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
-8장. 게이트 다운?#3-
“이거 얼마나 합니까?”
동승석에 앉은 준혁이 운전석의 유민섭에게 물었다.
“왜요? 1대 사시려고?”
“나도 뭐 하나 사면 괜찮을 거 같아서요.”
“돈도 좀 모였을 테니 나쁘지 않겠네요. 나중에 딜러 소개해 줄게요.”
“오케이.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흠, 어디 조용하게 이야기할 데 없습니까?”
바로 대답이 나왔다.
“있습니다. 뭐, 심각하게 할 얘기라도?”
“네.”
“적당한 곳이 있습니다. 거기로 가죠.”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유민섭이 소유한 서울의 한 고급 오피스텔이었다.
건물은 오피스텔이지만 업무 공간은 아니었다. 유민섭이 개인적으로 쉬고 싶을 때 찾는 곳이었다.
두 사람은 한쪽 공간에 꾸며 놓은 바에 나란히 앉았다. 바 한쪽 끝에는 청랑이 엎드린 채 앞발을 베고 졸고 있었다.
청랑은 앞으로 계속 소환을 유지한 채 데리고 있기로 했다. 역소환했다가 다시 소환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쪼르르르.
글렌캐런 위스키 글라스에 호박색 액체가 담겼다.
그때 졸고 있던 청랑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술잔을 향해 다급하게 달려들었다.
“헙!”
깜짝 놀란 준혁이 술잔과 술병을 들어 올렸고, 유민섭도 황급히 잔을 들었다.
“얘, 뭡니까?”
유민섭의 물음에 준혁이 대답할 말을 찾기도 전에 청랑이 풀쩍 뛰어올랐다.
노린 것은 술잔이 아닌 준혁의 팔이었다.
두 앞발로 팔에 매달려 한참을 바동거렸다. 하지만 지금 청랑은 준혁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씨름을 하던 청랑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어?”
깜짝 놀란 유민섭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청랑이 더 빨랐다.
왕-!
딴에는 우렁차게 내뱉은 포효였지만, 그저 작은 강아지의 귀여운 울음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 소리. 문제는 청랑의 힘은 그 소리처럼 귀엽지 않다는 점이었다.
쾅!
청랑에게 가슴팍을 밀린 유민섭이 넘어졌고, 술잔에 담긴 술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S급이라고는 해도 압도적으로 높은 근력을 가진 청랑을 막을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유민섭이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귓전으로 낯선 소리가 들렸다.
찹, 찹찹!
고개를 돌려 보니 청랑이 바닥에 쏟아진 술을 미친 듯이 핥아먹고 있었다.
뒤이어 유민섭의 머릿속에도 괴이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절대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언어 같은 느낌의 소리였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감정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맛있어!
머릿속의 소음은 분명 ‘지휘권’ 스킬의 영향으로 흘러들어오는 생각의 교환이었다.
그 생각을 전달한 주체는 분명 열심히 술을 핥고 있는 청랑이었다.
유민섭의 시선이 준혁에게로 향했다.
“얘, 술도 마십니까?”
“나도 처음 봅니다.”
“오래 데리고 있던 녀석 아니었습니까?”
“배면계에 술이 있을 리 없잖아요.”
“그, 그런가?”
“그리고 나, 그때 미성년자였다고.”
그사이 구멍을 뚫을 기세로 바닥을 핥던 청랑이 고개를 홱 돌렸다. 이번에 쳐다본 것은 준혁의 손에 들린 술잔이었다.
“안 돼.”
끼이잉!
단호한 준혁의 말에 청랑이 꼬리를 축 늘어트리고 억울한 표정으로 끙끙거렸다.
“허, 그놈 참.”
얼른 몸을 일으킨 유민섭이 오목한 접시를 들고 와 진열장의 술 중 하나를 부어 주었다.
하지만 청랑은 그 술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허, 미치겠네.”
황당한 표정으로 한소리 하는 유민섭을 보며 준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얘, 술맛도 아는 모양인데요?”
“그게 무슨?”
“그냥 술은 거들떠보지도 않네. 이것도 나름 괜찮은 술인데.”
준혁이 아직도 손에 들고 있는 술병을 흔들며 물었다.
“혹시 이거 비싼 겁니까?”
“싱글 몰트 빈티지인데… 돈 있어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죠.”
대답을 한 유민섭의 시선이 청랑에게로 향했다.
끼이잉!
귀까지 접은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청랑의 모습이 처량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귀엽기까지 했다.
청랑의 스탯을 생각하면 절대 가질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저 동글동글한 얼굴과 사람을 연상시킬 정도의 표정을 보니 알면서도 그런 감정이 들었다.
“에라이! 오늘 처음 만난 기념으로 내가 쏘는 거다! 다음부터는 아무거나 줘도 먹어라. 알았지?”
왕, 왕!
청랑이 금세 살아난 표정으로 앙증맞게 짖어 댔다.
유민섭은 한숨을 탁 뱉으며 새로운 접시를 가져와 구하기 힘들다는 비싼 술을 부어 주었다.
촵, 촵촵!
무시무시한 기세로 술을 핥아먹는 청랑의 모습에,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허, 허허!”
그리고 청랑은 유민섭이 아끼는 그 술을 무려 반병이나 먹어 치웠다. 그런 후에는 유민섭이 깔아 준 방석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것도 뒤로 누워 배를 깐 채 코까지 고롱고롱 골면서.
겨우 분위기가 진정된 후에야 두 사람은 바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준혁이 호박색 술이 담긴 술잔을 들면서 물었다.
“술잔이 희한하게 생겼네요?”
술은 주로 소주만 즐기는 준혁에게 아래는 넓고 위는 좁은, 마치 호리병을 연상시키는 술잔은 꽤 낯선 느낌이었다.
“제가 싱글 몰트를 즐기는데, 이 잔이 괜찮습니다.”
“그래요?”
준혁에게 싱클 몰트 위스키를 따라 준 유민섭이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한 잔 드시죠.”
유민섭이 잔을 들며 하는 말에 준혁도 잔을 들었다. 그리고 단숨에 원샷.
“크으!”
짙은 탁성을 길게 흘려 내는 준혁의 리액션은 정확하게 소주를 마실 때의 그것과 같았다.
반면, 유민섭은 가만히 눈을 감고는 향과 맛을 진득하니 음미했다.
그 모습을 본 준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술 한 잔 마시고 시라도 한 수 읊을 기셉니다?”
“내 취향이니 존중해 주시죠. 큰맘 먹고 딴 빈티지를 준혁 씨가 소주처럼 마시고 있지만, 나도 아무 말 안 하고 있잖아요. 그러고 보니 개보다 술맛을 모르시네?”
“개가 아니라 늑대.”
“아무튼요. 취향 존중!”
무엇을 어떻게 즐기는가는 결국 본인의 취향대로 하는 것이다.
남이 거기에 대고 이게 맞네, 저게 맞네 하는 건 당연히 실례였다.
그렇게 몇 잔의 술을 비운 후 유민섭이 운을 뗐다.
“그래서 하려는 이야기가 뭡니까?”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네?”
“시스템 엉키는 거요.”
유민섭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이내 그 의미를 이해하고 다급히 물었다.
“사람이 시스템을 건드렸다고요? 그게 가능합니까?”
“일단 내가 본 게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서두를 연 준혁은 아까 게이트가 소멸할 때 보았던 현상에 관해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유민섭은 잠시 입을 다문 채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정리했다.
“배면계에 사람들이 끌려가는 건 1회성이 아니다. 그리고 준혁 씨와 다른 시기에 배면계에 간 누군가도 있을 수 있다. 그중 1명이 지금 이 일을 벌인 것 같다. 이런 이야깁니까?”
“맞습니다. 1명이 아니라 여러 명일 수도 있고요.”
“그렇다면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하네요. 누군가가 지금 이 상황을 계획했다.”
“그렇죠.”
유민섭이 비어 있는 잔에 다시 술을 채운 후 이야기를 이었다.
“어차피 시스템은 엉키고 있었고, 우리는 그 상황을 알고 있었죠. 참고로 저는 어쩌다 보니 거기 묶여서 반쪽짜리가 돼 버렸고. 아무튼 이렇게 새삼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는 거 같습니다만?”
“막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새삼스럽게 그렇게 생각한 이유요.”
“시스템 자체의 문제로, 2개의 시스템이 엉키는 거면 어떻게든 거기에 맞춰서 움직여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목적을 갖고 저지른 일이라면, 그 목적이 옳은 방향일까요?”
유민섭이 고개를 내저었다. 좋은 의도로 하는 일이라면 이렇게 몰래 일을 꾸밀 리가 없었다.
준혁이 말을 이었다.
“배면계의 짐승들은 괴수, 영수, 신수로 구분합니다. 그중 영수급이 드래곤과 맞먹어요. 그리고 신수는 죽이지도 못합니다. 봉인시킬 뿐이지. 그런 신수가 무려 100여 마리예요.”
유민섭은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했다.
S급 3명에 A급 15명이 공략했는데도 겨우 죽일 수 있었던 게 드래곤이었다. 그런데 그 드래곤보다 강한 몬스터가 100여 마리나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준혁의 강함을 생각하면 믿지 않을 방법도 없었다.
그런데 점입가경.
“그 신수는 저도 목숨 걸고 봉인시켜야 합니다.”
도대체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그 배면계라는 곳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유민섭을 보며 준혁이 말을 이어 갔다.
“그런 놈들이 세상에 풀린다고 생각해 봐요.”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솔직히 세상 사람들이 위험해지는 건 상관없어요. 나는 최소한 죽지 않을 자신은 있으니까.”
“그렇겠죠.”
유민섭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준혁이 정의의 히어로 같은 캐릭터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우리 형이랑 형수님, 그리고 조카가 위험해지는 꼴은 못 봅니다.”
차라리 이런 분명하고 개인적인 이유가 훨씬 더 믿음이 갔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유민섭이 갑자기 피식 웃으며 말했다.
“되게 사람 섭섭하게 하시네? 우리 인연도 있는데 거기에 나도 좀 끼워 주면 안 됩니까?”
준혁이 묘한 표정으로 유민섭을 쳐다보았다.
드립이라도 칠 줄 알았던 유민섭은 괜히 무안해져서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막고 싶다는 거죠?”
“그렇죠.”
“이렇게 합시다.”
뭔가 계획이 있는 듯 꺼내는 이야기에 준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얘기를 꺼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탓이었다.
“그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게 있는데, 그걸 조금만 비틀면 될 거 같아서요.”
“얘기해 보세요.”
“일단 준혁 씨가 확답을 해 줘야 할 게 있습니다. 그게 전제가 돼야 진행할 수 있으니까요.”
“그게 뭔가요?”
“각성자 등록을 해 줘야 합니다.”
“네?”
준혁이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유민섭이 바로 대답해 주었다.
“방법은 있어요. 그리고 어차피 얼굴을 바꿀 수 있으니 가짜 신분 하나 만들어서 그걸로 하자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형님이나 가족들이 위험해지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건 뭡니까?”
“2가지. 첫째는 지금 시스템에 손을 대고 있는 놈을 유인할 수 있다는 겁니다. 배면계와 관계 있는 사람이면, 준혁 씨의 활약을 보고 배면계 경험자라는 걸 알 테니까요. 부가적으로 그 ‘누군가’와 관계없는 배면계 경험자들을 만날 가능성도 있죠. 어쩌면 조력자를 얻을 수도 있고.”
“두 번째는요?”
“가짜 신분이기는 해도 ‘공식적인’ 활동이 가능하다는 거죠.”
준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꼭 필요하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유민섭이 부연 설명을 했다.
“그렇게 되면 저하고 준혁 씨 관계도 정상적으로 묶입니다. 솔직히 나 불안하거든.”
“불안해요?”
“생각해 봐요. 나 지금 준혁 씨 없으면 던전 공략도 못한단 말입니다. 완전 쓸모없어진 거지. 그러니까 준혁 씨를 어떻게든 묶어 둘 장치가 필요하단 겁니다.”
“우리 사이에 뭐 그런 걱정까지.”
“인간적인 그런 거 안 좋아한다고 했던 분이 누구시더라?”
“크큭! 알았습니다. 확실히 계약으로 묶는 게 낫겠네요. 그렇게 하죠.”
인간적인 정 혹은 인연으로 묶인 관계는 언제든지 인간적인 이유로 틀어질 수 있다.
차라리 명확한 계약 관계가 훨씬 서로를 위해 좋다.
고개를 끄덕인 준혁이 가장 중요한 걸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각성자 등록을 하자는 겁니까?”
“지금까지 그게 고민이었는데… 때마침 아주 좋은 수단이 생겼습니다.”
“그게 뭡니까?”
준혁의 물음에 유민섭이 한쪽 구석에 대자로 뻗어 자고 있는 청랑을 가리켰다.
“술랑, 아니 청랑 저 녀석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