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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야구 인기가 확실히 예전만 못하다.
포스트 시즌, 한국시리즈, 그것도 무려 7차전에 만원 관중을 못 채우다니.
뭐, 어쩔 수 없다.
던전이 등장하고 초인들이 날뛰는 세상이다. 그게 벌써 10년이나 지났다.
세인의 이목이 모두 던전과 괴물, 그리고 헌터들에게 쏠려 있으니 기존 스포츠 종목의 인기가 식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그래도 스포츠는 스포츠다.
말도 안 되는 초인들의 현실감 없는 퍼포먼스보다, 어디까지나 일반인인 프로 선수들의 활약을 더 즐기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그리고 나처럼 각성하지는 못했지만, 피지컬과 재능을 겸비한 놈들도 프로 스포츠를 놓지 못한다.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4번 타자, 유격수 김준혁-!』
저게 나다.
정규 시즌 1위인 창원 웨일즈 부동의 4번 타자.
시즌 타율 0.381, 출루율 0.498, 장타율 0.790, 홈런 47개, 도루 40개…….
아, 꺼내기 시작하면 끝도 없으니 대충 여기까지만 하자.
‘어엠김’. 어차피 MVP는 김준혁. 팬들이 하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
9회 말 2아웃, 주자 2루, 스코어는 3 대 4로 우리 팀이 지고 있다.
마운드 위의 투수는 서울 팬서스의 클로저 한철민.
쉬익, 펑!
“스트라이크!”
조금 빠진 거 같은데?
공을 던진 한철민도 순간 멈칫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오늘도 심판의 스트라이크존은 별존이다. 그러니까 심판 맘대로.
망할, 이렇게 큰 축제에서 이딴 심판이라니!
그사이 한철민은 벌써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볼!”
망할 심판아! 1구하고 똑같은 코스잖아!
한철민이 연달아 공을 던지고, 볼카운트는 순식간에 3-1이 되었다.
역시 어렵게 승부하고, 안 되면 비어 있는 1루로 걸어서 출루시키겠다는 생각인 듯하다.
또다시 시작된 투구 동작.
쭉 뻗어 오는 공.
“흡!”
짧게 숨을 끊는 동시에 빠르게 어깨를 깊숙이 장전한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홈플레이트 직전에 갑자기 바깥쪽으로 날카롭게 꺾이는 고속 슬라이더.
이거다!
빠악-!
배트와 공이 교차하는 순간, 시야에서 공이 사라졌다.
그라운드를 스치는 짧은 정적.
와아아아아-!
뒤이은 함성.
아아아…….
그러다 뭔가 허무하고 어색하게 늘어지다가 결국 흐트러지는 함성.
홈런이었다.
그것은 장외를 훌쩍 넘기는 홈런.
아니, 그냥 장외가 아니라 도통 어디까지 날아갔는지 알 수 없는 홈런.
뭐지? 봉인됐던 흑염… 아니, 영력(靈力)이 왜 갑자기?
혹시나 싶어 미리 말하자면, 나는 각성자가 아니다.
도핑과 더불어 각성자는 절대 프로 스포츠 선수가 될 수 없다. 이미 각성 검사도 수차례 받았지만, 각성자가 아니라는 결과만 나왔었다.
그리고 이 영력은 각성자들이 사용하는 마나와는 전혀 다른 힘이다. 이미 8년 전에 봉인당한 힘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봉인이 풀렸을까?
어쨌든 끝내기 홈런.
뒤늦게 정신을 차린 동료들이 더그아웃에서 뛰쳐나와 홈플레이트 앞에 모여 섰고, 나 역시 베이스를 돌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깊이 묻어 두었던 감각을 끌어 올렸다.
정수리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내려와, 빠르게 전신의 근육에 녹아드는 이 힘은 영력이 분명하다.
왜 봉인이 풀려?
어느새 3루를 돌았다. 홈플레이트 근처에 모여 있는 팀 동료들은 이미 눈이 반쯤 돌아가 있다. 양손에 샴페인 병을 하나씩 든 채.
설마 그거 나한테 다 뿌리겠다는 거 아니지?
아니야.
먹는 거로 장난치는 거 아니야.
팡, 파앙-!
한국시리즈 우승을 알리는 불꽃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1장. 던전 입장
병원 응급처치실 문을 열자마자 준혁의 귀를 어지럽힌 것은 빗발치는 고함이었다.
“빨리 포션 들이부어!”
“김 선생, 뭐 해? 당장 거기부터 꿰매라고!”
“포션 아직이야? 뭣들 하는 거야!”
“피! 피 가져오라고-!”
커튼으로 가려진 칸막이 너머에서 터져 나오는 의료진들의 외침이었다.
황급히 두리번거리는 준혁의 시야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준혁의 형수인 이세연이었다.
“형수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이세연의 눈동자는, 그 불안감을 대변하듯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준혁아!”
다급하게 준혁에게 달려가던 이세연이, 무릎에 힘이라도 빠진 듯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깜짝 놀란 준혁이 손을 뻗어, 무너지는 이세연의 어깨를 잡아 올렸다.
“어떻게 된 거예요? 왜 아직 저러고 있는 건데요? 지유는요?”
창원에서 서울까지 택시로 달려왔다. 택시 기사를 재촉해 미친 듯이 달려왔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오는 데 3시간 30분이나 걸렸다.
그런데 아직도 치료가 끝나지 않았다.
기적의 외상 치료제라는 포션에 힐러들까지 있는 세상이다. 3시간 넘게 치료를 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환자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뜻이다.
“지유는 일단 언니 집에 보내 놨어. 준석 씨는… 그, 그게… 무, 무슨 저주 같은 거에 걸렸다는데…….”
준혁은 와락 인상부터 구겼다.
준혁의 친형, 김준석은 각성자이며 헌터였다. 하지만 헌터들 중에서도 최하위인 F급 헌터.
그 때문에 오히려 김준석이 위험할 일은 없었다.
자신의 한계를 잘 아는 김준석은 절대 위험한 일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으니까.
그랬던 김준석이 심각한 부상으로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준혁이 들은 것은 경기가 끝난 직후였다.
미친 듯이 샴페인 병을 흔들고 있는데, 구단 직원이 다급히 달려와 소식을 전했다. 준혁은 앞뒤 생각하지 않고 지갑만 챙겨 그대로 택시에 몸을 실었고, 지금 서울에 있는 병원에 도착한 것이다.
그때 커튼이 열리며 의료진 1명이 지친 표정으로 나왔다.
“어떻게 됐어요? 형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부정적인 말투에 준혁은 다짜고짜 의사의 멱살부터 잡았다.
“씨발! 당신 의사잖아! 그딴 식으로 포기하면 어쩌자는 거야! 수술 같은 거라도 하든가, 뭔가 방법을 말하라고!”
제대로 된 수술도 없이 저런 식으로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의사의 시선이 준혁에게 향했다. 그러더니 조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김준혁 선수?”
“그래서? 그래서 뭐?”
준혁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의사는 오히려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돈! 돈 있죠?”
“뭐? 돈? 그래, 있다! 있으면?”
“어쩌면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그제야 준혁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무슨 말이야?”
“각성자들 중에 상급 사제인 사람을 부르세요. 그 사람이면 저 환자,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상급 사제?”
“진짜 성직자는 아니지만, 그 클래스로 각성을 한 사람들이요. 해주(解呪)와 치유에 특화된 사람들이니까, 저 환자도 치료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진작 불렀어야지!”
“병원에서 관여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 사람들 부르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듭니다.”
그래서 돈 얘기부터 했던 모양이다.
“아는 사람 있어요?”
준혁의 다그침에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당장 불러요!”
“하, 씨발!”
준혁이 나지막이 욕을 뇌까렸다.
욕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상급 사제 클래스라는 놈을 호출하는 돈이 3억 원이었다. 그것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부르는 데 드는 돈이 그 정도였다.
게다가 해주나 치료는 환자 상태 확인 후에 따로 비용이 추가되는 방식이었다.
올해 준혁의 연봉이 4억이었다.
던전 시대가 오기 전 10억이 넘던 연봉이나, FA 총액이 100억을 넘기던 시절을 생각하면 확실히 심각하게 떨어졌다.
몇 시즌 동안 보여 준 준혁의 성적을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4억이라는 돈이 거액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준혁이 1년 내내 운동하고 그라운드를 구르면서 번 돈이었다.
그런데 헌터라는 놈은 그냥 움직이는 데 자신의 1년 치 연봉을 거의 다 가져간다니, 세상 참 거지 같다고 느낄 수밖에.
형을 구하는 데 드는 돈이니 아까울 건 없지만,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건 또 별개였으니까.
그때 응급처치실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엄청 비싸 보이는 슈트와 거만한 걸음걸이.
“장민호입니다.”
그리고 딱히 말을 섞을 생각도 없다는 듯 방향을 틀었다.
“일단 환자부터 보겠습니다.”
하얀 빛으로 물든 장민호의 손이 누워 있는 김준석의 몸을 천천히 훑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이것저것 하더니, 이내 준혁에게 다가왔다.
“시도는 해 볼 수 있지만, 확실하게 저주를 풀 수 있다고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장민호의 사무적인 목소리에 이세연이 또 한 번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여보!”
하지만 장민호는 이세연에게는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준혁만 쳐다보고 있다. 돈 줄 사람만 상대하겠다는 철저한 비즈니스적인 태도였다.
“시도해 주세요.”
준혁은 확률 같은 건 묻지 않고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단 1퍼센트의 가능성만 있어도 시도해 봐야 할 일이었다.
김준석은 준혁에게 부모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 사람의 목숨 앞에서 확률이니 비용이니 따질 때가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주가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도 해 줘요.”
“비용은 5억, 그리고 성공적으로 저주가 풀렸을 때 추가로 5억입니다.”
‘많이 벌어라, 이 개새끼야.’
준혁은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빠르게 스마트폰으로 계좌 이체를 했다.
입금 문자를 확인한 후에야 장민호가 움직였다.
장민호는 김준석에게 다가가며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망토처럼 생긴 로브가 튀어나왔다.
각성자들에게만 있다는 인벤토리였다.
장민호는 연이어 계속 물건들을 꺼내 머리에 법관을 쓰고 장갑을 끼는 등 장비를 걸쳤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장민호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이 쉴 새 없이 새어 나오고, 그에 따라 그의 몸 전체가 하얀빛에 휩싸여 갔다.
“마그누스 블레스!”
강렬한 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장민호의 온몸을 감싸고 있던 빛이 어느새 손에 모이더니, 누워 있는 김준석의 온몸을 감쌌다.
쉬우우욱!
바람이 스쳐 가는 듯한 소음과 함께 그 빛이 김준석의 가슴팍으로 빨려 들어갔다.
뒤이어 기적이 벌어졌다.
김준석의 온몸에 있던 상처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시커멓게 변했던 피부가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준석 씨!”
이세연이 황급히 김준석에게 달려갔다.
어느새 뒤로 몇 걸음 물러선 장민호가 방향을 돌려 준혁에게 다가왔다.
“된 겁니까?”
하지만 장민호는 고개를 내저었다.
“급한 불은 껐지만, 저주를 완전히 풀지는 못했습니다. 길어야 일주일 정도 버틸 겁니다. 좀 있으면 정신을 차릴 테니, 환자분이랑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여전히 감정이라고는 한 점도 배어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준혁이 반사적으로 장민호의 멱살을 잡았다.
“그럼 우리 형이 죽을 거라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고요.”
“방법! 방법이 있을 거 아냐! 너 말고 다른 사람은?”
준혁이 악에 받친 표정으로 외쳤다.
오늘 영력의 봉인이 풀렸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싸우는 데 쓰는 힘이었다.
사람을 구하는 것은 별개다.
“현재로서는 이 이상의 스킬을 가진 성직자 클래스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방법은 엘릭서밖에 없는데, 그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 말을 남긴 장민호는 인사도 없이 휑하니 나가 버렸다.
그 얘기를 들은 이세연은 김준석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응급처치실 안에 희미한 흐느낌이 섞인 정적이 내려앉았다.
두 눈을 감은 채 한참 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던 준혁이 제 형수를 불렀다.
“형수님.”
하지만 이세연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이세연의 등에 대고 말했다.
“제가 그거 구해 올게요. 형 퇴원시켜서 집에 데려다 놓고 기다려요.”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병원을 나섰다.
준혁은 병원을 나와 곧장 집으로 왔다.
몇 년 전에 준혁이 구입하고, 지금 형네 식구가 사는 곳이다. 한사코 거부하는 김준석에게 준혁이 강짜를 놓아 억지로 눌러앉게 했는데, 집 안에 준혁의 방도 있다.
평소에 이세연이 꾸준히 청소하는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방문을 걸어 잠근 준혁은 자물쇠로 잠가 놓은 옷장을 열었다. 그리고 옷장 안에 있는 이중 공간의 잠금 장치까지 열자 그 안에 숨겨 놓았던 물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준혁은 그중 비수 하나를 꺼내 천천히 영력을 불어넣어 보았다.
탁한 묵색의 연기가 풀썩 피어오르며 비수 전체를 휘감는다.
‘역시 영력이 제대로 돌아왔어.’
하지만 지금은 이 일에 대해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엘릭서를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준혁은 빠르게 장비들을 몸에 걸쳤다.
갑옷이라기보다는 각 부위의 보호구에 가까운 방어 장비부터 걸쳤다. 활동에 제약을 주지 않는 선에서 급소만을 보호할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한 방어구였다.
허리의 가죽띠에는 육모방망이와 포승줄 등의 무기들을 죄다 장착했고, 새하얀 가면 하나를 손으로 집어 들었다.
지옥 같았던 ‘배면계’에서 준혁이 하나하나 직접 제작한 장비들이었다.
영력을 봉인당하는 바람에 사용하지 못했었는데, 갑자기 영력이 복구된 지금은 사용할 수 있었다.
배면계.
‘하아, 젠장!’
갑자기 소환당하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던 그곳을 떠올리니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미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이제 엘릭서를 얻을 수 있다는 드래곤을 잡으러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