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5장. 비인가#3-
“내가 사람인지 아닌지는 나도 고민 좀 해 봐야겠…….”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유민섭이 지금까지 보여 준 적 없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제야 준혁도 잠시 멈칫한 후,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떤 의미로 묻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의미로 보든 사람 맞습니다.”
“으음…….”
“그럼 이제 다시 갈까요?”
유민섭의 반응이 뭔가 심상찮기는 했지만 준혁은 가족이 아니면 딱히 마음을 열지도, 관심을 두지도 않는 성격이었다.
준혁이 먼저 성큼성큼 산길을 따라 걸었고, 김준석과 유민섭이 다시 뒤를 따랐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유민섭의 계획은 단순했다.
손해가 막심했던 골드 드래곤의 레어를 정체불명의 헌터가 단독으로 클리어한 것을 알았을 때, 그의 생각은 골칫거리 던전을 돈 버는 던전으로 바꾸는 것뿐이었다.
정체불명의 헌터 ‘엽사’에게 호의로 다가갔고, 서로 윈윈인 제안을 했으며 합의가 이루어졌다.
강력한 헌터와 좋은 연을 맺어 두면 언젠가는 도움이 될 거라서, 포석을 깐다는 노림수도 조금은 있었다.
그리고 오늘, 확인을 위해 던전에 따라 들어왔다.
거기까지는 확실히 좋은 흐름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시스템 메시지 때문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게다가 인간의 수준을 초월한 엽사의 스탯에는 질려 버릴 판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것도 이미 허리 높이까지 빨려든 것 같은 느낌.
문제는 한 가지 강력한 예감이 그를 자극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후진은 불가능할 거 같은데?’
절대 발을 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아!”
유민섭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진이 없으면 직진해야지.’
유민섭은 반쯤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준혁의 뒤를 따랐다.
반면, 준혁은 꽤 들뜬 기분으로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스탯이 15퍼센트나 상승한 덕분에, 조금이기는 하지만 고양감에 온몸이 살짝 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거면 좀 더 신나게 붙어 보겠는데?’
이제 곧 만나게 될 골드 드래곤을 떠올리니 발걸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그리고 얼마 걷지 않아 골드 드래곤을 만날 수 있었다.
“단신으로 이곳까지 오다니, 대단한 인간이군. 나는 골드 드래곤 ‘카이르무스’.”
카이르무스는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대사를 내뱉기 시작했다.
“이곳까지 온 그대의 강함을 인정하여…….”
그리고 이번에도 카이르무스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콰앙!
묵색의 육모방망이, 무상곤이 그린 날렵한 궤적이 카이르무스를 후려쳐 날렸다.
볼썽사납게 땅에 처박힌 카이르무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카이르무스의 몸뚱이가 땅을 뚫고 처박힐 때, 준혁은 이미 도약 후 아래를 향해 낙하하고 있었다.
콰아앙-!
뿌연 먼지가 솟구치고, 산이 통째로 뒤흔들렸다.
“가시죠!”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몸이 굳어 버린 김준석에게, 유민섭이 재빨리 다가와 뒤로 잡아당겼다.
싸움의 위력을 보니 준혁의 말대로 300미터는 물러서야 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이 황급히 물러서는 사이, 순식간에 치열한 공방이 일어났다. 아니, 공방이 아니라 일방적인 구타가 일어났다.
빠악, 쩌억!
무상곤이 인정사정없이 카이르무스의 온몸을 두들겨 댔다.
카이르무스는 당황한 와중에도 신검을 들어 어떻게든 대항해 보려 했다.
하지만 15퍼센트의 버프를 받은 준혁의 움직임은 드래곤인 카이르무스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지난번에 싸울 당시 준혁의 피지컬은 카이르무스가 아슬아슬하게 막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넘어서니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수준이 된 것이다.
우득!
그리고 마침내 카이르무스의 팔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간이 어떻게!”
기겁한 표정의 카이르무스와 피식 미소를 짓는 준혁의 얼굴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준혁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지이잉!
무상곤이 한차례 떨리며 두꺼운 칼의 형태로 바뀌었다.
채앵-!
카이르무스가 황급히 들어 올린 신검이 쪼개지고, 준혁의 칼은 그 기세 그대로 카이르무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촤아악!
카이르무스의 가슴팍에 사선으로 붉은 흔적이 만들어졌다.
-인간이 감히!
카이르무스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온몸이 황금색 빛에 휩싸였다. ‘폴리모프’를 해제하는 모습이었다.
삽시간에 거대해져 가는 황금색 빛무리.
그 순간 준혁은 이미 땅을 박차고 솟아오르고 있었다.
높이가 지난번에 천신강림을 펼치기 위해 뛰어오른 것보다 훨씬 더 높았다. 순식간에 새까만 점으로 보일 정도였다.
[천천(穿天).]
하늘을 뚫는다는 기술명에 들어맞는 도약.
그사이 황금빛이 꺼지듯 사라지고, 카이르무스가 거대한 드래곤의 위용을 드러냈다.
-이놈-!
쉬우우우우-!
무시무시한 속도로 낙하하는 준혁의 손에는 거대한 창 1자루가 들려 있었다.
낙하하는 준혁의 모습은 한 줄기 유성을 연상시켰다.
꽈아아아앙-!
-크아아아악!
어마어마한 충격에 산 하나가 통째로 뒤흔들렸다. 자연재해를 떠올릴 정도의 신위였다.
거대한 크레이터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무시무시한 마법들이 난무했다.
[필드 오브 헬파이어(Field of Hellfire).]
일대가 작열하는 지옥의 염화로 뒤덮였다.
치이익!
준혁의 온몸을 호신강기처럼 뒤덮고 있던 영력이 검게 기화되며 흩어졌다.
뒤이어 맑은 하늘에서 난데없는 소용돌이가 역방향으로 준혁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수백에 달하는 황금의 창을 품은 소용돌이였다.
[스피어 토네이도(Spear Tornado).]
“흡!”
준혁은 두 팔을 열십자로 교차하며 온몸을 웅크렸다.
거의 찰나의 틈을 두고 당도한 황금 창의 소용돌이.
수백의 군사가 동시에 날린 것 같은 창격이 준혁의 온몸으로 쏟아졌다.
그 위로 쏟아진 것은 골드 드래곤이 뿜어낸 브레스였다. 황금빛 폭포 같은 숨결이 준혁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끝이 아니었다.
일대를 뒤덮은 지옥의 염화가 수백 줄기의 불기둥으로 변해 쏘아졌고, 그 속에서 몸을 일으킨 불의 거인이 준혁을 후려쳤다.
말 그대로 파상공세.
귀가 먹을 정도의 굉음이 던전 내부의 공간 전체를 뒤집어엎을 기세로 흔들었다.
그리고 찾아온 일순간의 정적.
요란한 마법과 브레스의 폭풍이 흩어지고, 그 한가운데 있던 준혁의 모습이 드러났다.
치이이이익!
준혁의 온몸은 10여 개의 커다란 방패에 싸여 있었다. 무수한 공격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방패들이 순식간에 크기를 줄였다.
준혁이 몸에 걸치고 있던 각 부위의 방어구를 방패처럼 키워 몸을 보호한 것이었다.
“크으! 이번엔 꽤 뜨거웠다!”
준혁의 피부마저도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만큼 무시무시한 공격.
-어떻게 인간이……?
카이르무스의 목소리에는 당혹스러운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준혁도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이상한데? 지난번보다 훨씬 과격해.’
세상에 등장한 던전이 게임에 등장하는 인스턴트 던전과 같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상식이었다.
그런데 지난번과 똑같아야 할 카이르무스의 공격성이 지난번보다 훨씬 과격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였다. 지금은 눈앞의 짐승을 사냥하는 것이 먼저였다.
반격을 위해 준혁이 앞으로 한 걸음 디디려는 찰나였다.
=멈.춰.라.
카이르무스에게서 흘러나온 외침이 퍼진 순간, 준혁의 몸이 그대로 멈췄다.
드래곤의 언령, 용언이었다.
온몸의 관절이 돌처럼 굳어 버린 듯했다. 몸이 뇌의 통제에서 벗어나 외부의 명령에 반응하는 상태.
‘미친!’
이 역시 지난번에는 보여 주지 않았던 공격이었다.
까드드득!
이를 악문 준혁이 황급히 기술을 펼쳤다.
[천신강림.]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준혁의 몸이 순식간에 드래곤과 같은 눈높이를 가질 정도로 거대해졌다. 그와 함께 굳었던 관절이 움직였다.
“이 망할 짐승 새끼야!”
버럭 소리를 내지른 준혁이 카이르무스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멈.춰.라.
다시 한 번 퍼져 나오는 카이르무스의 용언.
-끄아아아악!
하지만 오히려 카이르무스가 비명을 내지르며 다급히 뒷걸음질 쳤다.
천신처럼 거대해진 준혁의 몸이 용언의 제약을 거부했고, 실패로 인한 반동이 오히려 카이르무스의 정신을 뒤흔든 탓이었다.
쿵, 쿵쿵!
거대한 거인의 발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쭉 뻗은 준혁의 두 손이 드래곤의 목을 움켜쥐었고, 180도 방향을 뒤집은 준혁의 어깨에 드래곤의 머리가 얹혔다.
그리고 그 거대한 몸뚱이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꾸우우우웅-!
수직으로 정확하게 180도를 회전한 카이르무스의 등판이 대지를 두드렸다.
완벽한 엎어치기.
-끼에에에에엑!
카이르무스의 입에서 짐승과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준혁의 몸도 원래의 크기로 돌아갔다.
‘천신강림은 안 쓰고 싶었는데!’
처음 싸울 때는 시간이 촉박했기에 어쩔 수 없이 사용했지만, 이번에는 자제할 생각이었다.
보유하고 있는 영력의 절반을 소모해야 하는 것은 물론, 작아진 후에 밀려드는 탈력감이 뇌를 곤죽으로 만들 정도로 강렬한 탓이었다.
하지만 용언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천신강림’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후우, 후!”
준혁은 재빨리 호흡을 다독였다.
등판이 땅에 처박혀 하늘을 향해 4개의 다리를 허우적거리고, 땅에 닿은 날개를 다급하게 퍼덕거리는 카이르무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상 최강의 생명체라는 드래곤의 위용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애처롭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준혁에게는 어디까지나 사냥해야 할 짐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발버둥 치던 카이르무스는 온몸의 비늘이 곤두서는 듯한 소름 끼치는 기세를 느꼈다.
인간.
한낱 인간의 기세에 드래곤이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카이르무스가 마법을 이용해 황급히 몸을 띄웠다. 순식간에 펼친 배리어가 드래곤의 거체를 둥글게 감쌌다.
그리고 빙글 몸을 뒤집었을 때, 카이르무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시커먼 장궁을 손에 든 준혁의 모습이었다.
끼이이이익!
부러질 듯 휘어진 묵색의 장궁은 당연히 무상곤이 변한 형태. 시위에 걸린 것은 새까만 영력으로 이루어진 화살이었다.
파앙-!
영력의 화살이 시위를 벗어나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세찬 소리와 함께 터져 나갔다.
총알보다 빠르게 공간을 꿰뚫은 영력의 화살이 카이르무스의 턱을 노리고 솟구쳤다.
팡, 파앙-!
1발이 아니다. 연달아 날아온 영령의 화살은 모두 10개.
첫 번째 화살이 배리어를 두드리며 터져 나갔다. 두 번째 화살이 정확하게 같은 곳을 두드렸고 세 번째, 네 번째도 마찬가지.
깡-!
날카로운 소리를 울리며 배리어를 꿰뚫은 것은 일곱 번째 화살. 그리고 남은 3개의 화살이 구멍을 통해 침투했다.
-크아아아악!
마침내 준혁의 공격이 드래곤의 단단한 비늘을 깨트렸다.
가죽이 뚫렸고 살점을 갈랐으며 단단한 턱뼈에 틀어박혔다.
-이, 이건 무슨 기운이냐!
당황한 카이르무스가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바닥으로 내려섰다.
정확하게는 추락했다. 턱에 박힌 후 퍼져 나간 이질적인 기운이 그의 몸속에 담긴 마나를 교란시키고, 결국 변질시키고 있었다.
‘버프 효과 확실하네!’
본래의 힘만으로 싸웠다면 분명 사냥을 마치는 데 사나흘은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본래의 스탯과 비교하면 미약한 수준의 그 버프가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냈다.
본래의 스탯이었다면 영력의 화살이라 해도 드래곤의 가죽을 뚫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작은 힘이 더해지면서 가죽을 꿰뚫는 한계점을 초과한 것이다.
“오늘은 가죽 좀 건지겠네!”
큰 소리로 외친 준혁이 강하게 땅을 박찼다.
머리 너머로 넘겨 모은 두 손에는 어느새 칼날 길이가 2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칼이 쥐어져 있었다.
츠커커컥!
드래곤의 목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