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잡거나, 잡히거나 (1). >
1.
길조차 없는 숲, 아름드리 나무와 집채만 한 바윗덩이가 제멋대로 배치된 그 무대를 달리는 히르칸의 모습은 대단했다. 순간순간 등장하는 나무기둥을 뱀처럼 피하고, 뜬금없이 등장하는 바위를 디딤돌로 삼아 뛰어다니는
모습은 그야말로 날다람쥐, 그 자체였다.
‘젠장!’
하지만 아무리 도망치는 게 대단해도, 좋아서 도망치는 사람은 세상에 없는 법.
오른손에는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이루어질지 모르는 전투에 대비해 폐왕검을 들고 있고, 왼쪽 옆구리에는 고대의 힘을 품은 두루마리 상자를 끼고 있는 히르칸의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도망치는 강도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고, 당연히 그 모습 그 어디에도 여유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다급함, 초조함, 긴장감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여전히 전력을 다해 도망치는 히르칸, 그런 그의 앞에 갑작스레.
화르르르!
정말 갑작스레 거대한 불의 벽이 등장했다. 히르칸은 그 불길 앞에서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급해 죽겠는데 어떤 새끼야?’
등장한 불의 벽이 마법사의 솜씨라는 걸 모를 히르칸이 아니다. 그리고 그게 발걸음을 멈춘 이유였다.
그 높이가 10미터에 다다르고, 두께도 1미터를 훌쩍 넘기는 어마어마한 불의 벽이었지만, 그 위용은 히르칸의 아이템 세팅 앞에서는 솔직히 큰 의미가 없었다.
그냥 뚫고 지나가려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 사실을 마법을 쓴 마법사도 알고 있다. 즉, 이 불길은 히르칸에게 데미지를 주기 위한 마법이 아니라는 거다.
‘빌어먹을······.’
눈속임.
멋모르고 이 불의 벽을 묘기 부리듯 뛰어넘는 순간, 그 너머에서 치명적인 것이 날아올 것이다.
이런 경우에 이골이 난 히르칸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혹여 이 불의 벽 너머에 그 무엇도 없다고 해도, 히르칸은 이 불의 벽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히르칸이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바라봤다. 이 소란스럽기 그지없는 상황과는 다르게 히르칸이 바라보는 자신의 뒤편은 너무나도 조용하고, 고요했다. 보이는 건 자신이 뛰어온 흔적뿐이었다.
그러나 히르칸은 장담할 수 있었다.
‘그때 본 아누가스 공략에 따르면, 아누가스는 한 번 잡은 상대는 상대가 바뀌기 전까지 무조건 따라온다. 분류상 환상종이니까 언제 어느 순간 뜬금없이 등장해도 이상할 건 없지.’
추적자는 있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그렇기에 히르칸은 오히려 지금 상황을 나름의 호재로 봤다. 지금 자신의 눈앞을 가로막은 불의 벽은, 자신 대신 아누가스의 제물이 되어줄 유저가 최소 한 명 이상 있다는 증거이니까.
그럼 괜히 입 아프게 대화할 이유는 없다. 히르칸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상자를 근처에 던졌다. 고대의 힘, 지금 시점에서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놈이지만 그런 걸 옆구리에 낀 채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
히르칸은 자유로워진 왼손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불길을 한 줌, 훔쳤다.
히르칸의 장갑에 잠시나마 잡힌 불씨, 그 불씨는 꺼지지 않은 채, 오히려 더 격렬한 기세로 타오르고, 솟구쳤다. 종국에는 거대한 불의 거인 모습을 갖추었다.
파이어 골렘의 등장!
파이어 골렘은 등장하는 순간 곧바로 주인의 앞을 가로막는 불길을 흡수했다.
불의 벽이 갈라지며 길이 생겼다. 히르칸이 그 길을 지그시 바라봤다. 예상대로 길 너머에는 히르칸을 잡기 위한 것들이 있었다.
끄어어!
파이어 골렘처럼, 불로 만들어진 거대한 곰 두 마리가 히르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히르칸은 나서지 않았다. 파이어 골렘이 먼저 적을 발견했고, 주인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
그렇게 예정된 세 개의 불꽃 크리처들이, 거대한 괴물들이 서로 뒤엉키며 물고 뜯는 전투를 시작했고, 그 전투 사이로 히르칸은 해골 조각 두 개를 흩뿌렸다.
모습을 드러낸 건 미니 오우거 해골 전사들!
히르칸은 이미 검증된 추격의 귀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딱딱!
손가락을 튕기는 그 순간 히르칸은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봤다.
‘목에 폭탄을 걸고 싸우는 기분이군.’
절체절명.
예상치도 못한 위기에 빠졌다.
‘그래, 내 꼴이 원래 이렇지. 잘 나가면 꼭 이렇게 한 번 지랄 맞은 날이 나오지.’
그러나 반대로 히르칸은 이제야 워로드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2.
하회탈을 상대할 때 가장 피해야 하는 건 근접전이다. 일단 히르칸의 근력 수치는 네크로맨서인 주제에 그 어떤 스트라이커보다 높다. 레벨업 보너스 포인트를 전부 힘에 투자했고, 워로드 최고 수준의 아이템 세팅을 이룩했
으며, 어마어마하게 많은 타이틀 효과가 이러한 수치들을 다시 한 번 증가시켜줬다.
또한 히르칸이 가진 아이템 자체도 근접전투에 너무 유리하다.
크라잉 소드, 현존하는 무기 중에 이보다 방어구와 무기를 잘 파괴하는 아이템은 없다. 아이템 파괴 능력에서는 폐왕검보다 한 수 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폐위된 왕자의 검, 두말할 것도 없는 현존하는 워로드 최강의 아이템이다.
다크 스폿 세트, 이 역시 현존하는 방어구 중에 방어력 자체는 최고 수준이다.
결정적으로 히르칸의 근접 전투 능력은 괴물, 그 자체다.
그렇다면 히르칸의 약점은?
강력한 위력을 가진 범위 마법. 물론 히르칸의 마법 방어력이나 속성 저항력은 굉장하다. 강력한 범위 마법으로도 히르칸에게 치명적인 데미지를 주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이 히르칸의 약점이 되는 건, 히르칸이 가진 최대 전력인 해골 부하들에 대한 가장 확실한 견제법이기 때문이다. 히르칸의 해골 부하들의 무장도 어마어마하지만, 히르칸 만큼은 아니다.
특히 소환되는 해골 전사들이 많을수록, 그들을 소환한 히르칸의 마력 소모량도 늘어난다.
그렇다.
마력이 히르칸의 아킬레스건이고, 히르칸을 잡으려면 이 부분을 노려야 한다.
“계속 마법을 써! 녀석이 정신을 못 차리도록! 해골을 꺼내지 못하도록 마법을 써!”
아폴로는 지금 이 방법을 쓰고 있었다.
물론 본인이 직접 쓰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아폴로는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가 원했고, 동시에 그의 명령을 보이스톡을 통해 쉴 새 없이 들어야 하는 부하들이 원했다. 아폴로는 전투에서 방해가 되면 됐지,
도움이 되는 자는 아니었으니까.
‘개새끼, 자기가 하든가!’
‘마법 쓰는 건 뭐 쉬운 줄 알아? 아주 그냥 다들 탱커만 고생하는 줄 안다니까.’
물론 그렇다고 듣는 입장에서 기분이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전장을 헤집고 다니는 하회탈을 쫓아 마법을 쓰는 것도 미치겠는데, 그런 와중에 아폴로로부터 거듭해서 명령 같은 협박을 듣는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욕이었으니까.
고욕은 여기서 끝이었다.
- 당했다!
전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보가 터졌다. 하회탈은 마법의 동선을 역으로 추적해, 마법사를 제거했다. 마법사 근처에 스트라이커와 탱커가 마법사를 지키기 위해 배치되어 있었지만, 솔직히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탱커 한 명이 시간을 끄는 사이 스트라이커가 마법사를 데리고 도망을 치는 것, 그것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실패하는 경우에는 조금 전 나온 말처럼, 당했다! 같은 비보만 남았다.
결국 다섯 개였던 마법사 무리는 어느새 세 개가 됐다.
그 보고를 받은 아폴로는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미끼를 물었구나!’
3.
세 번째 마법사를 입고 있는 로브와 함께, 단칼에 잘라버린 히르칸을 향해 마법사를 호위하던 스트라이커가 검격을 날렸다. 위에서 아래, 수직으로 벼락처럼 떨어지는 스트라이커의 검을, 히르칸은 그냥 그대로 부술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카앙!
당연히 거친 쇳소리가 터졌다.
끼릭, 끼릭!
그리고 곧바로 두 개의 검이 서로 맞물린 채 소름 끼치는 신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 새끼······.’
당연히 히르칸은 이 순간 상대가 보통 유저가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눈치채고 자시고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렇다 할 스킬 사용 없이 히르칸의 검력에 당당하게 맞서 싸울 유저가 보통 유저일 리 만무하지 않은가? 히르칸의 눈이 곧바로 상대의 아이템 세팅을 훑었다.
‘대격전 영웅 무기, 황금 지네 세트인가?’
대격전 영웅 무기, 히르칸이 들고 있는 폐왕검 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지금 시점에서는 최고 수준의 무기다.
황금 지네 세트 역시 유명했다. 180레벨 보스 몬스터인 황금 지네를 잡아야 얻을 수 있는 유니크 아이템 세트로, 방어력은 낮지만 공격력 관련 옵션은 180레벨대 아이템들 중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때문에 속칭 극공셋이라
는 카테고리에 분류됐다.
당연히 다 비싸다.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놈이다. 황금 지네 같은 경우는 발견 자체가 최근에 이루어졌다. 아이템이란 것에 관심이 없는 유저는 이런 게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
[블러드 오우거의 위엄이 온몸에 엄습합니다.]
시스템이 히르칸에 경고 알림을 보냈다.
블러드 오우거의 위엄, 블러드 오우거 세트를 착용할 경우 발생하는 옵션에 노출됐을 경우 들을 수 있는 표현이다. 즉, 근처에 블러드 오우거 세트를 입고 있는 녀석이 히르칸에게 접근 중이란 의미!
더불어 블러드 오우거 세트의 값어치가 어느 정도인지, 히르칸은 누구보다 잘 안다.
“통성명이라도 해볼까?”
끼릭, 끼릭!
키스하듯 이를 맞물리고 있는 두 자루의 검이 내뱉는 소름 끼치는 소음 사이로, 히르칸이 질문을 던졌다.
그런 히르칸의 질문에 상대는 무시 대신, 대답을 택했다.
“루트비어.”
루트비어.
북미에서 인기가 많은 탄산음료 중 하나다. 콜라, 사이다 같은 이름이다. 당연히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을 수 없다.
“포커 팀, 클로버 소속이었나?”
사실 히르칸은 굳이 그렇게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 아니더라도, 상대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회탈이 기억해주니까, 기분이 괜찮군.”
클로버 부대.
그들 전부를 히르칸이 기억하고 있을 리 없다. 실력자들만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 그 속에서 루트비어는 핵심적인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실력자였다.
‘이 새끼도 장난 아닌데.’
그 핵심적인 역할이란 히르칸과 같다.
돌격대장, 몬스터의 몸에 달라붙어 아머 브레이킹과 데미지 딜링을 하는 전장의 꽃, 스트라이커!
실력은 히르칸이 보기에 이제까지 무명으로 지낸 게 신기할 정도, 이 정도 실력이면 이름을 떨치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을 텐데 어떻게 버텼는지 의문이 들 정도, 그 정도였다.
‘낚였군.’
그런 그가 굳이 이렇게 히르칸의 말을 받아주는 건, 당연히 이 역시 노림수이기 때문이다.
히르칸이 곁눈질로 주변을 살폈다. 하나둘, 히르칸을 포위한 자들이 포위망을 좁혔다. 개중 한 명이 입고 있는 블러드 오우거 세트가 유독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런 히르칸의 한눈팔기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이 루트비어가 자기가 한 말을 이어갔다.
“하회탈을 잡으면 기분이 더 괜찮겠지만.”
히르칸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차라리 여기서 아누가스가······.’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다. 제아무리 히르칸이라고 해도 클로버 부대를 이런 곳에서 상대할 순 없다. 상대를 하더라도 주도권을 히르칸이 쥔 상태에서 해야 그나마 승산이 있다.
‘아누가스 님, 제발 나와주세······.’
이제는 히르칸이 자신을 그토록 다급하게 만들던 원흉에 무언가 기대를 걸 정도.
그 순간.
- 어? 내 마력?
- 무슨 일? 어? 내 마력?
- 응? 너희도? 나도 마력이 갑자기 사라졌는데, 뭐야? 버그야?
- 하회탈이 스킬을 쓴 건가?
갑자기 보이스톡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그 어수선함에 하회탈이란 대어를 앞에 두고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던 루트비어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가겠는데, 그 소란은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었다. 정신이 사나워질 정도.
낚시꾼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그토록 기다리던 대어랑 씨름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오면 신경질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루트비어가 히르칸을 앞에 두고 소리쳤다.
“전투 중이다! 전투에 집중해!”
보이스톡을 향한 외침이었지만, 히르칸에게도 닿았다. 히르칸은 그 외침에 미소를 지었다.
‘마력이 삭제된 걸 보면, 아누가스가 눈을 뜬 모양이군. 여기서 놈이 이렇게 반가울 날은 앞으로도 없겠지.’
“그래, 열심히 집중하세요. 열심히.”
그 순간 히르칸의 등 뒤에서 기사(奇事)가 일어났다.
쩌적!
멀쩡하던 바닥이 갈라졌고.
쿵!
그 갈라진 바닥 사이로 네 개의 팔을 가진 거인이 육중한 모습을 드러냈다.
갈라진 바닥, 절벽이 되어버린 그곳을 기어 올라온 네 팔의 외눈박이 거인은 눈을 뜨고 있었다. 보석보다 영롱하기 그지없는 푸른색의 거대한 눈동자를 있는 힘껏 부라리고 있었다.
[아누가스가 눈을 뜹니다. 모든 존재의 마력을 먹어치웁니다.]
아누가스, 영혼을 먹는 거인의 등장이었다.
3.
아누가스.
눈을 뜨는 순간 반경 5백 미터 내의 모든 이들의 마력은 그대로 제로가 되어버린다. 마법사들과 사제들에게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특수능력이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등골이 싸늘해지는 건, 그 아누가스와 몸으로 부딪쳐야
하는 스트라이커들과 탱커들이다.
탱커와 스트라이커에게도 마력도 중요하다. 그들의 스킬은 공짜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더욱이 그들이 전투 중에 사용하는 스킬의 횟수와 가짓수는 생각 이상으로 크다.
그 모든 걸 전투에서 강제로 배제해야 한다는 것, 이제까지 당연하게 써온 것을 빼앗긴다는 것, 마치 공기가 없는 곳에서 싸워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누가스의 전투 스펙이 약하냐? 이 역시 아니다. 아누가스는 체력이나 공격력이 압도적으로 강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중대형 급 보스 몬스터에 어울리는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더욱이 네 개의 팔에서 나오는 전투 방식은 유저들에게 굉장히 까다로운 전투를 강요했다. 간단한 예로, 아누가스가 두 개의 팔로 유저의 양팔을 잡고, 남은 두 팔로 사로잡은 유저의 몸뚱이를 마음대로 유린해도 당하는 유
저 입장에서는 뭔가를 할 수가 없다.
스킬이라도 써서 그 상황을 모면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때문에 제대로 된 조치 없이, 준비 없이, 그냥 갑작스럽게 아누가스와 조우한 상황에서 양팔을 잡힌다면······.
“젠장! 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이 나온 거야!”
그 순간 끝이다.
그 사실을 클로버 부대는 하회탈을 잡기 위해 하회탈과 거리를 좁히던 동료가 아누가스에게 이렇다 할 발버둥조차 치지 못한 채 당하는 걸 보는 순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광경을 히르칸과 여전히 대치 중인 상황에서 바라본 루트비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회탈이 도망치던 게 이놈으로부터?’
왜 하회탈이 그토록 빠르게 도망쳤는지, 이제는 이해가 된다. 이런 괴물이 소리없이, 조짐없이, 흔적도 없이 다가오는데, 루트비어라도 도망쳤을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 하회탈 역시 섣부른 움직임 없이 대치 국면을 고수하고 있었다.
‘블러드 오우거 세트의 옵션이 아누가스의 어그로를 끈 건가? 그거 입어줘서 정말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사실 이건 히르칸이 마음이 넓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히르칸은 괜한 움직임으로 간신히 벗어난 아누가스에게 다시 한 번 타깃이 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 심중을 알 리 없는 루트비어가 질문을 던졌다.
“저놈을 알고 있나?”
“모르진 않지.”
히르칸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지금 히르칸도 등골이 싸늘했다. 지금 뒤에서 아누가스가 등장했는데, 기분이 편할 리 없다. 솔직히 지금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도, 여유 있는 척 연기를 하는 것도, 숨이 턱턱 막히는 일이었다.
“괴물을 데려왔군.”
“데려와? 난 도망치는 중이었고, 날 막은 건 그쪽이야. 내가 먼저 덤벼든 건 아니라고. 누구 과실이 더 큰지 보험사에 물어볼까?”
“······같이 잡을 생각이 있나?”
이 순간 루트비어가 갑자기 히르칸에게 동맹을 제안했다.
루트비어에게 그 정도의 판단력은 있었다. 하회탈을 잡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지만, 모든 마력을 사라지게 하는 정체불명의 괴물을 앞에 두고 하회탈을 잡는 건 상정 범위 밖의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등장한 괴물, 아누가스를 정말 잡을 생각을 이런 제안을 한 건 아니다. 이 제안의 목적은 따로 있다.
‘하회탈하고 싸우는 것만큼은 피해야 해.’
하회탈과 아누가스, 둘을 상대하는 걸 피하기 위한 것.
그 경우가 최악이다.
“싫은데?”
그런 루트비어의 의중을 히르칸이 모를 리 없다. 히르칸은 아예 활활! 불타오르는 루트비어의 심중에 기름을 끼얹었다.
“내가 올린 초창기 영상 중에 황금 해골 편이라는 영상을 봤는지 안 봤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일이 끝나고 그 영상을 보면 기분이 여러모로 새로울 거야. 보고 리플 남겨줘.”
참고로 루트비어는 하회탈이 올린 황금 해골 편을 봤다. 황금 해골을 이용해 자신을 도발한 유저들을 역으로 엿 먹인 그 영상을 통해 하회탈이 얼마나 영리하고, 야비한 유저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루트비어는 이 순간 작정했다.
‘하회탈과 같이 죽는다.’
최선도 차선도 택할 수 없다면, 최악 대신 차악을 택하는 것!
루트비어는 지금 이 순간 하회탈과 함께 엉망이 된 채 아누가스에게 같이 죽는 걸 택했다.
카앙!
각오를 마친 루트비어가 긴장된 대치를 풀었다. 히르칸과 대치 중인 검을 밀어냈다. 검을 휘두를 시간과 자유를 확보한 루트비어가 그대로 검을 높게 들었다.
큰 움직임, 자연스럽게 허점도 커졌다.
루트비어는 그런 허점을 드러내는 대신, 히르칸에게 보다 강한 일격을, 데미지를 줄 생각이었다.
뼈를 주고 뼈를 취할 속셈!
히르칸과 상처투성이 개싸움을 할 생각이었다.
‘응?’
그런데 검을 내리치려는 루트비어의 시선에 히르칸의 존재가 보이지 않았다.
루트비어가 검을 밀어내는 순간, 히르칸은 그걸 버텨낸 후 역공을 취하거나 대비를 하지 않았다. 마치 자해 공갈단처럼, 툭! 치니까 뒤로 억! 하고 넘어갔다.
철퍼덕!
통나무처럼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그 어떤 전투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 루트비어가 이제껏 워로드에서 해온 그 어떤 전투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젠장!’
경험하지 못한 일 앞에서는 제아무리 대단한 실력자도 대응을 할 수 없는 법.
결국 루트비어의 온 힘 가득한 검은 애꿎은 허공만 가른 후에 애처롭게 바닥만 내리찍었다.
그 사이 히르칸은 옆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육중한 갑옷이 무색할 정도로 능숙한 솜씨였다. 결코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렇게 몸을 피한 히르칸이 자리에서 잽싸게 일어나고, 곧바로 전장을 향해 소리쳤다.
“땡큐!”
“저 새끼 잡아아아!”
루트비어가 히르칸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컥!”
그 순간 아누가스의 팔 중 하나가 루트비어의 팔을 잡았다. 루트비어가 아누가스를 바라봤고, 그 광경을 보던 히르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를 빠져나갔다.
< 55화. 잡거나, 잡히거나 (1).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