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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기호지세#2-
준혁이 안내한 곳은 교외의 한적한 도로가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카페였다.
원래도 붐비는 곳이 아닌 데다, 이른 아침인 탓에 카페 안에는 자칭 화가라는 사장이 혼자 커피를 내려 마시고 있었다.
리그에서 이름값 있고 연봉 높은 선수들은 스토브 리그 기간에 따뜻한 해외로 개인 훈련을 떠나고는 한다.
추운 곳보다는 더운 지역에서 운동하는 쪽이 아무래도 부상의 위험이 적고, 운동 효율도 좋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준혁은 항상 이곳에 있는 개인 훈련장에서 운동했다.
부상 위험도 없을뿐더러 운동 효율을 따질 필요도 없는 최고의 피지컬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하는 훈련이라고는 수비 연습과 배팅 훈련 등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한 것들이 전부였다.
그런 이유로 훈련장 근처에 있는 이 카페 사장과도 꽤 자주 보고 농담도 주고받는 사이였다.
사장이 준혁을 보자마자 복잡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어? 김준혁 선수, 뉴스 봤어요.”
지난 보름 동안은 개인 훈련장에서 김준석을 훈련시키는 데만 몰두했기에 꽤 오랜만에 오는 셈이었다.
“아, 예. 음, 아메리카노 여섯 잔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사장이 분주히 움직이고, 준혁과 구단 사람들은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하지만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다른 곳을 보며 분위기만 살필 뿐이었다.
‘그나마 구단주님이 안 와서 다행이네.’
준혁은 속으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만날 때마다 준혁의 팬이라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구단주까지 왔다면 참 난감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사장이 커피를 내왔다. 그리고는 준혁을 향해 말했다.
“나는 위층 가서 개인 작업을 좀 해야겠네요. 말씀들 나누세요.”
분위기를 읽고 눈치껏 자리를 비켜 주는 것이다.
“예, 고맙습니다. 손님 오면 말씀드릴게요.”
“어차피 손님도 잘 안 오는데요, 뭐.”
사장이 너스레를 떨며 사라진 후, 준혁이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넘긴 후에야 누군가 입을 열었다.
“준혁아.”
창원 웨일즈의 젊은 감독, 이동훈이었다.
“예, 감독님.”
“구단이랑 상의도 없이 갑자기 왜 그러는 거냐?”
이동훈은 복잡한 감정을 애써 숨긴 채 최대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너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썼잖아.”
창원 웨일즈의 프렌차이즈 스타인 준혁이었다.
그런 만큼 오래 보았기에 준혁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은퇴 발표가 더욱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준혁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주변에 모인 다섯 사람과 한 번씩 눈을 마주쳤다.
그런 후 오른손을 살짝 들어 올려 영력을 일으켰다.
풀썩 피어오른 검은 연기 같은 기운이 준혁의 손바닥 위에 잠시 머물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본 다섯 사람은 입만 쩍 벌린 채, 그만큼이나 커진 눈에 불신의 감정을 잔뜩 담았다.
“너, 설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팀의 베테랑이자 덕아웃 리더 이효준이었다.
“예, 각성이에요.”
준혁의 확인 사살에 또 한 번 침묵이 테이블을 쓸고 지나갔다.
대표이사도, 단장도, 감독과 두 베테랑도 갑자기 목이 마른 듯 후룩거리며 뜨거운 커피를 목으로 넘겼다.
함께 온 사람 중 가장 이성적인 성격인 양태일 대표이사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날 각성 검사 결과는 어찌 된 겁니까? 혹시…….”
양태일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그 표정을 본 준혁이 재빨리 말했다.
“아닙니다. 검사 결과는 정확하게 나온 게 맞습니다. 다만, 제가 일반적인 각성과는 달라서 결과가 그렇게 나온 것뿐입니다.”
이효준이 혹시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각성한 순간이 7차전 그때?”
“맞아요. 솔직히 그 정도 비거리가 나오는 건 이상하죠.”
단장이 앓는 소리를 냈다.
“끄응!”
준혁은 분위기를 본 후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각성한 상태로 계속 야구를 하는 건 위험해요. 만에 하나 끝내기 홈런 그 순간에 각성했다는 게 알려지면 일이 아주 복잡해지죠.”
미리 맞추기라도 한 듯 모두들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확실히 그렇게 밝혀지면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일들이 줄줄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당장 우승이 무효라는 여론이 들끓을 것이다. 게임의 유효성도 문제고, 보름이나 지난 후에 이 사태를 처리하기에는 그 과정이 너무 지난했다.
준혁이 양태일을 향해 말했다.
“사장님.”
“말씀하세요, 김준혁 선수.”
“정정당당하지 못하다고, 속임수 같다고 생각하시죠, 지금?”
“솔직히 좀 그렇긴 합니다. 그래서 난감하네요.”
“그런데 그때 각성이 아니어도 그건 분명 홈런이었어요. 진짜예요. 저는 슬라이더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때 확실하게 스윗 스팟에 맞았어요.”
“그건 알아요. 몇 번이나 돌려 봤으니까.”
그렇게 대답한 양태일이 한참 동안 홀로 생각에 잠겼다. 같이 온 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양태일의 고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후우~”
양태일이 길게 한숨을 뱉자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김준혁 선수, 하나 묻겠습니다.”
“예.”
“완전히 은퇴를 결심한 겁니까?”
그 말에 준혁은 잠시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사장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야구가 참 좋습니다.”
준혁이 아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무 야구가 하고 싶어서… 어려운 형편인 걸 알면서도 형을 졸라 야구를 시작했죠. 열심히 했습니다.”
“그건 저도 잘 알죠.”
“그래서 사실… 너무 억울합니다.”
준혁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흐음.”
“여전히 야구가 좋습니다. 계속하고 싶어요. 그런데 법적으로는 각성자가 아니라고 해도, 어쨌든 각성했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잖아요. 이런 상태로 야구를 계속한다는 건…….”
모두의 얼굴에 숙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네, 이대로 숨기고 야구를 계속할 수도 있죠. 하지만 그건… 구단에도, 야구계 전체에도 누를 끼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너무 억울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지금, 박수 칠 때 떠나는 게 맞는 거라고…….”
그리고 다시 침묵이 찾아왔고, 양태일은 또다시 긴 고민에 잠겼다.
“후우!”
다시 한 번 한숨으로 고민이 끝났음을 알린 양태일이 준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알겠습니다. 김준혁 선수는 커다란 심적 고통 때문에 은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하죠.”
선고하듯 말하는 양태일의 표정이 복잡했다. 하지만 지금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준혁의 말대로 지금 가장 당황스럽고 억울한 사람은 준혁 본인일 터였다.
양태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곧 구단에서 발표가 있을 겁니다. 이후의 일들은 제가 알아서 정리하겠습니다.”
양태일이 오른손을 내밀었고, 뒤따라 일어선 준혁이 그 손을 맞잡았다.
“그럼 마음 잘 추슬러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고.”
“죄송합니다.”
“김준혁 선수가 죄송할 일은 아니죠. 그럼…….”
준혁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준 양태일이 먼저 카페를 나섰다.
함께 온 단장과 감독, 선배 선수들도 격려 혹은 위로의 말을 남겼다.
“힘내요. 서류 정리할 거 있는지 확인해 보고 연락할게요.”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해라.”
“하아! 너하고 같이 못 뛰는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혹시라도 도울 일 있으면 전화해라.”
“재충전하고 새 출발 한다고 생각하고 이참에 좀 푹 쉬어라.”
준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모두가 떠난 뒤, 준혁은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가만히 팔짱을 꼈다.
‘좀 미안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성적인 설득이 힘들 때는 감정에 호소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특히 처음에 담담한 척하다가, 갑자기 감정이 복받친 것처럼 보이면 효과가 두 배였다.
‘이렇게 하는 게 서로에게 제일 좋은 시나리오지.’
자기합리화이기는 해도 냉정하게 생각해 봐도 가장 좋은 마무리였다.
슬며시 미소를 지은 준혁이 손을 뻗어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이 카페의 커피는 언제 와서 마셔도 참 맛이 없었다.
***
준혁의 개인 훈련장은 농구 코트 절반 정도 크기의 실내 체육관이었다.
이전에 가져다 놓았던 준혁의 훈련용 장비들을 모두 치운 덕분에 실내가 꽤 넓어졌다.
준혁은 그 한가운데 앉아서 끊임없이 손을 놀리고 있었다.
지금 하는 일은 드래곤 가죽의 비늘을 하나하나 떼어 내는 일이었다.
‘되려나?’
준혁이 아는 재료 가공법과 아이템 제작법은 모두 배면계에서의 방법들이었다.
그 방법으로 지금 현실에 나타난 던전의 괴물 부산물도 가공하고 제작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그나마 가공 과정이 간단한 축에 속하는 비늘부터 떼어 내는 중이었다.
일단을 깔끔하게 떼어 낸 후, 손바닥 크기를 기준으로 그보다 큰 것과 작은 것을 구분해 쌓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데, 김준석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준혁에게 다가왔다.
“헉, 헉헉! 도와줄까?”
“아니. 뛰던 거나 마저 뛰어.”
“동생이 고된 작업을 하는데, 형이 돼서 어떻게 혼자만 훈련을 하고 있냐?”
“어, 해.”
김준석이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벽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김준석은 100킬로그램짜리 조끼를 비롯해 온몸에 무거운 물건들을 잔뜩 매달고 있었다.
‘요새 누가 이렇게 무식하게 훈련을…….’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김준석은 그렇게 달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준혁은 끊임없이 손을 놀렸고, 마침내 비수 하나를 만들 수 있는 재료를 준비했다. 아직 떼어 내지 않은 비늘이 잔뜩 있었지만, 일단 하나 먼저 테스트할 생각이었다.
도깨비 보따리에서 드래곤 하트와 이런저런 도구들, 그리고 도자기 병들을 잔뜩 꺼냈다.
밑 작업을 하는 데만도 무려 2시간을 소모한 끝에 테스트에 들어갈 수 있었다.
모든 작업을 마친 준혁은 밑 작업이 끝난 수백 장의 비늘 더미에 손을 얹은 후 스킬을 펼쳤다.
[융합(融合).]
스킬 발현과 동시에 준혁의 손을 중심으로 짙은 영력과 황금빛이 동시에 뒤섞여 퍼져 나갔다.
짙은 연기 사이로 황금빛이 새어 나오는 듯한 그 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어느새 준혁의 손에는 타원형 판 1장이 놓여 있었다.
타원형 판의 표면은 묵색 바탕에 황금색 선들이 마블링처럼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됐다!’
수백 장의 비늘을 이용해 1장의 판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으로 모양을 만들고, 다시 스킬을 이용해 특성을 부여하면 하나의 묵룡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건 묵룡비가 아니라 금룡비라고 불러야 하나? 그나저나 기존 묵룡비하고 좀 다른 성격의 물건이 나올 거 같기는 한데…….’
타원 판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아무래도 조금 새로운 물건이 만들어질 것 같았다.
‘일단은 작업부터.’
빠르게 고민을 멈춘 준혁은 다시 바쁘게 손을 놀렸다.
자신의 방식으로도 가공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이 재료들을 이용해 잃었던 장비를 만들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