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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비인가#1-
“어서 오세요, 엽사 씨. 잘 지내셨습니까?”
“뭘 또 우리 사이에 안부씩이나 물으실까?”
“원래 친해지는 과정이 이런 거죠.”
“비즈니스적인 접근이 좋은데요?”
“비즈니스 하다 보면 인간적인 정도 생기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친해지고 상부상조하고 그러는 거죠.”
“큰일 날 분이시네. 그게 다 적폐의 씨앗인 겁니다.”
오늘도 준혁과 유민섭의 대화는 묘하게도 합이 잘 맞았다.
보름 만에 만났는데도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지 않고, 왠지 앞으로 15년을 만나도 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었다.
골드 드래곤의 레어 앞에 네 사람이 서 있었다.
한쪽은 이순신 장군 얼굴의 준혁과 독특한 가면을 쓴 남자였고, 다른 한쪽은 유민섭과 최유나였다.
유민섭이 독특한 가면을 쓴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일행이 있네요?”
“아, 서로 인사 나누시죠. 이쪽 분은 던전에 같이 들어갈 제 동행입니다.”
“반갑습니다. 무훈 길드장 유민섭입니다.”
가면의 남자, 김준석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엽삼입니다.”
“엽삼… 이요?”
유민섭이 멈칫하며 준혁을 향해 물었다.
“엽사의 사가… 넉 사(四) 자였습니까? 그래서 삼(三), 사(四)?”
물론 그렇지는 않다. 엽사의 사는 스승 사(師)자다. 하지만 딱히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거, 대충 넘어갑시다. 어차피 본명도 아닌 거.”
“크흐흐! 뭐 그건 또 그러네요. 그럼 이쪽 분이 엽사 씨의 형님 되시나 봐요?”
유민섭은 농담처럼 말한 이름만 듣고도 꽤 예리하게 실체를 파악했다.
단순히 이름만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준혁과 김준석의 태도까지 살핀 후에 내놓은 말이었다.
느물거리는 태도에 쓸데없는 농담 따먹기나 하는 모습 때문에 만만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실체는 국내 1위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그 정도 눈치 혹은 통찰력은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덕목이었다.
준혁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이상한 개그에 일가견이 있으시네?”
“재미있었어요? 그럼 다행이고.”
“재미있었으면 내가 웃었겠죠.”
비죽 웃으며 말하는 준혁은, 당연하게도 전혀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아무튼 말로는 못 당하겠어.”
유민섭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데, 누군가 앞으로 불쑥 나왔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인 양 유민섭 뒤에 멀뚱히 서 있던 최유나였다.
“안녕하십니까. 최유나입니다.”
엽삼, 아니 김준석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 예!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최유나는 짧은 인사 후 곧장 준혁에게 다가갔다.
스르릉!
그리고 가타부타 말도 없이 일단 장검부터 뽑아 들었다.
“어, 어어!”
김준석이 당황해서 뒷걸음질 치는 순간, 유민섭이 재빨리 다가와 김준석을 살짝 뒤로 당겼다.
“우리는 물러나죠.”
“예? 아, 예.”
김준석이 영문도 모른 채 물러서는 사이, 최유나가 준혁을 향해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그럽시다.”
준혁이 무상곤을 꺼내 손에 쥐었다.
[와일드 대시(Wild Dash).]
주변의 공기가 일시에 빨려들어 가는 듯하더니, 거대한 풍압을 끌어안은 최유나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콰콰콰!
최유나 주변의 땅바닥이 과격하게 뒤집혔다.
최유나가 끌어안은 묵직한 바람의 압력이 준혁을 압박하고, 뒤이어 최유나의 롱 소드가 당도했다.
[마이티 세버(Mighty Sever).]
시리도록 푸른빛으로 물든 검신이 만들어 낸 한 줄기 궤적.
콰아아앙!
롱 소드와 무상곤의 격돌.
어마어마한 기의 충돌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충돌이 만들어 낸 기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주변 일대가 초토화되었다.
따앙!
그리고 울리는 허무한 쇳소리 한 줄기.
최유나의 롱 소드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사위가 적막으로 휩싸인 가운데, 물끄러미 자신의 롱 소드를 내려다보고 있던 최유나가 고개를 들었다.
“부족합니까?”
“아직은.”
최유나의 얼굴에 언뜻 실망감이 스쳐 가려는 찰나, 준혁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도 보름 만에 많이 좋아졌네.”
그제야 최유나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실망스러운 표정 위에 옅은 미소가 덧씌워졌다.
준혁이 유민섭을 향해 물었다.
“최유나 씨가 이러는 거 보니까 오늘은 길드장님이 동행하는 거죠?”
“하하! 맞습니다. 그래도 길드장이잖아요.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인데.”
“찬물 많이 드셔서 좋으시겠어요?”
“아, 이 사람 진짜… 크흐흐.”
“그럼 갑시다.”
준혁이 앞장서서 던전 게이트로 들어섰고, 김준석과 유민섭이 그 뒤를 따랐다.
[인가되지 않은 접속 시도를 발견하였습니다.]
던전으로 들어서자마자 귓전에 울리는 시스템 사운드에, 유민섭이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인가되지 않은 접속 시도?’
반사적으로 준혁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뒤이어 엽삼이라고 이름을 밝힌 김준석을 보았다.
김준석 역시 뭔가 멈칫하는 듯한 눈치.
빠르게 판단을 끝낸 유민섭이 준혁에게 말했다.
“엽사 씨.”
“네?”
“지금 저한테 시스템이 말을 하고 있어요.”
“무슨 말이요?”
“인가되지 않은 접속 시도를 발견했다고.”
그 말을 들은 준혁의 시선이 김준석에게로 향했고, 김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준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 비인가 접속 시도는 나 때문인 거 같네요.”
“아무래도 그런 거 같습니다.”
“뭐, 이미 말했잖아요. 나 각성자 등록도 안 돼 있다고.”
“그랬죠. 뭐, 특별히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죠?”
“이미 한 번 클리어했는데 문제가 생길 게 있나요? 그럼 이제 갈까요?”
“그럽시다.”
앞장선 준혁과 후미의 유민섭 사이에 김준석이 선 순서로 동굴을 따라 걸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서 걷는 김준석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사실은 골드 드래곤의 레어를 공략하러 가자는 동생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김준석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그 위험한 곳에 자신이 가 봐야 오히려 동생의 발목을 잡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던전 앞에서 무훈 길드장과 농담 따먹기를 하더니, 최유나와는 대련을 했다.
게다가 분위기도 이상했다.
근접 딜러 계열 중에서는 국내 최강이라는 그 최유나가 준혁에게 가르침을 받는 듯한데, 정상으로 보일 리가 없었다.
‘저런 무시무시한 놈이 내 동생이었다고?’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골드 드래곤을 혼자 잡았다고 할 때부터 아주 강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막상 눈으로 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일단 가자.’
던전의 첫 번째 전투가 발생하는 동굴 속 지하 동공에 도착했을 때, 준혁이 뒤를 향해 손을 들었다.
“거기서 구경하다가 마나석이나 캐고 있어요.”
거침없이 앞으로 달려가는 준혁의 손에는 어느새 무상곤이 쥐어져 있었다.
이미 한 번 겪어 본 싸움이었다. 어떻게 싸울지 머릿속에 완벽하게 그림이 그려졌고, 그것을 정확하게 몸으로 실현하는 일만 남았다.
영력에 휘감긴 무상곤의 형태가 순식간에 변했다.
준혁은 무려 5미터 길이의 묵색 봉으로 변한 무상곤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부우우웅, 퍼버버버벅!
전방 5미터의 반원 범위 안에 있던 몬스터들이 그대로 휩쓸리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크아아악!
몬스터들이 뭉텅이로 하늘을 날았다. 아니, 몬스터 시체들이 하늘을 날았다.
쿵, 쿠쿵!
몬스터 시체가 포물선을 그리며 처박힌 위치는 정확하게 김준석과 유민섭의 앞쪽이었다.
둔탁한 파육음과 몬스터들의 비명이 동공 안에 휘몰아치고, 그럴 때마다 쉴 새 없이 몬스터 시체들이 두 사람 앞에 떨어졌다.
살아 있는 놈은 단 한 놈도 없었다.
유민섭이 슬쩍 김준석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거 혹시…….”
“놀지 말고 마나석이나 캐라는 말 같죠?”
“같은 생각을 하셨네요.”
“후우! 하죠, 뭐.”
“그럽시다.”
무려 대한민국 1위 길드의 수장인 유민섭이 몬스터 시체 옆에 쭈그리고 앉아 비수를 꺼냈다.
푹, 자그락!
그런데 몬스터 시체를 가르고 마나석을 캐는 손길이 그렇게 능숙할 수가 없었다.
단번에 살점을 가르고 그대로 비수를 젖히면 마나석이 툭 뽑혀 나왔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저 정도면 전문 짐꾼 수준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김준석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쪽도 정상은 아닌 거 같아.’
처음 각성했을 때부터 S급이었던 유민섭이 어떻게 이런 일에 이 정도로 능숙할 수 있는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민섭의 대단한 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두 손으로는 기계적으로 마나석을 캐면서도, 두 눈은 정확하게 준혁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S급? 아니, 아직 정립되지 않은 SS급도 저렇게는 못할 것 같은데?’
S급 스테이터스를 지닌 유민섭의 눈으로도 제대로 좇기가 벅찰 정도로 빠른 몸놀림이었다.
‘그나저나 시스템이 이상한 건 확실하네.’
유민섭은 이곳, 골드 드래곤의 레어를 공략한 경험이 있었다. 그런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상황은 지금과 달랐다.
이 동공은 일종의 디펜스 룰이 적용되는 곳이었다.
1차에 고블린이 나오고, 끝나면 2차로 오크가 나오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모든 몬스터가 한꺼번에 몰려나오지 않았었다.
처음 던전에 들어왔을 때 들려온 메시지와 연관이 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비인가 접속 시도… 그리고 한꺼번에 공격하는 몬스터들. 비인가 접속 시도를 차단하는 행동이라고 봐야 하나? 엽사 씨의 정체가 도대체 뭘까?’
몇 번 겪어 보지는 않았지만, 도통 실체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느낌이 어째 쎄한데? 괜한 일에 발 담근 거 아닌지 몰라……. 어? 가만 보니……?’
그러다 뒤늦게 유민섭의 시야에 담긴 것이 있었다.
‘옷이?’
급히 옆에 있는 엽삼을 돌아보았다.
‘이쪽은 정상이고…….’
던전은 현실의 세상과 분리된 공간이었다.
각성하지 않은 사람도 들어갈 수는 있지만,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뿐이었다.
인간을 제외하고 현실 세계의 물건은 던전에 들어가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게 된다.
현실의 일상복을 입고 던전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벌거벗은 상태가 되어 버린다는 뜻이다.
그래서 헌터들은 대부분 던전에서 얻은 소재로 만든 옷을 입고 다녔다.
그런데 준혁의 옷은 어떻게 봐도 일상의 복장이었다.
몸에 착용하고 있는 보호구는 몰라도, 입고 있는 청바지나 티셔츠, 신발은 분명 일상의 물건이었다.
‘그런데 안 사라졌어? 엽사 씨가 가지고 있는 물건은 던전에서 사라지지 않는 거네? 이거 단순히 비인가 접속 시도 정도가 아니라… 바이러스?’
유민섭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준혁을 보았다. 공포에 질린 몬스터들이 뒤로 슬금슬금 물러서고 있었다.
몸속에 들어온 세균을 막기 위해 발동한 면역 체계가 결국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거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냄새가 나기는 하는데……. 그래도 꽤 재미있겠는데?’
피식 웃은 유민섭이 더욱 바쁘게 손을 놀려 마나석을 캤다. 점점 일감이 밀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