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보칸의 흔적 (2). >
5.
[퀘스트 ‘보칸의 흔적’이 시작됩니다.]
아힘브리가 보낸 편지를 전부 읽는 순간, 히르칸의 귓가에는 시스템 알림이 생겼고, 퀘스트 목록에는 새로운 퀘스트 목록이 떴다. 히르칸이 곧바로 퀘스트 내용을 확인했다.
[보칸의 흔적]
- 퀘스트 등급 : 유니크
- 퀘스트 수행 가능 레벨 : 200레벨 이상
- 퀘스트 내용 : 대마법사 보칸의 흔적이 발견됐다. 현재 하르드 요새 유적 마을의 NPC 디웅이 그 흔적을 보관 중이다. 그를 찾아가 보칸의 흔적을 찾고, 그 흔적을 조사하자.
- 퀘스트 보상 : 스킬북.
‘보칸이라······.’
아힘브리의 편지는 굉장히 장황했다. 주절주절, 너무 글자가 많아서 짜증이 날 정도.
하지만 그 안의 내용은 무척 단순했다.
자신의 스승, 대마법사 보칸의 흔적이 암흑대륙에서 발견되었으니, 자신을 대신해 대마법사 보칸의 흔적을 찾아달라는 것.
그 보상이 스킬북이다.
지금 시점에서 200레벨 이상의 스킬이 담긴 스킬북은 마른 하늘의 돈벼락과 다를 바 없다.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한다. 당연히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보칸이란 이름만 아니
었다면, 히르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퀘스트 수행에 목숨을 걸었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보칸이란 단어가 히르칸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얘가 무슨 역할이었더라?’
대마법사 보칸.
아힘브리를 포함해 일곱 제자를 둔 NPC로 워로드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간간이 그 이름을 들을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정보를 조합하면, 현재 워로드란 세계관에 찾아온 거대한 위협을 미리 인지하고, 그 위협에 맞서 싸우는 존재라는 것 역시 알 수 있다. 배덕의 왕자의 이름에
얽힌 스토리에서 그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배경 설정에 따르면 배덕의 왕자의 이름을 지어준 이가 대마법사 보칸이며, 보칸은 배덕의 왕자에게 세상에 찾아올 악몽을
몰아내는 순교자들과 함께 하라는 의미에서 딘이란 이름을 지어줬다.
이 정도면 넌지시 가르쳐준 수준이 아니라, 그냥 보칸의 존재 의의를 대놓고 알려줬다고 봐도 무방하다.
히르칸도 이 정도는 알고 있었다.
‘보칸이 폐허 왕국 편에 등장했었나?’
그러나 히르칸이 알고 있는 폐허 왕국 편에서 대마법사 보칸이 언급된 적은 없었다.
히르칸은 과거로 돌아오기 전 폐허 왕국 편 당시 메인 시나리오를 주도할 정도는 아니었어도, 최소한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를 얻으면 진행할 만한 저력과 전력을 가지고 있었
다. 당시 하회탈 길드는 이미 궤도에 올라있던 상황이었고, 때문에 하회탈 길드를 이끌고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에 적잖게 도전하기도 했다.
당연히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에 대한 관심이 앞선 두 개의 퀘스트 때보다 훨씬 더 높았다. 논문이나 다름없는 수준의 퀘스트 정보글을 읽고, 중요한 핵심 단어들, 용어들을 영
어 단어 암기하듯 암기했으며, 30대 길드의 메인 시나리오 관련 방송을 인터넷 강의 듣듯 집중해서 봤다.
그런 히르칸의 기억 속 어디에도 폐허 왕국과 대마법사 보칸의 접점은 없었다.
‘아힘브리가 스킬북을 주는 퀘스트 몇 개가 폐허 왕국 편 퀘스트와 연결되어 있었지만, 보칸이 직접 언급되는 퀘스트는 적어도 내 기억 속에는 없어.’
물론 퀘스트 루트는 진작에 달라졌다. 폐허 왕국 편에서 등장했었어야 할 요소들이 그 전에 등장했다. 벌써 신화급 고대의 힘이 등장했고, 아누가스도 등장했다.
간단하게 보면 퀘스트가 앞당겨졌다. 좀 더 나중에 나와야 할 떡밥이 지금 나왔다고 보면 된다.
문제는 히르칸이 알고 있는 폐허 왕국 편의 끝에도 대마법사 보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건 곧 그보다 더 뒤에 있던 게 등장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설마 벌써 이 시점에서 용들이 나오는 건 아니겠지?’
퀘스트 창을 바라보는 히르칸의 표정이 좀 더 굳어졌다.
6.
“정말 고맙습니다.”
“예.”
“끝내줬습니다.”
“예, 예.”
“이렇게 만나서 영광이었습니다!”
“예, 예, 예.”
파티 하나가 어수선한 분위기를 풍기며 부두쿠 터널 출구를 통해 나오고 있었다.
부두쿠 터널에서 유저들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못해 지겨울 법한 일이다. 때문에 부두쿠 터널 근처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동료를 기다리는 이들은 자기들 동료가 아니면 터널
에서 누가 나오든 신경을 쓰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곁눈질 정도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관심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지금 등장한 파티는 달랐다. 굉장히 들뜬 분위기의 어수선함이 주변의 시선을 끌었다.
그렇게 파티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볼 수 있었다.
“하회탈인가?”
“하회탈이잖아?”
하회탈을.
유저, 그 하나의 개체에 서열을 정한다면 워로드 최고 그리고 최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유저를.
좌중의 분위기 역시 파티의 분위기에 전염된 듯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히르칸은 자신과 함께 부두쿠 터널을 지나온 유저들의 요구에 응했다.
“저기, 그런데 인증샷 한 장만 같이 찍어도 될까요?”
“저도 한 장만 부탁합니다.”
“좋습니다. 대신 어깨에는 손 올리지 마세요.”
“예?”
“장난입니다. 김치로 해드릴까요, 치즈로 해드릴까요?”
“치즈 부탁합니다.”
“참고로 올리고 매너 없었다고 욕하지 마세요.”
“아무렴요.”
“매너 정말 좋으시던데요!”
히르칸의 허락에 여섯 명의 유저들이 달라붙어 하나하나 히르칸과 같이 인증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히르칸은 그 과정에 나름 V자도 해주면서 보답을 해줬다.
그 모습을 몇몇 이들은 별꼴이라는 듯이, 몇몇 이들은 부럽다는 듯이 바라봤다.
히르칸, 우르갈 대산맥을 1분 1초라도 더 빨리 넘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꼽사리였다. 부두쿠 터널 입장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파티 중 한 자리 남은 파티에 끼어들었
다.
어려울 건 없었다. 다른 유저라면 이런 일이 불가능하겠지만, 무려 하회탈 아닌가? 경험치는 경험치대로, 추억은 추억대로, 꿀은 꿀대로 빨 수 있는 이 기회를 마다할 파티는 없
었다.
그렇게 애프터 서비스까지 마친 히르칸은 곧바로 우르갈 대산맥의 정상으로 향했다.
가는 길목에는 적지 않은 유저들이 있었고, 히르칸을 발견한 그들은 모두가 어수선한 분위기를 풍겼다. 개중에는 히르칸에게 적의 같은 걸 보이는 이도 있었지만, 그걸 행동에
옮기는 이는 없었다
히르칸은 그런 상황에 만족했다.
‘이래서 인기가 있으면 손해 볼 게 없다니까.’
유명해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히르칸은 아니다. 인기가 싫었다면 그가 지금 이렇게 게임을 하는 일 자체가 없었을 거다. 히르칸은 인기 있는 게 좋다. 인기 덕을
보는 건 더더욱 좋다.
히르칸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우르갈 대산맥을 넘었다.
그리고 다시 마주하게 된 암흑대륙, 그 끝을 알 수 없는 지평선의 세계를 바라보는 순간 미소를 지웠다.
히르칸이 스킬 습득을 위해 클래스 타워를 다녀오는 동안에도 암흑대륙의 정세는 움직이고 있었다.
특히 하르드 유적 요새 마을이란 거점 지역이 생긴 이후 유저들이 몸을 사리지 않기 시작했다. 몸을 사리지 않는 유저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게임개발자 입장에서는 소름이
돋을 만큼 무시무시하다. 때때로 말도 안 되는 결과도 만들어낼 정도다.
지금 기세가 그랬다.
유저들은 우르갈 대산맥을 시작점으로 삼은 채 북쪽과 남쪽, 동쪽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었다.
폐허 왕국의 흔적을, 유적을 더듬으며 폐허 왕국이 몰락한 비밀을 알아내고, 폐허 왕국이 남긴 힘으로 자기 자신들을 보다 강한 존재로 탈바꿈하는 중이었다.
‘우레사냥꾼은 동쪽으로.’
개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결과물을 보여주는 건, 우레사냥꾼 길드였다
이스트 러시!
우레사냥꾼 길드는 모은 전력 전부를 이용해, 동쪽으로 끝을 모르는 질주를 시작했다.
말이 질주지, 그건 폭주에 가까웠다.
‘역시 채설연은 미친년이 맞아.’
개중에서도 채설연의 활약에는 광기마저 있었다. 불길의 힘을 채설연은 완벽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우레여왕이란 별명을 과연 더 이상 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
또한 우레사냥꾼 길드는 암흑대륙에서 활동하는 유저들 중에서 가장 목숨을 사리지 않는 자들이었다. 라이브 방송을 보면, 유저 두세 명은 당연하다는 듯이 죽는다.
죽지만, 동시에 그 목숨값 이상의 결과물을 얻어냈다. 울브드리 숲의 발로스 유적을 발견한 이후 우레사냥꾼 길드는 2개의 유적을 더 발견했다. 3개의 유적을 최초 발견한 것
이다. 보통 유적 하나를 최초로 발견하면 초월급 고대의 힘을 3개에서 5개 정도 얻는다. 여기에 전설급 고대의 힘이 하나 이상은 나왔을 것이다.
갑자기 히르칸을 비롯해 신화급 고대의 힘이 풀려서 그렇지, 전설급만 되어도 그 효용성은 엄청나다. 즉, 최초로 유적을 발견한다는 건 길드 자체의 전력을 급상승시킬 가장 확
실한 방법이다.
‘파스타 놈들은 북쪽과 남쪽으로.’
파이브 스타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하회탈과 우레사냥꾼 길드에게 한 방 먹고 꼴이 말이 아니게 됐고, 체면은 바닥에 떨어졌지만 반대로 그들이 입은 피해는 충분히 복구 가능한 수준이었고, 결정적으로 암흑대
륙에서 가장 큰 전력이란 사실은 지금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런 전력을 앞세워 파이브 스타는 북쪽과 남쪽으로 영역을 넓히는 중이었다. 4개의 유적을 발견하는 성과를 얻은 것이 그들이 나름 현명한 선택과 행동을 한다는 증거였다.
‘포커 팀 애들이 보통이 아니긴 해.’
그 중심에는 역시 포커 팀이 있었다. 포커 팀의 저력은 강력한 몬스터를 상대로 여과 없이 드러났다.
‘어디를 가든 불청객 대우를 받겠군.’
이제부터 히르칸은 그런 그들이 활약하는 곳에 몸을 던져야 한다.
하르드 요새 유적에서 NPC를 통해 대마법사 보칸의 단서를 얻는다면, 필시 그 세 곳 중 한 곳을 가야 할 테니까.
‘좋아.’
히르칸 이 순간 굳은 표정을 풀었다. 억지로라도 풀었다. 울상을 짓는 건 그가 아니라, 그를 상대하게 될 자들이 될 테니까. 그렇게 되게 만들 생각이었으니까.
7.
하회탈을 보는 순간 유저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어? 하회탈이다!”
하나는 놀라는 것.
“진짜 하회탈 맞아?”
하나는 의심하는 것.
물론 하르드 요새, 암흑대륙의 거점 지역 정도 되는 곳에서는 의심보다는 놀라는 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 2차 승급마저 마친 유저들이 암흑대륙에 와서 하회탈을 뒤집어쓰는
장난을 칠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게 이유였다.
“와, 이거 분위기 죽이겠네.”
“한판 붙나?”
“붙을 이유가 없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지. 어쨌거나 하회탈이 30대 길드와 손을 잡은 건 아니니까.”
하르드 요새 유적 마을에 히르칸이 등장했을 때 유저들은 그가 진짜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기대했다.
‘히드라 길드가 여기에 있을 줄이야.’
하회탈보다 조금 일찍 하르드 요새 유적 마을에 등장하며 유저들을 놀라게 한 히드라 길드와 하회탈, 그 둘이 만났을 때 어떤 식으로든 일어날 화학반응을!
물론 히르칸은 굳이 히드라 길드와 만나고 싶지 않았다. 배덕의 왕자 편 이후로 이렇다 할 접점도 없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친하다기보다는 얼어붙
은 땅에서 만난 이후 히드라 길드와의 관계는 안 좋은 쪽에 더 가까워졌다.
반대로 히드라 길드 쪽에서 히르칸을 찾아왔다.
“얼어붙은 땅에서 보고, 처음 보는군.”
소행크와 나탈, 그 둘이 투구를 벗어 얼굴을 드러낸 채 하회탈을 직접 찾아왔다. 그 둘과 한 명 더, 셋뿐이었다. 그 외의 나머지 히드라 길드의 길드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하회탈, 너와 싸울 생각은 없다! 그런 의미를 담은 무언의 표현.
“용건은?”
히르칸은 그들의 등장에 반가운 기색 같은 건 보여주지 않았다.
‘응?’
그런 히르칸의 하회탈 속 눈매가 가늘어졌다. 익숙한 나탈과 소행크의 얼굴, 그 둘 사이에 있는 얼굴이 어쩐지 눈에 익었다.
이윽고 히르칸이 떠올렸다.
“키요테?”
“와, 기억해주시네.”
키요테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했다. 심지어 키요테가 나탈과 소행크를 제치고 히르칸 앞에 섰다.
“예, 키요테입니다.”
“히드라 길드 소속?”
“예, 그보다 도전 기회 한 번 남아있는 거 기억하십니까?”
히르칸은 대답 대신 입꼬리 한쪽을 올렸다. 모를 리 없다. 당시에는 굉장히 비싸던 오크 히어로의 검을 받았지 않은가? 그때 그 검의 도움을 참 많이 받았다.
“그래서 지금 도전권을 쓰려고?”
“아닙니다. 그 전에 먼저 이겨야 할 상대가 있습니다. 아, 그리고 그때 배운 건 잘 써먹고 있습니다.”
키요테는 말과 함께 팔을 휙! 움직였다. 손에 쥔 무언가를 뿌리는 듯한 몸짓이었다.
모래 뿌리기.
요즘은 굳이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지만, 예전에 히르칸이 PK나 PVP를 할 때 잘 써먹던 수법이다.
사실 한 번 당하면 악몽으로 남기지, 그걸 본인이 직접 써먹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히르칸은 키요테가 여러모로 신선했다.
소행크는 그런 키요테를 보며 즐거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회탈 앞에서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용기와 근성은 노력이나 시간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반대로 나탈의 표정은 굉장히 일그러졌다. 하회탈은 특급 관리 대상이다. 대화 하나도 섣불리 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도전을 한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그 도전이 빌미와 구
실이 되어서 하회탈과 전쟁이라도 벌이는 날에는 끝장이다.
결국 나탈이 키요테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키요테 씨, 우리 조금 전 한 약속은 지킵시다.”
“아!”
그제야 키요테가 뒤로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정말 하회탈이 제 이름을 기억해줄 줄은 몰랐습니다.”
원래 키요테는 이곳에 올 예정이 없었다. 소행크와 나탈만 하회탈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자 했다. 그런데 키요테가 끼어들었다. 자신이 하회탈과 인연이 있다고, 보통 인연이
아니라고 말했다. 하회탈에게 당했고, 도전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나탈은 말했다. 하회탈이 당신을 못 알아보면 입 다물고 있으라고. 혹여 얼굴을 안다고 하더라도 긴 말 하지 말고 그냥 인사만 나누라고.
나탈이 보기에 인사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키요테가 물러났고, 나탈이 하회탈 앞에 섰다. 히르칸이 그런 나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얼어붙은 땅에서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지만, 그때 품은 앙심이 있다면 여기서 털고 갈까?”
“신사협정을 맺읍시다.”
나탈이 히르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 말을 잽싸게 뱉었다.
“손을 잡을 생각은 없는데.”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 둘이 물어뜯어서 다른 경쟁자들을 즐겁게 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히르칸은 대답 대신 소행크를 바라봤다. 소행크는 히르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올 테면 와라!
‘역시 소문대로 칠흑을 손에 넣은 모양이군.’
그 자신감의 근원이 아이템이나 레벨일 리 없다. 실력에 대한 자신감일 리는 더더욱 없다.
그 외의 힘이 있다는 의미.
‘신화급 고대의 힘을 퍼주네, 퍼줘. 원래 용의 군대를 처리할 때 쓰라고 주는 힘인데 개나 소나······.’
히르칸이 속으로 이죽거리는 와중에 머릿속 저울은 잽싸게 저울질을 마쳤다.
이 신사협정은 히르칸이 바라던 일이었다. 히르칸 역시 다른 누구는 몰라도 신화급 고대의 힘을 가진 인물을 적으로 두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지고 들어가는 거다.
“좋아. 괜히 개싸움을 벌일 필요는 없지. 그래서 어디로 갈 생각이지? 북쪽? 남쪽? 아니면 동쪽?”
나탈은 그 말에 히르칸을 지그시 바라봤다.
‘동선이 겹치면 신사협정 같은 건 무시하겠다, 이건가?’
나탈은 지금 히르칸의 말이 경고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손을 잡고 싶으면 히드라 길드가 대가를 지불하라는 의미의 경고.
히드라 길드의 명성을 생각하면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그러는 당신은 어느 쪽으로 갑니까?”
“그건 퀘스트를 받은 후에야 알 것 같은데, 말해주기 싫으면 말해주지 않아도 좋아.”
철컥!
말로는 괜찮다고 하면서, 히르칸은 제 허리춤에 있는 칼집을 건드렸다. 당연히 협박이다. 말해주기 싫으면 칼소리를 듣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의 협박.
다른 누가, 그것도 히드라 길드를 상대로 이런 짓을 하면 씨알도 먹힐 리 없지만, 하회탈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젠장, 완전 기가 살았군. 하긴, 혼자서 그 정도면······ 나 같아도 눈에 뵈는 게 없겠지.’
나탈이 고민에 빠졌다.
“그건 비밀이라서 말해주기 힘들겠군.”
그 고민을 해결한 건 이제까지 입을 열지 않고 있었던 소행크였다.
“우리 히드라 길드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이해해줬으면 좋겠군. 그게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말해주기 싫으면 말라고. 누가 보면 내가 협박이라도 한 줄 알겠네.”
소행크의 등장에 하회탈은 어깨를 으쓱한 뒤 등을 돌렸다. 더 이상 대화는 없었다.
하회탈은 자리를 떠났고, 나탈은 소행크에게 말했다.
“덕분에 숨통이 트였습니다.”
“이게 내 역할이지. 그래도 어쨌거나 나름 확신을 가져도 좋겠군. 하회탈의 아군은 암흑대륙에 없어.”
나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하회탈을 만나러 온 건 두 가지를 위해서였다. 하나는 말한 것처럼 신사협정, 괜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하회탈의 현재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하회탈에게는 배후가 있다. 그런 배후가 암흑대륙에서 하회탈을 도와줄 만큼 적극적인 활동과 세력을 가지고 있다면, 하회탈이 굳이 아쉬운 모습을 보일 리 없다.
그러나 최근 파이브 스타를 상대로 우레사냥꾼 길드의 도움을 받은 걸 비롯해 하회탈의 행보를 보면, 놀랍도록 대단하지만 반대로 어떻게 보면 다른 무언가의 도움을 기대하
기보다는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해내고자 하는 성향이 컸다.
물론 오늘 이 짧은 대화로 백퍼센트 확신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 확신을 가지기 전에 하는 게 의심이란 놈이다. 의심을 하면서 증거가 모이면 그 순간 의심이 확
신이 되는 법.
그런 그 둘의 대화를 듣던 키요테가 한마디 했다.
“그런데 제가 하회탈에게 도전해서 이기면, 제 직급은 어떻게 됩니까? 열 번째 머리가 될 수 있습니까?”
진지한 대화를 나누던 소행크와 나탈을 단숨에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어버리는 한마디였다.
< 57화. 보칸의 흔적 (2).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