찍자고 하면 찍어 줄까?’

피시식, 또다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누군가 이런 장민호를 보았다면, 하나같이 제 눈을 의심했을 모습이었다. 그만큼 장민호의 멘탈이 약해졌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장민호는 문을 열고 들어가 곧장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안내 데스크 직원이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혼원 길드입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장민호라고 합니다. 유민섭 길드장님과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과거와 달리 정중한 태도로 대답하는 장민호였다. 그동안 꾸준히 베푸는 삶을 살면서 그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장민호는 가만히 빌딩 로비를 둘러보았다.

길드 특구라고 불리는 종로의 7층짜리 신축 빌딩이었다. 유민섭의 소유였는데, 빌딩을 통째로 혼원 길드의 사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양반 스케일 참 커.’

장민호도 돈은 많았다. 갖고 있던 현금 자산 중 80퍼센트를 기부했음에도 여전히 풍족하게 누리고 살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전(前) 무훈 길드장 유민섭의 스케일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헌터 특구로 자리를 잡으면서 그러잖아도 비쌌던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곳이 종로였다. 그 종로에 유민섭 소유의 빌딩만 무려 10개였다.

잠시 후, 유민섭의 비서가 돌아왔고, 장민호는 그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엘리베이터 안의 숫자가 바뀌는 것을 보면서, 꼭대기 층 접객실로 가는 복도를 걸으면서 장민호의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드디어 자유를!’

그리고 열린 문틈으로 서서히 드러나는 내부의 모습에 그대로 심장이 멎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몇 번 본 적 있는 유민섭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장민호의 시선은 오로지 김지후만을 향해 있었다.

‘눈부셔!’

사람에게서 후광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안 장민호였다.

“어서 오세요, 장민호 씨.”

“예. 잘 지내셨어요?”

“하하! 네. 이쪽은 우리 길드의 마검사 클래스 김지후 헌터, 그리고 이쪽은 사제 클래스의 장민호 씨. 서로 인사들 나눠요.”

준혁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장민호는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달려가 두 손으로 덥석 준혁의 손을 잡았다.

“뵙고 싶었습니다. 장민호라고 합니다.”

“김지훕니다.”

“듣던 대로 정말 굉장하십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뭘 들었는지, 어떤 게 굉장한지 조금도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장민호가 김지후와의 만남에 더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예. 일단 앉으시죠.”

“아, 네!”

장민호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준혁의 맞은편에 앉았고, 준혁은 그런 장민호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관찰했다.

‘살이 좀 빠졌나?’

양 볼이 움푹 팬 것이 확실히 야위어 보였다. 처음 보았을 때 광채가 날 것 같았던 매끈한 피부는 푸석푸석했고, 눈 밑에도 짙은 다크서클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표정만큼은 더없이 밝았다.

겉모습은 그동안의 피폐한 삶을, 표정은 지금의 심리 상태를 보여 주는 것이리라.

‘뭐, 이제는 별 감정 없지만…….’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을 정도로 별다른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날 밤, 그렇게 괴롭힌 후 깔끔하게 털어 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피폐한 모습에 딱히 미안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얌전히 돌려보낼 생각도 없었다.

‘이 정도로 좋은 패는 당연히 써먹어야지.’

구하기 힘들다는 힐러 중에서도 더 귀하다는 사제 클래스였다. 잘 써먹을 수 있다면 써먹는 게 좋은 법이다.

‘어떻게 한다?’

곰곰이 방법을 고민하는 준혁을 보며 장민호가 입을 열었다.

“제 조건은 별다를 거 없습니다.”

길드 가입과 관련된 의견 조율은 당연히 길드장인 유민섭의 몫이었다.

“말씀하세요.”

“다른 힐러들처럼 보장액 없어도 됩니다. 던전이든 게이트 돔이든 공략 후 분배 비율도 플러스를 요구할 생각 없습니다. 정확하게 n분의 1로 받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조건은 딱 하납니다.”

“저번에 말씀하신 보호?”

“네. 저의 안전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것. 그것을 위해 김지후 헌터님의 바로 옆집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비상 호출기 같은 거 설치해서 위급 시에 저를 구하러 와 주십시오. 그게 안 된다면 최소한 김지후 헌터님이 어디에 가시든 제가 뒤따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물론 사생활을 침해할 생각은 절대 없으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원하는 건 최소한의 안전 보장일 뿐이니까요.”

장민호는 미리 연습이라도 한 듯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장민호는 급히 눈동자를 굴려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유민섭은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진짜 결정권자인 김지후의 얼굴에는 표정 자체가 없었다.

‘부족한가?’

잠시 고민한 장민호가 황급히 조건을 바꿨다.

“하하! 그러고 보니 제가 깜빡한 게 있군요. 제가 받을 분배금의 절반은 당연히 김지후 헌터님께 돌릴 생각입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보호를 요구하는 건 염치없는 짓이죠.”

그 말을 끝냈을 때, 장민호는 김지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이거였……. 음?’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뭐, 뭐지?’

미소는 미손데 이상하게도 섬뜩한 느낌이 드는 미소였다.

장민호는 슬그머니 눈동자를 돌려 유민섭 쪽을 확인했다. 하지만 유민섭은 여전히 알 듯 모를 듯 애매한 표정을 짓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김지후의 입이 열렸다.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

“…네?”

장민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김지후를 보았다.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상황은 이해했다. 자신은 필요한 조건을 말했고, 김지후는 그것을 거부했다. 아주 간단명료하니 이해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저 김지후가 왜 저렇게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건 마치…….’

그거였다.

다 잡은 먹잇감을 앞에 두고 입술을 핥고 있는 맹수의 눈빛이었다.

그래서 이 상황을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설명이 부족했네. 일단 네가 걱정하는 그 사람이 밤에 침입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 수는 있어. 그런데 내 집 근처라거나 위치를 알려 달라는 건 안 되겠다는 얘기야.”

“그게 무슨……?”

장민호는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고, 이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유민섭 또한 마찬가지였다.

“김지후 헌터님, 지금 이게 무슨 이야깁니까?”

“음, 뭐랄까… 이야기하자면 좀 긴데…….”

“저번에 저한테는 장민호 헌터를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 말하는 걸 들어 보니 그게 아닌 모양인데요?”

“남자한테는 남에게 알릴 수 없는 비밀이 있죠.”

심각한 상황에서 농담을 던지는 준혁의 모습에 유민섭은 기가 찼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럴 사람은 아니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 긴 이야기, 나중에 제가 좀 들어야겠네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장민호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상황이나 대화의 내용이 이상한 건 차치하더라도 자꾸 기분 나쁘게 뒤통수를 살살 간질이는 위화감이 있었다.

‘뭐지?’

김지후가 자신에게 했던 말 중에 뭔가 이상한 이야기가 끼어 있는 것 같았다.

장민호는 천천히 김지후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설명이 부족했네. 일단 네가 걱정하는 그 사람이 밤에 침입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 수는 있어. 그런데 내 집 근처라거나 위치를 알려 달라는 건 안 되겠다는 얘기야.’

“흡!”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켠 장민호가 두 눈을 부릅뜬 채 김지후를 보았다.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김지후 헌터님?”

“어, 왜?”

그 대답에 장민호는 뒤늦게 또 하나를 깨달았다. 김지후가 자신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뭘?”

“저는 밤에 누군가의 침입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데요?”

반응은 유민섭에게서 먼저 나왔다.

“어, 그러고 보니 그거 단순하게 추측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닌 거 같은데요?”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준혁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눈치채는 게 너무 늦은 거 아냐?”

“네?”

지금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장민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갑자기 덮쳐 오는 맹렬한 위압감이 전신을 옥죈 탓이었다.

준혁은 그렇게 위압감을 유지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딱딱하게 굳어 있는 장민호의 옆에 털썩 자리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 친근하게 어깨동무까지 하며 말했다.

“이봐.”

“네, 네?”

“나 좀 봐.”

무시무시한 위압감에 정면만 쳐다보고 있던 장민호의 고개가 준혁 쪽으로 삐걱대며 돌아갔다.

“컥!”

숨이 턱 막혔다.

거울을 보는 것조차 두렵게 했던 얼굴이 바로 옆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장난스러운 얼굴로 무작정 온몸의 뼈를 부러트려 댔던 무시무시한 그 얼굴이었다.

장민호의 눈동자는 단숨에 초점을 잃고 방황했고, 그 낯빛은 시체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오랜만이야. 그치?”

자신과 똑같은 얼굴로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 광경에 현실감각이 송두리째 사그라지는 기분이었다.

지금 나를 보고 웃고 있는 나의 얼굴은 누구의 얼굴인가? 내가 너인가, 네가 나인가? 네가 나라면 나는 누구인가?

머릿속의 사유(思惟)가 바닥이 없는 무저갱을 정처 없이 헤맸다.

준혁이 만들어 낸 장민호의 트라우마는 그 정도로 무겁고 깊었다.

그 공포가 뇌리를 완전히 장악한 순간, 장민호는 아득해지는 정신과 함께 시야가 암전되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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