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적색 사막 (2). >
4.
[엘프들의 유물]
- 퀘스트 등급 : 유니크
- 퀘스트 가능 레벨 : 200레벨 이상
- 퀘스트 내용 : 레드 엘프 부족은 다가오는 모든 존재를 배척합니다. 그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다면, 엘프들이 남긴 유물이 필요합니다. 그 유물을 찾으십시오.
- 퀘스트 보상 : 무덤지기의 열쇠.
이번에 새롭게 얻은 퀘스트 내용을 바라보는 히르칸의 얼굴은 무겁게 굳어 있었다.
‘진짜 워로드가 날 싫어하나? 무슨 이런 퀘스트를 주는 거지?’
퀘스트 내용을 그냥 보면 어려울 건 없어 보인다. 유물 하나만 찾아오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워로드를 하는 유저라면 이 퀘스트가 얼마나 밑도 끝도 없는 퀘스트인지 금방 알고, 혀를 내두를 것이다. 일단 어떤 퀘스트든 엘프가 관계되는 순간부터 짜증이 솟구칠 수밖에 없다. 엘프가 관계되면 일단 그와 관련된 엘프 부족을 찾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이
니까.
하물며 엘프의 유물을 찾아라? 어떤 엘프를 찾아가면 유물의 단서가 있다는 말조차 없다.
‘차라리 아누가스를 잡는 게 낫지······.’
아누가스 같은 공략법을 모르는 이상 결코 잡을 수 없는 몬스터를 잡는 게 쉽다고 느껴질 정도다. 아니, 어쩌면 히르칸에게는 그게 더 쉬운 일일 것이다.
물론 이게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의 특징이기도 했다.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인 타락 백작 편부터 그랬다. 강한 몬스터를 잡는 게 전부가 아니라, 워로드란 무대가 제공하는 다양한 콘텐츠와 퀘스트 전반에 걸친 높은 게임 진행도가 요구됐다.
그리고 그게 마땅한 일이다.
이제까지 히르칸을 비롯해 우레사냥꾼 길드나, 레드불스 길드 등이 그냥 힘으로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를 진행한 게 비정상적인 짓이고, 무식하기 그지없는 짓이다. 적어도 그게 순수하게 게임을 즐기는 모습은 결코 아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는 드디어 올 게 온 셈이다. 결코 힘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이 나올 때가 됐다.
히르칸이 일찌감치 시도를 포기한 채 씽에게 연락을 취한 이유였다.
‘씽하고는 어지간하면 다시 엮이기 싫었는데······.’
그건 퍽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쯧.”
일단 이렇게 필요할 때만 씽을 찾는 자신의 모습이 구차했다. 필요할 때만 친구를 찾는 것만큼 쓰레기 같은 짓이 어디 있겠는가? 반대로 그럴 수 있으니까 친구인 거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이제는 히드라 길드 소속이 된 씽을 히르칸이 멋대로 만나는 것 역시 남들이 보기에 좋은 그림은 결코 아니었다.
씽과 히르칸, 그 둘의 만남은 이제 그 누구의 환영을 받을 수 없는 만남이 된 셈이고, 이번 만남은 더더욱 누군가에게 알려져서 좋을 것 없는 만남이었다. 순수한 친구끼리의 만남은 결코 될 수 없었다.
지금 히르칸이 서 있는 곳이 그 증거였다.
“여기 있었군.”
우거진 나무 사이로 험악한 사냥개를 떠올리게 하는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히르칸은 반색했다.
“어, 왔어?”
불편한 자리에서 서먹서먹한 친구를 만날 때의 모습, 히르칸의 모습은 딱 그 모습이었다.
반면 씽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동안 활약 대단하더군.”
“보통이지.”
사냥터였다. 유저라고는 코빼기조차 보기 힘들 정도로 구석진 사냥터, 몬스터도, 유저도 없는 곳. 적어도 만남의 장소로 기꺼이 삼을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런 그 만남의 장소에는 그 둘이 전부가 아니었다.
“우와아아······ 진짜 하회탈이다.”
“하, 하회탈 씨 팬입니다.”
둘이 더 있었다.
히르칸은 자신을 향해 놀라움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둘을 지그시 바라봤다.
‘요조리와 조바.’
씽에게 미리 언질을 받았다. 씽은 혼자가 아니라 자신과 함께 게임을 하는 두 명과 같이 움직여야 하며, 그 둘이 반갑지 않다면 히르칸과도 만날 수 없다고 말했다.
더불어 그 둘이 믿을 수 있는 실력자란 말도 덧붙였다. 덧붙인 그 말을 히르칸은 믿었고, 그 둘도 이 장소에 초대했다.
‘요조리······.’
그리고 이 중 한 명인 요조리는 히르칸도 나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조금 통통한 느낌이 나는 고양이를 닮은 외모를 가진 요조리는 폐허 왕국 편 등장 전까지는 유명하지 못하다가, 폐허 왕국 편에서 확! 이름값을 높인 유저였다.
히드라 길드가 폐허 왕국 편을 진행하면서, 그동안 퀘스트 전담팀에서 활동하던 요조리를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그 프로그램이 꽤 히트를 한 게 유명세의 배경이었다.
물론 좀 더 깊게 들어가면, 요조리란 유저 자체가 다른 유저와는 다른 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게 대중에게 먹힌 게 가장 컸다.
‘좀 또라이였지.’
좋게 말하면 4차원, 대충 말하면 괴짜, 나쁘게 말하면 또라이. 요조리란 유저는 적어도 이해 가능한 타입은 아니었고, 실제로 그녀의 방송 프로그램은 인기를 끌었지만, 그 인기란 마이너한 인기였다. 관심이 없는 탓에 기억이 선명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떠올린
기억 속에서 그녀는 NPC들 외모를 가지고 랭킹을 정하는 장면이 있었다.
‘얘는 모르는 녀석이고.’
반면 조바는 히르칸의 기억 속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저였다.
하지만 그가 가진 내력만으로도 히르칸은 조바란 유저의 특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마검사 타입으로 210레벨······ 변태네.’
2차 승급을 마친 마법사는 지금 시점에서 꽤 많지만, 개중에 마검사 타입은 한 손에 꼽을 정도다. 하물며 지금 시점에서 210레벨은 결코 낮은 레벨이 아니다.
더욱이 워로드에서 마검사 타입은 대개 레이드를 전문적으로 하는 길드가 목적을 가지고 육성하는 경우가 많다. 마검사가 몬스터 어그로 관리에 가지는 이점은 레이드에서 가장 유효하니까. 하지만 조바는 레이드 팀이 아닌 퀘스트 전담팀 소속이다. 적어도 평범함과
가까운 타입은 아니다.
물론 이런 요소들이 그 둘을 바라보는 히르칸의 표정을 풀게 만들 이유는 될 수 없었다.
둘을 바라보는 히르칸의 표정은 좋지 못했고, 그런 그의 표정이 품은 감정은 하회탈을 뒤집어쓰고 있음에도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됐다.
요조리와 조바는 흠칫 놀랐다.
‘왜 이러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내가 예전에 하회탈한테 잘못한 게 있었나? 유튜브 영상 아래에 이상한 댓글 단 거 걸렸나? 욕은 안 했는데?’
워로드를 하는 유저치고 하회탈을 모르는 유저는 없겠지만, 요조리와 조바는 하회탈의 팬을 자처할 만큼 하회탈을 잘 알고 있었다. 하회탈의 성격이 굉장히 괴팍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자기 심기를 건드리는 놈들을 가차 없이 응징하고, 때때로는 야비한 수법도
거리낌 없이 쓰는 진짜배기 실전의 고수라는 사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둘이 긴장하는 건 당연했다.
그런 그 둘을 뒤로한 채 히르칸이 지그시 바라보던 시선을 씽에게 돌렸다.
“둘 다 히드라 길드 초창기 멤버라고 했지?”
“초창기 멤버라고는 말 안 했지만, 그렇게 봐도 무방할 정도로 오래 있긴 했지.”
“괜찮겠어?”
“무슨 의미지?”
“나야 히드라 길드 도움을 받으면 나쁠 건 없지만, 그쪽은 문제가 있을 것 같은데? 길드 허락을 받고 온 건 아니잖아?”
히르칸에게는 씽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이 둘 사이에는 히드라 길드라는 껄끄러운 장애물이 존재한다.
일단 히르칸 입장에서는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에 대한 단서가 히드라 길드에 들어간다는 게 탐탁지 않다. 물론 이 부분은 기브 앤 테이크로 넘어갈 수 있다. 이 난제를 쉽게 뚫을 수 있는데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각오는 충분하다.
오히려 골치 아픈 건 씽의 입장이다. 히드라 길드에 통보 없이 하회탈을 도와주는 건 씽은 물론 남은 둘에게 결코 작지 않은 리스크를 강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씽은 명쾌하게 답을 내렸다.
“길드 허락은 상관없어. 아니다 싶으면 나오면 되니까. 어차피 이제까지 히드라 길드 도움을 받은 적도 없고. 이 둘 역시 마찬가지. 우리가 할 건, 필요에 따라서 히드라 길드에 우리가 진행 중인 퀘스트 정보를 주는 것 뿐.”
너무나도 명쾌한 대답, 게임을 게임으로 보기에 쉽게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길드 허락보다는 이 둘의 허락이 중요하지. 이 둘하고 난 일종의 운명공동체다. 퀘스트 공동체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그만큼 이 둘에게 받은 도움이 적지 않아.”
“아닙니다. 우리가 더 도움을 많이 받았죠.”
“엘프 퀘스트는 씽 오빠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죠!”
그 둘이 부끄러운 듯 동시에 말을 내뱉고, 말소리가 겹치자 서로를 노려봤다.
그 둘이 눈싸움을 하는 사이 씽이 말을 마무리 지었다.
“이런 이유로 이 둘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 둘이 이번 퀘스트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널 도울 수 없다.”
돕는다.
그 단어에 히르칸은 입가에 제멋대로 지어지려는 쓴웃음을 간신히 삼켰다.
‘여전히 낭만적이군.’
도와준다.
참으로 듣기 쉬운 말이지만, 히르칸의 게임 플레이 속에서 그런 말을 들은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기브 앤 테이크, 언제나 거래였으니까. 히르칸에게 있어서 도와준다는 말은, 언젠가 도움을 줘야 한다는 걸 강요받는 것과 같았다.
“결정적으로 지금 네가 진행 중인 퀘스트가 우리가 진행 중인 퀘스트와 얽혀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고, 그렇기에 더더욱 나 혼자 결정할 수는 없다. 지금 진행 중인 퀘스트는 우리가 진행 중인 퀘스트이니까. 우리가.”
이 대목에서 히르칸은 감상에 빠지려는 자신을 감상의 구덩이에서 끄집어냈다.
고맙다.
도와준다는 말을 해주는 것도, 아니다 싶으면 히드라 길드를 그냥 나오겠다는 말도, 충분히 고맙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히르칸은 씽처럼 게임을 게임으로 볼 수 있는 게이머가 아니다.
“좋아, 그럼 확실히 선을 긋지. 내가 필요한 건 레드 엘프 마을에 들어가는 것. 거기까지 서로 협력하기로.”
히르칸이 이번 일을 거래로 만들었다.
씽은 쓴웃음을 짧게 짓고, 지웠다.
“그럼 정식으로 인사하지. 요조리와 조바. 크루세이더와 마검사로 표현하면 표현은 충분하겠지. 레벨은 조바가 210레벨로 가장 높고 내가 207레벨, 요조리가 206레벨이다. 이쪽은 하회탈. 유명인이니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겠지?”
그 말에 그 둘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무렴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런데 정말 초면에는 송구스럽습니다만 인증샷 한 장만 찍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 저도 한 장만 부탁드릴게요. 물론 이 녀석하고 같이 나오는 건 사양하겠어요.”
“나도 너랑 같이 나오기 싫거든?”
“얘는 무시하세요.”
“아니, 널 무시해야지. 이 빌어먹을 크루세이더야! 하회탈 님은 위대한 리치라고! 너랑 상극이야, 이 변태년아!”
“뭐래? 얘가 좀 시끄럽죠?”
주절주절.
그 둘을 바라보던 히르칸이 씽을 바라봤고, 씽의 눈썹이 어깨처럼 으쓱, 움직였다.
결코 앞날이 조용할 것 같진 않았다.
5.
“레드 엘프에 대한 이야기는 암흑대륙에 오기 전부터 단서가 있었어요.”
히르칸과 씽 패밀리가 손을 잡는 순간 이루어진 건, 퀘스트 정보 교환을 위한 브리핑이었다.
“최초로 언급된 건 160레벨 퀘스트인 바리 왕국의 후예 편에서 나와요. 바리 왕국이란 오래전······ 지금 세계관 내용으로 본다면 폐허 왕국이라고 할 수 있죠. 여하튼 그때 존재했던 엘프들의 왕국으로, 그곳에는 대륙 모든 엘프들이 그 왕국의 국민이었다고 하네요.”
“좀 더 자세히 들어가면, 바리 왕국의 후예 편을 완료하는 순간 유므 부족과 친밀도가 맥시멈이 됩니다. 그 혜택으로 그들이 수호하는 기록 나무에 들어갈 수 있죠. 기록 나무, 이게 기가 막힙니다. 기록하는 나무에 무언가를 기록해두면, 나중에 그 기록 나무의 씨앗을
다른 곳에 심고, 그 나무가 자라나면 기록 나무에 기록했던 내용이 새로운 나무의 잎사귀에 그대로 적힙니다. 살아 숨 쉬는 도서관인 셈이죠. 진짜 전 그거 보고 감동했습니다.”
“검은 난쟁이가 그들과 맞서 싸울 창과 방패를 만들 것이며, 붉은 요정이 그들을 해할 무기를 숨길 것이다. 훗날 그 창과 방패를 든 인간이 그들의 저주를 뚫고, 그들의 심장에 창을 찌를 것이다!”
“어쭈? 그걸 다 외웠네?”
“너보다 머리가 좋거든.”
“조금 전에 찍어둔 사진 보고 달달 외운 주제에 허세가 심하네.”
삽시간에 삼천포로 빠진 브리핑의 마무리는 당연히 씽의 몫이었다.
“내용 자체는 직관적이지. 결국 정리하면, 레드 엘프 부족은 강력한 무기를 보관하는 역할이고, 그 역할은 폐허 왕국이 폐허가 되기 전부터 이루어졌겠지. 여기서 하회탈, 네가 받은 엘프의 유물 퀘스트는 당연히 바리 왕국의 유물을 말할 테고.”
이야기를 듣던 히르칸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진짜 나 혼자 했으면 단서도 몰랐겠네.’
바리 왕국의 유물이라니? 히르칸이 모르는 내용이다.
“골치 아프겠군. 그럼 이제부터 바리 왕국의 유물을 찾기 위한 퀘스트를 진행해야 한다는 건데······.”
그나마 이렇게라도 단서를 잡은 게 다행일 정도. 이게 아니었다면 게임 도중에 다시하기 버튼을 눌렀어야 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가 진행 중인 퀘스트가 바로 바리 왕국의 유물을 찾는 퀘스트이지. 그리고 단서를 찾았다.”
“뭐?”
씽의 말에 히르칸이 기겁했다.
“정말이야?”
설마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풀릴 줄이야?
“북쪽이다.”
말과 함께 씽이 고개를 돌려 요조리를 바라보자, 그녀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꺼낸 건 보석으로 만든 소라였다.
히르칸의 눈빛이 달라졌다.
‘벌써 보석소라가 나왔어?’
소라는 폐허 왕국 편에서 유저들의 퀘스트 수행을 돕는 핵심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라는 만들어진 재질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가장 흔한 건 당연히 목각소라다. 폐허 왕국 관련 퀘스트를 하는 유저들은 허리춤에 목각소라 두세 개는 당연히 달고 다니고, 심한 경우에는 목각소라 열댓 개를 허리에 가지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 그 위가 금각소라,
마지막이 바로 보석소라다. 보석소라 다음은 없다.
‘미치겠군.’
히르칸은 여기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게임 진행이 빠르다는 건 알았지만, 이제까지 히르칸이 알고 있는 것과는 너무 속도가 달랐다. 아니, 속도가 달라진 건 아니다. 거리가 짧아졌을 뿐.
물론 히르칸은 그 사실에 의문을 길게 가지지 않았다.
‘그 대단하신 인공지능이 알아서 잘했겠지.’
의문을 가진다고 해서 그 의문에 해소될 일은 없으니까. 히르칸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사내다.
중요한 건 먹잇감이 눈에 보인다는 점.
“문제는 우리가 북쪽 지역으로 갈 수가 없다는 것. 일단 히드라 길드의 영역이 아닐뿐더러, 현재 북쪽 지역은 하이우드 숲 너머로는 탐색 자체도 거의 포기한 형세지.”
씽의 말에 히르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적색 사막까지는 쾌적한 운행을 보장하지. 돈 주고도 못 탈 버스를 태워주겠어.”
기브 앤 테이크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6.
헤비빈은 영상을 보고 있었다.
퍼엉, 퍼엉!
영상 속에서 희귀 보스 몬스터인 블랙 트리는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폭발을 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트리의 악몽, 하회탈의 유료 영상 데뷔작으로 현재 구매자수가 2백만 명을 돌파하면서, 워로드 팬들 사이에서는 이제는 고전 명작으로 평가받는 영상이기도 했다. 온라인 세상에서 1년이란 시간은 아주 까마득한 시간이니까.
헤비빈은 이 영상에 대해 몇 가지 추억······ 아니, 추억이라고 부르기는 힘든 기억이 얽혀 있었다.
‘분명해. 이 영상에 간간이 나오는 건 핏불이 맞아.’
이 영상이 찍힐 무렵, 빅스마일 길드는 분위기 반전을 위해 파이터즈 길드와의 전쟁을 준비했었고 그 구실로 핏불 사냥에 나섰다. 그 임무를 아폴로가 맡았었고, 동시에 그 일을 승인하고 기획했던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헤비빈이었다.
‘이 영상 직후 핏불 사냥에 나섰는데······ 실패했지.’
그런데 도중에 문제가 생겼다. 방해꾼, 하회탈이라는 방해꾼이 등장은 감히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생각해보면 그냥 깽판이라고 보긴 힘들었지.’
그 당시에는 하회탈이 빅스마일을 상대로 그냥 깽판을 친 것으로 생각했다. 하회탈과 빅스마일 그리고 아폴로 사이의 얽힌 관계는 좋지 못했으니까. 그때 그들의 관계를 고려하면, 서로를 향해 아무런 이유 없이 칼질을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면, 그 결과로 핏불이 목숨을 구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핏불과 하회탈 사이에 끈이 없었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헤비빈은 본격적으로 조사를 했다. 핏불과 하회탈, 둘을 같이 검색해봤다. 예상보다 그 둘 사이의 친밀함을 예상할 수 있는 정보가 많이 나왔다.
‘히드라 길드는 관계없어. 이 둘 관계는 파이터즈 길드 시절 때부터고, 파이터즈 길드 내에서 핏불은 그냥 이름만 올려준 길드원이었으니까. 파이터즈 길드와 하회탈도 접점이 없어. 있다면 파이터즈 길드는 진작에 30대 길드가 됐겠지.’
그리고 이런저런 상황들을 배제하고 헤비빈이 내린 결론.
개인적인 친분이다. 개인적인 친분이 하회탈과 핏불 사이에 있다.
‘핏불을 찌르면 하회탈이 나온다.’
당연히 핏불을 빅스마일 길드가 공격한다면, 하회탈은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일 것이다.
‘······같은 건 일차원적인 생각이지.’
하지만 헤비빈이 노리는 건 그 반응이 아니었다.
‘핏불을 찌르면 가장 먼저 발끈하는 건 히드라 길드지.’
히드라 길드가 하회탈보다 먼저 움직일 것이다. 이제 핏불은 히드라 길드 소속이니까.
‘최고군.’
그게 헤비빈이 노리는 바였다.
헤비빈, 그는 현재 빅스마일 길드의 부길드 마스터다. 결코 낮은 자리가 아니다. 예전 빅스마일이 길드 마스터 없이 간부들로만 구성했을 때보다는 직책이 높은 셈이다. 하지만 가진 권력은 예전에 비하면 조촐한 수준이 아니라, 지금 그는 아예 길드 내에서 발언권조차
없었다.
빅스마일 길드는 사실상 싱글레와 부르크, 둘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 부길드 마스터 중 한 명인 아폴로는 그 둘의 심복이고. 심지어 길드마스터인 부르크보다 싱글레를 위한 길드나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아폴로조차 중요한 논의를 할 때 부르크가 아닌 싱글레에게
먼저 연락을 할 정도일까?
애초에 헤비빈이 부길드 마스터가 된 것 자체도 그가 예뻐서 그런 게 아니었다. 빅스마일 길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부르크와 가장 큰 대립각을 세운 헤비빈에게 나름의 대우를 해주지 않을 경우 생기는 폐해를 막기 위해서였다. 무작정 헤비빈을 배척한다면, 헤비빈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나올 테니까.
당연히 지금 체제가 갖춰진 이후 그 셋은 야합을 통해 헤비빈의 세력을 야금야금 잘라냈다.
더 나아가 파이브 스타가 등장하면서 헤비빈의 발언권은 더더욱 약해졌다. 빅스마일 길드의 의견보다 파이브 스타의 의견이 더 중요해졌다. 그 다섯 길드가 합의를 내린 일에 길드 내에서도 보잘것없는 헤비빈이 무언가를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 정도까지 좋은 구실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 정말 최고군.’
그래서 준비했다.
헤비빈은 자신의 처지를 반전시킬 속셈이었다. 그리고 반전을 위해서 필요한 게 판을 흔드는 일이었다. 지금 판으로는 뭘 해도 안 된다. 균열이 생겨야 판을 헤집고 나오든, 쪼개진 판의 일부를 뒤집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아폴로만 이용하면 돼. 녀석이 핏불을 잡으면, 알아서 히드라 길드든 하회탈이든 우리랑 붙어주겠지.’
히드라 길드와 하회탈 정도라면 균열을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는 경쟁 상대다. 물론 그 과정에서 빅스마일 길드가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지만, 그건 헤비빈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그 경우 결국 책임을 지는 건 기존에 권력을 쥐고 있던 높으신 분들이 될 테니까.
분명한 건 헤비빈의 처지가 지금보다 나빠질 건 없다는 점이다. 헤비빈은 이미 밑바닥에 있으니까.
‘그동안 날 무시한 대가,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생각을 마친 헤비빈이 아폴로에게 연락을 취했다.
< 60화. 적색 사막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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