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160화 (160/192)

< 55화. 잡거나, 잡히거나 (3). >

7.

아누가스가 등장하고, 눈을 뜨는 순간 히르칸이 정화의 서클렛을 착용했다. 효과는 통하지 않았다. 아누가스를 바라보던 히르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히르칸의 머릿속에 그려지던 시뮬레이션이 종료됐다.

‘정화의 서클렛은 통하지 않는다고 분명 레드불스가 말했었어.’

히르칸이 다시 시뮬레이션을 시작했다.

장면은 다시 처음으로, 아누가스가 다시 히르칸의 앞에 등장했다. 녀석이 눈을 뜨자, 모든 마력이 사라지고, 마력 회복 능력은 물론 마력 회복 아이템도 무용지물이 됐다. 그런 아누가스를 맞이하는 히르칸은 다크 스폿 세트

와 폐왕검, 워로드에서 스트라이커가 착용할 수 있는 최고의 세팅을 한 상태.

휙휙, 아누가스의 네 개의 팔이 뱀처럼 히르칸을 향해 연신 날아왔고, 히르칸은 이리저리 공격을 피했다. 잽싸게 피하면서, 지척의 거리에서 아누가스의 몸을 폐왕검으로 긁었다. 굵직한 상처를 남겼다.

‘가죽 방어력이 상당하다고 했으니까, 차라리 폐왕검보다는 크라잉 소드가 나을 거야.’

히르칸의 시뮬레이션 속, 아누가스와 싸우고 있던 히르칸의 검이 짠! 하고 폐왕검에서 크라잉 소드로 바꾸었다. 츠릉츠릉! 잡음이 추가됐다. 멈춰있던 전투가 다시 시작됐다.

‘흠.’

그리고 어느 순간 히르칸이 눈살을 찌푸렸다. 열심히 싸우던 히르칸의 왼팔이 아누가스의 팔에 잡혔고, 아누가스가 히르칸을 번쩍 드는 장면이 원인이었다.

‘근접전을 계속하면, 결국 언젠가는 잡혀.’

히르칸은 굳이 상상할 필요도 없는 끔찍한 시뮬레이션을 멈추고, 다시 장면을 처음으로 돌렸다.

똑같이 전투가 시작됐다. 히르칸이 이번에는 아이템 세팅을 다시 한 번 바꾸었다. 전투 스타일도 바꾸었다. 치고받는 근접전 대신 치고 빠지는 전투를 시작했다.

‘음.’

마치 기사들이 말을 탄 채 창을 앞세우며 마상시합을 벌이듯, 히르칸과 아누가스가 서로를 향해 달리고, 찰나의 순간 서로에게 하나의 상처만을 주고,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시작된 전투 시뮬레이션은 끔찍한 장면 없이 나

름 꽤 오랫동안 진행됐다.

‘끄응.’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전투에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히르칸과 아누가스가 싸우는 전장을 향해 어마어마한 마법들이 폭격을 하다시피 떨어지기 시작했다. 광범위 마법들은 전장을 헤집고, 종국에는 뒤집었다.

그와 동시에 히르칸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히르칸, 와치맨 스타일이라고 알고 있나?

‘젠장.’

히르칸이 다시 시뮬레이션을 종료했다.

히르칸은 다시 시뮬레이션을 시도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정면에 보이는 하르드 요새 유적을 바라보았고, 시선을 좀 더 돌려 하르드 요새 유적을 포위하듯 우거진 숲을 봤다. 그 숲 속에서 터져 나온 몬스터의 울음소리, 그

몬스터와 누군가의 전투가 만들어내는 소란이 귓가를 간질였다.

히르칸이 눈살을 찌푸렸다.

‘결국 파스타 새끼들이 문제군.’

파스타.

당연히 스파게티를 말하는 건 아니다.

히르칸이 말하는 파스타란 파이브 스타, 현재 암흑대륙을 장악하기 위해 나선 5개 길드를 의미하는 별칭이다.

좋은 의미로 나온 별칭은 아니었다. 5개 길드의 행보에 적지 않은 이들이 불만과 함께 비판을 보냈고, 그런 그들을 비판하던 누군가가 그들에게 파이브 스타라는 멋진 이름과 함께 파스타란 비아냥거리기 좋은 별명을 붙여

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행보마저 비아냥거림을 받을 만큼 우스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파이브 스타는 암흑대륙을 독무대로 만들기 위해 철저한 준비와 계획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하르드 요새 유적 감시였다.

하르드 요새 유적의 보스 몬스터, 아누가스에게 이미 쓴맛을 본 파이브 스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아누가스 감시에 심혈을 기울이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달리 말하면, 히르칸이 아누가스 레이드를 시도하는 순간 파이브 스타는 그 사실을 빠르게 파악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나설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를 마친 상황이란 의미다.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히르칸의 아누가스 레이드를 도와줄 리 없다.

“씨팔.”

기어코 히르칸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결국 이 모든 상황이 히르칸에게 선택을 강요했으니까.

물론 선택은 히르칸의 몫.

‘결국 이런 날이 오는군.’

이번 선택에 따른 책임은 당연히 히르칸이 마땅히 짊어져야 한다. 그게 거친 욕설을 내뱉는 이유였다.

8.

“어때?”

“예쁘십니다.”

“예쁜 건 의미가 없어. 느낌을 말해.”

“솔직히 남자가 보기엔 예쁜 것 빼고는 딱히 느낌상 느껴지는 건 없습니다만.”

“하희, 네가 보기에는?”

그 순간 대답하던 해치의 옆에서 굉음이터졌다.

“여왕님 최고예요!”

그 소리에 해치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희가 생각 없이 내뱉는 말도 말이지만, 하희는 해치의 고막을 부술 기세로, 그의 지척에서 전력을 다해 소리를 내질렀다.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표정을 좋을 리 없다.

해치는 그 찌푸린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자신의 앞에서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정말 아름다운 여인, 시르를 바라봤다.

‘맞선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참나.’

헛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해치는 이 순간 헛웃음을 내뱉는 짓은 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은 결코 웃음이 피어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여왕님.”

“말해.”

“분명히 말하지만, 그에게 호의를 가진 것도 좋고 호의를 표시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절대 우리 길드가 손해 보는 짓은 하시지 마십시오. 정말 그런 식이면 저 이 길드 나갑니다.”

폭군을 향해 충언을 내뱉는 충신의 심정, 그 심정이 해치의 얼굴 위로, 표정을 통해 역력하게 드러났다.

“웃기시네. 계약기간 2050년까지면서.”

“시끄러워 2051년짜리.”

하지만 하희의 태클에 그 진지한 표정은 금방 짜증 섞인 표정으로 바뀌었다. 계약기간, 그게 해치의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런 그 둘을 보던 시르는 담담하게 말했다.

“모두 대기하도록.”

담담한 건 물론 담백하기까지 한 그 말을 끝으로 시르는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해치와 하희, 그리고 좀 더 떨어진 곳에 있는 서른 명의 우레사냥꾼 길드원들을 등졌다.

자신의 우두머리를 바라보는 이들은 그 등을 바라보며 긴장감을 품었다.

그 긴장감의 원인.

‘하회탈이 설마 먼저 접근할 줄이야.’

하회탈이다.

갑작스러운 연락이었다. 하회탈이 처음으로 우레사냥꾼 길드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하회탈 입장에서 연락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우레사냥꾼 길드는 하회탈이 지겹다 못해 짜증이 날 정도로 그에게 많은 러브콜을 보냈으니까. 러브콜에 응답할 방법은 러브콜 횟수만큼 존재했다.

그런 열렬한 러브콜에 하회탈이 처음으로 응답을 했다.

물론 하회탈이 우레사냥꾼 길드에 들어오겠다는 의사를 밝힌 건 아니었다. 목적은 거래, 무엇을 거래하는지조차 하회탈은 말해주지 않았다.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약속만 잡았다.

당연히 시르 혼자만 오라고 했고, 시르는 그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즉, 우레여왕은 이제부터 하회탈과 단독으로 대면하게 될 것이다.

‘꼬이면 밑도 끝도 없이 꼬이고, 풀리면 밑도 끝도 없이 풀리겠지.’

이 순간 해치가 우려하는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하회탈이 우레여왕을 공격할 경우. 장담컨대 우레여왕은 1대1로 하회탈을 이기지 못한다.

다른 경우는 우레여왕이 하회탈에 대한 짝사랑이나 다름없는 감정 때문에 그녀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할 때다.

이 중에서 해치가 좀 더 걱정하는 경우는 후자였다.

‘하회탈 앞에서는 이상하게 약해진단 말이야.’

하회탈을 향한 우레여왕의 관심과 애정은 짝사랑, 그 이상이다. 더욱이 우레여왕은 자신의 짝사랑을 그저 애틋한 감정으로 품은 채 러브레터나 쓰는 성격이 아니다. 자기 손에 안 들오면 다른 놈도 쥐지 못하게 파괴해버리는

비틀린 성정의 여인이다.

그 정도로 비틀린 애정이 이성적인 거래에 도움이 될 리 없다.

무엇보다 지금 이 무대, 암흑대륙은 지금 우레사냥꾼 길드에게도 굉장히 혹독한 땅이었다.

그 혹독한 땅에서 하회탈이 우레사냥꾼 길드에게 먼저 다가왔다는 건, 적어도 평화로운 무언가를 하는 건 아닐 터.

‘절대 같이 아누가스, 그 갑작스럽게 등장한 괴물 같은 새끼 레이드를 하는 것만큼은 피해야 해.’

해치가 재차 기도했다.

그런 기도를 뒤로한 채 둘의 대화가 시작됐다.

9.

우레여왕과 하회탈.

워로드를 대표하는 최고의 실력자다. 우레여왕의 이름값이 단독으로는 하회탈에 밀리는 건 사실이지만, 그 둘이 워로드 최고의 두 명이란 사실은 모두가 인정했다.

남녀의 구분을 의미함이 아니다. 그 둘은 여러모로 전인미답, 전무후무한 각자의 역사를 쓰고 있었기에, 그 둘은 거의 동등한 대우와 위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이건 결국 하회탈과 우레여왕이 서로 직접 붙어서 자웅을 가리

지 않는 이상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 둘이 처음으로 호흡을 맞췄던 배덕의 왕자 레이드 편이 모든 영상을 제치고, 워로드 관련 영상 최고 조회수를 기록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그 둘이 지금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하회탈, 그때는 고마웠어.”

우레여왕이 먼저 말을 거는 것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도, 여러모로 처음이었다.

히르칸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어떤 표정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쓰고 있는 하회탈 아래로 보이는 입은 미소를 짓지도, 울상을 짓지도 않았다. 입은 그저 입으로 있을 뿐이었다.

그런 히르칸의 모습에 시르는 재차 말했다.

“이야기가 길어지는 게 싫다면, 본론으로 들어가지.”

성깔로는 워로드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르였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히르칸의 행동에 분노하기보다는 오히려 본인이 나서서 상황을 진행시켰다.

히르칸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누가스 레이드를 할 거다.”

본론이 나왔다.

시르가 예상한 말이었고, 대답은 바로 나왔다.

“그래서? 도와달라는 건가?”

“도와달라면 도와줄 건가?”

“고민해야지.”

아누가스.

우레사냥꾼 길드는 아누가스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다. 파이브 스타가 가장 많은 정보를 쥐고 있다. 그들은 적지 않은 희생을 담보로 아누가스와 제대로 싸웠으니까.

그래도 소문은 퍼진다. 모든 스킬을 쓸 수 없게 만드는 말도 안 되는 특수능력을 가진 보스 몬스터란 정보는 우레사냥꾼 길드도 입수했다.

그래서 해치는 말했다. 하회탈이 레이드를 같이 하자는 제안을 하면 무조건 거절하라고. 하회탈이 우레사냥꾼 길드에 가입하지 않는 이상, 그 제안은 무조건 무시하라고.

반대로 말하면 하회탈이 우레사냥꾼 길드에 가입해준다면, 기꺼이 같이 싸워줄 생각이었다.

“솔플이다.”

그런 시르의 기대를 하회탈은 한 단어로 뭉갰다.

“아누가스는 나 혼자 잡는다.”

솔플이란 단어를 시르가 모를 리 없음에도 하회탈이 재차 말했다. 그리고 시르는 히르칸의 그 말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시르가 표정을 차갑게 식혔다.

“그럼 우리에게 원하는 건?”

사실 시르는 그런 그림을 원했다. 하회탈이 우레사냥꾼 길드와 운명을 함께 하는 상황을. 극단적이지만, 그러기를 소원했다. 그 소원을 히르칸이 단숨에 짓밟았으니 표정이 식는 건 당연했다.

“파스타들의 방해를 막아줘.”

“우리가 그래야 하는 이유는?”

“내가 실패할 경우, 바통 터치다.”

시르가 고소를 머금었다.

“들러리만 되라는 거군.”

아가르도 레이드 때와 같다. 히르칸이 아누가스 레이드에 집중할 무대를 마련해주고, 아누가스 레이드에 실패할 경우 우레사냥꾼 길드가 다음 도전권을 얻는다.

더불어 히르칸과 전투를 치른 아누가스는 꽤 넝마가 되어있을 터.

하지만 반대로 그게 메리트의 전부다. 그 외에 추가적인 무언가를 기대하긴 힘들다.

무엇보다 파이브 스타를 막아서는 건, 우레사냥꾼 입장에서도 적지 않은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

그런 우레사냥꾼 길드를 설득하기 위해 히르칸이 준비해온 카드를 꺼냈다.

“고맙다는 인사 대신으로 이 정도는 해줬으면 좋겠군.”

고맙다는 인사 대신, 배덕의 왕자 때를 말함이다. 시르는 그 말에 입가에 어렸던 감정을 지웠다.

“좋아.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이니까.”

이 대화를 해치가 들었다면 과연 그는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하지만 이곳에 해치는 없었다. 이 대화는 보이스톡을 통해 전달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해주지.”

시르가 확답을 줬다.

“그럼 이제 빚은 없겠네.”

“그래, 빚은 없지.”

그렇게 단숨에 그 둘 사이에 있던 하나의 빚이 사라졌다. 그제야 시르가 말했다.

“하회탈, 우레사냥꾼 길드에 들어와. 최고 대우를 약속하지.”

그 말을 듣는 순간 히르칸은 지그시 시르를 바라봤다. 짙은 침묵이 깔렸다.

그 침묵 끝에 히르칸이 입을 열었다.

“이 게임에서 내가 우레사냥꾼 길드의 심볼을 여기에.”

툭툭, 히르칸이 자신이 가슴팍 왼쪽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곳에 단 채 전장에 나가는 일은 없을 거다.”

제스처마저 취한 채 보여준 히르칸의 강렬하기 그지없는 의지의 표현에 시르의 표정이 더더욱 차갑게 변했다. 당장에라도 시르의 주변으로 서릿발이 휘날릴 것 같았다.

“이유는?”

히르칸은 이유를 내뱉는 대신 등을 돌렸다.

등을 돌린 채 나지막이, 이 세상 그 누구도 듣지 못하는 작은 목소리로, 오로지 히르칸 본인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한 게 있는데, 내 스스로가 쪽팔려서라도 그렇게는 못할 것 같다.”

< 55화. 잡거나, 잡히거나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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