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1장. 던전 입장#2-
한참 운전한 끝에 준혁이 차를 주차한 곳은 동두천 소요산역 인근이었다.
준혁의 목적지는 소요산 동쪽 너머 포천에 있지만, 혹시 나중에 추적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부러 이쪽으로 온 것이다.
험한 편인 소요산을 넘어야 하지만, 영력을 회복한 준혁에게는 딱히 문제 될 게 없었다.
차에서 내린 준혁은 챙겨 왔던 하얀색 가면부터 얼굴에 썼다.
아무런 무늬도 형태도 없는, 심지어 눈구멍조차 뚫려 있지 않은 하얀색의 밋밋한 가면이었다.
그런데 준혁이 영력을 밀어 넣는 순간 변화가 생겼다.
묵색의 안개와 같은 영력이 풀썩 피어올랐다 흡수될 때, 하얀 가면이 갑자기 흐물거리며 준혁의 얼굴 피부에 엉겨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 과정이 끝났을 때, 준혁의 얼굴은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가면의 이름은 ‘매구탈’이었다.
천 년 묵은 여우가 변한다는 전설의 짐승이 ‘매구’였다. 흔히 알려진 구미호와 비슷한 전승들을 가지고 있는 여우 형태의 짐승.
그 매구의 내단과 가죽, 뼈를 이용해 만든 것이 지금 준혁이 쓰고 있는 매구탈이었다.
착용자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이미지대로 얼굴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물론, 머리 전체를 보호해 주는 투구의 기능도 갖고 있었다.
‘하! 그 매구 놈 잡으려고 무려 한 달을 박박 굴렀었는데.’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토가 쏠릴 지경이었다.
바로 소요산으로 오르려던 준혁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발을 멈췄다.
“상태창.”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상해.’
영력은 완전히 돌아왔는데, 상태창이 반응하지 않는 것은 뭔가 이상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준혁의 망막에 홀로그램처럼 네모난 반투명 창이 떠올랐다.
멈칫했던 준혁이 연신 두 눈을 깜빡였다.
‘이건 또 뭐야?’
상태창이 뜨기는 했다. 그런데 그 상태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어지러운 노이즈뿐이었다.
‘안 보여도 상관은 없지만…….’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영력이 돌아온 이상, 준혁의 모든 스탯은 최고치를 찍은 상태일 테니까.
그리고 지금은 던전을 터는 게 우선이었다.
준혁은 상태창을 닫고 곧장 산으로 올라갔다.
근육에 스며든 영력이 모든 신체 능력을 비약적으로, 아니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높여 준다.
준혁은 순식간에 산을 타고 넘어 포천에 도착했다.
“교대가 내일이었지?”
남자의 말에, 주변에 흩어져 앉아 있던 이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 남자의 뒤쪽에 푸르게 빛나는 소용돌이가 허공에 떠 있었다.
‘골드 드래곤의 레어’의 던전 게이트였다.
그리고 게이트 앞에 모여 있는 남자들은 헌터 용역 업체의 파견 경비원들이었다.
처음 말을 꺼낸 남자는 경비조장이었다.
경비조장이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이며 말했다.
“아무튼 무훈 애들도 재수 더럽게 없지.”
그 말에 조원 하나가 물었다.
“왜요?”
“응? 너 못 들었냐?”
“뭘 못 들어요?”
“하, 모르나 보네? 무훈 애들이 여기 낙찰받고 기세 좋게 공략 들어갔잖아.”
“그랬겠죠?”
“길드장부터 시작해서 S급만 무려 3명이 포함됐지.”
“무훈 길드장은 유민섭이잖아요. 근데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요?”
“후우~”
조원의 애타는 물음에 조장이 길게 담배 연기를 한 번 뿜으며 뜸을 들였다.
“그 공략 팀이 들어가서 공략을 끝내는 데 걸린 시간이 무려 일주일이었다.”
“일주일이요? S급이 3명이 들어갔는데?”
“S급 3명이 뭐냐, A급도 15명 들어갔다. 무훈 길드 사상 최강 공략 팀이었단 말이야. 그런데 공략에 일주일 걸린 게 문제가 아니야.”
“그럼요?”
“공략 끝나고 골드 드래곤을 잡고 얻은 아이템이 그 유명한 엘릭서였는데 말이지…….”
“아, 답답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봐요!”
“공략 끝냈을 때 무훈 길드장이 빈사 상태였다. 진짜 온몸이 만신창이가 돼서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단 말이야. 무슨 저주에 걸렸는지 힐링을 해 줘도 안 먹히고.”
“어? 설마?”
“그래, 그 설마다. 죽도록 고생해서 얻은 엘릭서를 결국 무훈 길드장이 마셨지.”
“허, 허허허!”
휘이이잉-!
“어? 뭐, 뭐야?”
바람 한 점 없던 산속에서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바닥에서 뽀얀 먼지가 세차게 말려 올라와 던전 게이트 방향으로 몰아쳤다.
“갑자기 웬 바람이야?”
조장이 손을 휘휘 저으며 투덜거리는데, 뭔가 이상한 장면이 보였다. 자신 쪽으로 돌아 있던 조원들의 표정이 귀신이라도 본 듯 하얗게 질려 있었다.
“뭐야? 왜?”
“조장, 저거, 저거!”
“응? 뭐가?”
조장이 조원의 손짓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잠시 지난 후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뭐야? 게이트가 왜!”
소용돌이치던 던전 게이트의 푸른빛이 붉은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누군가 안쪽에서 게이트를 닫았다는 뜻.
“당장 CCTV 돌려 봐!”
“편리하네.”
준혁은 붉게 변한 던전 게이트를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게이트가 있고 던전이라는 독립 공간이 있다는 게 준혁에게는 신문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하, 참! 나는 맨날 뒤통수까지 조심하고 다녀야 했는데……. 세상 참 편하게 사네, 헌터 놈들.”
투덜거리는 준혁 앞에는 아주 커다란 동굴 하나가 뻗어 있었다.
‘꽤 넓다고 했던 거 같은데?’
던전의 환경은 다양했다. 미로 같은 동굴도 있고, 넓은 평원이 있는가 하면 고대 도시 같은 곳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 모든 던전의 공통점은 아주 넓다는 점.
“되려나?”
애매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준혁이 허리의 가죽띠에 걸어 놓은 작은 피리를 꺼내 입에 물었다.
삐이이익-!
하지만 준혁이 기대한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괜히 혼자 뻘쭘한 표정을 지은 준혁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피리를 다시 허리춤에 걸었다.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 건 분명하네. 아무튼 이렇게 되면 짤 없이 걸어야겠네.”
준혁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허리춤의 육모방망이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동굴 안쪽으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5분여를 걸었을 때 준혁이 발을 멈췄다. 지하에 만들어진 돔형의 거대한 공동 입구였다.
“여기서부터인가?”
어둠 속에서 하나둘 새빨간 불빛이 떠올랐다. 오로지 공격 본능만 남아 있는 괴물들의 눈동자였다.
어둠 속이라고 해도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는 준혁의 두 눈이 차분하게 공동의 맞은편을 살폈다.
‘저건 고블린, 저건 오크고… 노옴에 코볼트, 리자드맨, 오우거……. 몬스터 대백과 사전이네?’
머릿수만 따져도 물경 500은 넘어가는 숫자였다.
“후!”
준혁은 허리춤의 육모방망이를 꺼내 들고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준비 운동으로 딱 좋네!”
괜히 혼자 중얼거리더니 힘껏 땅을 박찼다.
크워어어어-!
온갖 괴성이 난무하며 괴물들이 그대로 준혁을 향해 몰려왔다.
허공으로 훌쩍 뛰어오른 준혁의 타깃은 괴물 중에서도 유독 거대한 1마리였다.
다른 오우거들에 비해 1미터는 더 큰, 신장이 무려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오우거 1마리.
빠아악!
최초의 일격에 오우거의 머리통이 그대로 으깨졌다. 제대로 된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즉사.
쿠우웅!
거구의 몸뚱이가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워낙 거대한 몸뚱이 탓에 그 밑에 깔린 몬스터들이 죄다 한꺼번에 절명했다.
탓!
쓰러진 오우거의 몸뚱이를 밟고 선 준혁의 육모방망이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뻑, 뻐벅!
육모방망이가 닿는 곳마다 어김없이 파골음이 터지고, 길게 피가 솟구쳤다.
준혁이 밟고 선 오우거의 시체 주위에 삽시간에 시체의 담이 쌓였다.
하지만 괴물의 수는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물론 준혁의 얼굴에는 단 한 톨의 긴장감도 보이지 않았다.
끼익! 크아아아-!
공동 안에 괴물들의 괴성이 어지러이 메아리쳤다. 휘몰아치는 소리의 너울만으로도 공동이 이대로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준혁은 처음 쓰러트렸던 오우거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거대한 체구와 그에 따른 무게, 그리고 질기기 짝이 없는 근육과 강철 같은 골격으로 이루어진 오우거의 시체는 그 자체로 강력한 무기였다.
그 강력한 무기가 준혁의 손에 쥐어졌다.
휘이이잉!
그 거대한 오우거의 시체를 한 손으로 쥔 채 머리 위로 빙글빙글 돌렸다. 5미터의 키를 생각하면 그 무게 또한 무시무시할 테지만, 오우거 시체를 휘두르는 준혁의 얼굴은 가뿐하기 짝이 없었다.
후우웅!
위압적인 바람을 잔뜩 끌어안은 채 회전하는 오우거의 시체에 괴물들이 속절없이 튕겨 날아갔다.
일말의 여지도 없는 즉사.
하지만 아무리 단단한 오우거의 시체라 해도, 그것을 휘두르는 준혁의 힘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충격을 완전히 버틸 수는 없었다.
우드드득!
결국 오우거의 척추가 부러지고, 온몸의 가죽이 너덜너덜하게 변했다.
쿠웅!
준혁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오우거의 시체를 내던졌을 때, 공동 안에 있던 괴물의 절반이 어느새 곤죽이 된 시체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무거운 적막이 거대한 공동을 내리눌렀다.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 공격 본능만 남아 있던 괴물들의 눈동자는 그대로였다. 다만 차갑게 얼어붙어 있을 뿐이었다.
공포로.
저벅!
준혁의 가벼운 한 걸음.
크웍! 끽, 끼끽!
종족을 불문하고 괴물들이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4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오우거조차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눈동자가 애처로워 보일 정도였다.
저벅, 저벅!
다시 두 걸음.
준혁의 온몸에서 뿜어진 기세가 공동 전체를 가득 메웠다.
실체화된 기운이 아님에도 영력이 배어 있는 준혁의 기세는 날카로우면서도 무거웠다.
괴물들 쪽에서는 괴성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숨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저벅!
또 한 걸음.
마침내 괴물들 사이에서 최초의 패닉이 터져 나왔다.
그워어어어-!
우습게도 그 첫 번째 주자는 4미터에 달하는 신장과 거대한 덩치를 가진 오우거 1마리였다.
오우거가 비명을 지르며 뒤쪽으로 가기 위해 제 편인 괴물들을 쳐 날리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공황의 전염 속도는 치명적이었다.
포효가 아닌 비명의 외침과 함께 모든 괴물이 뒤로 달아나기 위해 아군을 공격해 댔다.
순식간에 50여 마리가 절명한 후에야 괴물들이 일제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괴물들에게서 질서라는 걸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덩치가 작은 괴물들이 속절없이 짓밟혀 죽었다.
그리고 준혁이 달리기 시작했다.
빠악, 빡!
가장 뒤처진 놈들부터 뒤통수가 터지며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운집해 있던 괴물들이 준혁을 중심으로 순식간에 좌우로 길을 벌렸다. 당연히 준혁은 그 길로 발을 딛지 않았다.
육모방망이가 쉴 새 없이 피를 머금었다.
내뻗는 주먹도, 틈틈이 날리는 발차기도 두 번은 없었다. 단 일격이면 충분했다.
목이 꺾이고, 심장이 터지고, 머리가 깨졌다.
그런 상황에서도 준혁에게 맞서는 괴물은 단 1마리도 없었다. 공포에 짓눌린 본능은 항거를 격렬하게 거부했다.
그리고 준혁이 육모방망이를 허리춤에 걸었을 때, 살아 있는 괴물은 더 이상 없었다.
짧게 숨을 고른 준혁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괴물 시체에서 마나석 캐야 한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그리고 슬쩍 주변을 둘러보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어떡한다?’
처음 생각은 빠르게 엘릭서만 구해서 나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금광이나 다름없는 마나석을 그냥 두고 가는 것이 좀 애매했다.
형을 위해 엘릭서를 구해야 하기는 하지만, 빡빡하게 잡아도 나흘의 여유가 있었다.
준혁의 예상으로 나흘이면 충분히 드래곤을 잡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또 하나 신경이 쓰이는 건, 무훈 길드가 돈을 투자해서 낙찰받은 던전에서 마나석을 챙기는 게 조금 켕기는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가 구한 세상에서 호의호식하고 있잖아?”
준혁이 홀로 중얼거리며 허리춤에서 비수를 뽑아 들었다.
“그러니 내가 이 정도 챙기는 건 정당한 보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