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161화 (161/192)

< 55화. 잡거나, 잡히거나 (4). >

10.

보고가 왔다.

“뭐라고?”

- 하르드 요새에서 전투가 치러지는 모양입니다. 누군가 아누가스를 건드린 모양입니다.

보고를 받는 순간 싱글레는 누구? 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하르드 요새 유적, 아누가스란 맹수 중의 맹수가 있는 우리에 제 발로 걸어가는 자는 둘 중 하나, 바보 아니면 맹수를 잡고자 하는 전사밖에 없었으니까.

바보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고, 전사라면 후보는 오로지 단 둘 밖에 없다.

우레사냥꾼 길드와 하회탈!

누구라는 표현을 쓸 이유는 없다. 그리고 그 둘 중 하나라면, 누구든 좋았다.

‘알아서 맹수 우리에 가줬으면, 그만한 대우를 해줘야지!’

이미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강력한 마법 폭격을 가능케 해줄 마법 전력을 대기 시켜두고 있었다.

신호 한 번이면, 지금 파스타라 불리는 5개 길드에 소속된 오백의 마법사들과 그들을 지키는 오백의 호위 병력과 함께 하르드 요새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아누가스의 특수능력이 통하지 않는 거리에서, 마법사들이 각자 한 번씩 마법을 쓰면 된다. 그러면 하르드 요새는 깔끔하게 정리가 될 것이다.

물론 아누가스는 잡지 못할 것이다. 대신에 아누가스를 잡으러 간 놈은 확실하게 잡을 수 있을 터.

싱글레는 곧바로 보이스톡 채널을 바꿨다.

“핸즈 길드.”

- 핸즈 길드, 말해.

“아무래도 아누가스 레이드를 시도하는 모양이야.”

- 기어코 먼저 움직이는군. 미친놈들.

- 아니지. 미친놈들이니까 일을 여기까지 벌인 거지. 애초에 하회탈이나 우레사냥꾼이 정상이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 거야.

- 그도 그렇군. 정상이면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좋아, 준비하지.

- 이쪽도 준비하겠어.

“이쪽도 준비하지.”

싱글레도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11.

처벅처벅······.

히르칸은 갑옷을 입은 채 걷고 있었다. 그런 그가 입은 갑옷은 평소 그가 입던 다크 스폿 세트가 아니었다.

가죽 갑옷이었다. 마치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히어로 슈트처럼 몸에 적당히 달라붙는 그 가죽 갑옷은 히르칸이 내디디는 발걸음에 따라, 주변 환경에 카멜레온처럼 자신의 색

을 맞추고 있었다.

숲의 추적자 세트.

워로드에서 가장 빠른 자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된 방어구를 입고 등장한 히르칸의 손에는 츠릉츠릉, 크라잉 소드가 울음을 내뱉고 있었다.

그런 히르칸의 발걸음이 멈춘 건, 누군가가 헤집은 흔적이 역력한 돌무덤 앞이었다. 히르칸이 무너뜨린 돌무덤은 그때로부터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헤집어진 그대로 존

재하고 있었다.

리셋이 되지 않는 지역, 필시 상징성이 부여되는 장소일 터.

‘역시 여기군.’

덕분에 히르칸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쿠궁!

그 확신에 대답하듯, 굉음과 함께 히르칸의 뒤편에서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때와 똑같았다.

갈라진 땅 사이로 네 개의 팔을 가진 거인이 튀어나왔다.

아누가스!

네 팔의 거인은 등장하는 순간 두 눈을 번쩍 뜨고 있었다.

[아누가스가 눈을 뜹니다. 모든 존재의 마력을 먹어치웁니다.]

아누가스는 그 무엇보다 가장 강렬한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런 아누가스의 존재감 앞에서 히르칸은 놀라기보다는 그냥 검을 들었다.

츠릉츠릉!

아누가스를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게 된 크라잉 소드가 울음을 토해냈다. 히르칸은 그런 크라잉 소드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징징거리지 마.”

검을 향해 뱉은 말, 그러나 막상 그 말을 명심해야 하는 건 크라잉 소드가 아닌 말을 뱉은 당사자란 사실을 히르칸은 잘 알고 있었다.

‘안재현, 네가 자처한 거니까 이제 절대 징징거리지 마.’

결코 도망칠 수 없는 추격자 앞에 스스로 등장했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자처했다.

우레사냥꾼 길드와 손을 잡고 싸우면 보다 쉬운 길이 될 수 있음에도, 그 역시 거절했다.

이쯤 되면 결국 모든 건 히르칸이 자처한 셈이다. 이번 일의 결과가 악몽으로 끝나더라도, 히르칸에게 징징거릴 자격은 없었다.

물론 히르칸은 악몽을 꿀 생각이 없었다.

히르칸이 숨을 멈추고, 아누가스를 향해 달렸다. 아누가스도 달려오는 히르칸을 향해 돌진했다.

쿵쿵!

아누가스의 발소리는 육중했고.

파바밧!

히르칸의 발소리는 날렵했다.

그 두 가지 소리가 가까워졌고, 이내 교차했다.

후웅!

히르칸의 머리통을 잡으려던 아누가스의 팔은 애꿎은 허공만 쥐었다.

스윽!

히르칸이 아누가스의 허벅지를 벴다.

쿵쿵, 파바밧!

교차한 둘이 서로 지나온 길을 되짚듯 지나갔다. 히르칸이 발걸음을 멈춘 후 몸을 돌렸고, 아누가스도 육중한 몸을 멈춘 후 고개를 돌렸다. 아누가스는 히르칸을 노려봤고, 히

르칸은 아누가스의 허벅지 부근에 자신이 만들어낸 상처를 봤다.

‘딱 예상한 만큼 나오는군.’

히르칸이 다시 조금 전과 같은 자세를 잡았다. 아누가스를 향해 달려갈 준비를 했다.

‘페이즈는 3개. 레이드 예상시간은 44분 33초. 앞으로 이런 짓을 천 번쯤 하면 되겠군.’

준비를 마친 히르칸이 다시금 아누가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허락되지 않는 전투가 시작됐다.

12.

암흑대륙은 지금 유례가 없는 몬스터 풍년을 기록하는 중이었다. 암흑대륙으로 넘어오는 유저들은 꾸준한 속도로 늘어나고 있었고, 게임 시스템은 그런 유저들의 수요에 맞추

기 위해 몬스터 공급량을 조절했다. 그런데 막상 유저들은 공급된 몬스터를 처리하지 않았다. 초과 공급이 시작됐다.

그런 와중에 하르드 요새 유적 퀘스트가 발동하면서, 하르드 요새로 향하는 길목 내의 몬스터 숫자가 증가하고, 몬스터 리젠 타임이 크게 감소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누가스 감시를 위해 파이브 스타는 하르드 요새 주변에 꾸준히 유저들을 배치했다. 유저가 배치된다는 걸, 워로드 시스템은 당연히 사냥에 대한 의지

로 해석하고, 그에 맞는 대응을 했다.

이미 넘치기 직전, 표면 장력의 힘으로 물이 넘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 무대를 향해 천 명이나 되는 전력을 집어넣는 게 현명한 선택일 리 없다.

대격전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대격전 당시 몬스터들은 공성 모드라는 설정으로 굉장히 많은 허점을 노출했다. 그 허점이 아니라 몬스터들이 제멋대로 싸웠다면 대격

전의 난이도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높아졌을 것이다. 더욱이 암흑대륙의 몬스터들은 대격전 때처럼 약하지 않다. 모두가 200레벨 이상, 환상종이라는 새로운 종도 있다.

하르드 요새 폭격을 위해 이동하는 파이브 스타의 전력들이 천천히 이동하는 건 이런 이유였다.

그들은 무리하지 않았다. 몬스터를 차근차근 처리하면서 안전을 꾀한 채 움직였다. 스트라이커가 앞서 가서 방해가 될 몬스터를 미리 발견하고, 유인한 뒤, 탱커가 몬스터의 어

그로를 관리하는 상황에서 마법사와 스트라이커가 몬스터를 제거했다.

- 그야말로 지뢰 찾기네.

하르드 요새 유적 폭격 작전을 맡게 된 포커 팀의 다이아몬드 부대의 대장은 이 과정은 짤막하게 설명했다.

- 딱 맞는 말이군.

- 꼼꼼하게 가서 나쁠 건 없지.

그의 말에 핸즈 길드란 이름이 붙은 보이스톡 채널에 접속한 이들이 한마디씩 말을 던졌다.

- 가장 위험한 건 하회탈이 그때처럼 아누가스를 데리고 도망칠 경우야. 그때는 하회탈을 포기하고, 무조건 뒤로 빼.

- 맞아. 그건 명심해야 해. 손해를 입는 건 피해야 해.

- 그래도 이번에는 잡아야지. 하회탈이 언제까지 활개 치도록 놔둘 수는 없잖아? 위에서도 그 새끼 잡으라고 난리야.

- 그런 생각이 위험하다니까.

- 그보다 요즘 게임 할 맛이 나긴 하네. 요즘은 어디를 가도 얼굴을 알아본다니까.

- 조만간 나도 방송 나간다.

- 어디?

- BBC.

서로를 향한 경고, 진심 어린 조언, 간간이 나오는 신변잡기에 대한 잡담들.

그런 그들의 대화에 긴장감이 깃든 건 일순간이었다.

- 몬스터가 몰려온다!

13.

해치는 수십 마리의 몬스터들, 200레벨을 가뿐히 넘기는 괴물들과 그들을 상대하는 유저들, 그 두 무리가 만들어낸 소란을 바라보며 쯧쯧쯧쯧! 마치 약기를 연주하듯 제 혀를

찼다.

‘결국 손해 보는 장사했네.’

시르가 하회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 대가로 우레사냥꾼 길드는 하회탈의 아누가스 레이드를 방해하려는 파이브 스타의 전력을 막아야 했다.

해치가 보기에는 손해를 보는 장사였다.

‘하회탈을 향한 애정을 나한테 보여주면 안 되나? 그 정도 애정이면 내 계약기간을 2045년까지 줄여줄 수 있잖아? 아니면 차라리 둘이 사귀기라도 하든가, 그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우리가 하회탈한테 손해 보는 장사를 해야 해?’

그러나 해치는 이런 자신의 불만을 시르 앞에서 표현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해치는 이번 일이 손해 보는 일이라는 생각에 허투루 일처리를 할 생각도 없었다.

‘결국 손해를 만회하는 건 아랫사람들 몫이잖아?’

해치가 움켜쥔 주먹을 허공으로 번쩍 들자, 그의 주먹 위로 거대한 얼음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치가 난잡해진 전장을 바라보며 얼음창을 겨누었다.

발리스타.

워로드 최고의 마법 명중률을 자랑하는 그가 한쪽 눈을 감은 채, 스나이퍼가 되어 마법사들이 뭉쳐 있는 곳을 가늠했다. 가늠이 끝나는 순간, 해치가 숨을 멈췄고, 단숨에 마법

을 던졌다.

쉬익!

그가 던진 마법의 얼음창은 거대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파바박!

이윽고 허공에서 수백 개의 얼음 조각이 되었고, 화살 크기의 얼음 조각들은 뭉쳐 있는 마법사 무리를 향해 우박처럼 흩뿌려졌다.

블리자드 슈팅 스타!

190레벨 유니크 등급의 마법, 현존하는 워로드 빙속계 마법 중 가장 위력적이고, 섬뜩하고, 멋진 그 마법은, 그 마법을 동경하는 마법사들의 몸을 사정없이 뚫고, 뚫은 그들의

몸뚱이를 그대로 얼려버렸다.

해치가 그걸 보며 쯧쯧, 혀를 찼다.

‘여하튼 계약 기간만 끝나면 내가 어떻게든······.’

14.

몰려온 몬스터들이 하르드 요새 유적 폭격팀을 헤집자, 그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 에이스들이 움직였다. 에이스들의 역할은 현재 열 명 안팎으로 구성되어 이동 중인 무리들이

상대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하고, 껄끄러운 몬스터를 상대하는 일이었다.

“나머지 인원은 뒤로 후퇴해!”

“여긴 다이아몬드 부대에게 맡겨라!”

다이아몬드 부대는 그 힘든 역할 중에서도 가장 힘든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그렇기에 필연이었다.

암흑대륙에서 아누가스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장 잡기 힘든 몬스터로 분류되었던 블랙 블러드 트롤을 잡기 위해 다이아몬드가 나선 건 당연한 필연이었다.

- 마법 공격이다!

- 마법사 부대가 마법 공격에 당했어!

“젠장, 역시 누군가 몬스터를 몰고온 거군!”

- 조심해, 이런 짓을 할 곳은······.

그런 그들이 블랙 블러드 트롤과 전투를 치르는 순간, 역으로 그들을 잡기 위한 우레사냥꾼의 특공대가 등장한 것 역시 예고된 필연이었다.

“우레여왕?”

그리고 그 다이아몬드 부대를 상대하기 위한 특공대에 고대의 힘 불길을 발동한 우레여왕 시르가 포함된 것 역시 필연이었다.

“포커 팀, 요즘 명성이 하늘을 찌르는데, 허명인지 아닌지 한 번 알아보고 싶군.”

“우리는 비앤비 길드 소속이다! 지금 길드전을······.”

“시끄러!”

그리고 우레여왕 앞에서 시간을 끌기 위해 길드전을 언급하려던 다이아몬드 부대 소속 길드원의 머리에 우레공주 하희의 모닝 스타가 꽂히는 것 역시 필연이었다.

“여왕님! 그냥 부셔버려요!”

워로드의 미래를 바꿀 전투가 시작됐다.

15.

워로드에서 유저가 전투에서 최고조에 다다른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대개 15분 정도로 본다. 그 이후부터는 어떤 식으로든 집중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중요한 건 얼마나 완만하게 떨어지느냐, 집중력이 떨어지는 속도를 얼마나 잘 늦추느냐 그리고 집중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얼마나 잘 싸우느냐, 그 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39분 동안 아누가스를 상대로 단 한 번의 유효한 타격도 허락하지 않은 채 여전히 집중력 넘치는 전투를 치르는 히르칸은 박수를 받아 마땅했다.

“후우, 후우.”

지금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숨을 돌리는 히르칸이 만약 라스베이거스에서 세계적인 타이틀 매치업을 치르는 중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 경기를 보던 모든 관중이 자

리에서 일어나, 경기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박수를 쳤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히르칸의 주변에 박수를 쳐주고, 환호성을 내질러줄 관중은 없었다. 히르칸이 볼 수 있는 건, 상처투성이인 네 팔의 외눈박이 거인이 전부였다.

‘우레사냥꾼, 역시 실력은 대단해.’

그 사실에 히르칸은 만족했다.

단 한 명의 관중도 없다는 것, 그건 우레사냥꾼 길드가 정말 훌륭하게 방해꾼들을 막아준다는 의미였으니까.

물론 히르칸은 이 순간 우레사냥꾼 길드를 향해 감사의 마음을 품진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 히르칸을 서 있게 해주는 건, 그의 집중력을 날카롭게 유지시켜주는 건 우레사냥꾼 길드를 향한 증오심이었다.

‘그래도 이놈은 절대 못 줘.’

히르칸이 아누가스에게 당하는 순간, 아누가스는 우레사냥꾼 길드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거의 다 잡은 고기이니까. 그런 고기를 우레사냥꾼 길드에게 준다는 건, 히르칸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옹졸하고, 이기적이고, 우매하다고 해도 상관없다. 애초에 히르칸은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이제까지 게임을 해온 게 아니다.

‘절대 못 줘.’

그리고 그러한 증오심이, 우레사냥꾼 길드에게 주기 싫다는 마음이 히르칸을 움직이게 해줬다.

히르칸은 그 의지를 가진 채 아누가스의 눈을, 이제는 붉게 변한 눈을 피하지 않았다.

크어어!

그런 히르칸을 향해 아누가스는 분노를 아끼지 않았다.

근육질 가득했던 녀석의 거대한 몸은 상처가 가득했다. 마치 상처라는 이름의 옷을 두른 듯했다. 상처는 옅지 않았다. 매우 깊었다. 언제든 상처가 좀 더 깊어지면, 신체절단도

가능할 듯한 상처였다.

종유석이 만들어지듯, 한 번 한 번, 히르칸이 라만차의 풍차를 향해 달리는 돈키호테처럼, 전력으로 달려들어, 남들이 보기에는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 짓을 수백 번 거듭해서

만들어낸 상처들이었다.

동시에 그 상처들은 굳건하기 그지없는 철문을 향해 히르칸이 두드린 노크의 횟수이기도 했다.

‘그런데 제발 이제 좀 바뀔 때가 되지 않았냐? 3페이즈 슬슬 시작될 때 같은데?’

아누가스는 총 3가지 단계가 있다. 그 단계는 보석 같은 눈의 색깔을 통해 알 수 있다.

처음에는 푸른색으로 빛나고, 이후 데미지가 쌓이면 붉은색으로 변한다. 마지막 세 번째는 색이 사라지고, 다이아몬드처럼 변한다.

3페이즈가 시작되는 징조고, 그 징조가 나오는 순간 아누가스는 실체를 갖춘다.

죽을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 설정은 거듭된 마법 폭격으로 아누가스를 잡으려는 유저들의 당연한 시도를 막기 위해 마련된 설정이었다. 이런 설정이 있으면, 2페이즈 동안은 아누가스의 HP 이상의 데

미지를 줘도 아누가스를 죽일 수 없다. 참으로 곤란한 설정이다.

물론 히르칸과 같이, 결코 워로드 시스템이 예상조차 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아누가스를 잡는 이에게 아누가스가 보여주는 눈동자 색의 변화는 신호등일 뿐이었다.

[아누가스가 실체를 갖춥니다.]

[아누가스의 눈이 빛납니다.]

[아누가스의 영향력이 넓어집니다.]

‘왔다!’

그리고 이내 아누가스란 신호등의 색이 바뀌는 순간, 히르칸이 기다렸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로부터 몇 초 후, 아누가스와 히르칸이 만들어낸 무참한 전장을 향해 달려오는 오십 마리의 해골 전사들과 세 마리의 해골 기사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데스나이트의 모습

이 히르칸의 눈에 들어왔다.

히르칸이 이를 꽉 물었다.

‘이제 올인이다.’

이게 히르칸이 준비한 마지막 노림수였다.

전투 시작 전에 해골 군단을 소환해두었다. 마력이 텅텅 비어버리는 건 물론, 값비싼 마력 회복 아이템을 이용해 서리의 힘을 발동한 상황에서 해골 전사를 소환하고, 그들에게

본아머도 둘러줬고, 그들의 무기에 일일이 수 개의 저주도 걸어줬다.

무려 30분에 다다르는 작업이었고, 그 작업이 끝나는 순간 히르칸은 해골 군단을 방어 모드로 전환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여기서 못 잡으면 끝이다.’

하얀 입김을 토해내며 등장한 해골 군단들이 아누가스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크어! 크어!

아누가스는 그렇게 달려드는 해골 군단들을 네 개의 팔을 이용해 상대했다. 한 팔은 해골 군단을 그대로 잡아 던졌고, 다른 팔은 해골 전사를 주먹으로 후려쳤고, 남은 두 팔은

해골 전사들을 각각 한 마리씩 잡아서 둘을 충돌시켰다.

꽈앙!

갑옷이 서로 부딪치며 나는 꾕가리 소리에 해골 전사들의 뼈가 부셔지는 소리가 삽시간에 전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더불어 상처 입은 해골 전사들은 상처를 회복하지 못했다. 주인인 히르칸의 마력이 없으니까. 데스나이트가 있었지만, 데스나이트의 불멸 스킬 역시 히르칸의 마력이 없으면

발동하지 않는다.

때문에 상처 입은 해골 전사들은 상처 입은 채로 싸웠다. 어깨가 날아가면 외팔이인 채로 싸웠고, 다리가 망가지면 엉금엉금 기어와서 아누가스를 괴롭혔다.

죽여도 죽지 않는 해골 군단의 위엄은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지금 이 순간 해골 군단은 하회탈이란 이름 아래에서 보여준 그 어떤 전투보다 치열하고, 화려했다. 무엇보다 지금 이 전투에서 해골 군단들은 필사(必死)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죽든, 죽이든. 두 가지 중 하나를 무조건 택해야 하는 것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을.

그리고 가장 필사적인 건 히르칸, 본인이었다.

‘5분 안에 끝내야 해.’

올인이다.

해골 전사들은 이제는 치료할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는 일회용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또한 긴박한 순간에 써먹을 수 있는 멋진 역전 찬스, 뼈폭탄 따위를 기대할 수도 없다.

여기 나온 모든 것이 지금 히르칸이 내세울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무너지면, 히르칸도 무너지는 상황.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고, 그런 히르칸의 필사적인 모습은 히르칸을 보다 과감하게 만들었다.

언제나 그랬다.

히르칸은 위기 속에, 절망 속에서 뒷걸음질을 치기보다는 위기와 절망을 향해 박치기를 날렸다.

지금도 히르칸은 해골 전사들이 시선을 끄는 사이, 아누가스의 네 개의 팔이 해골 전사들을 잡느라, 더 이상 팔이 남아나지 않는 사이, 녀석의 등에 올라탔다.

그러는 사이 해골 기사와 데스나이트가 주인을 위한 절박한 활약을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 가장 큰 활약을 보여주는 건 데스나이트였다. 주인의 마력을 받지 못하는 와중에도 데스나이트는 아누가스와 정면에서 붙어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다크 스폿 세트를

두르고, 폐왕검을 들고 있는 데스나이트는 오히려 아누가스를 때때로 뒷걸음질 치게 했다.

해골 기사들의 활약도 눈부셨다. 데스나이트가 아누가스를 몰아치면, 양옆에서 아누가스를 찌르고 들어왔다. 이미 히르칸이 거듭된 공격으로 만든 상처에 제 검을 찔러 넣었

다. 세 마리의 해골 기사는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아누가스를 움직였다.

해골 전사들은 그야말로 몸을 던졌다. 그들의 역할은 아누가스의 손에 사로잡힌 채, 아누가스가 다른 것을 쥘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혹은 아누가스의 발치로 기어와 아누가

스의 발목 부근에 제 검을 찔러 넣어 아누가스의 시간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몸을 사리지 않는 해골 전사들의 활약이 어떤 의미에서 데스나이트보다 더 눈부셨다.

무엇보다 그들의 거듭된 공격은 아누가스의 몸에 하얀 서리를 내리게 했다.

서리의 힘!

더욱이 해골 군단의 무기에는 전부 저주가 걸려 있었다.

무기력, 나태, 부식······ 히르칸의 저주 스킬 랭크는 꽤 된다. 아누가스에게 장시간 영향을 주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었다. 하나가 끝나면 두 번째가, 두 번째가 끝나면 세 번째

저주가 아누가스를 옭아맸으니까.

크어어!

아누가스의 입에서 이제는 쉴 새 없이 비명이, 분노로만 이루어진 비명이 터져 나왔다.

히르칸이 등반을 시작한 건 그 무렵이었다.

절벽 같은 몸, 놈의 몸에 히르칸이 만든 상처를 잡고 녀석의 어깨까지 올라갔다.

‘끝을 보자.’

그건 누가 봐도 미친 짓이었다. 아누가스가 제 등에 달라붙은 히르칸을 제 팔로 떼어내는 순간, 히르칸은 죽는다.

하지만 히르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누가스에게 굳이 가까이 갔다. 가까이 가는 정도가 아니라 놈의 몸에 달라붙었다.

그 끝이 명백히 존재하는 해골 군단의 희생이 끝에 다다르기 전, 확실한 결과물을 만들어야 했으니까. 그저 뒤에서 뒷짐지고 해골 군단이 알아서 끝내주기를 바랄 정도로 멍청

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히르칸은 어느새 아누가스의 어깨 근처까지 올라갔다.

그 순간.

휙!

데스나이트와 치열하게 싸우던 아누가스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어깨까지 올라온 히르칸을 바라봤다.

크어!

아누가스가 분노의 일갈을 내질렀고, 히르칸은 이번 전투 이후 처음으로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와 함께 녀석의 투명한 다이아몬드 눈동자를 향해 검을 내찔렀다.

키잉!

이 장면, 이 단 한 컷의 장면 그리고 이 장면을 꾸며주는 짤막한 소리!

히르칸이 그토록 원하던 장면이었다.

< 55화. 잡거나, 잡히거나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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