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
-6장. 기호지세#1-
“확실히 쓸 만하겠네.”
준혁은 목이 잘려 나간 드래곤의 사체를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묵룡삭을 다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아, 금룡삭이라고 해야 하나? 재료가 달라서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성큼성큼 사체로 다가간 준혁은 무상곤을 도축용 칼 형태로 바꿔 도축을 시작했다.
하지만 작업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김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혁… 아니, 아니… 엽사야, 다친 데는?”
멀리서 싸움을 지켜보았는데도 김준석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동생의 안위부터 확인했다.
“아, 괜찮아. 이제 도축 좀 하려……. 응? 저 사람 왜 저래?”
준혁이 가리킨 곳에는 유민섭이 멍하니 서 있었다.
카이르무스와 싸우는 그 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갑자기 사람이 초췌하게 변해 있었다.
“그게… 음…….”
김준석이 뭐라 설명할 말을 찾으려고 고민할 때 유민섭이 입을 열었다.
“안 됩니다.”
맥락 없이 튀어나온 말에 준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안 된다고요.”
“그러니까 뭐가 안 된다는 말입니까?”
“버프! 버프가 안 들어간다고.”
점점 알 수 없는 말에 준혁이 답답한 표정을 지으려는 찰나, 김준석이 말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버프를 걸어 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표정이 돌변하더라고. 지금 들어 보니 나한테 버프가 안 들어갔다는 말인가 봐.”
“왜?”
당사자가 아닌 두 사람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유민섭은 퀭한 눈으로 시스템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
[대상과는 시스템 체계가 달라 강화 효과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준혁과 카이르무스가 싸울 때, 그 여파는 아주 멀리까지 뻗쳤었다.
조금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유민섭은 김준석에게도 4가지 강화 버프를 걸어 주려 했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메시지가 떠오르며 스킬 사용이 되지 않은 것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유민섭이 준혁을 향해 말했다.
“잠깐 시간 좀 내 주시죠.”
“뭐, 그러세요.”
“일단 버프부터 해제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준혁에게 걸어 주었던 근·순·지·감의 4가지 스탯에 대한 강화를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강화 스킬을 펼쳤다.
[대상 ‘엽사’의 근력을 10퍼센트 강화합니다.]
[대상 ‘엽사’의 순발력을 10퍼센트 강화합니다.]
[대상 ‘엽사’의 지구력을 10퍼센트 강화합니다.]
[대상 ‘엽사’의 감각을 10퍼센트 강화합니다.]
‘지휘권’에 등록한 명칭까지 표시된 채로 스킬이 적용되었다.
유민섭의 시선이 다시 김준석에게로 향했다.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적시며 긴장감을 애써 억누르면서 스킬을 펼쳤다.
[대상과는 시스템 체계가 달라 강화 효과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젠장!”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평소 능글맞게 느껴지던 여유로운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갖고 있던 능력을 봉인당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일 수도 있으니 당연한 일었다.
준혁이 조심스레 물었다.
“안 됩니까?”
그래도 아직 이성의 끈은 놓지 않았는지 엉뚱하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안 되네요. 후우…….”
유민섭이 내뱉은 긴 한숨과 함께 적막이 내려앉았다.
‘아까 그 시스템 오류…….’
방어 시퀀스에 돌입한다고 하더니 이내 실패라는 메시지가 올라왔고, 그 후 깨진 문자가 잔뜩 나타났었다.
그다음이 ‘지휘권’을 인정했다는 문장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때의 그 메시지가 지금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는 걸 모를 수 없었다.
문제는 유민섭이 자초한 일이었다는 점이다.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는 일.
가만히 유민섭을 지켜보던 준혁이 김준석에게 말했다.
“엽삼 씨, 일단 유민섭 씨 데리고 저쪽에서 좀 쉬고 계세요.”
서로 말을 편하게 하다가, 던전에서 아닌 척하려다 보니 ‘엽사 씨’, ‘엽삼 씨’가 오고 가는 중에도 반말과 존댓말을 뒤섞어 쓰는 두 형제였다.
김준석이 유민섭을 뿌리째 뽑힌 나무 옆으로 이끌었다.
그 손길에 이끌려 따라온 유민섭은 털썩 주저앉아 그저 멍한 눈으로 먼 하늘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준석의 도축 작업이 시작되었다.
무상곤의 형태를 수시로 바꾸며 진행하는 도축 작업의 속도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가죽을 벗기고 근육의 결을 갈라 힘줄을 뽑고, 뼈를 발라 한쪽에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빠르게 일을 마친 준혁은 한쪽에 깔끔하게 쌓아 놓은 드래곤의 부산물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도깨비 보따리에는 안 들어가겠는데?’
도깨비 보따리의 생김새는 작은 포대와 비슷했는데, 주둥이를 통과할 수 있는 물건은 제한 없이 넣을 수 있지만 더 큰 물건은 넣을 수 없었다.
거대한 드래곤의 뼈나 가죽이 작은 포대의 주둥이를 통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배면계에 있을 때는 특별히 주거 공간도 없었기에 근처 아무 데나 자리를 잡고 아이템 제작을 했지만, 여기서는 그럴 수도 없었다.
‘일단 묶어서 들고 나가자.’
그것을 위해 짐꾼을 자처해 따라 들어온 유민섭이 필요한 도구를 가지고 있을 터였다.
상태가 좋지 않은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그렇다고 마냥 던전 안에 앉아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준혁이 유민섭에게 다가가 말했다.
“나갈 준비를 좀 해야 할 거 같네요.”
“그래야죠.”
힘없는 목소리로 대꾸한 유민섭이 인벤토리에서 부산물을 챙기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꺼내 주었다.
***
준혁과 김준석, 유민섭이 밖으로 나온 후 던전 게이트는 이내 폐쇄되었다. 이 상태에서 몬스터들이 모두 리젠되어 문이 열릴 때를 기다려야 했다.
세 사람이 게이트 밖에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에게 다가가려던 최유나가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유민섭이 평소와는 분위기가 다른 것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주변 상황에 관심을 갖지 않는 최유나가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유민섭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길드장님?”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을 부르는 최유나의 모습에 유민섭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최유나 헌터!”
“네?”
“일단 우리 확인부터 해 보자.”
“확인……?”
최유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유민섭은 이미 ‘지휘권’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다. ‘지휘권’ 스킬이 펼쳐지고, 이내 반딧불이 같은 푸른빛이 나풀거리며 최유나 앞으로 날아갔다.
아주 익숙한 일이었기에 최유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았다.
그리고 유민섭 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
[대상과는 시스템 체계가 달라 서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끄으!”
짓눌린 신음을 흘린 유민섭이 눈에 힘을 잔뜩 준 채 ‘근력 강화’를 펼쳤다.
[대상과는 시스템 체계가 달라 강화 효과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유민섭이 그대로 철퍼덕 주저앉았다.
지휘관 마법사가 헌터에게 ‘지휘권’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지휘관으로서의 사망 선고였다.
물론 유민섭은 스탯도 S급이며, 다른 서포트 마법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휘관의 핵심은 ‘지휘권’과 ‘통찰’, 부가적으로 4가지 스탯의 강화 스킬이었다.
그것이 모두 잘려 나갔으니, 스탯만 높은 B급 서포터 마법사로 전락한 셈이었다.
‘이걸 어떻게…….’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유민섭은 재빨리 준혁에게 걸려 있는 ‘지휘권’ 스킬을 해제하고, 다시 최유나에게 ‘지휘권’ 스킬을 사용했다.
하지만 여전히 절망적인 시스템 메시지만 눈앞에 떠오를 뿐이었다.
“하아…….”
유민섭의 입에서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다 갑자기 준혁을 향해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자초한 거지.’
준혁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유민섭이 너무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던전에 들어서자마자 이상한 시스템 메시지가 뜬 걸 보고도 호기심에 ‘지휘권’ 스킬 사용을 제안한 것은 유민섭이었다.
원망할 대상은 결국 자신이었다.
“하아…….”
또 한 번 긴 한숨을 내쉰 유민섭은 인벤토리에서 수거했던 마나석을 꺼내 내려놓았다.
“난 좀 쉬어야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죠.”
“저, 저기…….”
김준석이 황급히 유민섭을 불러 보려 했지만, 준혁이 손을 내밀어 막았다. 김준석이 준혁을 보며 물었다.
“왜?”
“지금은 그냥 혼자 있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그렇긴 하지.”
김준석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붙잡고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래 봐야 자신은 이제 D급이 된 하급 헌터고, 유민섭은 국내 최강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준혁도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결국 유민섭이 자초한 일이었다. 지금은 일단 그대로 두는 게 유민섭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었다.
“우리도 일단은 가자.”
준혁이 던전에서 가지고 온 거대한 짐 덩이를 어깨에 올린 채 말했다.
“그래.”
준혁에 비해 꽤 작은 크기의 짐을 어깨에 진 김준석은 그제야 동생이 트럭을 빌려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때 최유나가 급하게 달려와 준혁의 앞을 가로막았다. 준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스파링은 다음에…….”
“태워 주세요.”
“예?”
“차가 없어요.”
유민섭과 함께 타고 왔는데, 유민섭이 휑하니 가 버린 탓에 돌아갈 방법이 사라진 것이었다.
“트럭이라 불편한데?”
“괜찮습니다.”
“갑시다, 그럼.”
***
준혁과 김준석은 드래곤 부산물을 개인 훈련장에 가져다 놓은 후, 일단은 집으로 와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훈련장으로 향했다.
“누가 훔쳐 가냐? 거기에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를 텐데.”
차를 운전하며 김준석이 조금 투덜거렸다.
오후까지 늘어지게 잠을 잘 생각이었는데, 준혁의 성화에 끌려나온 탓이었다.
피곤한 건 아니었다.
D급 각성자인 데다, 던전에서 특별히 한 일도 없기에 몸이 피곤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정신적 피로는 상당했다.
동생의 그 무시무시한 능력은 눈으로 보고도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용언에 묶였을 때, 갑자기 거인으로 변해 용언의 굴레를 깨 버린 광경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차마 동생에게 그런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에게는 그때 받은 정신적 충격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했다.
거기에 더해 무훈 길드장 유민섭에게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도 김준석의 정신을 피로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그 정도 대단한 인물의 좌절을 목격한 것 역시 멘탈을 흔드는 일이었다.
김준석의 투덜거림에 준혁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이야?”
“훈련장에 놔둔 부산물들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냐?”
“아닌데?”
“그럼?”
“형 훈련해야지.”
“뭐?”
김준석의 멘탈이 또 한 번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 지독한 동생 놈!”
“이왕이면 형님을 생각하는 지극한 동생이라고 불러.”
결국 할 말은 잃은 김준석은 조용히 운전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차를 몰아 개인 훈련장 앞에 도착했을 때, 김준석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어? 저 사람들 뭐야?”
준혁의 훈련장 앞에 몇 명의 남자들이 초겨울 추위에 옷깃을 여민 채 서 있었다.
그리고 준혁이 그 사람들을 알아보았다.
“어? 형, 차 세우지 말고……. 아, 아니다. 일단 차 세워 줘. 나 내릴게. 형은 내리지 말고.”
“왜?”
“우리 구단 사람들이야.”
“응?”
“내 개인 훈련장 어디 있는지 안 가르쳐 줬는데 잘도 찾아왔네.”
“괜찮겠냐?”
준혁은 구단과 상의 없이 은퇴를 결정하고 발표했었다.
지난 보름 동안 두문불출한 준혁을 찾느라 저 사람들은 발에 땀이 나도록 뛰었을 터.
어차피 한 번은 이야기해야 했다. 준혁은 이번 기회에 완전히 마무리하는 게 깔끔하다고 생각했다.
“일단 차에서 기다려. 아, 아니다. 미안한데 형은 일단 멀리 있는 커피숍에서 기다려. 시간 좀 걸릴 거 같으니까.”
“어, 알았다.”
준혁이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구단 사람들이 주변으로 몰려왔다.
“안녕하세요.”
창원 웨일즈의 대표이사, 단장, 감독, 그리고 팀의 베테랑 선수 2명까지 해서 모두 5명이었다.
그들이 말을 꺼내기 전에 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여기서는 좀 힘드니, 자리를 옮기시죠.”
준혁은 그렇게 말하고는 앞장서서 가까운 카페로 향했고, 다섯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