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
-8장. 게이트 다운?#1-
모든 헌터는 각성자다.
하지만 모든 각성자가 헌터의 길을 택하는 건 아니었다.
헌터가 되어 던전에 들어간다는 것은 몬스터와 싸워야 한다는 의미였고, 이는 언제든 목숨을 잃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중 헌터 기피 현상이 가장 도드라지는 포지션이 바로 힐러였다.
사제 클래스, 혹은 치유 계열의 마법사 클래스들의 헌터 기피율이 극단적으로 높았다.
F급만 되어도 병원 응급실에서 높은 연봉을 제시하며 모셔 갔다.
C급 이상이면 프리랜서를 해도 1년에 수억 원의 돈을 벌었으며, B급 이상은 한 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수천만 원이 오갔다.
힐러들이 던전을 꺼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 탓에 헌터계에서는 힐러 기근 현상이 일어나고, 간혹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오고는 했었다.
하지만 사회의 여론은 반대였다. 힐러들의 그러한 선택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영구적인 장애가 남을 수 있는 부상도, 힐러의 손길을 받은 후 수술하면 후유증 없이 완쾌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당연했다.
장민호도 그중 1명이었다.
더군다나 마법사가 아닌 사제 클래스이기에, 그의 가치는 더욱 높을 수밖에 없었다.
사제들의 축복 계열 스킬 덕분이었다.
일반인이 받으면 면역력이 향상되고, 몸의 기력을 회복시켜 주며, 잔병치레를 막아 준다는 연구 결과까지 나와 있기 때문이었다.
“미치겠네…….”
깊은 밤, 장민호의 고급 오피스텔에는 불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왜… 왜 안 오는 건데?”
장민호는 하루하루 말라 죽는 느낌이었다.
벌써 4개월째였다.
그 사건,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남자가 들어와 밤새도록 뼈를 부러트렸던 그 사건 이후, 장민호는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문제의 그놈이 언제 올지 몰라 불안에 떨다 보니, 공황장애를 앓는 수준으로 정신이 피폐해졌다.
수면제 같은 것은 소용도 없었다. 몸에 강제로 변화를 일으키는 작용을 독으로 인식한 각성자의 육체가 약효를 지워 버리는 탓이었다.
그 탓에 처음으로 A급 헌터의 육체가 저주스러울 정도로 장민호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동안 모아 놓았던 돈의 80퍼센트를 사회 곳곳에 기부했다.
이전에는 이미지 관리를 위해 분기에 한 번 정도 하던 무료 축복 봉사도 거의 사흘에 한 번 꼴로 하고 있었다.
할 때마다 비싸기 짝이 없는 마나 포션을 물배가 찰 정도로 들이켜야 하는 일임에도 기를 쓰고 봉사 활동을 나갔다.
반성하라던 그놈의 말 때문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놈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제길!”
한참을 홀로 고민에 잠겨 있던 장민호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책상 서랍을 열어 그 안에 잔뜩 쌓여 있는 명함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날 지켜 줄 우산 밑으로 들어가는 게 낫겠다.’
마냥 앉아서 놈이 오기를 기다리다가는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보호해 줄 단체에 들어가는 것이 나았다.
‘분명 전에 받았었는데?’
서랍 속의 명함은 모두 국내외 거대 길드의 길드장 명함이었다.
장민호는 한참을 뒤적거린 끝에 마침내 원하던 명함을 찾았다.
‘새로 길드를 만들 거라고 했었지? 이 정도 이름값이면 괜찮은 헌터들이 모일 테니 내 보호막으로 적당하지.’
그 명함에는 ‘무훈 길드 길드장 유민섭’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
“이거였군요.”
강태웅이 묘한 표정으로 유민섭을 향해 말했다.
“이거라니?”
“길드장님이 저를 버린 이유요.”
“버려? 내가 강태웅 헌터를?”
“그럼 버린 거죠. 솔직히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이 정도로 꿀을 빠는데 버릴 만하죠.”
장난스럽게 던지는 말에 유민섭도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솔직하게 머리 터지도록 전장 지휘하는 것보다 훨씬 편하잖아? 그냥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만 해도 되는데 말이야.”
“크흐흐! 탱커는 필요 없어요?”
“강태웅 헌터가 빠지면 무훈 길드는 어쩌려고?”
“아니면 엽사 헌터를 그냥 무훈 길드에 영입하는 건?”
“그게 되면 나도 좋겠네.”
“에이, 그럼 어쩔 수 없네. 그냥 내가 길드장 하지, 뭐.”
“그래라.”
유민섭은 길드장 자리를 강태웅에게 넘긴 것에 대해 크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아직 젊은 나이인 강태웅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강태웅은 농담을 던져 그런 유민섭의 미안한 마음을 희석하려 한 것이었다.
솔직히 어느 정도는 진심도 섞여 있었다. 그만큼 준혁의 전투는 압도적이었다.
쿠웅-!
마침내 카이르무스의 거체가 무너지듯 쓰러지면서 땅이 크게 진동했다.
“후우! 드디어 끝났네.”
준혁이 무훈 길드와 던전 공략 거래를 한 때로부터 거의 4개월이 지났다.
던전 공략은 벌써 8번째로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예닐곱 번이라는 추측을 넘어 한 번 더 공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 공략이 끝나면 이 던전은 소멸될 예정이었다.
공식적인 첫 번째 공략은 11월 말이었고, 지금은 해가 바뀌고 3월 말이었다.
골드 드래곤의 레어 공략만으로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할 때가 된 것이다.
준혁은 옆으로 쓰러진 카이르무스의 시체 위에 걸터앉은 채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한 번 더 리젠됐으면 좋았을걸.’
홀수 번으로 끝났다면 준혁이 던전의 수확물을 한 번 더 가져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던전 에너지 측정 결과, 오늘이 마지막 리젠이었다.
준혁은 잠시 숨을 돌린 후 곧바로 드래곤 사체의 해체 작업을 시작했고, 뒤이어 도착한 유민섭과 강태웅도 작업에 합류했다.
준혁이 빠르게 칼을 놀리며 유민섭에게 생각을 전했다.
-오늘도 변화가 없습니까?
-예, 없군요. 준혁 씨는?
-저도 별다른 조짐이 안 보입니다.
두 사람은 꾸준히 시스템의 반응을 주시해 왔었다. 하지만 마지막인 오늘 공략에서도 시스템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참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이라 뭔가 변화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늘도 아니네요.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 다른 던전에 들어가서 반응을 살펴보기로 하죠.
-그 수밖에 없겠습니다.
조용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은 다시 해체 작업에 몰두했다.
해체 작업을 마친 후, 각자 거대한 짐 덩이를 짊어진 세 사람은 나란히 왔던 길을 되짚었다.
가장 선두에 선 강태웅이 유민섭을 향해 물었다.
“시원섭섭하시겠습니다?”
오늘 공략이 끝난 후, 유민섭이 새로운 길드를 만든다는 것을 알기에 꺼낸 말이었다.
“섭섭할 게 뭐 있나? 어차피 무훈 길드와 업무 제휴로 계속 같이 갈 텐데.”
“그래도 적(籍)을 옮기는 거잖습니까?”
“잘 모르겠는데?”
“그래요? 아, 그런데 길드 이름은 정하셨습니까?”
“혼원 길드.”
순간 멈칫한 강태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혼원? 그게 무슨 뜻이에요?”
“우주라는 뜻.”
준혁의 등급인 ‘혼원급’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강태웅은 모호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신경이 쓰인 유민섭은 결국 이유를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래?”
“단어가 좀 낯설어서요.”
“그렇다고 우주라고 할 수는 없잖아.”
“뭐, 그렇긴 한데… 굳이 우주라는 뜻을 쓸 필요도 없잖아요.”
“에이, 그냥 넘어가. 이름이 뭐 그리 대수라고.”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한 유민섭의 걸음이 다급해졌다.
강태웅이 그 모습을 보며 피식 한 번 웃어 주고는 재빨리 뒤를 따랐다.
“같이 가요!”
유민섭이 가장 먼저 던전 게이트를 통과해 밖으로 나왔고, 강태웅과 준혁이 뒤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애물단지 될 뻔했는데 그래도 꽤 건졌네.”
유민섭이 후련한 표정으로 외쳤다. 준혁 덕분에 엘릭서와 드래곤 하트를 4개씩 얻었으니 꽤 남는 장사였다.
강태웅은 짐을 내려놓은 후, 인벤토리에서 캠코더를 꺼내 동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2029년 3월 28일 09시 34분, 소요산 동쪽 면에 위치한 골드 드래곤의 레어 던전 소멸.”
행정 업무 처리를 위한 촬영이었다.
이런 식으로 던전 소멸 영상을 촬영해 던전 관리청에 제출해야만 공식적으로 던전 공략 완료 확인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강태웅이 무훈 길드장이었기에, 강태웅이 영상을 녹화하는 것이었다.
항상 유민섭과 팀을 이뤄 움직이는 강태웅이었기에 이런 일은 처음 해 보는 것이었다.
그 탓에 국어책 읽듯이 말하고 있었다.
준혁과 유민섭은 행여 자신들의 소리가 동영상에 포함될까 싶어 멀찍이 물러선 채 이 광경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5분쯤 시간이 흘렀을 때, 강태웅의 당황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 왜 이러지?”
던전 소멸은, 보통 공략했던 헌터들이 밖으로 나온 후 2~3분 후에 시작되는 편이었다.
그런데 5분이 지나도록 까맣게 변한 던전 게이트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민섭이 급히 다가갔다.
“강태웅 헌터.”
“예, 길드장님.”
“측정기 좀 줘 봐.”
“여기요.”
강태웅에게 던전 에너지 측정기를 건네받은 유민섭이 서둘러 측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측정기 패널의 숫자는 ‘0’에서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거 왜 이래?”
그때였다.
삑삑!
측정기에서 짧은 비프음이 울리더니 0에서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던 숫자가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다.
유민섭의 두 눈이 찢어질 정도로 커졌다.
“다운, 다운!”
외침을 터트리는 동시에 황급히 땅을 박차며 뒤쪽을 향해 도약했다.
강태웅 또한 유민섭의 외침을 듣는 순간 인벤토리에서 거대한 타워 실드를 꺼내 전방을 막았다.
측정기에서 나타난 급격한 수치의 변화. 그것은 게이트 다운의 전조 현상이었다.
게이트 다운(Gate Down)이 일어나면 던전 안에 있던 괴물들이 바깥세상으로 풀려난다. 그리고 재앙이 시작된다.
유민섭과 강태웅이 긴장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준혁 역시 무상곤을 손에 쥔 채 잔뜩 기세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당장 길드에 연락해!”
유민섭의 재촉에 되돌아온 것은 강태웅의 당혹스러운 목소리였다.
“그, 그게!”
“왜?”
“통신이 터지지 않습니다!”
“뭐? 설마 벌써 시작된 거야?”
게이트 다운이 일어나면 그 일대는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변한다. 그 영향을 받은 일대의 공간은 통신조차 터지지 않게 된다.
어느새 유민섭 곁으로 다가온 준혁이 말했다.
“일단 우리끼리라도 막읍시다.”
“그래야죠.”
산비탈만 내려가면 바로 주택가가 나온다. 게이트 다운의 영향이 어디까지 퍼질지 알 수 없지만, 민간에 피해가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최대한 몸으로 버티고 막다 보면, 이상 현상을 알아챈 인근의 누군가가 신고를 하리라.
하지만 의문도 있었다.
‘소멸만 앞둔 던전 게이트가 다운? 이게 말이 돼?’
유민섭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던전 게이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준혁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런 준혁의 눈앞에 한 줄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일시적으로 시스템의 기능을 회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