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야만왕 (6). >
18.
꾸릉, 꾸릉!
하늘 위로 먹구름이 끼고, 낀 먹구름이 뇌운을 머금으며 그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꿀꺽!
그 광경을 보던 이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와, 진짜 하회탈에서 흔자서 2페이즈에 도달하네."
"다른 팀들은 이삼백 명은 죽어야 가능했던 일인데......
그 순간.
쩌저적!
예고도 없이 거대한 우레 하나가 바닥을 향해 떨 어졌다. 그 우레 소리에 모든 게 멈췄다. 마치 일시 정지를 누른 것처럼, 전장을 채우던 수천 개의 작은 전투가 아주 잠시 동안 멈추었다.
그리고 전투가 다시 시작됐다.
'어떻게 됐지?'
'하회탈은 피했나?'
'성공했나?'
하지만 이 순간 전투를 치르는 유저들의 머릿속 에 있는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과연 하회탈이 이 우레 심판을 피했을까? 계획 대로 우레 심판을 피하면서, 우레 심판을 대행하는 야만왕에게 그 우레 심판을 내리꽂았을까?
그 대답.
- 하회탈이 첫 번째 성공했다!
보이스톡을 통해 나왔다.
"그렇지!"
"우와, 나 지금 소름 돋았어."
"게임인데 소름이 돋기는 개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오케이, 가자! 이대로 가자!"
"하회탈이 성공했다!"
전장에서 함성이,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오 기 시작했다. 모두가 하회탈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각, 내리치는 우레를 피해 아슬아슬 하게 야만왕의 발치 근처를 스쳐 지나간 히르칸이 터져 나오려는 숨을 꿀꺽 삼켰다.
'……우와.'
자신이 우레 심판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리는 알 림과 함께 3초짜리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3 초.
숨 한 번 길게 내쉬기에도 짧은 시간. 그 찰나나 다름없는 순간 자신을 언제든 짓밟아 죽이거나, 코 로 때려죽이거나, 손으로 움켜 죽일 수 있는 적을 향해 달려든다는 것.
설명은 필요 없다. 제아무리 설명을 자세히 해주어도, 보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을 테니
심지어 우레가 떨어지는 순간, 그 우레가 야만왕 에게 꽂히는 순간, 그렇게 꽂힌 우레 심판 옆을 지 나치는 순간, 일순간 세상이 노랗고 하얗게 변해버 리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전올이 돋았다.
'끝내주네.'
그리고 미소가 지어졌다.
'이거 타이밍 1초가 아니라 0.5초만 어긋나도 세 팅이고 나발이고 황천길로 가겠는데?'
이 순간 하회탈은 천옷을 입고 있었다.
풀세트 가격 이 50만 골드를 호가하는 뇌광의 마법사 세트이며, 여기에 정화의 서클렛을 착용하고 있었다.
물리방어력은 도외시한 채, 오로지 번개 속성 저 항력을 높이기 위한 세팅이었다. 정화의 서클렛은 우레 심판에 맞는 순간 생기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스턴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우레 심판에도 먹 힐지, 안 먹힐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챙겼다.
합치면 어마어마한 값을 자랑하는 이 세트의 가치는 오직 한 번의 기회였다.
우레 심판에 맞아도 한 번은 살아날 수 있다는 의미.
하지만 우레 심판을 목격하는 순간 히르칸은 직감했다.
'다음은 없다.'
저 우레 앞에서는 거금을 들여 준비한 대비책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기대서는 안 된다.
맨몸으로 싸운다는 생각으로, 이번이 마지막 기 회이며, 유일한 기회라는 심정으로.
'우레...... 진짜 우레 단 것들하고는 사이가 좋아질 수가 없네.'
우스운 건 이 긴박한순간에도 실소가 지어질 법한 잡념이 머 릿속을 채운다는 점 이었다.
그러는 사이 야만왕이 히르칸을 향해 손을 뻗었 다. 히르칸은 날아오는 그 손을 피하고, 피하고, 피하고, 계속 피했다. 획획! 마치 권투선수의 잽처 럼 날아오는 야만왕의 공격을 히르칸은 피했다. 야만 왕은 요리조리 피하는 히르칸이 짜증났는지 코를 높게 든 후에 내리찍었다.
과앙!
히르칸이 벼락처럼 추락하는 야만왕의 코끼리 코를 피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멀리 도망치진 않았다. 거리를 유지했다. 멀어지면, 심판이 시작되는 순간 다가갈 수가 없으 니까.
[우레 심판이 당신을 향합니다.]
[3... 2...]
그리고 알림이 뜨는 순간 히르칸은 야만왕의 다 리 사이를 향해 몸을 던졌다.
쩌저적!
벼락이 야만왕의 몸뚱이 위에 내리꽂혔다. 이 순 간 히르칸은 느낄 수 있었다.
'피뢰침이야. 야만왕의 근처로 벼락이 떨어지면, 야만왕이 그걸 흡수하듯 받아.'
콤마 1초까지 정교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예상대로 이게 공략법이었고, 워로드는 이 공략 법을 수행하는 자에게 자그마한 배려를 해주었다.
'눈물 나게 고맙군. 씨팔.'
정말 히르칸의 심정 그대로 눈물이 나는 배려였고, 그 배려에 보답하려는 듯 히르칸이 다시 야만 왕과 대치했다. 대치한 상태로 히르칸이 야만왕의 상태를 가늠했다.
야만왕의 몸에는 그을림이 생겼지만, 녀석의 위 용은 여전히 건재했다. 이 짓을 몇 번을 해야 하는 지 모른다. 앞서서 서른한 번째 도전자는 세 번까 지 성공했으나 이후 레이드를 포기했다.
세 번 이상, 열 번이 될 수도 있고 스무 번이 될 수도 있고, 야만왕이 가진 수호의 보석 숫자처럼 서른한 번이 될 수도 있다.
히르칸이 이를 꽉 물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그 속담을워 로드의 인공지능이 알아췄으면......:
쩌적!
열 번째 우레 심판이 다시 한 번 심판자를 향해 거센 뇌성을 토해내며 떨어졌다.
그 순간 그것을 신호 삼아 대기하고 있던 두 무 리가 움직였다. 멀리서 움직이기 시작한 그들은 단 숨에 비즈마 평야에 유저들이 하회탈을 위해 만든 벽에 가까워졌다.
유저들은 접근하는 이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고, 이내 그 눈초리는 당흑감으로 바뀌었다.
"우레사냥꾼이다!"
"레드불스야!"
두 거대 길드.
이제까지 잠룡을 자처했던 레드불스와 이번 무 대를 만들어내며 이번 시대의 선두를 이끌던 우레 사냥꾼.
두 길드가 자신들의 증표를 숨기지 않은 채 야만왕이 있는 무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소식은 이 순간 하회탈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 부리나케 하회탈 주변을 돌아다니 며 몬스터와 유저를 제거하던 씽의 귀에도 빠르게 들어갔다.
'하필이면…'
방해꾼이 오리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방해꾼이 몇 있었다. 하지만그 방해꾼에 레드불스와우레사냥꾼이 포함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다른 곳 도 아니고, 그 두 곳이라면 30대 길드라는 위치에 어을리는 자긍심이, 자존심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역시 이익이 우선이라 이건가?'
물론 반대로 그들의 행동이 이해가 됐다.
30대 길드는 워로드에서 가장 상업적인 단체다. 기업과 같다. 그들은 게임을 하는 게 목표가 아니 다. 게임을 통해 수익을 내는 게 그들의 목표다.
그런 그들에게 야만왕 레이드가 가지는 값어치 는...... 적어도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과는 비교를 거부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액수일 터.
어쨌거나 최악의 시나리오가 나왔다.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장담컨대 그들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 버틸 수 있을까? 같은 의문은 품는 것 자체가 오만한 짓이 다. 씽과 그와 같이 움직이는 요조리와 조바를 포 함한 동료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시간을 끄는 것, 그게 전부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을 상대로 얼마나 끌 수 있 을까?
꿀꺽!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는 씽은 솔직히 그마저도 감히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젠장.'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감, 그 절망감은 곧바로 히르칸을 향한 미안함으로 바뀌었다.
결국 씽이 벌인 일이다.
히르칸은 굳이 이 무대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충분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씽이 그를 굳이 이 구렁텅이에 데리고 왔다. 그런 히르칸을 위로해줄 수 있는 건 승리 그
리고 성공, 그러한 것들이 전부다.
그런데 지금 그 모든 게 망가지려고 한다. 그저 구렁텅이에 빠진 재 허우적거리기만 할 판이다.
"저기, 말해줘야 하나요?"
그 사이 요조리가 질문을 던졌다. 두 거대 길드의 등장을 하회탈은 지금 모른다.
"아니."
그런 요조리에게 씽이 침묵을 요구했다.
지금 이 사실을 히르칸에게 말해줄 수 없다. 지금 야만왕과의 목숨을 건 전투를 치르는 히르칸에게 자신의 한 마디가 그의 죽음으로 이어질지도 몰 랐으니까. 지금 히르칸은 1초의 승부를 하는 중이 다. 1초 동안 딴생각을 하는 순간 이룩한 모든 것 이 무너지는 아슬아슬한 승부를.
그 승부를 어떻게든 도와주는게 씽이 친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었다.
"그냥 이대로 막는다."
씽이 이를 꽉 물었다.
죽음은 예전에 각오했다. 오히려 이 순간 씽은 다른 방법의 협박을 강구했다. 현실에서 법적으로 이런 수작을 부린 우레사냥꾼 길드와 레드불스 길드를 고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런 것을 이 용해 그들을 협박하거나 겁을 줄 수는 없을까? 하는고민.
하지만 그 고민도 길지는 않았다.
씽, 그의 앞에 유저들이 만든 벽을 가뿐하게 뭉 갠 채 야만왕과 하회탈과의 거리를 좁히는 우레사 냥꾼 길드가, 그리고 그들의 가장 앞에 선 유저의 모습이 보였으니까.
'맙소사.'
우레여왕 시르!
그녀가 선두에 서 있었다. 하회탈과 함께 워로드 최고라고 불리는 그녀가 있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만큼은 변호사니, 고소이니, 법적인 조치이니 같은 건 통하지 않는다.
씽은 전의마저 잃을 지경이었다. 투견이라 불리 는 그의 얼굴에서도 전의가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우와, 우레여왕이다.'
"죽어도 어디 가서 자랑은 할 수 있겠네."
나머지 멤버들도 죽는 소리를 일찌감치 내밸었다. 그 순간 씽은 검을 집어넣었다.
"여긴 넘어갈 수 없다!"
그리고 소리쳤다.
전력을 다해.
씽은 살아생전 이보다 더 큰 외침을 외쳐본 적 이 없었을 정도로, 모든 것을 토해내듯 소리쳤다.
그 외침에 거침없이 달려오던 우레사냥꾼이, 우 레여왕의 발걸음이 멈췄다.
"30대 길드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하회탈 그리 고 워로드에 대한 예의를 생각한다면, 이곳은 하회 탈에게 맡겨라!"
그들은 멈췄으나, 씽은 거듭 소리를 내질렀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게이머라면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라!"
그런 씽의 외침에 시르는 지그시 씽을 바라봤다. 씽을 바라보는 시르는 아름다웠으나, 그녀의 표정 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차가웠다. 씽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투견답게 노려봤다.
그 섬득한 는싸움 속에 말을 꺼낸 건 제삼자였 다.
"하회탈과 거래를 하러 왔습니다."
발리스타 해치.
무리 맨 뒤에서 뛰어오던 그가 소리를 내질렀다.
"야만왕 이벤트는 우리가 시작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야만왕을 끝낼 수 있는 열쇠도 우리 손 에 있습니다. 이대로 놔두면, 야만왕은 다시 활동 할 겁니다."
해치의 설명.
그 설명 끝에 시르가 말을 덧붙였다.
"내가 하회탈과 싸우더라도 이곳에서 싸울 일은 없어. 그러니까 비켜."
씽이 이를 꽉 물었다.
19.
열 번째 벼락이 떨어지는 순간 야만왕은 그대로 정지했다. 꼿꼿이 서 있었다.
마치 동상처럼.
야만왕은 산 재로 멈했다.
'아!'
히르칸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안도의 한숨을 머릿속으로 내쉬었다.
공략법이 효과가 있었으니까.
[야만왕 네샤가 잠에 빠집 니다.]
[24시간 이후 야만왕 네사가 잠에서 깨어납니 다.]
그러나 이후 나온 그 시스템 알림은 히르칸의 모 든 것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이 좃같은 게임이!'
최악이다.
3페이즈가 등장할 수 있으리란 가능성은 염두에 두었다. 3페이즈에 돌입한 야만왕이 더 미쳐 날뛰 리란 예상을 했고, 그때를 대비해서 나름의 준비도
그런데 이런 식의 시나리오는 염두에 둔 적이 없 다.
동시에 이 시나리오에 대응할 방법이 히르칸에 게는 없었다.
[야만왕 네사가 잠에서 깨어나기까지 23시간 59 분 50초가 남았습니다.]
그런 히르칸 앞에서 워로드의 시스템은 냉흑하 고, 냉정하고, 참흑하게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난...... 이 녀석을 잡아야 해.'
이 순간 히르칸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준 이 들을 떠올렸다.
손해? 그런 건 중요치 않다. 그런 건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았다. 돈을 위해 게임을 하지 않았다. 단지 워로드란 게임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을 뿐이다.
두려운 건 실망감이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서 활약을 해준 이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승리를 위해 전투를 치 르는 이들, 이미 죽어서 게임 밖으로 나간 재 들릴 리 없는 응원을 내지르는 이들, 그들이 가지게 될 실망감이 히르칸은 그 무엇보다 무서웠다.
"잡아야 한다고!"
결국 히르칸이 동상이 되어버린 야만왕 네샤를 향해 전력을 다해 악을 내질렀다.
-히르칸, 우레사냥꾼 길드와 레드불스 길드가 그쪽으로 간다.
그 순간 씽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래를 원한다고 한다.
히르칸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평야의 중심을 향해 다가오는 일말의 무리들이 보였다.
그녀도 보였다.
우레여왕 시르!
그녀는 투구를 쓰지 않은 재 머리칼을 휘날리는 그녀와 그녀가 이끄는 무리가 자신을 향해 다가왔 다.
히르칸은 그 모습을 바라봤다.
시간이 흐르고 시르와 히르칸이 마주 봤다.
"마지막 제안이야."
시르, 그녀가 입을 열었다.
< 63화. 야만왕 (6). > 끝 © 디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