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
-7장. 무언가 있다#1-
<국내 최고의 길드라고 평가받는 무훈 길드의 유민섭 길드장이 오늘 길드장 직위에서 사임할 것을 발표했습니다.>
<단순히 직위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닌, 무훈 길드를 사퇴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길드 역시 회사의 형태로 보고, 소유주와 경영인을 분리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유민섭 길드장은 헌터로서 은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말했습니다.>
<해당 발표로 인해 헌터계의 지각 변동이 예상됩니다. 국내 수위의 길드들 역시 이에 대해 놀랍다는 반응입니다.>
준혁은 던전 게이트 앞에 의자를 깔고 앉아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오늘 하루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뉴스였다.
준혁의 은퇴 뉴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파급력이 대단했다. 국내 헌터계에서 유민섭의 존재감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었다.
“다 알면서 또 뉴스를 보고 계십니까?”
그 대단한 파급력의 주인공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능글맞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 뒤에는 최유나도 보였다.
“온종일 이 뉴스로 시끄러워서 말이죠.”
유민섭과 함께 했던 공략 이후, 다시 보름이 지나 던전을 공략할 날이 돌아왔다.
오늘은 최유나가 옵서버로 들어가는 날이었는데, 유민섭도 같이 가겠다며 따라온 것이었다.
어차피 준혁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버프를 걸어 줄 수가 없으니, 이제는 진짜 한 팀처럼 움직여야 하는 탓이었다.
“입금은 받으셨죠?”
“받았죠.”
일전에 개설해 놓은 이나의 비밀 계좌로 오늘 돈이 입금되었다.
금액은 9억 2천만 원.
공략 불가에 가까운 던전에서 얻은 것치고는 적은 액수였다.
하지만 골드 드래곤의 레어에서는 몬스터 부산물이 나오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엘릭서와 드래곤 하트를 매물로 내놓지 않았다는 걸 감안하면 적정 액수였다.
준혁이 돈에 크게 관심을 가지는 편도 아니었기에 불만은 없었다.
“그럼 출발하시죠.”
“예.”
세 사람이 차례대로 골드 드래곤의 레어로 들어섰다.
***
던전 공략은 순조로웠다.
유민섭의 버프를 받은 준혁은 오늘도 여전히 몬스터 무리를 학살했고, 골드 드래곤 카이르무스 또한 여유 있게 사냥했다.
특히 카이르무스의 사냥이 지난번보다 훨씬 더 빠르게 끝이 났다.
이번에 새롭게 제작한 아이템 덕분이었다.
처음 공략 때 소모한 묵룡비 대용으로 골드 드래곤의 비늘로 만든 비수 덕분이었다.
준혁이 지은 아이템 이름은 ‘금문묵룡비(金文墨龍匕)’였다. 금색 무늬가 있는 묵색의 비수라는 아주 직관적인 이름.
준혁이 소유한 아이템들이 대부분 짙은 묵색인 이유는 영력의 영향이었다.
준혁의 영력이 짙은 묵색을 띠다 보니, 준혁의 영력을 부여해 만든 아이템들의 색깔도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오류 때문에 아이템창을 볼 수 없었지만, 준혁은 다양한 실험을 통해 금문묵룡비의 기능을 몇 가지 밝혀 낼 수 있었다.
30개의 비수를 단 하나의 비수로 합쳐 놓을 수 있다는 점이나 던진 후에도 준혁의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손을 떠났어도 금문묵룡비가 품고 있는 영력을 발출할 수 있다는 점 등.
그중 가장 유용한 것은 길이 조절. 준혁의 의지에 따라 15센티미터 길이의 비수를 1미터까지 늘일 수 있었다.
오늘 카이르무스를 잡는 결정적인 기능이기도 했다.
카이르무스의 얼굴에 10여 개의 금문묵룡비를 박아 넣은 후, 길이를 늘여 놈의 몸속에 직접 영력을 주입한 것이 결정타였다.
“휘유~ 두 번째 보는 건데도 믿을 수가 없네.”
유민섭의 말에 카이르무스의 시체를 향해 다가가던 준혁이 발을 멈췄다.
“이제 익숙해지셔야지.”
“그야 당연한 일이죠. 그래도 놀라운 건 놀라운 거죠. 이렇게 드래곤을 일방적으로 구타하는 헌터가 있다는 말을 어디 가서 하면 미친놈 취급 받을 겁니다.”
“어차피 말할 일 없잖아요?”
“하긴…….”
짧게 잡담을 주고받은 후, 준혁은 곧장 카이르무스의 시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유민섭 또한 그 옆으로 가서 작업을 거들었다.
유일하게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최유나였다.
‘뭘 본 거지?’
이미 한 번 보았던 유민섭이 거듭 놀랄 정도인데, 처음 본 최유나는 당연히 그 충격이 몇 배였다.
‘강해.’
단순히 스탯이나 스킬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최유나가 본 준혁은 사람 자체가 강해 보였다.
사실 최유나는 정체기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최유나는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실패를 경험해 본 적 없는 헌터였다.
각성으로 얻은 높은 스탯과 공격 스킬의 조합으로 단번에 근접 딜러 계열 최강자 반열에 오른 그녀였다.
각성과 동시에 무훈 길드에 들어갔고, 실패 없이 승승장구해 왔었다.
그랬던 최유나가 처음으로 실패를 경험한 것이 이곳 골드 드래곤의 레어였다.
그 실패 이후 최유하는 성장에 목말라 있었다.
각성자들은 어느 정도의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훈련과 던전 공략을 꾸준히 되풀이하면 스탯 상승으로 인해 등급이 오른다는 것은 헌터로서의 상식이었다.
대부분의 각성자가 최초 각성 등급에서 한 단계 정도 성장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고, 가끔 두 등급을 올리는 예도 있었다.
같은 길드의 탱커 강태웅은 최초 각성 등급이 A급이었다. 그 후 스탯이 오르고 새로운 스킬을 얻으면서 S급으로 승급한 케이스였다.
반면, 최초 각성 등급이 S급인 각성자들 중에 그보다 높은 단계에 올랐다는 사람은 아직 단 1명도 없었다.
수많은 전문가가 S급들의 성장을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지만, 아직 S급 각성자의 스탯을 높일 수 있는 훈련법은 발견되지 않았다.
최유나 역시 최초 각성 등급이 S급이었다.
발전하고 싶어도 방법적인 부분에서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등장한 사람이 준혁이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일 것이라고.
그리고 오늘 더욱 굳게 마음을 먹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사람을 통해 강해지겠다고.
어느새 해체 작업이 끝을 보이고 있었다.
가죽과 뼈, 힘줄 단위로 나눈 부산물을 밧줄을 이용해 묶고 있는 모습을 보며 최유나가 다가갔다.
“엽사 님.”
그 말에 준혁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님?”
“네, 엽사 님.”
“님은 무슨……. 아무튼 왜요?”
“강해지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전에 말 안 했어요? 칼 잡는 법부터…….”
“필요하다면 사부로 모시겠습니다.”
원래도 무뚝뚝한 표정의 최유나가 오늘은 심각할 정도로 딱딱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본 준혁도 그제야 조금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내 말을 크게 오해한 모양인데?”
최유나를 슥 훑어보던 준혁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어떻게 할까?’
그런 고민을 하며 힐끔 고개를 돌리니, 유민섭의 얼굴에 기대하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자신이 데리고 있던 헌터라 성장에 도움을 줬으면 하는 모양이었다.
‘쯧. 서비스다.’
상황에 몰렸다고는 해도 유민섭의 결정은 절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아는 준혁이었기에 조금 친절을 베풀기로 했다.
“칼 뽑아요.”
“네.”
최유나는 일말의 궁금증도 없이 허리춤의 롱 소드를 뽑았다.
준혁은 조금 넓은 공터로 자리를 옮긴 후 말했다.
“스킬 쓰지 말고 덤벼 봐요.”
고개를 끄덕인 최유나가 득달같이 달려들며 롱 소드를 휘둘렀다.
빨랐다.
롱 소드에 실린 힘은 무거웠고, 뿜어지는 기세 또한 묵직한 압력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준혁의 움직임은 아주 가벼웠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최유나의 일검을, 슬쩍 몸을 비틀어 피한 후 슬쩍 오른발을 내밀었다.
턱!
발이 걸려 버린 최유나가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다시.”
준혁의 말에 벌떡 몸을 일으킨 최유나가 좀 더 기세를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쿵, 쿵!
조용한 던전 안에 최유나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만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그렇게 서른 번쯤 바닥을 구른 최유나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입고 있던 새하얀 갑옷은 곳곳에 흙이 묻어 지저분해져 있었다.
그리고 이를 악문 표정에는 억울한 감정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정확하게 읽어 낸 준혁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멀었네, 멀었어.’
조금 한심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철저하게 깨 주는 수밖에.’
어차피 서비스하기로 마음먹은 참이었다.
“스킬 써 봐요.”
최유나의 억울함이, 스킬을 쓴다면 이렇게까지 당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 나왔다는 걸 눈치챈 것이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최유나의 움직임이 돌변했다.
[와일드 대시.]
일전에도 한 번 쓴 적 있었던 대시 스킬.
“흡!”
최유나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연계 스킬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틱, 쿠웅!
하지만 두 번째 스킬을 펼치기도 전에 또 한 번 발을 걸려 넘어졌다.
“이익!”
이를 악문 채 스프링처럼 튕겨 일어난 최유나가 곧장 롱 소드를 뻗었다.
영웅급 아이템인 최유나의 롱 소드 ‘기사의 신념’에 장착되어 있는 2개의 스킬이 동시에 전개됐다.
[오러 블레이드(Aura Blade).]
[리젼스 차지(Legion’s Charge).]
푸른 오러가 맺힌 검이 태산 같은 압력으로 준혁을 덮쳤다.
뒤이어 ‘리젼스 차지’라는 이름 그대로 하나의 군단이 돌격하는 것과 같은 강력한 일격.
그리고 준혁은 그 군단의 돌격을 향해 한 걸음 불쑥 내디뎠다.
콰르르릉!
무시무시한 굉음.
하지만 최유나의 공격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뒤흔들어 놓았을 뿐이었다. 준혁은 이미 최유나의 곁을 스치며 이번에도 발을 툭 뻗고 있었다.
쿠우웅!
최유나는 자신이 펼친 강력한 스킬만큼이나 거칠게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벌떡 일어서는 최유나. 하지만 준혁은 이미 그녀와 거리를 한참이나 벌리고 있었다.
“그만!”
이를 악물고 달려들려던 최유나가 움찔거리며 발을 멈췄다.
“아직 모르겠습니까?”
“무얼…….”
“칼 쥐는 법부터 배우라는 게 무슨 뜻인지?”
최유나의 무뚝뚝한 얼굴 위에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준혁이 최유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곧장 말을 이었다.
“기본이 없어.”
“기본?”
“칼을 쓰는 기본이 안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칼을 쓰는 기본이라고요?”
“내 말대로 칼 쥐는 법부터 배우고 싶거든, 어디 가서 검도라도 배워요.”
준혁의 말에 최유나는 점점 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검도?”
“그래야 칼 쥐는 법이라도 배우죠.”
“도장 같은 곳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검도를 어디 가서 배웁니까?”
서로 엇나가는 것 없이 말을 주고받는 게 분명한데, 이상하게 서로의 의도를 이해 못하는 묘한 대화였다.
준혁의 얼굴에 답답한 표정이 떠올랐을 때, 최유나의 입에서 그 이유가 나왔다.
“그런 데 가도 전부 저보다 약합니다.”
준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
“저보다 약한 사람들한테 배운다는 게…….”
딱딱하게 굳어 가던 준혁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야!”
그 미소는 오해의 여지가 조금도 없는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건방 떨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