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야만왕 (4). >
11.
"수고했다."
수천 명이 넘는 유저들을 상대하느라 몇 시간 동안 진을 뺀 히르칸에게 씽이 말을 건넸다. 히르칸 은 그런 씽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나지막이 불만감을 표현했다.
"그놈의 엘프가 뭐라고……"
엘프 부족이 야만왕에게 몰살당한 것이 씽을 움직이게 했다는 사실을 히르칸이 모를 리 없다. 그 런 씽이 히르칸을 움직이게 했으니, 결국 엘프 부 족이 워로드를 움직인 셈.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번 전쟁의 비하인드 스토리다.
"미안하다."
씽이 쓴웃음과 함께 사과를 했다.
"맨입으로?"
"나중에 크게 쏘지."
씽의 대답에 히르칸은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 았다. 대신 히르칸을 고개를 돌렸다.
비즈마 평야.
그곳을 꾸미고 있던 해골과 골렘, 본 드래곤은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유저들은 떠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간간이 근처를 배회하던 몬 스터들은 넘치는 유저들의 심심풀이 사냥감이 되 었고, 그것이 또 다른 하나의 볼거리가 되었다. 아 쉬움의 증거였다. 이제껏 워로드란 게임에서 누리 지 못했던 독특한 즐거움을 좀 더 느끼고 싶다는 의미의 증거.
히르칸 만들어낸 유쾌함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의미였다. 이곳에 온 이들이 히르칸이 준 것들을 마음껏 즐겼다는 의미이기도 했다.하지만 내일 이 무렵에 이곳은 처절한 전쟁터가 될 것이다.
'게임답군.'
하루아침에 세상이 변한다는 건 기겁할 광경이지만, 이곳은 현실이 아니다. 게임 속,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건 하나도 없다.
'게임이니까……'
그 사실을 히르칸을 되새김질했다.
게임이니까, 그 되새김질에서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맛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히르칸이 그 어렴풋한 맛의 정체를 음미하기 위해 감상에 빠지기 시작했다.
"일단 레이드 참가 신청자는 6,322명이다."
씽이 그런 히르칸을 현실로 끄집어냈다.
이 번 하회탈 테마파크의 목적은 어 디까지 나 이 번 레이드에 참가해줄 우군을 얻기 위해서다. 히르 칸은 아무에게나 치즈를 해주지 않았다. 강제력 따 원 없지만, 이번 야만왕 레이드에 참가하겠다는 서 명을 받았다.
그 숫자가 6,322명.
"비올은 나쁘지 않아. 무엇보다 탱커가 2,551명. 꽤 많이 신청했지."
더불어 이번 작전에 가장 중요한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는 탱커의 비올이 기대 이상으로 높았다.
"레벨은 전부 200레벨, 2차 승급을 마쳤으니 사실 이쯤 되면 30대 길드 서너 개를 합친 전력이지.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도 암흑대륙에 남을 정도라면 실력은 평균 이상일 테고."
질적인 면도 테스트를 한 건 아니지만 평균 이상일 수밖에 없었다. 철사자 기사단의 길이 등장했 다고 해도, 암흑대륙에서 활동하는 건 그리 쉬운 게 아니니까.
결정적으로 지금처 럼 암흑대륙에 악몽만이 가득 한 상황에서도 남아서 전투 의지를 불태운다는 건, 실력과 레벨 외적인 요소…… 정신적인 면도 평균 이상이란 의미다.
"그중 절반만 와주면 바랄 게 없겠군."
히르칸의 말에 씽은 고개를 기분 좋지 못한 느 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인 면면, 숫자는 기대 이상이었다. 과연 하회탈이다! 탄식이 나올 정도다. 만약 씽이 그저 하회탈의 명성을 파는 수준이었다면 6천 명은 커녕 3천 명도 모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렇게 모인 이들이 정말 전장에, 전투에 참가해주는 일은 결단코 없다. 절반이 나오면 그나 마 다행이다. 절반이라면 3천 명 정도가 와준다는 거니까.
"와주겠지. 네가 그렇게 치즈를 많이 해줬는데."
대답을 하던 히르칸이 내일 비즈마 평야에서 펼쳐질 전투를 머릿속으로 시물레이션하기 시작했 다.
"그들이 1시간은 버텨줘야 해."
야만왕.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도전자와 습격자를 등갠 괴물 중의 괴물. 이제껏 등장한 워로드의 보스 몬 스터 중에 가장 무자비하고, 욕 나오는 특성과 능 력과 위엄과 난이도를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한 달여 동안, 유저들은 놀지만 않았다. 서른한 번이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수만 명이 넘 는 유저들이 야만왕에게 몸을 던졌다. 차근차근, 야 만왕을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그 방법 의 통하는지 제 몸을 던져서 확인했다.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더듬으며 코끼리란 걸 정 확하게 이해하는 것, 그와 비슷한 작업을 했다.
그리고 최근 씽과 그의 동료들…… 개중 한 명인 퀘스트맨이란 자가 그동안 모은 워로드의 메인 시 나리오를 모아 가설을 하나를 세웠다.
2페이즈, 우레 심판 모드에 돌입한 야만왕이 우레 심판을 맞으면 어떻게 될까? 영화 속에서 나오 는 장면처럼,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유도 미사일을 적을 향해 유도하는 식으로 야만왕에게 우레 심판 을 유도할 수 있지 않을까? 우레 심판은 용의 심판, 그 심판 앞에서 과연 야만왕도 무사할까? 또한 무사하다고 하더라도 우레 심판을 맞는 순간 시작되는 상태이상효과는 어떻게 적용될까?
그 가설을 서른한 번째 야만왕 레이드가 시도해 봤다. 레이드는 실패했지만, 나름 유효한 결과를 얻 었다. 2페이즈 공략법도 발견한 셈이다. 물론 말이 공략법이지,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지려는 순간워 로드 현존 최강의 몬스터에게 달려가는 건 자살행 위다.
그게 이번 야만왕 공략의 핵심이기도 했다.
희생.
다수의 희생을 통해 야만왕에 달고, 야만왕의 아머브레이킹을 위해서도 다수의 희생을 담보로 잡 아야 하며, 우레 심판 공략 역시 결국 누군가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야만왕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에게 도전하는 유저들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있었다.
"정말 혼자 잡을 생각인가?"
그런 녀석을 히르칸은 혼자 잡을 생각이었다.
"방해꾼들이나 막아줘."
말도 안 되는 짓이다. 멍청하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짓.
그러나 이 선택은 막연한 고집, 히르칸이 하회탈 이란 이름값에 대한 집착에 의해 나온 선택이 결 코 아니었다.
"야만왕 공격 패턴, 루트, 방법, 속도는 머릿속에 있지만 방해꾼 놈들이 뭘 할지는 예상도 안 되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방해꾼의 존재다. 히르칸이 탐탁지 않은 자들은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들이 히르칸의 이번 레이드를 팝콘만 먹어가며 얌전히 봐 줄 리 없다.
하물며 6천 명 넘는 나무들 속에 정체를 감춘 재 숨는 건 일도 아니다. 아니, 숨을 필요도 없다. 내일 아침에 슬그머니 비즈마 평야로 와서 같이 싸우겠습니다, 그러면 과연 누가 거부할까? 축제란 그런 거다. 오는 자를 막을 수 없다.
"그리고 나한테는 차라리 이게 편해."
두 번째는 야만왕 공략법이다.
2페이즈에 돌입한 야만왕을 잡기 위해서는 그의 특수 능력은 우레 심판을 유도해야 한다. 이 우레 심판의 대상은 야만왕의 인식 범위 내의 유저 중 한 명이 임의로 선정된다. 때문에 우레 심판의 표 적이 된 대상은 주어지는 3초 동안 야만왕에게 다 가가야 한다. 방법은 있지만, 그 방법이 불가능하 다는 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여기서 히르칸은 생각을 바꿨다.우레 심판의 표 적이 되는 그 범위 내에 유저가 한 명뿐이라면 어 떻게 될까? 임의는 무의미하다. 누가 표적이 될지 분명하니까.
이게 히르칸이 솔플을 택한 이유였다.
"아, 편하다고 해서 이게 쉽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히르칸의 말에 씽은 여러 말들을 삼키고, 동조만 했다.
"이 게임은 어렵지."
"그냥 아니라 지랄 맞게 어려워."
짜증을 부리던 히르칸이 다시 한 번 비즈마 평야를 바라봤다. 내일 저기서 야만왕과 춤을 출 것 이다. 번개가 내리치는 격렬한 춤을, 야만왕의 근 처를 멤돌며 우레 심판의 대상이 됐음을 알리는 알 림을 배경음 삼아, 신나게 부딪치고, 떨어지고, 다시 부딪칠 것이다.
"그래도 이번 영상 제목은 잘 나오겠네."
"벌써 제목도 정해뒀나?"
"당연하지. 영상수입 없으면 난 이 게임을 할 수 가 없는데. 제목은 볼름이야."
"볼름?"
"웰컴 투 볼룸. 볼룸에 어서오세요."
"왜 그런 제목을…?"
이 세상 오직 하회탈만이 출 수 있는 춤을 저곳 에서 출 것이다.
"정말 신나게 춤판이 벌여야 할 테니까."
12.
"지금 이곳, 비즈마 평야에는 약 5천 명의 유저 들이 모여 있습니다."
"하회탈 팀이 레이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30 대 길드는 아직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이곳에서 라이브 재 널을 통해서도 방 송되지 않을 역사적 사건을 함께할 예정입니다."
비즈마 평야.
그 드넓은 평야 위를 무수히 많은 유저들이 가 지각색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장 분주한 건, 이번 야만왕 레이드 영상을 팔아치우기 위해 이 모든 과정을 영상으로 남기고자 하는 이들이었다. 하회탈은 일찌감치 이번 레이드 과정에서 영상의 상업적 이용에 대한 책임과 권리 를 포기했다. 누구든 하회탈 그리고 하회탈의 전투 를 찍어서 써도 좋다고 말했다.
물론 하회탈이 그런 결정을 내린 건 자신과 함께 싸워주는 이들을 위한 자그마한 선물이 었다. 자 신과 함께 싸우는 이들이 얼마든지 그 과정을 기 록으로 남기고, 남긴 기록을 얼마든지 자기 마음대 로 쓸 수 있기를 바라면서 준 선물.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호의 앞에서 같은 미소를 지어도 누군가는 감사함의 미소를 짓고, 누군가는 음흠한 미소를 짓는 법. 하회탈의 전투에 하등 도움이 될 생각이 없는 이들은 이 금싸라기 같은 기회에 모기처럼 달라붙었다. 쉴 새 없이 비즈먀 평야를 오고 가며 허공에 대고 인터뷰를 하는 그들 의 소리는 실제로도 윙윙, 모깃소리가 났다. 인터 뷰 프로그램으로 자신의 목소리가 외부로 노출되 지 않게 설정을 한 탓에 다른 이들에게는 윙윙거림만 들릴 뿐이었으니까.
반면 하회탈을 위해 온 이들은 준비를 했다.
"계획 설명합니다. 계획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 규모 마법 포격을 통해 야만왕의 주변을 벽처럼 두 르고 있는 몬스터의 개체 수를 줄일 겁 니다. 그 후 에 자연스럽게 끌린 어그로를 탱커들이 막아냅니다."
"우리들 역할은 1차 저지선이 구축되면 그중 한 곳을 뚫어서 길을 만드는 것이다."
"1 차 저지선이 확보되고, 여덟 방향에서 스트라 이커 팀들이 길을 뚫으면 사제와 마법사, 탱커들이 그 길로 안으로 들어 가세요. 그리고 야만왕을 지키 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는 몬스터를 막으세요. 하회 탈이 야만왕과의 전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무대를 만드는 게 우리의 역할이에요."
하루 전에는 축제 분위기를 즐겼던 이들, 그런 그들은 듣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전술을 반복해 서 들었다. 그냥 듣는 것만 하는 게 아니었다. 홀로 그램 창을 띄운 후에 가상으로 전투 시물레이션을 그렸다. 예상되는 전황이 점들을 통해 그려졌다.
"탱커들 사이에 몬스터들을 가두라니, 탱커들만 죽어 나가겠군."
"별수 없잖아? 야만왕과 하회탈의 1대1 무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벽을 쳐야지."
"대충 보니까 탱커가 2천 명쯤 되는 거 같은데, 이 중에서 절반 이상은 하르드 요새에서 만나겠네."
"절반만 죽으면 다행이지. 하회탈이 실패하면 그 때는 전부 죽자사자 도망쳐야 할 걸?"
예상되는 전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좋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야만왕 레이드는 그 어떤 보스 몬 스터 레이드보다 많은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도 록 디자인이 되어 있었다. 워로드의 시스템이 그렇 게 설정을 했다. 지금 이곳에 모인 이들 중에는 그 사실을 몇 차례 경험한 이도 있다. 서른 번 넘게 이 루어진 야만왕 레이드에 여러 번 참가한 이들도 있으니까.
"아, 오늘 뒈지겠다."
그렇기에 우려 가득한 소리가 나오는 것도.
"젠장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하는지 모르겠네."
불만 가득한 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게임을 접어야지. 에휴."
한숨 가득한 소리가 나오는 것도, 전부 당연했다.
하지만 그 소리 속에서도 야만왕 레이드를 준비 하는 이들은 준비만큼은 철저히 했다.
"자들 보이스톡 접속하시고. 아아, 보이스톡 테 스트. 아아, 보이스톡 테스트. 우리 팀원분들 머리 위로 손!"
"우리 팀원분들파이팅입니다! 각자역할하고포 지션 다시 한 번 확인해주세요."
"5천 명 넘게 참가한 전투입 니다. 자기 위치만 지 키는 게 중요합니다. 자기 위치 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고수이니까.
"괜히 몸 사리지 마세요!"
"어차피 암흑대륙 아니면 사냥터도 없는데, 그냥 눈 딱 감고 한 번 죽어봅시다."
"여기서 하르드 요새로 걸어가는 거랑, 그냥 죽 어서 다시 하르드 요새에서 시작하는 거랑 별 차 이 없어요. 까짓것 죽어요. 한두 번 죽어본 것도 아 니 잖습니까?"
워로드에서 200레벨을 찍고, 2차 승급을 마치고, 암흑대륙이란 무대에 발을 디뎠다는 것. 그저 단순히 워로드를 오래 한다고 해서 이룩할 수 있는 성과가 결코 아니다.
열심히 해야 하고, 게임을 남들보다 잘해야 하며, 더 나아가 애정을 가지고 이 게임을 해야 한다.
최소한 게임 때문에 현실에서 주변 가족, 지인들 에게 너 언제 정신 차릴래? 게임 언제까지 할래? 오빠 내가 좋아 게임이 좋아? 같은 소리를 들어봤 을 정도로, 워로드란 게임을 삶의 일부로 거뜬히 받아들여야 이룩할 수 있는 성과다.
어중이떠중이?
결코 아니다.
"자, 그럼 마법사들 준비합니다."
"순서는 불, 번개, 바람, 얼음 순입니다. 명심하세 요."
"야만왕 접근 중! 불바다 팀! 준비!"
현실에서는 게임 폐인이라 불리지만, 워로드에 서는 남부러울 것 없는 게임 고수들이자, 백전의 노장들이자, 역전의 명수들이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그런 자들이다.
그들이 각오를 했다.
이 전투에서 몸을 불사르기로. 자신들의 게이머 인생에 끝장나는 추억을 한 번 남겨보기로.
"이야, 아주 개떼같이 몰려오네."
"우리도 이 번에는 개떼만큼 모였잖아? 5천명 넘게 모인 건 이번이 처음일 걸?"
그렇게 워로드 역사에 길이 남을 하이라이트가 시작됐다.
13.
첫 시작은 화염비, 파이어 스통이었다.
꾸르르!
"와, 구름 봐라."
붉은빚을 머금은 구름이 비즈마 평야에 발을 디 딘 야만왕과 그의 부하들 머리 위를 재우기 시작 했다. 는치 빠른 몬스터들이 잽싸게 고개를 들어 구름을 향해 경계심을 표출했다.
주룩!
그리고 구름이 화염비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비 가 내리는 그 범위는 매우 컸다. 축구장 단위로는 계산조차 힘들 정도로, 마치 작은 도시에 폭우에 적셔지는 분위기였다.
더욱이 내리는 비는 비즈마 평야의 풀 쪼가리를 거름 삼아, 들풀이 되어 거세게 번지기 시작했다.
내린 비는 흥수처럼, 바다를, 불의 바다를 만들 었다.
"불덩이 굴려!"
- 불덩이 굴립니다!
그 불바다 위로 거대한 불덩이들이 달리기 시작
콰과콰!
거친 소리를 내며 폭주하듯 달리기 시작한 불덩 이들이 불바다 위를 지나치며 제 몸을 거듭 키웠다. 거대하게 불어났다. 그 거대해진 불덩이 앞에 서 어지간한 소형 몬스터는 볼링핀 골이나 다름없었다.
커형, 커형!
그러나 그 불덩이 앞에서 몬스터들은 볼링핀처 럼 속절없이 당하기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공격을 당한 몬스터들은 그 순간 공격성을 드러 냈다. 어그로를, 타깃을 설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설정이 마치는 순간 그들은 그 타깃을 파괴하 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마법을 쓴 마법 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날렵한 것들, 네 발을 가진 것들, 늑대와 사자와 말과 같은 것들이 몬스 터 무리를 빠르게 치고 나와, 선두를 이끌었다.
"온다."
"버프 다 됐어?"
"오케이, 끝! 29팀 완료!"
"33팀도 준비 완료!"
눈이 돌아간 재, 온갖 괴상망측한 을음을 토해낸 재 달리는 몬스터를 정면에 두고 이제까지 상황을 지켜보던 탱커들이 움직였다. 왼손에는 방패를, 오 른손에는 무기를 죈 탱커들이 처벅처벅, 몬스터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적당한 자리를 잡은 순간, 몇몇은 그대로 자리에 버티고 섰다. 탱커들이 거대한 벽이 되었다.
-전투 시작했다!
-L 어? 너 레이드 어디서 봄?
-L 친구가 게임하는 거 옆에서 실시간으로 영 상 송출해서 보는 중.
-L 영상 공유해주세요!
-L 저도 공유해주세요!
그 시각 온라인 세상도 떠들썩해졌다.
여 러모로 역사적 인 사건, 30대 길드의 주도가 아 니라 일반 유저들의 참가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번 야만왕 레이드에 대한 워로드 팬들의 관심은 절정 에 다다랐다.
하지만 이 과정을 공식적으로 라이브 방송을 해 주는 곳은 없었다.
-젠장 왜 이런 걸 라이브 방송으로 안 하는 거야?
-L 염치가 있으면 못하지.
-L 이제까지 뒷짐만 쥐고, 자기들 사냥터에서 꿀 빨던 새끼들이 여기서 방송을 하면 보이못을 해 야지.
-L 차라리 나중에 나오는 하회탈 영상을 보고 말지, 라이브 방송? 웃기지도 않는 소리.
-L 그냥 하회탈한테 라이브 채널 하나를 주자!
-LL 동감함.
-LL 동감함(2).
공식적인 라이브 재널을 가진 30대 길드에게는 자격이 없었으니까.
이제까지 야만왕의 폭정을 좌시한 재, 자기들이 관리하는 사냥터에서 나름 충분히 게임을 즐기고 있던 대부분의 30대 길드에게 야만왕과 하회탈 그 리고 일반 유저들이 만들어내는 역사적 사건으로 제 이익을 추구할 자격은 있을 수가 없었으니까.
비즈마 평야 위의 전투는 그런 전투이자, 그런 무대였다. 이익을 초월한 유저들의 꿈과 소망과 각 오와 의지가 모인 무대.
어떤 의미에서 가장 순수하게 게임을 하기 위해 모인 무대. 그래서일까?
'장관이다.'
이 무대를 바라보며, 숨을 고른 재, 앞으로 있을 전투를 기다리며 모든 것을 갈무리하는 히르칸에 게 전장은 그 어떤 전장보다 화려하게 빚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장관.
과거로 돌아오기 전부터 과거로 돌아온 후.
지금까지 치른 무수히 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오늘보다 빚이 나는 무대는 없었다.
'장관이야.'
5천 명이 넘는 유저가 오직 한 명을 위해 마법을 던지고, 칼을 휘두르고, 방패를 들고, 기도를 외우고 있다.
심지어 이제 시작이다.
이제부터 이 치고받고, 숨은 막히지만 숨을 돌릴 름은 허락되지 않는 전투는 최소 1시간 동안 치러 질 것이다.
물론 몇몇은 그 고통스러운 전투 속에서 결국 포기하고 그냥 로그아웃을 하거나 흑은 그냥 도망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적지 않은 유저들이 이곳에 서 게임오버를 각오하고, 죽기 직전까지는 싸울 것 이다.
심지어 죽어가는 유저들 대부분은 이 전투에서 손해를 볼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어 디에서도 값어 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그저 게임오버로 기록될 것 이고, 오히려 48시간이란 시간을 죽음에 대한 대가로 세상에 지불해야 할 것이다.
레이드 도중 죽은 유저들에게 보상을 해주는 30 대 길드의 시스템이나, 잡는 순간 모든 것을 독식 하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 턴의 하회탈식 전투와는 다르다.
저들이 보다 순수하다.
'그래, 이런 무대에서 싸우고 싶었다.'
그래서 이런 광경을 히르칸을 꿈꾸었었다.
이 무대.
유저들이 만들어주고, 응원해주고, 대가 없이 목 숨마저 바쳐주는 이 무대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기왕이면 이 무대를……'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도 그랬다. 하회탈 길드, 온 갖 고생을 함께한 그들과 함께 이렇게 가장 찬란 한 무대에 서고 싶었다. 그리고 이 무대에 어을리 는 전투를, 결과를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더더욱 배신감이 컸었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니고, 이 광경을 함께 보고 싶었던 이에게 당했 던 배신이었기에, 그래서 그토록 격렬하게 반항했 던 건지도 모르겠다.
'흥.'
물론 그때의 기억을 히르칸은 추억으로 남기지 않았다. 아니, 이제 그때의 기억에 사로잡히지 않 을 것이다. 그때를 기억하며, 후회하고, 분노하는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래,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이제 후회할 이유가 없으니까.
히르칸이 옆에 있는 본 드래곤의 몸뚱이 안에 타이머를 맞춘 뼈폭탄을 집어넣었다. 그런 히르칸의 뒤에는 이미 본 아머마저 완벽하게 두른 해골 전 사들이 대기 중이었다.
히르칸, 그가 활약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점차 다가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