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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어디서 많이 본 얼굴#3-
“하하! 이렇게 빨리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안내받은 접객실로 들어서자 유민섭이 반가운 얼굴로 악수를 청했다.
“아직 퇴근들 안 하셨을 거 같더라고요.”
“뭐,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일단 앉으시죠. 커피라도?”
“아뇨. 됐습니다.”
준혁이 소파에 앉고 유민섭이 상석에, 나머지 두 사람이 준혁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쪽은 강태웅 헌터, 그리고 아까 한 번 칼을 섞어 봤던 최유나 헌터입니다.”
준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차분하게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유민섭과 강태웅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두 쌍의 눈에는 짙은 궁금증이 담겨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았던 준혁의 얼굴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그리고 최유나는 준혁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 강렬해 준혁마저 흠칫할 정도였다.
‘뭐지?’
딱히 적대적인 감정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강렬한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준혁은 이내 시선을 돌려 유민섭에게 말했다.
“거두절미한 쪽을 좋아합니다. 본론부터 말씀하시죠.”
“하하! 왜 이리 사무적이에요?”
“우리가 딱히 정을 나눌 사이는 아니잖아요?”
“혹시 모르죠. 나중에는 정을 나눌 사이가 될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죠. 그래서 사업 이야기라는 건 뭡니까?”
초면이었던 게이트 앞의 만남에서부터 이상하게 대화의 합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유민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거두절미를 좋아하신다니 저도 그렇게 하죠.”
“좋습니다.”
“던전 공략.”
딱 네 글자를 말한 후, 유민섭은 입을 꾹 다물었다. 던전 공략이 어떻다는 건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살며시 인상을 찡그린 준혁이 곧장 물었다.
“조건은?”
“와아! 진짜 재미없는 양반일세? 그 말을 이해했다고?”
준혁이 보여 주는 태도 때문에 궁금증을 느끼라고 살짝 장난을 쳐 봤는데, 도무지 말려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탓이었다.
“그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닙니까?”
“당연한 겁니까?”
“무훈 길드 최고의 공략 팀을 꾸렸는데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을 것이고… 다시 공략하자니 버겁고, 그렇다고 비싸게 주고 낙찰받은 던전에서 채굴만 하자니 투자금 회수가 안 됐을 것이고……. 그런데 혼자 던전을 공략한 사람이 등장했다? 그럼 당연히 던전을 대신 공략해 달라는 뜻 아닙니까?”
유민섭이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돗자리 까세요. 돋보기는 내가 마련해 줄 테니. 아주 용하다고 소문나겠네.”
추론이야 가능하겠지만, 국내 1위 길드가 던전 공략을 일개 개인에게 부탁한다는 파격적인 발상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길드들은 ‘공략’이라는 관점에서 던전을 2가지로 분류한다.
그중 하나는 클리어 던전이다. 보스까지 공략해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이 큰 던전들이 거기에 속했다.
나머지 하나는 채굴 던전이다. 보스를 잡아도 들인 노력 대비 수확이 적을 때, 보스는 잡지 않고 일반 몬스터만 사냥해서 그 마나석과 부산물을 챙기는 방식이었다.
던전 보스를 사냥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몬스터 리젠 시간이 확연히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골드 드래곤의 레어는 클리어 던전으로 분류된 던전이었다.
공략 난이도는 엄청나게 높지만, 엘릭서는 그걸 감수할 정도의 보물이었으니까.
하지만 공략 후 엘릭서를 써 버려야 한다면, 공략 불가라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이 첫 공략 이후 골드 드래곤의 레어를 채굴 던전으로만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던전을 솔로 공략이 가능한 사람이 나왔으니, 유민섭으로서는 준혁이 가뭄에 단비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유민섭이 설명을 부연했다.
“던전에 리젠 한계라는 게 있는 건 아시죠?”
“그 정도야 요즘 세상에는 상식이죠.”
“골드 드래곤의 레어는… 우리가 측정해 본 바로는 앞으로 예닐곱 번 정도 완전히 클리어하면 소멸할 던전입니다.”
“측정? 그런 걸 따로 측정을 통해서 아는 겁니까?”
일개 운동 선수였던 준혁으로서는 알지 못하는 정보였다.
“던전 에너지 측정기라는 게 있죠. 그 측정기의 결과를 바탕으로 계산합니다.”
“그런 물건도 있었군요.”
“BR 코퍼레이션에서 생산하는 제품이죠.”
“아, 거기. 소문은 들었습니다. 외계인 감금하고 있는 회사라는 얘기는 들었는데…….”
“BR은 진짜 그럴지도 모릅니다. 던전 에너지 측정기, 각성 검사기, 던전 발생 감지기, 아이템 등급 측정기, 레이드 시뮬레이션……. 던전이랑 관련된 모든 제품은 그 회사에서 만든 겁니다.”
“그 정돕니까?”
“네.”
준혁이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 정도면 던전을 만든 게 그놈들이라는 의심을 해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한때 그런 음모론도 있었죠. 달라붙은 기자, 정보기관이 한둘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의심스러운 부분은 없었습니다. 아, 이야기가 옆으로 샜네요. 어디까지 했죠?”
준혁이 잠시 기억을 더듬은 후 대답했다.
“던전이 예닐곱 번 남았다고.”
“아, 네. 그 예닐곱 번의 클리어를 대신 해 주시겠어요?”
“당연히 내가 받을 것도 있겠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뭘 새삼스레 물어보십니까? 절반 드리죠.”
“절반?”
“다음번 던전 공략 클리어 후에 얻는 모든 건 그쪽에서 가져가십시오. 오늘 클리어해서 얻은 수확물이 있겠지만, 그건 실력 검증한 셈 치겠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번의 획득물은 우리 쪽으로. 그렇게 번갈아서 한 번씩. 어떻습니까?”
이것저것 따지는 것 없는 꽤 호쾌한 제안이었다.
무훈 길드에서는 던전 공략권 낙찰에 쓴 돈이 있으니, 반반이라고 해도 저들의 손해였다.
그런데도 저렇게 편안한 얼굴로 이런 제안을 할 수 있다는 건, 유민섭의 그릇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 주는 실례이기도 했다.
그리고 유민섭이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던전 폐쇄까지 남은 공략 횟수가 홀수 번이면 내가 한 번 더 가지게 되는 셈인데도 나한테 먼저 권리를 준 거 같은데?’
단순한 산수 계산이니 그걸 간과했을 리는 없을 터였다.
이 역시 유민섭의 배포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준혁이 순수하게 감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파격적인 분이시네?”
“오해하셨군요. ‘정석’이 삶의 모토인 사람입니다. 하지만 정석이 있어야 파격도 있는 법이기는 하죠.”
“그래도 통이 아주 크네요?”
“에이, 설마 그것밖에 없겠습니까? 조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 더?”
“던전 공략 시 무조건 우리 측 옵서버 1명 동행해 주십시오. 뭐, 짐꾼으로 쓰거나 마나석 캘 때 부려 먹어도 괜찮습니다.”
“그렇게만 말하면 어떡합니까? 이유 정도는 알려 줘야지.”
준혁의 물음에 유민섭이 거침없이 답했다.
“견학입니다.”
“견학?”
“거기까지만 말씀드리죠. 나도 내 속을 다 깔 수는 없잖습니까?”
하지만 준혁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전력을 파악하거나, 혹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S급 헌터들의 성장을 돕거나.
‘아니. 둘 다겠지.’
준혁으로서는 딱히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걸리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나, 헌터 등록 안 돼 있는 거 짐작하시죠?”
“내가 이 바닥 생활이 몇 년인데 그 정도도 눈치 못 채겠습니까? 걱정할 거 없습니다.”
빠르게 결론이 나왔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그때였다.
“저요!”
갑자기 최유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무슨 일이야, 최유나 헌터?”
“제가 가겠습니다.”
“뭘?”
“옵서버, 제가 가겠습니다.”
준혁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래도 들을 건 다 들은 모양이었다.
“그런 얘기는 손님 보내고 나서…….”
“제가 가겠습니다!”
딱히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지만, 두 눈이 고집스럽게 빛을 뿜었다.
최유나가 저 상태일 때는 아무도 못 말린다는 걸 잘 아는 유민섭이었다.
“하아!”
짧게 한숨을 내쉰 유민섭과 강태웅이 시선을 마주치더니 곧장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빼고는 최유나 헌터가 옵서버로 따라가는 걸로 하지. 그 두 번은 내가 한 번, 그리고 강태웅 헌터가 한 번. 어때?”
“감사합니다.”
빠르게 정리를 끝낸 유민섭이 품에서 휴대폰 하나를 꺼내 준혁에게 내밀었다.
“길드 법인 명의로 개통된 휴대폰입니다. 연락하실 때 이걸 쓰십시오. 여기 세 사람 번호가 저장되어 있으니까 필요할 때 연락하시면 됩니다.”
준혁도 마침 잘됐다는 듯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도청 장치니, 위치 추적이니 하는 것들을 조금은 의심할 법했지만, 두 사람 다 거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아직 신뢰가 만들어지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으니 서로를 믿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짧은 시간 서로가 서로를 파악한 자신들의 안목을 믿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름 정도는 알려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준혁이 잠깐 멈칫했다.
알려 주지 못할 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알려지면 형에 대한 것도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 부분만큼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준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엽사라고 불러요.”
상태창에 나오는 준혁의 직업이었다.
“엽사?”
“사냥꾼이라는 뜻입니다.”
“하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알았습니다.”
“그나저나 너무 손해 보는 거 아닙니까?”
“뭐, 그렇게 생각해 주면 좋죠. 빚을 지워 두는 느낌 같은 거 있잖아요?”
“내가 그렇게 성실한 채무자는 아닌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는 사람이니까.”
준혁이 보기에는 손해였지만, 유민섭이 보기에는 이 거래는 절대 손해가 아니었다.
전사 계열 헌터 중 세계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가 최유나였다.
눈앞의 엽사는 그런 최유나를 단 일 합으로 칼을 놓치게 만든 실력자였다.
아니, 그 전에 S급 헌터가 3명이나 포함된 공략 팀으로도 제대로 클리어하지 못한 골드 드래곤의 레어를 단신으로 하루 만에 클리어했다.
그 정도 실력자와 연을 맺고 좀 더 나아가 호감을 끌어낸다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자산이었다.
그것도 도저히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자산이었다.
무훈 길드를 대한민국 1위 길드로 만든 유민섭의 안목과 촉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때 준혁이 갑자기 멈칫하더니 백팩을 열었다.
“이왕 해 주는 거, 이것도 좀 처분해 주시죠.”
준혁은 백팩에서 꺼낸 도깨비 보따리에서 마나석 하나를 빼 들었다.
“혹시 골드 드래곤 레어에서 캐낸 것들입니까?”
“예.”
유민섭이 도깨비 보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거 아이템입니까?”
“예.”
“혹시… 아공간 주머니?”
유민섭도 골드 드래곤의 레어를 이미 한 번 공략했었다. 거기에서 나온 마나석이 저렇게 작은 주머니에 다 들어갈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설마하고 물어본 것이었다.
“맞습니다.”
준혁의 대답에 유민섭과 강태웅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각성자가 갖고 있는 인벤토리도 아공간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저렇게 아이템으로 아공간을 구현한 물건은 아직 세상에 나온 적이 없었다.
저런 물건이 뿌려진다면 아마 물류의 대혁명을 이룰 수 있으리라.
퍼뜩 정신을 차린 유민섭이 물었다.
“혹시 그 안에 레어에서 가지고 온 마나석이 다 들어가 있는 겁니까?”
“네.”
“잠시만요.”
유민섭이 자신의 인벤토리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여기 부으세요.”
무훈 길드에서 마나석을 나를 때 쓰는 상자였다.
준혁이 쏟아 낸 마나석은 상자 5개를 가득 채웠다. 그마저도 드래곤 하트는 꺼내지 않은 양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위용에 유민섭은 혀를 내두르면서도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몬스터를 안 잡고 드래곤한테만 달려든 게 아니라… 몬스터를 전부 잡고 드래곤까지 사냥한 거였어. 그런데도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거잖아. 허, 도대체 어느 정도로 강한 거야?’
상자를 한쪽에 내려놓은 후 유민섭이 말했다.
“이거 전부 현금으로 바꾸면 힘드니까, 이참에 ‘이나’에 계좌 하나 만드시죠.”
“이나?”
준혁으로서는 아주 생소한 단어였다.
“Invisible Network Account, 이나(I.N.A). 스위스 비밀 계좌 같은 겁니다. 고위급 헌터들은 전부 하나씩 갖고 있죠. 만드는 데 돈이 들어서 그렇지, 만들어 놓으면 아주 편합니다.”
갑자기 통장에 거금이 들어오면 여러모로 불편할 건 자명한 일.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들어서 문자로 알려 드리죠.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준혁이 먼저 악수를 청했다. 준혁도 유민섭에게 어느 정도 호감이 생겼다는 의미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도록 노력해 보죠.”
유민섭이 너스레를 떨며 하는 말에, 준혁도 이번에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피식 웃어 주었다.
“나가는 길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평소 그런 것에 아무런 관심도 없던 최유나가 벌떡 일어나 앞장을 섰다.
이번에도 유민섭과 강태웅이 서로를 향해 시선을 던지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오시죠.”
최유나가 준혁을 이끌고 접객실을 나선 후, 강태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는 커피나 한잔할래요. 길드장님은?”
“어, 나도. 여기 동전.”
강태웅의 입맛은 자판기나 믹스 커피 쪽이었고, 유민섭도 가끔은 그게 당길 때가 있었다.
땅!
유민섭이 튕긴 동전이 허공을 날아 강태웅에게로 향했다. 그것을 향해 손을 뻗던 강태웅이 그 자세 그대로 갑자기 딱딱하게 굳었다.
“왜 그래?”
유민섭이 깜짝 놀라 물었다. S급 헌터가 동전 따위를 못 받는 건 말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생각났어요!”
“응?”
“그 얼굴! 엽사 씨 얼굴이요!”
“그게 무슨 소리야?”
강태웅이 재빨리 100원짜리 동전을 주워 앞면을 유민섭에게 보이며 외쳤다.
“이 얼굴이었어요!”
강태웅이 동전의 앞면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얼굴에서 수염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렸다.
“헉!”
유민섭이 기겁한 표정으로 동전에 새겨진 이순신 장군의 얼굴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눈앞에서 보았던 엽사의 얼굴과 그렇게 닮아 보일 수가 없었다. 다른 점은 수염이 없다는 것과 더 젊어 보인다는 것 정도였다.
“허허! 이순신 장군님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