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159화 (159/192)

< 55화. 잡거나, 잡히거나 (2). >

4.

“와치맨 스타일이라고 알고 있어?”

검을 어깨에 걸친 채 질문을 내뱉는 유저, 하회탈을 뒤집어쓴 유저의 물음에 질문을 받은 마법사는 대답 대신 팔을 들고, 쥐었던 주먹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활짝 폈다.

하회탈을 쓴 유저는 마법사의 대답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푹!

그 비웃음을 머금은 채 바닥에 주저앉은 마법사의 몸에, 가슴팍을 향해 검을 내찔렀다.

검에 찔린 마법사는 그대로 뒤로 누웠고, 마법사를 단숨에 관통한 검은 마법사의 등이 땅바닥에 닿는 순간, 그 땅바닥마저 깊게 뚫고 들어갔다. 마법사의 가슴을 찌른 검이 뿌리까지 박혔다.

이 순간 검에 찔린 마법사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죽진 않았으나, 시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강제 로그아웃.

히르칸은 자신의 죽음을 실시간으로 관람하는 대신 최소한의 발악에 만족한 마법사에게 그에 어울리는 대가만 줬다. 푹, 푹! 죽을 수 있을 만큼의 데미지만 주었다. 시체를 향한 화풀이는 하지 않았다.

사냥을 마친 히르칸은 곧바로 하이에나가 되어, 마법사의 소지품을 뒤지고, 시계 역시 챙겼다.

그렇게 챙긴 것들을 배낭처럼 가지고 다니는 검은 상자 안에 대충 넣었다. 검은 상자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소모품과 워로드의 유저들이라면 모두가 착용하고 다니는 시계 네 개가 있었다.

‘이걸로 다섯 명.’

그 검은 상자 안에 다섯 번째 시계가 추가됐고, 히르칸은 다음 표적을 향한 추격 의지 대신, 처음으로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이번 소란의 쉼표가 되는 한숨이었다.

아누가스 등장 이후 상황은 완벽한 개판이 됐다. 히르칸을 잡기 위해 온 빅스마일과 클로버 부대는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아누가스와는 전투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아누가스의 일방적인 학살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클로버 부대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 중 두 명이 게임오버를 당하고, 루트비어가 왼팔을 잃은 채 도망

치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그 후 히르칸은 곧바로 자신이 잠시 버려두었던 검은 상자를 챙긴 후에 역으로 사냥을 시작했다.

히르칸은 결코 자신을 건드린 상대를 곱게 보내지 않았으니까.

단순히 손목시계에 대한 욕심, 노획품에 대한 욕심을 떠나서 히르칸은 감히 게임오버 위기 직전까지 자신을 몰아넣은 자들에게 잊을 수 없는 응징과 보복을 해줬다.

그 응징과 보복마저도 이제는 마쳐야 할 때였다.

‘이 이상 설쳤다가 아누가스에게 걸리면 끝장.’

히르칸은 자신의 마력 상태를 살폈다. 현재 그의 마력은 조금 회복이 되어, 해골 기사 한 마리 정도는 소환할 만한 양이 됐다.

마력이 회복된다는 건, 눈을 뜬 아누가스가 근처에 없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히르칸이 안심해야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혹시 몰랐으니까. 아누가스는 눈을 감고 추적하는 동안은 특수 능력이 발동하지 않는다. 표적을 발견하고, 표적을 향해 모습을 드러내려는 순간, 그때부터 아누가스의 능력

이 발동된다.

마력이 다시 사라지는 순간은 이미 늦은 거다.

히르칸은 혀를 짧게 찼다.

‘이래서 환상종은 정말 싫다니까.’

환상종(幻像種).

폐허 왕국 편의 무대가 되는 암흑대륙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몬스터 종이다.

환상,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실체가 사실은 실체가 아닌 존재다.

좀 더 자세한 배경 설정에 따르면,  몬스터처럼 자연히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고대의 어느 왕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용이 자신의 권능을 이용해 만든 군대, 용의 군대의 일원이다.

그와 비슷한 몬스터가 바로 프로스트 나이트와 블레이즈 슬라임 드래곤이다.

이런 환상종의 가장 큰 특징은 상황에 따라서 지형지물을 무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블레이즈 슬라임 드래곤, 녀석은 불리할 때면 그냥 자신의 형태를 포기한다.

아누가스의 경우에는 표적을 추격할 때는 보이지 않는 형태로 이동하고, 전투 시에만 정체를 드러낸다.

이 외에도 흙더미를 바다처럼 헤엄치는 놈들도 있고, 그림자를 타고 다니는 놈들도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같은 스펙의 몬스터라고 해도 이 환상종의 특징에 따라서 사냥 난이도는 천지 차이가 된다. 이제까지 유저들이 몬스터들을 수도 없이 잡으면서 쌓아온 경험이 통하지 않으니까. 좀 과장하면 다시 초보 시절

로 돌아가서 게임을 하는 격이다.

심지어 아누가스는 환상종 타입의 보스 몬스터 중에서도 굉장히 상대하기 힘든 녀석이었다.

‘가뜩이나 왜 하필 나오는 놈이 아누가스인 거지? 이 새끼가 지금 나올 타이밍이 절대 아닌데?’

“후우!”

히르칸이 재차 한숨을 내뱉었다.

목숨을 구했다는 것에 대한 안도의 한숨은 아니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앞으로 자신이 마주해야 하는 처절한 현실에 대한 한숨이었다.

5.

‘일이 이렇게 꼬일 수 있는 건가?’

모든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고받았고, 다시 한 번 상황을 정리한 내용을 보던 싱글레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재수가 없는 걸까? 아니면 이마저도 하회탈이 의도해서 생긴 노림수인가?’

하회탈, 대어 중의 대어를 잡을 기회를 코앞에 두었다. 그냥 잡았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낚시로 따지면 낚싯바늘을 제거하고 이제 기념사진촬영만 남은 상황이었다.

루트비어와 하회탈이 서로의 검을 맞물린 채 대치했다는 보고를 실시간으로 받는 순간, 싱글레가 그 자리에서 주먹을 불끈 쥐며 미리 승리의 세레모니를 한 것도 다 잡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아누가스라는 놈이 모든 것을 망쳤다.

‘가뜩이나 말도 안 되는 괴물이······.’

더불어 등장한 아누가스는 워로드 등장 이후 이제까지 현실보다 워로드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긴 싱글레조차 쉽사리 견적을, 가늠을 하기 힘든 말도 안 되는 괴물이었다.

그 어떤 낌새도 보이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추격전, 등장하는 순간 주변 유저들의 모든 마력과 마력 회복력, 마력 회복 아이템 효과를 제로로 만드는 가공할 특수 능력까지!

녀석에게 클로버 부대와 빅스마일 길드원, 합쳐서 일곱 명의 피해자만 생긴 게 오히려 천만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더 나아가 이제 정리된 녀석의 특징을 보는 싱글레는 녀석을 잡을 방법을 도무지 떠올릴 수 없었다.

‘역시 그때 들은 오버 밸런싱이······.’

싱글레는 곧바로 자신이 받은 아누가스의 몬스터 특성에 대한 간략한 정보가 담긴 보고서, 그 마지막에 적혀 있던 명령을, 녀석을 잡지 말라는 명령을 떠올렸다.

솔직히 그 명령이 아니라도, 싱글레는 녀석을 잡고 싶지 않았다. 더 나아가 싱글레가 보기에는 그 녀석을 잡을 수 있는 유저는 워로드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하회탈, 그마저도 결국 아누가스를 피해 도망치다가 클로버 부대에게 걸린 것 아닌가?

여기서부터 싱글레의 생각이 바뀌었다.

정확히는 명령이 달라졌다.

‘그래도 이게 호재가 되긴 하는군.’

좀 더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아누가스가 하르드 요새를 거점으로 활동한다는 사실이 파악됐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아누가스를 잡아야 하르드 요새가 암흑대륙 최초의 거점 지역으로 활성화될 가능성이 높다.

즉, 아누가스를 잡기 전까지 암흑대륙은 여전히 유저들의 편한 게임 진행을 용납지 않는 혹독한 무대가 된다는 의미다. 당연히 아누가스를 앞에 두고 유저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정체가 시작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득을 보는 건 현재 암흑대륙을 독무대로 만들고자 하는 5개 길드다.

현재 암흑대륙에서 5개 길드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누가스가 이 암흑대륙을 출구 없는 새장으로 만들었다. 암흑대륙에 있는 유저들은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된 셈이다.

그토록 잡고 싶은 쥐새끼와 같은 독 안에 있다는 의미.

‘우레사냥꾼 길드 위치는 확인 완료했어. 하회탈도 당분간은 지금까지 개방된 지역 내에서만 활동이 가능할 터. 잡으려고 하면, 잡을 수 있다.’

하회탈을 잡는 시도가 실패했지만, 아누가스가 살아있는 동안 그 시도는 연거푸 이루어질 것이다.

싱글레, 그게 이제부터 그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 와치맨 스타일이라고 알고 있어?

그 순간 싱글레가 보던 영상에서 하회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회탈에게 당한 클로버 부대 소속 유저가 보낸 영상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연이었다.

그 우연 앞에서 싱글레는 인상을 있는 힘껏 찌푸렸다.

‘하회탈, 네놈은 무조건 죽인다.’

6.

캡슐 커피 머신이 만들어준 풍미 넘치는 커피에 포도당 사탕을 떨어뜨린 후 커피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는 안재현의 시선 끝에는 최근 구매한 V기어 6S레벨이 고고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 안재현이 살고 있는 원룸 보증금보다 곱절이나 비싼 녀석이었고, 이곳에 V기어 6S모델을 설치하러 온 설치기사들이 안재현을 굉장히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볼 정도였다.

“씨팔.”

그런 V기어를 바라보던 안재현의 입에서 거칠기 그지없는 쌍욕이 흘러나왔다. 고급스러운 커피 덕분인지, 쌍욕을 내뱉으면서도 입안에서 풍기는 커피의 향은 풍미가 넘쳤지만, 안재현에게 그걸 느낄 수 있는 정신적 여유나,

커피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없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꼬일 수 있는 건가?’

다시 한 번 커피를 머금은 안재현의 얼굴 표정은 분노를 넘어 울상에 가까웠다.

그 이유.

‘잡거나, 잡히거나.’

지금 안재현이 놓인 처지 때문이었다.

고민의 시작점은 당연히 아누가스였다.

아누가스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그 사실에 기뻐하기에는 상황은 좋지 못했다.

더군다나 지금 아누가스는 하르드 요새의 보스로 등장했다.

놈을 잡기 전까지 하르드 요새는 거점 지역이 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녀석을 잡아야, 하르드 요새 너머에 보이는 협곡······ 블럭 필드로 설정된 그곳을 지나갈 수 있다.

녀석은 단순한 장애물이 아니라, 유저들이 나아가야 하는 길목을 방해하는 방해자로 등장한 것이다.

그런 놈을 잡지 못하면, 결국 그 후에는 안재현을 뒤쫓아온 무리들에게 안재현이 잡힐 것이다.

잡거나 잡히거나.

‘아니 대체 왜 아누가스가 이 시점에서 등장한 거지? 지금 등장할 놈이 아니잖아?’

사실 이건 안재현도 예상치 못한 바였다.

안재현이 알고 있는 아누가스의 등장 시점은 블레이즈 슬라임 드래곤이 잡히고 두 달여 정도가 흐른 시점이었다. 아누가스를 맞이한 유저들의 레벨이 230레벨 근처이던 시점이었고, 이미 적지 않은 유저들이 2차 승급과 고

대의 힘을 통한 큰 스펙업과 암흑대륙이란 새로운 무대에 적응을 어느 정도 끝낸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녀석을 잡는 건 쉽지 않았다.

안재현은 그 당시 결과만큼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스위퍼즈에 레드불스, 트리플윙이 달라붙어서······ 세 번째에 잡았지.’

30대 길드 중 최고의 마법 화력을 자랑하는 스위퍼즈 길드와 뛰어난 스트라이커, 탱커를 다수 보유한 레드불스, 빅스마일에 버금가는 길드원 숫자를 자랑하는 트리플윙이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세 길드는 두 차례의 실패를

밑거름 삼아 세 번째 레이드 시도에서 아누가스를 잡을 수 있었다.

‘밸런싱 오류인가?’

아누가스가 이 타이밍에 등장했다는 건, 워로드의 게임 시스템이 이 상황에 녀석이 등장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재현이 보기에는 이건 말도 안 되는 등장이었다.

‘신화급인 서리나, 불길이 지금 시점에서 등장한 것도 그렇고······ 서너 달 후에나 있을 일이 연거푸 일어나는군.’

안재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개를 흔들며 비틀어진 안경을 고쳐 썼다.

지금 안재현이 워로드 시스템을 고민하고, 걱정하고, 우려할 상황은 결코 아니다.

핵심은 결국 하나니까.

아누가스를 잡지 못하면, 히르칸이 잡힌다. 누구에게? 비앤비 길드, 빅스마일 길드를 비롯한 5개 길드에게 잡힌다.

이미 하회탈을 향한 그들의 목적과 의지는 몸으로 확인했고, 그들이 가진 저력 역시 몸으로 확인했다.

클로버 부대는 강했다. 그때 아누가스가 없었으면 안재현은 커피 대신에 술을 마시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대로 아누가스를 놔둔 채 활동하기에는 암흑대륙으로 넘어온 5개 길드의 전력이 가공스럽다.

‘다른 놈이 녀석을 잡아줄······.’

물론 다른 누군가가 아누가스를 잡아줄 때까지 몸을 사리면서 지내는 것도 나름 지금 선택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

‘······리가 없지.’

하지만 이 방법 역시 답이 없었다.

아누가스를 잡으려면 못해도 30대 길드가 나서야 한다. 하지만 30대 길드 중에 지금 당장 암흑대륙으로 넘어오는 이들은 많지 않다. 대부분이 이미 넘어온 5개 길드 소속이다. 부두쿠 터널 대기 순번을 들으면, 암흑대륙에

대한 미련이 눈 녹듯 사라진다.

‘5개 길드 애들이 아누가스를 잡으려고 설칠 이유는 없고.’

더불어 이미 넘어온 5개 길드는 아누가스를 그대로 놔두는 게 이익이다. 그동안 골칫거리인 하회탈과 언제든 골칫거리가 될 수 있는 우레사냥꾼 길드를 처리하는 게 그들에게는 최선이다. 그리고 아누가스보다 그 둘이 잡기

더 쉽다.

남은 건 하나.

‘우레사냥꾼 애들이라면······.’

우레사냥꾼 길드는 나름 저력이 있다. 아누가스 레이드를 시도하고, 승산을 가늠할 수 있는 저력이.

‘그 미친년이라면 하긴 하겠지.’

더불어 그 길드를 이끄는 우레여왕 시르는 안재현이 인정하는 미친년이다. 말도 안 되는 전투라고 해도, 무언가 꽂히면 덤벼들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아누가스 레이드를 성공할 가능성을 안재현은 높게 보지 않았다.

안재현이 모든 레이드 공략방법을 알려주지 않는 이상, 확률은 한 자릿수에 불과하다.

“씨팔.”

이 순간 안재현의 입에서 재차 쌍욕이 나왔다. 거듭된 고민, 그 고민 때문에 나온 욕이 아니었다.

사실 이런 고민은 현실도피다. 이미 안재현이 골라야 하는 답은 하나밖에 없다.

잡거나, 잡히거나.

안재현은 잡힐 생각이 없다. 잡혀도 5개 길드, 비앤비 길드나 빅스마일 길드에 잡힐 바에는 아누가스에게 잡히는 게 훨씬 낫다.

그럼 남은 답은 하나.

“진짜 좃 같은 게임이야.”

아누가스 레이드, 안재현이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이 시작됐다.

< 55화. 잡거나, 잡히거나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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