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야만왕 (2). >
4.
“미안해요, 우리는 숲을 버리고 도망칠 수 없어요.”
가녀리고, 구슬픈 감정이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귓가를 간질이
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투견과 흡사한 외모를 가진 사내는 말없이 바라보고, 말
없이 이를 꽉 물었다.
“씽 형님! 이미 코앞까지 왔습니다!”
“씽 오빠, 이제 떠나는 게 좋겠어요!”
그런 험악한 외모를 가진 사내의 이름을 멀찌감치 떨어진 곳의 두 남녀가 동시에
불렀다.
씽은 요조리와 조바, 이제는 동료이자, 동생이 된 그들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
다. 벚꽃 잎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를 머리에 달고 있는 분홍빛 짧은 머리칼을 가진
쫑긋한 귀의 엘프를 바라봤다.
“가세요.”
엘프는 그런 씽을 향해 방긋, 미소를 지으며, 씽의 가슴을 가볍게 제 손으로 밀었
다.
“우리들을 위해 씽, 당신이 보여준 노력은 잊지 않겠어요. 꼭 기록 열매에 남기도
록 하겠어요. 씽이란 이가 엘프를 위해, 세상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했다는 것을. 훗
날 기록 열매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다면 후세가 당신을 기억해줄 겁니다.”
그렇게 씽의 가슴을 밀어낸 엘프가 등을 돌린 후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달
려가는 엘프는 한 명이 아니었다. 벚꽃과 흡사한 분홍빛 잎사귀를 휘날리는 울창한
숲을 무수히 많은 엘프들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타이틀 ‘엘프의 위대한 은인’을 획득하셨습니다.]
[타이틀 ‘엘프의 가호를 받는 자’를 획득하셨습니다.]
[타이틀 ‘엘프의 가호를 받는 자’의 효과에 따라 나무가 있는 곳에서는 이동 속도
가 10퍼센트 빨라집니다.]
그 소란 속에서 씽에게 타이틀 획득을 알리는 시스템 알림이 들렸다. 개중에는 정
말 소름이 끼칠 만한 알림도 있었다. 어쩌면 이제까지 등장한 무수히 많은 타이틀에
서 그 값어치로는 손에 꼽을 정도, 워로드의 유저라면 탐낼 수밖에 없는 눈이 돌아
갈 정도로 값진 타이틀이었다.
하지만 씽에게는 그 타이틀의 가치 같은 건 귀에도, 눈에도, 조금도 들어오지 않
았다.
‘빌어먹을.’
암흑대륙 남동부에 위치한 반달 모양의 호수, 오호칼.
그 호수를 무대 삼아 주변에 펼쳐진 벚꽃 나무의 숲은 언제나 싱그러움과 향긋함
을 가진 곳이었다. 그것을 터전으로 삼는 엘프 부족, 시미아 부족은 터전에 퍽 어울
리는 차림을 하고 다녔다. 시미아 부족 엘프들은 어디에나 벚꽃을 떠올리게 하는 엑
세서리를 착용했다.
그런 그들의 터전은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과 달리 220레벨의 몬스터들이 우글
거리긴 했지만, 시미아 부족은 그 난관 속에서도 나름 자신들의 부족을 지키며 살아
오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터전을 향해 그들이 결코 맞서 싸울 수 없는 존재가 오고 있었다.
야만왕!
한 달여 전 우레사냥꾼 길드가 깨운 그 괴물은 거침없이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자
신이 지나간 곳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그런 야만왕이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복종
하는 수천 마리의 몬스터들을 이끌고 오호칼 호수를 건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미아 부족은 그런 야만왕으로부터 호수와 터전을 지키기 위해 결사항전을 택했
다.
그런 그들의 끝.
“형님!”
“오빠!”
무너질 것이다.
씽은 이 순간 장담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지만, 시미아 부족이 야만왕을 상대로
이 터전을 지키지 못한다는 건 분명했다. 워로드란 시스템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워로드의 시스템은 오직 유저들에게만 야만왕을 무찌를 자격을 허락한다.
그 사실을 우르갈 대산맥마저 넘어왔던 철사자 기사단이 보여줬다. 거침없이 240
레벨대의 몬스터들의 벽마저 뚫어내며 야만왕에 닿았지만, 야만왕의 몸에 제대로
된 상처조차 내지 못한 채 처참하게 짓밟힌 그들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게임이니까.
“빌어먹을!”
하지만 이 순간 씽은 게임이라는 이유로, 이 상황을 그저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
다.
“요조리, 조바! 너희들만 떠나!”
“예?”
“난 여기서 싸운다. 내가 야만왕을 막아내겠어.”
그 말을 들은 요조리와 조바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야만왕을 막아낸다? 그런 시도는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 야만왕을 잡기 위해 유
저들은 적지 않은 숫자의 레이드 팀을 구성하기도 했고, 꽤 짜임새를 갖춘 채 레이
드를 시도했었다.
그리고 처참하게 패배했었다.
지금 이곳으로 야만왕이 오는 이유도 앞서서 도전한 레이드 팀이 실패했기 때문
이다.
그런 야만왕을 막아내겠다니? 이 세상에서 가장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오케이, 한 판 붙어봅시다.”
“까짓것 죽기밖에 더하겠어요? 같이 싸워요. 어차피 야만왕, 그 새끼 때문에 퀘스
트고 나발이고 없는데.”
“하르드 요새 유적까지 걸어가기도 힘든데, 그냥 죽어서 한방에 갑시다.”
“그냥은 못 돌아가죠. 아무렴요!”
하지만 요조리와 조바는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굳은 표정을 풀고 해맑은 표정으
로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그런 그 둘의 말에 씽은 이를 꽉 물었다. 자신 때문에 게임오버를 자처하는 그들
이 고마웠고, 미안한 탓이다. 하지만 이 순간 씽은 그 두 가지 감정 모두 표현하지 않
았다.
“좋아, 우리도 한 번 영웅이 되어보자고.”
그저 의지를 표현했다. 보잘것없지만, 볼품마저 없지는 않은 그 의지를 표현했다.
그러나 그들이 영웅이 되는 일은 없었다.
5.
[레벨이 올랐습니다.]
[본 드래곤의 스킬 랭크가 C랭크로 상승했습니다.]
[아이언 골렘의 스킬 랭크가 C랭크로 상승했습니다.]
[데스나이트의 스킬 랭크가 B랭크로 상승했습니다.]
[해골 전시회의 스킬 랭크가 D랭크로 상승했습니다.]
[타이틀 ‘타투 스콜피언 학살자’를 획득하셨습니다.]
듣기 지칠 정도로 연달아 시스템 알림이 들었다. 하나하나 알토란 같은 기꺼운 소
식이었지만 히르칸은 그 소식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자신이 밟고
있는 몸길이 7미터의 검은 문신을 잔뜩 가진 타투 스콜피언의 꼬리를 바라봤다.
뚝뚝!
고개를 드는 순간, 타투 스콜피언의 사람 머리 크기의 거대한 독침에서 독액이 떨
어졌다.
그 독액이 떨어질 때마다 히르칸의 HP도 점차 떨어졌다. 히르칸이 입안에 넣어두
었던 붉은 사탕을 깨물었다. 알싸한 마늘 향과 함께 줄어들던 HP가 차올랐다.
여유를 가진 히르칸은 이내 자신의 방어구를 살폈다. 절대무적까지는 아니더라도
워로드에서 그 어떤 방어구보다 뛰어난 방어력을 보여주었던 얼룩무늬의 갑옷, 다
크 스폿 세트 곳곳에는 히르칸이 조금 전 바라본 타투 스콜피언의 독침 크기와 꼭
맞는 구멍이 가득했다.
‘이제 바꿀 때가 왔네.’
다크 스폿 세트, 정말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사용했던 이 아이템에 작별을 고할 때
가 온 것이다.
늦은 작별이었다. 아무리 성능이 좋다고 해도 180레벨짜리 아이템을 260레벨 사
냥터에서 써먹으면서 무사하길 바라는 게 오히려 도둑놈 심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게 지금 타투 스콜피언을 잡는 이유이기도 했다.
‘뭐, 이번 기회에 싹 바꿔야지.’
타투 스콜피언.
260레벨의 중대형 몬스터로, 적색 사막 좀 더 깊숙한 곳에 도달하면 등장하는 적
색 황무지에서 만날 수 있는 몬스터였다. 현재 워로드에서 발견된 일반 몬스터 중에
서는 최고 레벨의 몬스터였다. 동시에 현재 240레벨 이상의 몬스터를 잡아서 제작
할 수 있는 레어 등급의 아이템 중에서 가장 괜찮은 옵션의 아이템을 가진 몬스터이
기도 했다.
특히 5개 파츠를 착용 시 발동하는 타투 스콜피온의 문신 문양 효과가 매우 좋았
다. 공격 시 상대방을 중독 상태로 만들고, 독의 위력 역시 꽤 대단했다.
히르칸은 이번 기회에 본인은 물론 해골들도 죄다 타투 스콜피언 세트로 무장시
킬 속셈이었다.
그게 야만왕이 등장하고 한 달여가 흐르는 동안 오로지 타투 스콜피언만 잡은 이
유였다. 한 달 넘게 보낸 시간은 충분히 값어치가 넘쳤다. 레벨은 253레벨을 달성했
다. 이제 레벨 랭킹 순위에서 히르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퍼스트원과의 레벨
도 이제 12레벨 차이에 불과하다.
아이템도 꽤 모았다. 해골 전사 서른 마리를 풀세트로 무장시킬 수 있을 만큼 아
이템을 확보했다. 말이 서른 마리이지, 한 마리에 다섯 파츠를 입히는 셈이니까 무
려 레어 아이템 150개를 확보한 셈이다. 그 아이템을 위해 타투 스콜피언 몇 마리를
잡았는데, 일반 유저들은 감히 그 과정을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히르칸의 영상을 통한 수익이 나올 수 있었다. 히르칸은 사냥에 돈을 퍼
부었다. 리치리치, 그만큼 부자는 아니지만, 그가 쓰는 만큼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닐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르칸의 가계부는 언제나 흑자였다. 돈을 미친 듯
이 써도, 히르칸의 지갑에는 언제나 돈이 남았다.
최고다.
레벨 랭킹 1위인 퍼스트원을 가시권에 둘 만큼 어마어마한 레벨업 페이스, 아낌
없는 투자를 통해 빠르게 오르는 스킬 랭크들, 강력한 몬스터를 잡아 확보한 250레
벨의 레어 아이템, 이 모든 과정을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하회탈에게 망설임 없이
지불하는 시청료까지.
심지어 이 와중에 암흑대륙은 야만왕에 의해 점차 지옥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회
탈의 경쟁자들은 야만왕의 폭정 앞에 무너지는 중이었다. 하회탈의 독주가 시작됐
다.
이보다 좋은 상황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다시 게임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
을 때, 그때도 상상조차 못했던 최고의 상황과 무대 위에 히르칸이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지루해.’
하품이 나온다.
그토록 원하던 걸 이룩했는데, 부와 명예를 손에 쥐었는데,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위치에 올랐는데, 최근 동안 타투 스콜피언 사냥은 히르칸이 워로드를 시작한
이후 가장 지루했다.
‘우레사냥꾼하고 싸울 때도 지루한 적은 없었는데······.’
처음이었다.
히르칸은 워로드를 하면서 짜증나고 열불이 나고, 욕이 나오는 경우가 무척 많았
지만, 그래도 워로드가 지루한 게임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
어 우레사냥꾼 길드와 전쟁을 했을 때도 욕이 나오고 진절머리가 나고, 그들을 향해
분노를 토할지언정, 그때도 워로드란 게임이 지루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우레사냥꾼 길드의 길드원들 대여섯 명을 죽일 때, 그 난관을 뚫고 영웅도
살자다운 목적을 수행해냈을 때,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그 순간을, 워로드를 즐겼
다.
히르칸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주변에는 타투 스콜피언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
을 세운 해골 전사들이 가득했다. 해골 전사들은 지그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
인의 새로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훈련을 안 해도 똘똘하게 잘 싸우네.’
애틋한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 해골 전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그들을 무자비하
게 몰아붙였을 때를.
그러나 이제는 그런 훈련은 필요 없었다. 해골들의 전투 인공지능은 이제 훌륭하
게 완성됐으니까. 거듭된 훈련과 전투가 그들을 어떤 전투에서도 최소한 제 몫을 할
수 있는 불세출의 전사로 만들어줬으니까.
유저보다 나은 해골들, 그런 해골을 백 마리나 부릴 수 있다. 조만간 데스나이트
도 A랭크가 되면 미리 놔둔 초월급 고대의 힘으로 강화를 할 것이다. 그럼 과연 누
가 적수가 될까?
로열 로드!
제왕의 길이 보이고 있었다. 이 길을 그대로 가면 필시 최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히르칸은 그 길 너머가 궁금하지 않았다.
히르칸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을 바라보는 해골 전사들의 눈길을
피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씨팔.”
결국 히르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왔다.
그런 그의 지루함을 멈춰준 건, 친구의 전화였다.
6.
- 하회탈, 네 이름을 빌리고 싶다.
갑작스럽게 히르칸에게 연락을 한 씽은, 정말 갑작스럽기 그지없는 부탁을 했다.
히르칸이 무어라 되묻기도 전에, 씽은 무언가에 쫓기듯 다급하게 사정도 설명했
다.
- 네가 나설 필요는 없어. 네가 나서는 게 부담스럽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단지
······ 네 이름이 필요하다. 네 이름을 빌려줘.
히르칸이 진정하고, 설명을 하라고 되물은 후에야 씽은 자신의 계획을 침착하게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 야만왕을 잡을 생각이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30대 길드는 야만왕 레이드에
나서지 않는다. 결국 일반 유저들을 모아서 레이드 팀을 구성해야 하는데······ 하회
탈의 이름으로 일반 유저들을 모을 생각이다. 네가 야만왕 레이드에 나선다고 한다
면, 많은 유저들이 참가할 테니까.
마지막은 사과였다.
- 무리한 부탁인 것 알고 있다. 그러니까 레이드에 실패하면······ 내가 꾸민 이야
기라고 할 거다. 내가 널 팔았다고. 그래도 널 향한 비난이 갈지 모르지만······ 부탁
한다. 야만왕을 이대로 놔둘 수가 없다. 아무리 이게 게임이라도, 지금 이 상황을 그
냥 지켜만 보면서 30대 길드가 움직이기를 기도만 하는 상황은 참을 수 없어.
그제야 제대로 된 통화가 시작됐다.
“그러니까 야만왕을 잡겠다?”
- 야만왕에 대한 유저들의 불만은 한계치에 도달했다. 네가 야만왕을 잡겠다고
하면, 널 도와줄 유저는 충분히 많아. 아니, 네가 나올 필요는 없어. 다시 말하지만
필요한 건······.
“야만왕 공략법은? 1페이즈는 수호 보석 파괴야 어려울 것 없지만, 수호 보석 파
괴 후 우레 심판 모드로 돌입하는 2페이즈부터는 데미지를 주는 방법이 없잖아?”
-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를 조사한 결과, 단서가 나왔다. 그리고······ 조만간 시도
되는 서른한 번째 야만왕 레이드 시도에서 그 단서를 기반으로 공략을 해볼 예정이
다.
“그 방법이 뭔데?”
- 방법은······.
씽이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에서 확보한 단서를 시작으로 공략법을 말해주기 시작
했다.
“으하하하.”
그 말을 듣던 히르칸의 입에서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과할 정도로 유쾌하기 그지
없는 웃음은 쉽사리 멈추지 못했다.
“미안, 아, 정말 미안.”
히르칸이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사과를 했다.
- 지금 내가 방해를 한 건가? 그럼 내가 조금 있다······.
씽은 그 사과를 이해하지 못했다. 히르칸의 웃음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그는 그
저 미안할 뿐이었다. 혹시 자신이 히르칸의 중요한 일을 방해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에 씽은 솔직히 당장에라도 이 전화를 끊고 싶었다. 그는 친구를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역시 난 이게 체질에 맞아.’
그런 씽의 마음을, 히르칸이 덜어줬다.
“그래, 하회탈이 해야지. 제2의 하회탈 같은 게 아니라, 이런 일은 하회탈이 해야
지.”
지루했던 게임, 한 달 넘게 한숨과 하품이 나왔던 게임이 갑자기 히르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히르칸은 이 두근거림마저 외면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 이 두근거림이 없다면 워
로드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두근거림은 하회탈이 워로드를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엔진 소리와 같았다.
“세팅해. 내가 가서 야만왕 그 새끼를 잡아줄 테니까.”
통화와 함께 히르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해골들의 시선이 히르
칸을 따라 움직였다.
“아, 그리고 야만왕은 나 혼자 잡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머릿수가 많으면 골치
가 아프겠어.”
- 혼자서? 히르칸, 아무리 너라도 야만왕을 혼자서······.
히르칸이 그런 해골에게 지령을 내렸다.
“혼자 잡아야 내가 다 먹을 수 있잖아? 물론 난 혼자가 아니지만.”
다음 목표는 야만왕이라는 지령을!
7.
쿵!
거인이었다.
마치 기둥을 떠올리게 만드는 거대한 다리와 그 거대한 다리조차도 버거워 보이
는 육중한 몸 그리고 길고 두꺼운 팔을 가진 거인.
쿵!
그 거인은 황금으로 된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갑옷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갑
옷 곳곳에 장식이 가득했다. 그 장식들 중에서도 가지각색의 보석들이 가장 돋보였
다. 서른한 개의 보석들은 사람 머리통만큼 컸고, 찬란할 정도로 영롱했다.
쿵!
그런 거인의 가장 인상적인 건 머리였다. 코끼리, 부채처럼 넓은 귀와 탐스러운
상아 그리고 길게 늘어진 코.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코끼리와는 비교를 거부했다.
검은색 눈알, 그 안을 채운 노란색 눈동자는 용에게서나 볼 수 있는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건 단언컨대 용의 눈이었다.
쿵!
7미터 신장, 용의 눈과 코끼리의 머리를 가진 황금 보석 갑옷을 입은 거인! 걸을
때마다 지축을 뒤흔들 만큼 무시무시한 힘과 존재감을 내뿜는 존재!
이름은 네샤.
야만왕 네샤!
용의 심판을 대행하는 존재이며, 일찍이 용에 맞서 싸울 만큼 찬란하고, 강인했던
왕국들의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든 존재이며, 용의 권능에 따라 야만스러운 것, 문명
을 갖추지 못한 것, 본능에 충실한 모든 것을 제 수족으로 부릴 수 있는 존재다.
그런 왕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몬스터들이 나섰다.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펼쳐진 숲, 왕의 걸음을 방해하는 나무들이 제거되기
시작했다.
쉬익, 쉬익!
날카로운 것을 가진 몬스터들은 나무들을 베었고.
푸홧!
그러지 못한 것들은 나무와 돌을 뿌리째 뽑았다. 야만왕조차 넉넉히 갈 수 있는
길이 생겼다.
쿵!
그제야 야만왕이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그야말로 왕의 위엄.
그 왕의 위엄이 넘치는 광경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던 수백 명의 유저
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비웃음을 머금고 이죽거림을 내뱉기 시작했다.
“새끼, 이번에는 잡는다.”
“2페이즈 공략법이 먹힌다는 걸 알았으니, 이번에는 무조건 잡아야지.”
그 이죽거림 끝에 이 무리를 이끄는 대장으로 보이는 유저가 입을 열었다.
“파이어스톰 준비!”
- 준비 완료!
“파이어!”
바로 나오는 대답.
그 대답과 함께 길을 만들고, 왕을 모시던 몬스터들의 머리 위로 구름이 끼기 시
작했다. 적색 빛이 감도는 구름은 이내 자신들이 머금고 있던 것들을 내리기 시작했
다.
화르륵, 화르륵!
내리기 시작한 건 불길이었다.
파이어 스톰!
범위 마법 중에서도 꽤 넓은 범위를 자랑하는 그 마법이 하나도 아니고 수십 개가
동시에 발동하자, 삽시간에 축구장 대여섯 개를 합친 것보다 넓은 범위가 화염으로
된 소나기에 적셔지기 시작했다.
화르르르!
그렇게 내린 비는 나무를 횃불로 만들고, 풀밭을 들불로 만들었다. 삽시간에 불바
다가 완성됐다.
그게 시작이었다.
“불덩이 투척!”
- 투척!
- 투척!
몬스터들이 불바다의 뜨거움에 야단법석을 피우며 이 불바다의 원흉을 향해 달리
기 시작하는 사이, 달려오는 수백 마리의 몬스터들을 향해 거대한 불덩이가 구르기
시작했다.
데굴데굴!
불밭을 구르는 불덩이는 눈밭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구르면 구를수록 덩치가 커졌
다.
몬스터와의 거리가 지척이 되었을 때, 이미 몬스터를 집어삼키고도 남은 크기가
됐다.
퍼엉, 퍼엉!
그 불덩이는 기어코 몬스터들을 볼링핀처럼 무참하게 날려버리고, 짓밟고, 부셨
다.
콰콰콰!
그렇게 멈출 줄 모르고 달리던 불덩이를 막은 건, 한 덩치를 자랑하는 몬스터들이
었다. 야만왕의 옆에 서도 덩치로는 밀리지 않는 중대형 몬스터들, 오우거, 트롤, 미
노타우로스 따위가 불덩이를 제 몸으로 막았다.
우어어!
불덩이를 막아내기 위해 불덩이와 부딪칠 수밖에 없는 몬스터들의 입에서는 울음
이 터져 나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스터들은 그 불덩이를 어떻게든 막아냈다.
감히 왕의 근처에 다다르지 못한다!
불덩이를 막아내는 몬스터들에게는 그런 의지가 분명 깃들여 있었다.
더 나아가 왕을 향한 위협을 용납지 못하겠다는 의지도 분명했다.
크어어어!
불덩이가 가로막히는 순간, 목청 높은 몬스터들이 정면의 적을 향해 있는 힘껏 함
성을 내질렀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쿵, 쿵, 쿵, 쿵!
모든 몬스터들은 정면의 적을 향해 돌진하라는 명령!
그 명령에 몬스터들이 경쟁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
든 것을 제거할 각오를 휘날리며 달렸다.
“야만왕 팀 움직인다.”
그사이 비슷한 의지를 품고 달리는 이들이 있었다.
야만왕이 지나온 길, 숲 위에 나무를 베고, 돌을 뽑아 만든 그 길을 따라 이백 명
의 유저들이 달렸다. 그들은 몬스터들이 빠지면서 생긴 뻥 뚫린 길을 전력으로 달렸
다.
전투가 시작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십 분 후.
꾸릉, 꾸르릉!
하늘에 우레를 머금은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 63화. 야만왕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