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3장. 어디서 많이 본 얼굴#1-
폭발의 여파가 가시고 나타난 것은 흉측한 몰골로 폭사한 카이르무스의 시체였다.
그리고 허공에서 갑자기 포션 1병이 나타나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여러 가지 색의 빛이 동시에 새어 나오는 포션은 준혁의 던전 방문 목적인 엘릭서였다.
일단 엘릭서부터 도깨비 보따리에 집어넣은 준혁은 터덜터덜 걸어 카이르무스의 시체로 다가갔다.
‘묵룡삭에 묵룡비(墨龍匕)를 죄다 날렸네.’
두 아이템을 소모하지 않고도 카이르무스를 사냥할 수는 있었다.
차근차근 데미지를 쌓은 후, 결정타를 날리는 방식이면 충분했다.
그랬다면 육탄전을 벌이며 상처를 입지도 않았을 것이다. 주지했다시피 아이템을 소모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자면 적잖이 시간을 들여 싸워야 한다는 것이 준혁의 계산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기에는 형의 상태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드래곤의 시체는 폭발에 휘말려 시커멓게 타 버린 탓에 제대로 쓸 만한 부위가 없었다.
‘가죽이랑 힘줄만 건져도 좋았을걸…….’
그랬다면 새로운 포승줄 아이템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한동안은 재료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 드래곤급의 가죽과 힘줄이 아니고서는 묵룡삭 정도의 아이템은 만들지 못할 테니까.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마음을 접을 건 빨리 접어야 미련도 그만큼 빨리 사라지는 법이다.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이번에는 급해서 어쩔 수 없었다지만, 다음번에 왔을 때는 온전한 상태로 드래곤을 사냥할 여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 재료를 준비하면 된다.
‘그때는 뼈와 살을 제대로 분리해 주마.’
준혁은 무상곤을 꺼내 날카로운 칼의 형태로 바꿔 드래곤의 시체를 가르기 시작했다.
드래곤의 시체가 순식간에 2분 도체가 되었다.
그리고 준혁의 손에 들린 것은 사람 머리통 크기의 거대한 황금색 보석이었다. 드래곤의 무한한 마나의 원천인 드래곤 하트였다.
준혁은 드래곤 하트만 도깨비 보따리에 밀어 넣은 후, 미련 없이 돌아섰다.
『지직, 지지지직!』
“음?”
준혁의 걸음이 멈췄다. 귓전에서 울리는 지직거리는 잡음이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그리고 그 직후.
[시스템… 인하여… 오류…….]
[통제…….]
준혁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날, 영력을 봉인당하고 세상으로 돌아왔던 그날 이후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시스템 메시지였다.
현재의 각성자들도 시스템 메시지를 본다고는 하지만, 이 메시지는 분명 준혁이 겪었던 그 시스템 메시지였다.
폰트의 특징 하나하나까지 다 기억하고 있는 준혁이 잊을 리가 없었다.
“이 납치 시스템!”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정작 그 내용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시스템… 인하여… 오류…….]
[통제…….]
『치이익, 치직!』
[시스템… 인하여… 오류…….]
[통제…….]
게다가 같은 메시지가 반복되고 있었다.
‘오류라…….’
이 역시도 노이즈가 껴 정확한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시스템 오류가 생겼다는 내용까지 못 알아들을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다 뭔가 떠올라 재빨리 입을 열었다.
“상태창!”
[상태창]
김준혁
직업:엽사(獵師)
등급:혼원급(混元級)
근력:[ ] 순발력:[ ]
지구력:[ ] 감각:[ ]
영력:[ ]
미분배 점수:[ ]
기(技)
[ ] [ ] … [ ] [ ]
술(術)
[ ] [ ] … [ ] [ ]
외(外)
[ ] [ ] … [ ] [ ]
장비
[ ] [ ] … [ ] [ ]
던전에 들어오기 전과 달리 상태창의 목록들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확실히 오류가 생긴 게 분명한지 이름, 직업, 등급 외에 전부 공란이었다.
떠오른 상태창이 던전에 들어오는 다른 각성자들과는 조금 달랐다.
이름이야 당연히 준혁의 이름이고, 엽사는 사냥꾼, 등급의 ‘혼원’은 우주라는 뜻이었다.
기(技)는 몸으로 사용하는 스킬을 뜻했다. 카이르무스를 사냥할 때 펼친 ‘전뢰보’가 이 ‘기’에 속하는 스킬이었다.
그리고 술(術)은 몸이 아닌 영력만을 사용하는 마법 같은 스킬이었다. 카이르무스의 몸뚱이를 불태운 ‘화룡연무’가 그 술의 예였다.
마지막 외(外)는 기나 술에 포함되기 어려운 독특한 스킬들이었다.
몸을 거대하게 만들었던 ‘천신강림’을 들 수 있는데, 영력의 소모가 심해 오랫동안 지속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 외에 패시브 스킬도 이 ‘외’에 포함되는 것들이었다.
‘세부 수치가 전부 공란인 걸 보면 확실히 오류는 오류인 거 같은데…….’
문제는 던전 입장 전에는 노이즈가 심해서 전혀 보이지 않던 상태창이 지금은 그래도 항목의 이름이나마 보인다는 점이었다.
‘뭐가 다른 거지? 아, 던전.’
홀로 질문을 던졌다가 금세 답을 찾았다.
던전이었다.
정확하게는 던전을 클리어한 그 순간이었다. 드래곤 하트까지 손에 넣었을 때 시스템 메시지가 떴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는 건 던전 쪽 시스템이랑 내 시스템이랑 연관이 있다는 말인데?’
그런데 그것도 이상했다.
처음 던전이 등장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각성자가 나타났을 때, 준혁도 당연하다는 듯 각성 검사를 받았었다.
하지만 미각성이라는 결과가 나왔고, 영력도 사용하지 못했었다.
그랬던 것이 이제 와서 갑자기 봉인이 풀리고, 상태창과 시스템 메시지가 나왔다.
‘차차 조사해 봐야겠다.’
지금은 던전 클리어 순간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는 것 외에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준혁은 대강 생각을 정리한 후 빠르게 발을 놀렸다.
연달아 ‘전뢰보’를 펼친 데다, 길을 막는 몬스터도 없으니 동굴까지는 금방이었다.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절대 덤비지 마라.”
골드 드래곤의 레어 던전 게이트 앞, 무훈 길드장 유민섭이 진지한 얼굴로 거듭 당부했다.
“알겠습니다.”
게이트 앞에는 무훈 길드 소속 S급 헌터 3명만이 캠핑 의자를 깔고 앉아 있었다. 유민섭이 경비를 서던 헌터들까지 죄다 물린 탓이었다.
그때 3명 중 유일한 여자 헌터인 최유나가 입을 열었다.
“덤비지 말라는 게, 적대적으로 대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미성이지만 말투는 지극히 딱딱했다.
딱딱한 건 말투만이 아니었다. 헌터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팬을 보유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에도 딱딱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 씌워져 있었다.
유민섭이 물었다.
“무슨 뜻으로 묻는 거지?”
“말 그대롭니다.”
“좀 자세하게 말해 봐.”
“스파링 요청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또 시작했구만.”
유민섭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강하게 말리지도 않았다.
“알아서 해. 하지만 알지? 그로 인해 생기는 손해는 최유나 헌터가 책임져야 하는 거.”
유민섭은 길드원들을 통제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행동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든 지게 만들었다.
무훈 길드 창설 초반에는 그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었다.
하지만 그런 기조가 완전히 자리를 잡은 후부터 무훈 길드는 폭발적으로 발전해, 대한민국 1위 길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인 최유나가 던전 게이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딱딱한 얼굴에 드물게 감정이 드러났다. 그것은 경악이었다.
“왜?”
그 모습을 본 유민섭과 강태웅이 덩달아 최유나의 시선을 좇았고, 이내 똑같은 표정으로 변했다.
붉은빛이 소용돌이치던 던전 게이트가 잔잔하게 변해 있었다.
빛의 소용돌이는 사라지고, 그저 붉은빛만 희미하게 새어 나올 뿐.
던전이 클리어되었다는 의미였다.
강태웅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대상이 정해지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빨리?”
의문의 남자가 던전에 들어간 지 겨우 하루 정도 지났을 뿐이다.
“그러니까… 하루 만에 카이르무스를 잡았다고?”
세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도대체 어떤 헌터가 던전에 들어간 지 하루 만에 골드 드래곤의 레어를 클리어한단 말인가.
‘이게 가능한 이야기야?’
유민섭은 이미 공략을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그 후 골드 드레곤의 레어 공략법을 머리 싸매고 고민했었다.
‘레이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도 수백 번 돌려 보았다.
‘레이드 시뮬레이션’은 BR 코퍼레이션이라는 곳에서 나온 프로그램으로, 던전의 데이터를 이용해 공략 가능성을 사전에 테스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렇게 컴퓨터가 과부하로 터져 나간 후에야 얻은 결론은 현재 무훈 길드의 자원으로는 공략 불가였다.
최소 15명 이상의 S급을 동원해야만 클리어 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런 던전을 혼자 클리어했다고?’
유민섭으로서는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던전 게이트의 붉은빛이 푸른빛으로 바뀌었다. 닫힌 문이 열렸다는 뜻.
“물러서!”
유민섭이 급히 말했고, 최유나와 강태웅이 재빨리 던전 게이트와 거리를 벌렸다.
던전 게이트의 푸른빛을 헤치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직후, 푸르게 빛나던 던전 게이트가 검게 변했다. 내부의 몬스터가 완전히 리젠된 후에야 다시 푸른빛 소용돌이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쉰 준혁은 차분한 표정으로 게이트를 둘러싸고 있는 3명의 S급 헌터들을 둘러보았다.
‘S급이 강하긴 강하군.’
반사적으로 느껴지는 기운에서 확실히 강자의 면모가 느껴졌다.
‘그래 봐야 나보다 약하지만.’
그때 유민섭이 조심스레 앞으로 나왔다.
준혁도 아는 얼굴이었다.
툭하면 TV에 얼굴이 나오니 모를 수가 없었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 조사에서 당당하게 1위를 차지한 사람이기도 했다.
“무훈 길드의 길드장인 유민섭입니다. 귀하에 대한 소개를 좀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촌스럽게 통성명은 뭐하러?”
피식 웃으며 나오는 준혁의 대거리에 유민섭이 따라서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품에서 명함 1장을 꺼내 내밀었다.
“받으세요.”
“뭡니까?”
“우리 사업 이야기 좀 하죠.”
생각지 못한 말에 준혁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사업?”
“예, 사업이요.”
“나 안 막아요?”
“뭐하러 막습니까? 쓸데없이 피 보고 싶지 않네요.”
그렇게 말하는 유민섭의 태도는 거짓말이라는 느낌이 조금도 없었다.
“신기한 양반일세?”
“별게 다 신기하시네. 우리 길드 빌딩 와서 그 명함 보여 주면 바로 안내해 줄 겁니다. 생각 있으면 오시고, 생각 없어도 한번 들러요.”
“거 재미있는 양반일세?”
“재미있을 것도 참 없나 봐요?”
만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묘한 대화가 오고 갔다.
그 대화를 하며 유민섭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일단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
실제로도 유민섭에 대한 준혁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보통 자기 길드 관리하에 있는 던전이 털리면 지옥까지도 쫓아간다고들 한다. 길드의 자존심은 물론 재산까지 가로채 간 행위이기 때문이다.
준혁도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다. 다만 절대 붙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느긋하게 게이트를 나왔을 뿐이다.
그런데 유민섭의 반응은 뭔가 달랐다. 화를 내기는커녕 환대하는 분위기였다.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꼭 한번 연락하세요.”
유민섭이 오른손을 내밀었고, 준혁이 그 손을 마주 잡아 편안하게 악수까지 주고받았다.
그런데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최유나였다.
“그쪽은 또 뭡니까?”
갑옷을 받쳐 입고, 허리춤의 검 손잡이에 오른손을 얹은 자세로 선 최유나의 모습.
그 모습을 일별한 준혁이 슬쩍 유민섭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대답은 최유나의 입에서 나왔다.
“스파링 한번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스파링?”
“예.”
그 말과 함께 최유나가 롱 소드를 뽑아 들고 자세를 취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단단히 마음먹고 나선 듯한 느낌이었다.
준혁이 슬쩍 유민섭에게 말했다.
“오늘 분위기 좋으니까 기분 좋게 마무리하죠.”
“하하! 그래 주면 좋…….”
유민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준혁이 최유나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와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최유나가 스킬을 펼쳤다.
짧은 바람 소리가 울린다 싶은 순간, 최유나는 이미 준혁을 향해 롱 소드를 내리긋고 있었다.
까아아앙!
높은 쇳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떠오른 것은 직전까지 최유나의 손에 들려 있던 롱 소드였다.
최유나의 얼굴에 또다시 감정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경악에 찬 표정이었다.
‘이 정도까지 차이가…….’
그런 최유나의 귓속으로 준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덤비기 전에 칼 잡는 법부터 배워.”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준혁의 모습이 S급 헌터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