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5장. 비인가#2-
‘할 말이 없네.’
유민섭의 시선은 한 곳에 못 박혀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입을 반쯤 헤 벌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말 그대로 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이건 SS급… 아니다, 이 정도면 등급을 나누는 게 무의미해.’
동공 안에서 몬스터들을 사냥할 때만 해도 이 정도까지 충격을 받지는 않았었다.
준혁과 같은 수준으로 휩쓸지는 못하지만, 최유나도 어쨌든 그 정도 몬스터들을 홀로 상대할 수 있었으니까.
동굴에서 나온 후, 무시무시한 도약으로 와이번을 잡을 때는 조금 더 놀랐다.
하지만 마법사인 자신의 버프만 있으면 최유나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민섭은 준혁의 수준을 SS급으로 생각했다.
S급을 뛰어넘은 SS급에 대해서는 아직 헌터계에서도 논의가 진행되는 중이지만, SS급이 있다면 준혁과 같은 수준일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드래곤 나이츠를 학살하는 광경을 보고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어쩌면 드래곤도 그냥 패 죽인 거 아냐?’
드래곤을 홀로 사냥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개인의 능력이 최유나의 몇 배는 될 거라는 것도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절대 예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사냥, 특히나 보스 몬스터 사냥은 단순히 무력만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패턴을 익히고, 계획을 짜고, 단계를 밟아가며 서서히 잡아야 했다.
준혁, 그러니까 엽사가 골드 드래곤을 사냥한 것은 본신의 뛰어난 무력과 철저한 계획을 통해 이루어졌을 거라 예상했었다.
그렇지 않고는 만 하루 만에 골드 드래곤을 사냥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나는 헌터계의 전설이 될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물론 그러는 중에도 유민섭의 손은 드래곤 나이트의 마나석을 캐고 있었다.
‘쯧. 여기는 이게 안 좋아.’
마나석이 뽑히자 잠시 후 사라지는 드래곤 나이트의 시체를 보며 유민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몬스터 사체에서 마나석을 캐면 사체가 남는 경우도 있고, 남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현상은 같은 몬스터라 해도 던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데, 보통은 사체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면 그 사체에서 아이템의 재료로 쓸 수 있는 부산물을 챙길 수 있었다.
문제는 이 던전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사체가 남는 몬스터는 유일하게 보스 몬스터인 골드 드래곤밖에 없었다.
‘그래도 엘릭서 몇 병 챙길 수 있으면 남는 장사다.’
수요는 어마어마한데 공급은 한없이 0에 수렴하는 물건이라, 1병만 있어도 그동안의 손해는 모두 메울 수 있었다.
유민섭이 그런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준혁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엽삼 씨.”
준혁의 부름에 김준석이 잠시 멈칫거렸다. 엽삼이라는 이상한 이름과 동생이 자신에게 엽삼 ‘씨’라고 부른 게 적응이 안 된 탓이었다.
“왜?”
“드래곤 만나거든 최소 200미터는 거리 벌려.”
“200미터로 되겠냐? 한 300미터는 돼야 하지 않을까?”
“겁 참 많아.”
“너도 처자식 딸려 봐라. 당연히 몸 사려야지.”
“크흐흐! 그렇긴 하지. 그래. 안전하게 300미터.”
“오케이.”
짧은 대화를 마친 후, 준혁은 빠르게 드래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걸어가는 준혁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두 눈에는 기이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심장의 박동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드래곤이라는 무시무시한 짐승을 잡을 생각에 아드레날린이 과도하게 뿜어져 나오고, 심한 흥분에 온몸이 저릿할 지경이었다.
‘점점 인간미가 사라지는 느낌이다만…….’
문득 든 생각에, 입가에 매달린 미소가 쓴웃음으로 바뀌었다.
보통 사람들의 방식으로는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는 것.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상대할 때의 스릴에만 감각이 반응한다는 건 확실히 인간미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마저도 지웠다.
‘그래도 나는 인간이지.’
배면계에서의 10년 세월은 준혁의 마음을 칙칙한 어둠으로 물들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스스로의 정체성마저 모호하게 느끼게 됐을 즈음, 준혁은 현실 세상으로 돌아왔었다.
그리고 그때 준혁의 마음을 잡아 준 건 하나뿐인 피붙이인 김준석의 존재였다. 자신을 위해 헌신해 주는 형이 있다는 그 사실 덕분에 준혁은 자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이대로 간다.’
준혁이 그런 상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저기, 엽사 씨?”
뒤따르던 유민섭이 준혁을 불렀다.
“예?”
“저한테 버프 한번 받아 보실래요?”
그제야 준혁이 걸음을 멈췄다.
“버프요?”
“예, 버프요. 아, 버프만이 아니고 또 한 가지 제안할 만한 게 있는데…….”
고개를 끄덕이는 유민섭은 두 눈을 호기심으로 잔뜩 채우고 있었다.
유민섭은 S급 마법사 클래스의 헌터 중에서 꽤 드문 케이스인 지휘관 포지션의 마법사였다.
[상태창]
유민섭
클래스:마법사
근력:[58] 순발력:[89]
지구력:[60] 감각:[83]
마나:[452]
스킬:
[지휘권], [통찰], [근력 강화], [순발력 강화], [감각 강화], [지구력 강화], [그래비티 컨트롤], [프로텍션 돔], [널 사이트], [블링크], [뱀피릭 리커버리], [블리딩 아이비], [미개방], [미개방]
스킬의 대부분이 버프나 지원형이라, 보통은 서포터 포지션의 마법사가 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 스킬들 중에 2개, S급 보조형 마법사들에게만 나타나는 ‘지휘권’과 ‘통찰’이라는 2개의 스킬이 그의 포지션을 지휘관으로 만들어 주었다.
연계되는 2개의 스킬을 이용해 전장 전체를 한꺼번에 통제할 수 있기에, 지휘관형 마법사라는 독특한 포지션이 완성되는 것이었다.
유민섭이 말을 이었다.
“저한테 지휘권이라는 스킬과 통찰이라는 스킬이 있습니다. 이게 어떤 스킬이냐 하면…….”
[지휘권]
명령받는 것을 동의한 대상에 한해 지휘권이 발동된다.
지휘권으로 묶인 대상들끼리 생각만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지휘 대상의 근력, 순발력, 지구력, 감각이 5퍼센트 증가한다.
지휘 가능 대상 26명.
[통찰]
지휘 대상의 스테이터스를 확인할 수 있다.
설명을 들은 준혁의 눈에도 호기심이 어렸다.
“그러니까 길드장님의 지휘권이라는 걸 내가 받아들이면, 길드장님이 내 상태창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네요?”
“그렇죠. 아, 딱 근·순·지·감, 4가지 수치만 확인 가능합니다. 그리고 모든 능력치가 5퍼센트 버프. 거기에 더해서 따로 근력, 순발력, 지구력, 감각 스탯을 10퍼센트씩 상승시켜 주는 강화 스킬도 있습니다. 합계 15퍼센트의 버프 효과죠.”
준혁은 잠시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내 스탯이 유민섭한테는 어떻게 보일까? 거기에 15퍼센트라…….’
그 정도면 결코 적지 않은 효과였다. 특히나 모든 수치를 최고로 올린 준혁에게 15퍼센트라면 어마어마한 능력치 상승 효과였다.
‘그런데 과연 버프가 먹힐까?’
서로 다른 시스템이었다.
각성자의 버프 스킬은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에게는 효과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미 많은 곳에서 실험을 해 보았기에 그것은 분명한 진실이었다.
그런데 준혁은 분명 각성자와 비슷하지만 다른 시스템의 각성자였다.
의외로 이것저것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한번 해 보죠, 까짓것.”
“하하! 시원시원하시네요.”
기분 좋게 웃은 유민섭이 준혁을 대상으로 지정하고 ‘지휘권’ 스킬을 펼쳤다.
허공에 푸른색의 반딧불이 같은 빛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준혁 앞으로 날아갔다.
“그걸 손으로 잡으시면 됩니다.”
준혁은 망설임 없이 푸른색의 작은 빛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어!”
그리고 실성을 내뱉은 사람은 유민섭이었다.
[경고! 접근이 불가능한 시스템에 접촉하였습니다.]
귓속에 시스템음이 요란하게 떠들었다.
[비인가 사용자를 통한 시스템 침입 시도가 발생하였습니다.]
[비인가 사용자를 통한 시스템 침입 시도가 발생하였습니다.]
망막에도 한 가지 메시지가 연달아 주르륵 올라갔다.
유민섭의 시선이 황급히 준혁에게로 향했다.
“왜 그래요?”
하지만 준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유민섭을 바라보기만 할 뿐.
유민섭의 눈동자가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기 시작했다.
망막에는 여전히 같은 메시지가 도배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거야?’
몇 년째 헌터 생활을 하면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대비책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였다.
[시스템 침입 시도에 대하여 강제적으로 개입합니다.]
[시스템과의 연결 일부를 차단합니다.]
[자체 방어 시퀀스에 돌입니다.]
[…….]
[…….]
알 수 없는 메시지가 주르륵 올라왔다.
당혹감이 역력한 유민섭의 얼굴에도, 준혁과 김준석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실패…….]
[주ᅟᅳᆮ,ㄱ.ㅅ먀ㅐㅔ]
[며ㅑㅔㅐㅗㅓᅟᅡᆸㅈㄷ휴ㅜᅟᅡᆷ;ㅓㅣㅏ]
실패라는 메시지 이후, 메시지창이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문자열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나 어떻게 되는 거야?’
알 수 없는 공포가 유민섭의 머릿속을 장악했다.
‘설마 각성이 풀리거나…….’
그때였다.
[‘피지휘자 1’이 지휘권을 인정하였습니다.]
“어?”
뭔가 실패 어쩌고 하더니 결국 ‘지휘권’ 스킬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메시지가 나왔다.
[‘피지휘자 1’의 콜사인을 정해 주십시오.]
처음 ‘지휘권’ 스킬을 허락한 대상에게는 이런 메시지가 떴다.
‘엽사.’
[‘피지휘자 1’의 콜사인이 ‘엽사’로 정해졌습니다.]
[지금부터 ‘엽사’에게 지휘권이 적용됩니다.]
[대상 ‘엽사’의 근력, 순발력, 지구력, 감각이 5퍼센트 상승합니다.」
“어라?”
동시에 준혁이 실성을 흘리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지휘권을 받아들여 근력, 순발력, 지구력, 감각이 각각 5퍼센트씩 상승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하지만 준혁은 특별히 스탯이 오른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버프 들어온 거 맞죠?”
“예. 그런데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준혁이 자신의 스탯창을 불러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노이즈가 잔뜩 낀 화면만 나타날 뿐이었다.
“그런데 제 스탯도 볼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잠시만요.”
유민섭은 곧장 통찰 스킬을 발동했다.
[피지휘자 엽사의 상태창]
근력:[+50] 순발력:[+50]
지구력:[+50] 감각:[+50]
유민섭이 저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이건 또 뭐야?’
상태창 각 스탯의 ‘+’표시 뒤에 나타나는 숫자가 버프로 인해 올라가는 수치였다. 그런데 앞의 숫자는 보이지 않고 +표시 뒤의 숫자만 보였다.
보이지 않는 것도 이상했지만, 유민섭의 눈에 더 이상해 보이는 것은 따로 있었다.
‘+50’이라는 표시였다.
버프되어 상승되는 수치가 50이라면, 이걸 기준으로 역산하면 실제 숫자를 알 수가 있다.
50이 5퍼센트라면, 그 앞의 숫자는 당연히 1,000이라는 뜻이었다.
그것도 4가지 스탯 전부.
‘이게 말이 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숫자였다.
유민섭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갖고 있는 버프 스킬을 모두 준혁에게 쏟아부었다.
[근력 강화], [순발력 강화], [지구력 강화], [감각 강화].
[피지휘자 엽사의 상태창]
근력:[+150] 순발력:[+150]
지구력:[+150] 감각:[+150]
새삼 확인할 필요도 없었지만, 실제로 확인해 보니 결과는 역시나였다.
‘기본 육체 스탯이 전부 1,000? 미쳤네, 미쳤어.’
혼자서 거듭 당황하고 있는 유민섭을 보며 준혁이 말했다.
“아, 버프 들어온 거 같아요.”
합계 15퍼센트의 버프가 걸린 후에야 약간 느낌이 왔다. 유민섭은 그 말에 또 당황해야 했다.
‘기본 수치가 너무 높으니까 5퍼센트는 느낌도 안 왔던 건가?’
유민섭은 괴물을 보는 듯한 눈으로 준혁을 볼 수밖에 없었고, 그런 유민섭을 보며 준혁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유민섭이 되물었다.
“당신, 사람 맞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