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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기호지세#3-
열흘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준혁은 훈련장에 나와 하루 종일 장비 제작에 몰두했다. 그럼에도 이제 겨우 금룡비의 재료가 되는 타원 판 20개 정도를 만들었을 뿐이다.
열흘 사이에 창원 웨일즈 구단에서는 준혁에 관한 이야기를 발표했다.
긴 장문의 발표문이었지만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1. 김준혁은 오랫동안 묵묵히 참고만 있던 것이 터져 심각한 우울증이 생겼다.
2. 김준혁은 당분간 치료에 전념할 생각이다. 현역 복귀 여부는 불투명하다.
3. 구단에서는 선수 보호 차원에서 김준혁에게 치료에 전념할 것을 당부했다.
4. 선수 본인은 은퇴를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일단은 육성 선수로 등록 전환을 하는 선에서 합의를 했다.
5. 김준혁 선수는 육성 선수로 전환되었지만, 연봉은 올해 연봉을 동결한다.
6. 김준혁 선수 본인의 요청에 따라, 내년의 연봉은 모두 장학 재단에 기부한다.
준혁은 은퇴의 정당한 이유를 공인받고, 구단은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최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놓은 것은 덤이었다.
여전히 각종 야구 게시판에서는 갑론을박이 뜨거웠지만, 준혁은 그 모든 일에 신경을 끄고 작업에만 열중했다.
끊임없는 단순 반복의 연속인 탓에 힘들 만도 한데, 준혁은 조금도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배면계에서 10년 동안 이미 죽도록 했던 작업이었다.
그리고 프로 선수의 훈련이라는 것 역시 대부분은 같은 동작의 끝없는 반복이었다.
이 정도는 가뿐했다.
그때 김준석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혁아.”
“어.”
“내가 좀 도와줄까?”
지난 열흘간 툭하면 했던 말이었고, 그때마다 준혁이 거부했었는데 김준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인마!”
간절함이 절절하게 배어 있는 김준석의 부름에 준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옆에 있는 커다란 가죽 조각을 건네며 말했다.
“그럼 이거 비늘 한번 떼어 봐.”
한 번쯤 직접 경험하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 내가 이래 봬도 아르바이트로 부산물 가공도 꽤 했단 말이지.”
자신만만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김준석이 자신의 인벤토리에서 작업용 도구들을 꺼냈다.
도구들을 보니 아르바이트를 했었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불과 5분도 지나지 않아 김준석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제 손과 동생의 손놀림을 한참이나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
“어떻게 하냐?”
“거봐, 안 된다니까?”
강한 몬스터일수록 그 가죽이나 부산물 가공에 강력한 능력이 필요했다.
드래곤의 부산물은, D급으로 올랐다고는 해도 김준석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쩝!”
“D급 형님아, 그냥 훈련이나 마저 하세요.”
“동생 놈한테 이렇게 구박받고 살 줄이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불과 20여 일 전의 동생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김준석이었다.
하지만 김준석은 쉬이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엉덩이를 뭉개고 앉은 채 슬그머니 물었다.
“엘릭서는 어쩔 거야?”
괜히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는 속셈이 뻔히 보였지만, 준혁은 한 번 속아 넘어가 주기로 했다.
“쟁여 놔야지.”
“쟁여 놔? 그거 내놓으면 서로 사겠다고 달려들 텐데? 아마 자기들끼리 자청해서 경매 붙을걸?”
“그래도 안 돼.”
“그러냐?”
어차피 김준석의 의도는 조금이라도 앉아서 시간을 벌려는 것이었다. 엘릭서야 동생의 물건이니 팔든 마시든 상관없었다.
그런데 정말 생각지 못한 이야기가 들렸다.
“형이나 형수, 그리고 지유도 있잖아. 언제 엘릭서가 필요한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쟁여 놔야지.”
“어?”
동생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김준석은 괜히 심장이 짜르르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못한 채 다시 훈련 스케줄을 소화하러 나섰다.
조용한 훈련장에 김준석이 달리는 소리만이 한참을 울려 퍼졌다.
그리고 준혁이 21번째 타원 판을 만들었을 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유민섭에게 받았던 휴대폰이었다. 발신인 역시 유민섭.
“예, 길드장님.”
(예, 엽사 씨.)
“잘 지내셨습니까?”
(뭐, 지내는 것만 잘 지냈죠. 아주 머리 터질 뻔했어요.)
조금은 자학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목소리가 쾌활했다. 열흘 전, 그 절망스러웠던 표정이 한 번에 싹 잊힐 정도였다.
그것을 확인한 준혁도 조금은 편안하게 농담하듯 대화를 이었다.
“뭐,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하아, 이럴 때도 한 마디를 안 지시네.)
“우리 사이 그런 사이잖아요?”
(그건 또 아니라고 못하겠네요. 아무튼 우리 한번 만날까요?)
그 말에 준혁이 잠시 멈칫했다. 목소리에서 무언가 강력한 결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죠. 여기로 오시겠어요?”
(당장 달려가겠습니다. 주소 불러 주시죠.)
“그건 제가 문자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따 뵙죠.)
통화를 끝낸 준혁은 훈련장에서 가까운 시내에 있는 한 카페를 찾은 후, 문자로 주소를 보냈다.
열흘 전 구단 사람들과 갔던 카페가 이야기하기는 편하지만, 일단은 보안에 신경 써야 했기에 먼 곳으로 잡은 것이다.
“나 유 길드장 만나서 얘기 좀 하고 올게. 형은 훈련하고 있어.”
“알았다.”
평소 같았으면 꾀를 한번 부려 봄 직할 텐데, 이번에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김준석이었다.
준혁은 밖으로 나와 차를 출발시키기 전에 매구탈을 쓰고 얼굴부터 바꿨다.
차를 몰아 카페에 도착하니, 낮이라 그런지 손님이 없어 한적했다. 준혁은 구석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유민섭을 기다렸다.
유민섭이 나타난 것은 30분쯤 기다렸을 때였다. 아무래도 얼굴이 알려진 탓인지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깊이 눌러쓴 모습이었다.
“어우, 빨리 오셨네요?”
“마음이 급했거든요. 엽사 씨 만나러 오느라 그랬는데, 과속 딱지는 좀 처리해 주실래요?”
“돈도 많은 양반이 왜 이러실까? 마음 급한 건 길드장님인데 그걸 왜 내가 내 줘요?”
“뭐, 그럼 내가 내죠.”
“대신 커피는 내가 사죠.”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겠네요.”
괜히 너스레를 떠는 유민섭의 표정은 확실히 밝았다. 그러면서도 두 눈에서는 확고한 결의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유민섭의 커피가 나온 후에도 두 사람은 먼 산을 보며 말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유민섭이 이미 하고 온 결심을 입에 담았다.
“나하고 제대로 사업 하나 하시죠.”
“또 사업 얘깁니까?”
“이번엔 제대로 한번 하자는 겁니다.”
“무슨 사업이요?”
“길드 하나 새로 만들죠.”
그 말에는 준혁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길드?”
“내가 무훈 길드장을 하기에는 지금 문제가 많은 거 아시죠?”
“알죠.”
“그래서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내가 엽사 씨한테 완전 코 가 뀄더라고. 사자성어로 기호지세. 호랑이는 아니지만 엽사 씨 등에 올라타서 못 내리는 상황. 좀 더 고상하게는 낙장불입이지. 물론 내가 자초한 일인 건 확실히 알고 있으니, 그 부분은 신경 안 쓰셔도 되고.”
“상황이 그렇긴 하네요.”
“그래서 진짜 고민을 많이 했단 말입니다.”
절대 쉬운 고민은 아니었다. 무려 일주일 동안 한숨도 못 자고 고민에 고민만 거듭했다.
처음에는 이 상황을 되돌릴 고민을 했고, 별의별 방법을 다 써 보았다.
길드에 있는 믿을 만한 사제 클래스 헌터를 불러 해주도 해 보았고, 다른 던전도 들어가 보았다.
하지만 이미 바뀌어 버린 시스템은 복구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버프를 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엽사 한 사람밖에 없다면, 그 한 사람하고만 같이 다니자고.
그렇게 관점을 달리하고 보니, 자신의 상황이 마냥 절망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버프를 받을 수 있는 그 유일한 한 사람이, 드래곤도 혼자 때려잡을 정도의 강자라는 것은 오히려 큰 메리트였다.
그래서 구상을 시작했고, 구상을 끝낸 후 당사자인 엽사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흐음… 아예 한 세트로 다니자, 그런 말이죠?”
“그렇죠.”
“그럼 무훈 길드는 어쩌시려고?”
“강태웅 헌터한테 길드장 자리를 넘길 생각입니다. 그 친구도 아주 뛰어난 탱커라, 약간의 전력 손실이 있을지언정 길드에 큰 타격은 없을 겁니다.”
“흐음…….”
준혁도 가만히 고민에 잠겼다.
‘나쁘지 않은데?’
카이르무스를 사냥할 때 준혁도 확실히 느꼈었다. 유민섭으로부터 받은 버프가 없었다면, 카이르무스 사냥은 꽤 길어졌을 것이다.
그런 버프를 꾸준히 받을 수 있다는 건 득이 되면 득이 되지,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나는 괜찮은데, 길드장님은 괜찮겠어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엽사 씨의 이야기를 사실대로 말해 주세요. 무슨 말 하는지 아시죠?”
준혁의 배경과 시스템 문제 등에 관한 이야기였다.
“흐음.”
준혁은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민섭은 지금 가진 모든 걸 버리고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누가 보더라도 절대 쉽지 않은 결정이니만큼, 준혁에게 이 정도 신뢰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유민섭 스스로 말한 대로 준혁에게 코가 꿰인 상황이었다. 말 그대로 기호지세. 준혁이 없으면 헌터로서는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일단 자리를 좀 옮기죠. 새로 주소 알려 드릴 테니 거기로 오세요. 어차피 제 차 따라오면 되겠지만.”
유민섭이 군말 없이 몸을 일으켜 준혁을 따라나섰다.
부아아앙!
‘거참, 시끄럽네.’
준혁은 형의 낡은 중형 세단 뒤에 굉음을 으르렁거리는 슈퍼 카를 매달고 훈련장으로 돌아왔다.
“여기는 개인 연습장 같은데요?”
“이제 알게 될 텐데 뭘 그리 물어봅니까?”
“크흐흐! 내가 또 한 호기심 하거든.”
안으로 들어서니 김준석이 열심히 웨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유민섭이 물었다.
“혹시 엽삼 씨?”
“맞습니다. 형, 형도 좀 와서 앉아 봐.”
준혁이 접이용 의자를 가져와 펼쳤고, 세 사람은 동그랗게 마주 앉았다.
“일단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부터 하죠.”
“제일 궁금하던 겁니다.”
“배면계라는 곳이 있어요.”
준혁은 형에게 했을 때와는 달리 개인적인 감정을 빼고 사실만을 이야기해 주었다.
“으음!”
이야기를 듣는 내내 유민섭의 표정은 꽤 심각했다. 그리고 준혁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탄식을 흘리며 말했다.
“그래서 엽사 씨가 각성자 등록이 안 돼 있는 거군요. 시스템이 서로 다른 것도 그런 이유였고…….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해 보니, 나는 그 배면계의 시스템에 좀 더 종속돼 있는 상태? 뭐, 그런 거겠네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렇습니다.”
일단 원래 갖고 있던 상태창이 문제없이 보이는 것을 생각하면, 던전 쪽 시스템에서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또요?”
“제 얼굴을 좀 보시죠.”
“음?”
유민섭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준혁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변장한 준혁의 얼굴 피부에서 부글부글 거품이 끓는 것처럼 피부가 늘어나더니, 이내 아무 무늬도 없는 새하얀 가면의 형태로 바뀌었다.
“어? 얼굴을 바꾸는 아이템?”
준혁이 고개를 끄덕인 후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유민섭 길드장님. 김준혁입니다.”
순간, 유민섭의 표정이 돌변했다.
“와, 이거 완전 사기꾼이잖아! 당장 한국시리즈 우승부터 취소!”
유민섭은 이번 시즌 한국시리즈 준우승팀인 서울 펜서스의 광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