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2장. 드래곤을 사냥하는 법#2-
“이놈이 감히-!”
버럭 소리를 지른 카이르무스의 주변에 황금색 빛줄기가 솟구쳤다.
소용돌이치듯 카이르무스의 온몸을 휘감은 황금 빛줄기가 점점 그 덩치를 불려 가더니, 급기야 고개를 꺾어야만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파아앗-!
그리고 문제의 빛줄기가 갑작스레 소멸한 순간,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거대한 황금색 드래곤이었다.
-인간이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카이르무스의 기묘한 목소리가 귀와 뇌리를 동시에 뒤흔들었다.
“하!”
준혁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무시무시한 기세에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확실히 용이 맞긴 하네?”
존재감만으로도 세상이 짓눌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모든 ‘종’은, 그 종의 본래 모습일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이든, 드래곤이든 예외는 있을 수 없었다.
준혁이 카이르무스를 도발해 드래곤의 형태로 돌아가게 만든 것도 그런 이유였다.
드래곤을 상대한다면 어차피 최종 페이즈는 드래곤의 모습일 테니, 쓸데없는 중간 과정을 스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드래곤의 실체는 확실히 대단했다.
준혁의 두 눈이 지금껏 보인 적 없는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오랜만이네!’
이런 거대한 존재를 상대하는 것도, 그로 인해 이렇게 긴장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불과 하루 전, 한국시리즈 7차전 마지막 타석에서도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었다.
“흡!”
짧게 호흡을 끊는 동시에 풀썩 뿜어져 나온 영력이 준혁의 온몸을 감쌌다.
그 순간, 카이르무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콰아아아-!
크게 벌어진 카이르무스의 아가리에서 황금빛의 숨결이 폭풍처럼 쏟아져 나왔다.
드래곤의 전매특허인 브레스였다.
빛의 폭풍이 준혁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그리고 카이르무스의 거대한 두 눈이 한층 더 크게 벌어졌다.
드래곤 브레스를 직격으로 맞은 준혁이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탓이었다.
준혁의 팔뚝에 지금까지 없었던 거대한 흑색의 방패가 생겨나, 영력을 잔뜩 품은 채 준혁의 전신을 가려 주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카이르무스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겨우 방패 따위가 브레스를 막는다니.
마침내 브레스가 멎었다. 완전히 초토화된 주변 지형이 브레스의 위력을 대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준혁이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그 뒤쪽으로는 땅의 모양이 그대로였다.
-이럴 수가!
카이르무스의 입에서 경악스러운 외침이 토해졌다.
그 순간 준혁의 오른쪽 팔뚝에 달려 있던 거대한 방패가 갑자기 줄어들더니, 급기야 팔뚝만 한 크기가 되었다.
아니, 방패 자체가 원래부터 준혁의 팔뚝에 차고 있던 완갑이 변한 것이었다.
‘묵린갑(墨鱗甲).’
준혁이 온몸에 차고 있는 보호구의 이름이었다. 용의 비늘을 수백 장씩 겹쳐 가공한 물건이었다.
“이제 내 차례지?”
대답을 전혀 기대하지 않은 물음과 동시에 준혁이 그대로 땅을 박찼다.
쏘아 올린 로켓처럼 수직으로 솟구치는 준혁의 신형.
그 순간 하늘에서 갑자기 거대한 낙뢰가 떨어졌다.
[기가 라이트닝.]
생각과 동시에 발현되는 마법의 낙뢰.
파지지직!
하지만 준혁의 온몸을 감싼 영력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낙뢰를 흘려보냈다.
‘천신강림(天神降臨)!’
마음속으로 부르짖는 외침과 동시에 준혁의 온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순식간에 거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화들짝 놀란 카이르무스가 그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하지만 거대한 준혁의 손이 더 빨랐다.
뻗은 왼손이 카이르무스의 목을 움켜쥐고, 오른손의 육모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
부아아앙-!
준혁이 커진 만큼 거대하게 변한 육모방망이.
‘무상곤(無像棍).’
소유자의 의지에 따라 크기와 형태를 마음껏 바꿀 수 있는 무기였다. 물론 이 역시 준혁이 직접 제작한 무기였다.
뻐억, 뻑!
무상곤이 카이르무스의 주둥이를 교차로 후려갈겼다.
마침내 드래곤의 주둥이가 찢어지며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화르르륵!
허공에서 생성된 거대한 불길이 준혁의 온몸을 집어삼켰다. 뒤이어 날아든 드래곤의 거대한 꼬리가 준혁의 몸통을 후려쳤다.
준혁이 거세게 옆으로 밀려나며 비틀거렸다.
마법과 브레스를 떠나 그 피지컬만으로도 이미 최강의 생물이라는 드래곤다운 위력이었다.
그사이 카이르무스가 거센 날갯짓과 함께 하늘 높이 솟구쳤다.
“제대로 해보자!”
한마디 뱉은 준혁이 거인 상태 그대로 또 한 번 땅을 박차고 솟구쳤다.
영력을 머금은 무상곤이 이미 긴 쇠사슬이 달린 유성추 형태로 변해 있었다.
촤르르르륵!
준혁의 의지에 따라 어지러이 허공을 비행한 유성추가 드래곤의 목을 휘감았다.
-어디서 감히!
카이르무스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세차게 고개를 뒤로 젖혔다.
유성추의 쇠사슬에 실리는 묵직한 힘.
팽팽해진 쇠사슬 상태를 본 준혁이 그 힘에 그대로 몸을 실었다.
워낙 거대한 몸체라 움직일 때마다 묵직한 파공음이 산 전체를 휩쓸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드래곤과 인간의 육체. 그 순간 주변의 모든 공간에서 마나의 폭풍이 몰아쳤다.
허공에 거대한 반원형의 얼음장벽이 솟아났다.
사방에서 세상 만물을 얼려 버릴 듯한 눈의 폭풍이 휘몰아쳤고, 위에서는 거대한 얼음 칼날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마나의 폭풍이 마법이 되고, 그 결과로 폭음이 산을 뒤흔들 때까지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준혁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원래대로였다면 이미 형태 자체가 지워졌어야 할 공격들이었다. 하지만 준혁은 그저 원래의 크기로 돌아가 있을 뿐이었다.
쑤아앙-!
20미터 길이의 대도로 변한 무상곤이 단숨에 허공을 잘라 냈다.
순간적으로 강도를 극한으로 끌어 올린 드래곤의 날개가 칼질을 막았고, 뒤이어 꼬리가 채찍처럼 준혁을 덮쳤다.
거대한 드래곤과 인간 사이의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튕겨지고 흘려 나간 힘의 여파만으로 산의 형태가 바뀔 정도의 격돌.
두 존재의 몸에도 하나둘 상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인간이 어찌 이런!
카이르무스의 경악스러운 외침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만큼 그는 놀라고 있었다.
온몸의 비늘이 흉물스럽게 터져 나가고, 길게 갈려 나간 상처에서 굵은 핏줄기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드래곤인 카이르무스가 언제 이런 낭패를 겪어 보았겠는가.
준혁 역시 멀쩡하지는 않았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준혁에게는 이러한 일이 일상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본 게임 들어가자!”
짧게 외친 준혁이 갑자기 거리를 벌리는 듯하더니, 오른손을 뻗으며 외쳤다.
“화룡연무(火龍燃舞)!”
손바닥에서 외부로 발출된 영력이, 속이 빈 거대한 원을 그렸다. 원 안으로 뻗은 묵색의 영력이 복잡한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양이 완성된 순간, 복잡한 도식들이 시뻘건 빛을 뿜더니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화룡.
불꽃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용 1마리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카이르무스를 향해 날았다.
-감히 드래곤에게 마법으로…….
콰르르르!
-크아아악!
무시무시한 불길에 휩싸인 카이르무스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괴로움에 온몸을 뒤틀더니, 급기야 그대로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콰아아앙!
거대한 크레이터가 파이고, 그 중심에서 불길에 휩싸인 카이르무스가 비명을 질러 댔다.
급기야 허공에서 갑자기 물줄기가 떠오르더니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치이이이익-!
자욱한 수증기가 일대를 자욱하게 뒤덮었다.
가볍게 불어온 바람이 수증기를 흩날렸을 때, 낭패한 몰골의 카이르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떻게 마법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드래곤은 마법의 원류다. 어지간한 수준의 대마법사라 해도 드래곤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런데 준혁이 사용한 마법은 카이르무스가 어떠한 영향도 줄 수가 없었다.
준혁이 크레이터 가장자리에 선 채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그게 마법이라고 생각하냐?”
-뭐?
“체계가 다르거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준혁의 손이 움직였다. 무상곤이 아닌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포승줄이었다.
끝이 고리 형태로 매듭지어진 포승줄이 교묘하게 허공을 날아 카이르무스를 위협했다.
-크아아아!
괴성과 함께 카이르무스의 마법이 폭사되며 허공을 두드렸고, 동시에 카이르무스의 몸뚱이가 다시금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피하기 위한 비행이 아니었다.
짧은 비행과 동시에 사선으로 낙하하는 카이르무스의 몸뚱이가 위협적으로 준혁을 덮쳤다.
피하려는 준혁의 뒤로 10여 개의 마법이 동시에 발현되며 후퇴를 막았다.
또 한 번 산이 뒤흔들렸다.
“끄아악!”
준혁의 입에서 처음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대로 짓눌러 죽여 주마!
카이르무스가 위협적으로 한 걸음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끼이이이익!
갑자기 낯선 소음이 귓전을 두드리는가 싶더니, 단단하고 질긴 무언가가 카이르무스의 목을 죄었다.
-끄으으윽!
준혁이 무시무시한 육탄 공격을 온몸으로 맞으면서까지 카이르무스의 목에 포승줄을 거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어디 용 가죽이 질긴지, 드래곤 가죽이 질긴지 한번 보자!”
‘묵룡삭(墨龍索).’
용의 가죽과 힘줄을 꼬아 만든 동아줄이었다.
-이놈이 감히!
아까 나타났던 유성추처럼 힘으로 당겨 풀려고 했지만, 목에 걸리는 힘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동시에 준혁의 모습도 시야에서 사라진 후.
‘전뢰보(電雷步)!’
블링크만큼은 아니지만 무시무시한 속도로 공간을 내달리는 스킬을 펼친 준혁은, 이미 카이르무스의 꼬리 어림에 도착해 있었다.
휘리릭!
묵룡삭으로 카이르무스의 꼬리를 휘감기 무섭게, 이번에는 등판 위로 올라타 다시 머리 쪽을 향해 전뢰보를 펼쳤다.
-내려가라, 이놈!
카이르무스가 날개를 퍼덕이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채 10미터도 오르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준혁의 묵룡삭이 이번에는 날개를 휘감아 묶은 것이었다.
끝없는 마법이 솟구치며 준혁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 어떤 마법도 준혁을 때리지 못했다.
펑, 퍼퍼펑!
허무하게 허공을 두드리거나 제 몸뚱이를 때릴 뿐이었다.
그사이 묵룡삭 끝부분을 쥔 준혁은 종횡무진 카이르무스의 거체 위를 내달렸다.
날개에 이어 다시 목을 휘감고, 뒤이어 앞발을 묶어 결박한 후 다시 등으로 넘어갔다가 뒷다리를 묶었다.
카이르무스는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인 채 희번덕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힘을 써도 전신을 묶은 밧줄이 끊어지지 않았다.
긴 모가지가 당겨져 배에 닿고, 그 위에 꼬리가 겹쳐졌으며, 네 다리는 한 묶음으로 묶여 몸뚱이에 바짝 붙어 있었다.
마치 공을 연상시키는 모습.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묵룡삭이 스스로 길이를 줄이더니 카이르무스의 온몸을 옥죄었다.
-키아아아아!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살점으로 파고드는 묵룡삭에서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이질적인 기운이 새어 나와 카이르무스의 몸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온몸이 결박당한 채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는 드래곤의 모습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카이르무스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한 치욕이 없었다.
멀찍이 선 준혁이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괴로워하는 카이르무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 이걸로는 안 되나?’
역시 무시무시한 짐승이었다.
‘시간이 없는 게 아쉽네.’
형의 상태가 어찌 될지 몰라 마음이 급했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준혁은 차근차근 데미지를 쌓은 후, 결정타를 날리는 방식으로 드래곤을 사냥할 수 있었다.
그랬다면 육탄전을 벌이며 상처를 입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준혁이 허리춤에 있던 비수를 꺼내 들었다.
영력을 주입하자 비수가 펼쳐지며 30여 개로 그 수를 늘렸다.
“핫!”
짧은 기합성과 함께 쏘아져 나간 30여 개의 비수가 어지러이 허공을 비행하며 카이르무스의 온몸에 틀어박혔다.
동시에 준혁의 손에서 발출된 해일 같은 영력이 묵룡삭을 타고 뻗어 나갔다.
묵룡삭이 시커먼 스파크에 휩싸이고, 그것이 그대로 카이르무스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 영력에 반응한 것은 드래곤의 몸뚱이 곳곳에 박힌 비수들.
콰콰콰콰쾅!
-키아아아아아!
성대한 폭발이 카이르무스의 온몸을 휘감고, 카이르무스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털썩!
준혁 또한 온힘을 다한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아, 빡세네!”
단신으로 드래곤을 잡고 내뱉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