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고대의 힘 (3). >
6.
테르베 성벽 너머.
본래는 격전지라는 워로드에서 마이너한 콘텐츠를 즐기던 유저들만이 알고 지내던 이곳은 이제 워로드를 즐기는 유저라면 모두가 알 수밖에 없는 메이저 무대가 됐다.
이 무대에서 빅스마일 길드를 대표하는 킬러 싱글레, 그가 섬뜩하지만, 인상적인 별명을 얻었고, 거침없이 질주하던 히드라 길드가 크게 무너졌으며, 하회탈이 이제는 일인군단이 되어 30대 길드를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워로드의 역사적 사건들이 연이어 펼쳐진 무대는 이제 신비와 로망과 낭만과 모험과 탐험마저 품었다.
노스랜드는 자연스럽게 핫플레이스가 됐다.
레벨이 되는 유저들, 아니 레벨이 되지도 않는 유저들조차 테르베 성벽을 넘어 노스랜드로 향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이런 노스랜드는 유저들의 꿈과 낭만을 보여주는 천국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세상은 노스랜드가 하회탈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 어떤 길드도 소유권이나, 관리권, 자치권 따위를 주장할 수 없었고, 하회탈은 자기 영역을 관리할 생각이 없었다.
더욱이 노스랜드는 그 어디에도 리셋 포인트로 삼을 만한 성이나, 마을이 없었다. 유저들이 모이는 장소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가소로운 장소일 뿐, 거점이 될 수 없었다. 죽으면, 모두가 테르베 성벽으로 돌아갔
다.
온갖 종류의 비매너 행위를 해도 당장 그것을 막아주고, 관리해줄 사람이 없으며, 문제가 생겨서 상대를 PK로 처치해도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는 세상.
노스랜드은 어느 순간 무법천국이 되어 있었다.
그런 무법천국에서 살아남은 채 여전히 노스랜드에서 게임 플레이를 하는 이들이 정상일 리 없다.
“우리가 몇 개 챙겼지?”
“아까 잡은 놈들 것까지 합치면 일곱 개째.”
“벌이가 좋네. 다들 아이템도 짱짱하고. 여기서 1년 치 게임비 뽑을 수 있겠는데?”
목줄 풀린 투견처럼, PK를 일삼는 유저들이 무법의 무대에서 무법을 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게 나름 게임의 재미라면 재미였다. 워로드는 시스템상 PK를 막지 않는다. 페널티를 주지도 않는다. 워로드는 PK를 워로드를 즐길 수 있는 콘텐츠로 치부했다.
하물며 지금 이 세 명, PK로 얻은 손목시계의 숫자를 세고 있는 그들은 이 재미에 한 가지 재미를 더 추가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이거 쓰면 끝이라니까, 끝! 내가 진작에 써먹자고 했잖아! 여하튼 좋은 걸 말해줘도 이해를 못 한다니까.”
“그래, 너 똑똑해서 좋겠다. 그 좋은 머리로 대학에서도 열심히 써먹지 그랬나?”
“시비 거는 거냐?”
“야야, 그만둬! 같은 가면 쓴 놈끼리 싸우면 보는 쪽에서는 정신 사나우니까.”
검사, 마법사, 사제.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진 그들은, 지금 워로드에서 아이언맨이나 배트맨보다 훨씬 더 유명한 이의 얼굴을 빌리고 있었다.
“그래도 하회탈이 이렇게 잘 먹힐 줄이야. 이것만 봐도 애들이 일단 겁부터 먹더라.”
하회탈.
그들이 쓰고 있는 가면의 정체다.
물론 그들과 하회탈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접점도 없다. 굳이 무언가 관계를 덧붙이자면 스타와 팬 정도의 관계, 지금 관계를 보면 피해자와 사기꾼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터.
사실 그들만 이런 짓을 하는 건 아니었다. 워로드 곳곳, 마을이나 성에서 하회탈 가면을 쓴 자를 찾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하회탈의 명성을 수작에 이용하기 위해 가면을 쓰는 이들 역시 적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테르베 성벽 너머, 노스랜드에서 하회탈의 존재감은 그 어느 곳보다 강하다.
“여긴 하회탈 영역인데, 당연한 일이지.”
“우리도 우리끼리 보면 가끔 깜짝깜짝 놀라잖아.”
존재감이 강한 만큼, 효과도 강했다.
원래 어느 장소든 어지간한 유저들에게 사냥터에서 하회탈 가면을 본다는 건, 가슴 떨리는 일이다. 하회탈의 팬들에게는 혹시? 하는 기대감에 가슴이 떨리고, 하회탈한테 안 좋은 짓을 한 인간들은 혹시? 하는 섬뜩함에 가슴
이 떨린다.
그 떨리는 가슴을 역으로 이용하면, 쏠쏠한 재미를 볼 수 있고, 지금 세 명은 그 재미를 느끼는 중이었다.
우어어!
그런 그들의 귀에 울음이 들렸다.
‘해머 헤드다!’
독특한 그 울음소리의 주인을 단숨에 특정한 그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대화를 멈추고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후에 다시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시계 좀 더 챙길까?”
필사적으로 게임을 하는 유저들의 허점을 노린다는 것, 야비하기 그지없는 그 행위를 논하는 그 셋에게 거부감은 없었다.
“견적부터 보고 작업에 나서자고.”
“이번에도 맛있는 놈이었으면 좋겠는데.”
“이러다 맛 들리겠어.”
오히려 그들은 입맛을 새로운 희생양을 만들기 위해 소리가 난 방향으로 잽싸게 움직였다.
7.
“젠장!”
하회탈 가면을 쓰고, 마법사 로브를 뒤집어쓴 유저의 몰골은 거친 소리를 내뱉는 유저의 모습처럼 별로 좋지 못했다. 마치 얼음으로 된 옷을 한 겹 더 입은 듯, 큼지막한 얼음 조각들이 유저의 옷 곳곳을 얽매고 있었다.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그 얼음 덩어리는 누가 보더라도 거추장스러운 족쇄였으니까.
[서리의 힘이 뼛속으로 침투합니다. 모든 능력치 및 이동 속도가 감소합니다.]
하물며 이곳은 수풀이 무성한 밀림, 약간은 불쾌하기까지 한 열기가 가득한 곳에서 오한을 느낀다는 건, 불쾌함이나 기분이 나쁜 수준을 넘어 당혹스러운 일이이다.
그러나 마법사 유저를 정말 당혹스럽게 만드는 건, 자신의 눈앞에서 하얀 입김을 토해내는 해골 전사들이었다.
“젠장!”
같은 소리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마법사, 서비드의 머릿속에 이 순간 대항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그가 쓰고 있는 하회탈이란 가치에 어울리는 행동은 아니었다. 워로드에서 하회탈이란, 그 무엇도 해내는 불굴의 의지와 행
동력과 능력을 가진 위대한 영웅을 의미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의 처지에 처한 이라면, 모두가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비드가 마주 본 해골 전사들, 그 너머에는 하회탈에 가장 어울리는 유저가 있었으니까.
진짜배기, 세 번째 시대의 개막을 알린 자, 히르칸!
그가 그곳에 있었다.
더불어 그 진짜배기 하회탈을 서비드가 적으로 마주하는 과정은, 특별할 것 없었다. 혼자서 거인형 몬스터, 해머 헤드를 상대하는 유저를 보는 순간 서비드와 동료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선공을 날렸고, 그 이후 선공을 날
린 대가를 서비드의 두 동료가 치렀다.
이제 서비드, 본인만 대가를 치르면 이 사고는 별거 아닌 해프닝으로 종료될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시계는 전부 드릴 테니까 목숨만 살려주세요.”
이 순간 서비드가 장고 끝에 내뱉은 건 진심 어린 사과였다. 그 외에 솔직히 그가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하회탈이 그에게 자비와 아량을 베푸는 게 서비드가 두 다리 멀쩡히 테르베 성벽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
일한 방법이었다. 물론 두 손목이 무사할지는 의문이겠지만.
더욱이 지금 하회탈은 서비드가 영상으로 수도 없이 봤던 하회탈이 아니었다.
입고 있는 값비싼 갑옷에는 서리가 맺혀 있었고, 투구 사이로 보여야 하는 해골 전사의 눈빛은, 평소와 달리 불꽃이 아닌 보석처럼 빛나는 얼음조각이었으며, 투구에서는 쉴 새 없이 하얀 입김이, 차디찬 숨소리가 흘러나왔
다.
그저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적으로 마주한 이들을 실제로 소스라치게 만드는 냉기였다.
“제발! 다시는 이런 짓 안 하겠습니다!”
그 한기 앞에서 서비드는 다시 한 번 절박한 심정을 담아 용서를 구했다.
히르칸은 그런 서비드의 외침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손가락을 두 번 튕겼다.
대치하고 있던 해골 전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서비드를 향해 동시에 덤벼들었다.
“젠장, 이 개새끼!”
결국 히르칸을 향한 본심을 토해내는 서비드. 그게 그가 히르칸 앞에서 뱉은 마지막 말이었다. 해골 전사들은 서비드가 그 말 다음으로 추가적인 저주를 퍼부을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서비드의 몸뚱이를 토막 냈다.
히르칸이 그런 서비드에게 다가간 건, 해머 헤드를 처리한 해골 기사 둘이 돌아왔을 때였다.
자신을 위협할 요소가 전부 제거됐을 때 히르칸은 서비드의 시체 근처로 이동했다.
자신의 심볼을 얼굴에 단 그들을 바라보는 히르칸의 심정은, 생각 이상으로 담백했다.
‘미친놈들.’
기분 나쁠 건 없었다. 애초에 하회탈이 히르칸만이 창조해낸 것도 아니다. 누구든 쓸 수 있고, 만드는 것 역시 어렵지 않다.
그리고 누구든 써도 히르칸은 상관없었다.
‘내가 요즘 너무 착하게 지낸 모양이야. 이런 놈들이 하회탈을 쓸 엄두를 내다니.’
하회탈을 정의의 상징으로 만들 생각이 없으니까. 히르칸이 원하는 하회탈의 이미지는 30대 길드의 실력자들조차 겁을 먹고, 그들이 하회탈을 따라 하는 자들에게 화풀이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뭐, 덕분에 용돈은 벌었군.’
더불어 히르칸에게 하회탈을 쓰는 인간들은, 언제든 잡아도 뒤탈 없는 몬스터와 같다.
시계를 챙긴 히르칸이 고개를 돌려 해골 전사와 해골 기사를 바라봤다. 그들을 바라보는 히르칸의 입가에 그제야 미소가 번졌다.
고대의 힘 서리의 효과에 만족해야만 나올 수 있는 미소였다.
‘기대 이상이다.’
얼어붙은 왕국을 떠난 히르칸은 테르베 성벽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레벨업을 위한 사냥을 했다. 동시에 서리의 힘을 실전을 통해 제대로 확인하고, 분석했다.
결과는 지금 지은 미소가 오히려 부족하게 보일 정도로 최고였다.
해골 부하들이 보여주는 능력은 백점만점에 백점을 주어도 부족할 정도였다.
서리의 힘을 부여하는 순간, 모든 해골 부하들의 능력치 및 이동속도가 20퍼센트 상승했다. 여기에 접촉한 주변 대상에게 적용되는 오한 효과는 여러모로 유용했다. 심지어 노출된 효과가 길어지면, 오한 효과는 동상 효과로
바뀌었다.
서리 골렘 역시 최고였다. 등장하는 순간 삽시간에 주변에 있는 모든 적에게 오한을 느끼게 만들고, 단단해지기 스킬을 사용할 경우 그 단단함은 흙골렘 때와는 비교를 거부했다.
서리 본 아머 역시 빼놓을 수 없었다. 닿은 대상을 오히려 얼어붙게 만드는 서리 본 아머는 사냥은 물론 PK에서 그 유용성이 무궁무진했다.
개중에서도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보여준 건 뼈폭탄이었다. 서리의 힘으로 강화된 뼈폭탄은 터지는 순간, 기존 뼈폭탄보다 강력한 데미지를 주는 건 물론, 폭발 범위만큼 대상을 얼려버렸다. 빠르게 동상 효과를 주는 건 물론,
대상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역할도 톡톡히 했다.
물론 아쉬운 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마력 소비가 예상 이상으로 큰 것만 빼면······.’
일단 고대의 힘 서리를 발동하는 순간, 서리의 힘에 영향을 받는 모든 스킬의 마력 소비량이 2.2배가 됐다. 소환은 물론 유지에 드는 마력 소모량 역시 2.2배가 됐다. 최근 마력 스탯이 크게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히르
칸이지만, 서리의 힘을 발동한 상황에서는 소환할 수 있는 모든 해골 부하를 소환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여기에 서리의 힘이 오로지 소환 스킬 트리에만 적용된다는 것 역시 아쉽다면 아쉬운 일이지만, 그 부분은 이미 진작부터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여러모로 서리의 힘은 대단했다. 평소라면, 예정대로라면 이 강력함에 취했을 것이다.
‘시르, 그년도 이 정도는 하겠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히르칸은 이 놀라운 힘이 자신만이 가진 힘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 신경 쓰였다.
히르칸은 해골 전사들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년하고 대체 언제까지 싸워야 할지, 이제 오히려 궁금할 지경이군.’
8.
유명인의 소문은 불이 번지는 것보다 빠르게 퍼진다.
하회탈과 우레여왕.
당연히 워로드의 최고 유명인이 된 이 둘에 관한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들불조차 가소로울 정도로 엄청났다.
우레여왕의 경우에는 소문이라기보다는 본인 스스로가 광고를 시작했다.
우레여왕은 손에 넣은 고대의 힘 ‘불길’의 위력을 가감 없이 우레사냥꾼 길드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영상을 통해 보여줬다. 다양하면서도 강력한 스킬과 불길의 힘을 섞어 사용하는 우레여왕의 존재감은 유저들에게 놀라
움을 주었고, 경쟁자들에게는 박탈감을 줬다.
- 이거 너무 사기 아니야?
- 다른 유저들하고 비교가 안 되네.
- 고대의 힘이란 걸 손에 넣으면 다 이 정도가 가능한 거야? 아니면 이 스킬만 특이한 거야?
- 젠장, 나도 금수저 물고 태어났으면 저런 것쯤이야 일도 아닐 텐데!
- ㄴ 금수저가 아니라, 토봇 소프트 창립했어도 넌 안 됨.
- ㄴ 동감.
하회탈의 경우에는 분명한 소문이었다. 하회탈은 스스로 자신이 얻은 것을 공개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전투를 용케 찍은 유저들이 올린 영상이 소문의 시발점이 됐다.
기존에 하회탈이 부리던 해골 군단이 아니라, 서리라는 흔적을 남기는 해골 군단의 존재는, 누가 보더라도 하회탈이 새로운 힘을 손에 넣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서리 해골의 등장!
유저들은 하회탈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이 결과에 대해서 당연히 관심을 가졌다.
- 리치왕이네.
- 리치왕이야.
- 리치왕은 좀 그렇고, 하회탈은 엄청난 부자이니까 별명으로 리치리치 어때?
- ㄴ 이거 괜찮네.
- ㄴ 리치리치 찬성! 이걸로 몰아붙이자!
물론 그 둘 외에도 이슈가 될 사건들이 넘쳐났다.
2차 승급의 등장으로 인해 보다 강력해진 유저들이 보여주는 전투 영상은 예전보다 훨씬 더 화려했고, 차츰 드러나는 고대의 힘 콘텐츠에 대한 정보 역시 유저들의 흥미를 단단히 붙잡을 만큼 매력적이었으며, 30대 길드에
서 하위로 치부 받던 길드들의 약진 역시 흥미 넘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넘치는 콘텐츠 속에서 워로드의 유저는 물론, 워로드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라이브 방송, 유튜브 방송, 유료 영상, 유료 티켓, 마케팅 시장은 절정에 다다랐다. 게임을 잘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예전에는 상
상조차 힘들었던 돈과 명예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됐다.
바야흐로 르네상스의 개막!
그 르네상스 시대의 개막과 함께 하회탈의 얼어붙은 왕국 영상이 공개됐다.
8.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로매니는 대화를 마치는 순간 머리에 쓰고 있던 헤드셋을 그대로 뒤편에 있는 침대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의자에 앉은 채로 주먹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기어코 해냈다.’
최근 로매니는 제대로 된 잠을 잔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이 순간 로매니는 피곤함보다는 오히려 넘치는 뿌듯함에 불면증마저 걸릴 기세였다.
‘설마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하고 공동 작업을 하게 될지도 몰랐지만, 이렇게 대단한 걸 해낼 줄이야!’
움켜쥔 주먹이 로매니의 머리 위로 솟아올랐다.
모든 것의 시작은 하회탈이었다. 하회탈이 어마어마한 양의 영상을 보내줬다. 얼어붙은 왕국에서 찍은 영상으로, 몇 분으로 나눌 수 있는 분량이 아니었다. 무려 20일 치의 영상이었다.
그 영상을 보내면서 하회탈은 주문이 아니라 질문을, 부탁에 가까운 질문을 했다.
이 영상을 2시간에서 3시간 안팎의 장편 영상, 영화처럼 만들어줄 수 있냐고.
처음 그 질문을 받는 순간,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편집을 통해 단편 영상을 만드는 것과 장편, 그것도 영화를 만드는 건, 차원이 다르다. 로매니의 궁극적인 목표가 영화 제작이었지만, 지금 당장 그걸 가능케 할 역량이 자신에게 없다는 걸 로매니 본인이 그 누구보다 잘 알
고 있었다.
미안하다, 나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그런 대답에 하회탈은 재차 질문했다.
다른 사람과 공동 작업도 괜찮고, 돈이 얼마가 들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낼 수 있으니, 시도해달라는 부탁.
거기서 로매니는 일단 알아봤다. 인맥을 통해 영화 제작 관계자들에게 의사를 물어봤다.
그런데 마치 이런 날을 기다렸다는 듯이, 어마어마한 명성을 가진 이들이 오히려 소문을 듣고 로매니에게 공동 작업 참가를 요청했다. 개중에는 할리우드에서 베테랑으로 대우받는 실력자들도 있었고, 심지어 제작비가 수억
달러가 넘는 영화를 제작했던 할리우드 최고 수준의 감독의 적극적인 조언도 받았다.
심지어 그들이 받는 돈은 그들의 명성에 비하면 푼돈이나 다름없었음에도 그들은 그 어떤 때보다 열정적으로 작업에 참여했다.
‘그래, 다들 목이 말랐던 거지.’
당연히 그들의 열정은 돈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지금 시대를 바꾸고 있는 가상현실이란 세계, 그 세계에서 현재 구할 수 있는 재료 중 최고의 재료를, 워로드의 최고 실력자 하회탈이라는 재료로 제대로 된 작품을 한번 만들고 싶다는 마음!
그런 마음이 모여 나온 결과물은, 로매니의 기대 이상이었다.
그렇기에 로매니는 장담했다.
‘이 영상이 워로드······ 아니 가상현실 영상산업의 역사적 분기점이 될지도 몰라.’
만약 훗날 모든 영화 관계자들이 가상현실이란 무대를 통해서 영화를 제작한다면, 그들은 이번에 로매니와 동업자들이 만든 영상을 꼭 참고할 것이다. 로매니가 오래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과 스필버그 감독, 제임스 카메
론 감독의 영화를 질리도록 본 것처럼.
‘아카데미상에 가상현실 부분이 없는 게 아쉽군. 그럼 오스카 수상식에 참가했을 텐데.’
오스카 시상식에 참석하는 자신의 정장 입은 모습을 떠올린 로매니가 이내 실소를 머금었다.
행복하지만, 한편으로는 우습기 그지없었다.
그 순간.
‘응?’
로매니가 자신의 손목을 바라봤다. 손목에 찬 시계가 진동을 토해내며 전화가 왔음을 알려줬다. 발신자도 알려줬다.
로매니가 발신자를 보는 순간 곧바로 시계를 찬 왼손으로 허공을 흔들었다.
그러자 곧바로 로매니의 주변으로 전화기 모양의 홀로그램이 위성처럼 맴돌기 시작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 로매니 씨, 개인적인 대화 좀 가능하겠습니까?
근처에 있는 스피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얼마든지요.”
그는 이번 하회탈 영상 작업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가한 동료였다. 그 전까지는 이름조차 몰랐지만, 이제는 개인적인 대화를 나눠도 부족함이 없는 동료.
- 하회탈하고 만나고 싶은데, 다리를 놓아주실 수 있으십니까?
하지만 반대로 지금 이 제안을 쉽사리 받아줄 수 있을 만큼 친한 동료는 아니었다.
로매니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하회탈에게 이메일로 물어보겠습니다.”
로매니가 하회탈의 매니저도 아니고, 하회탈이 로매니하고만 거래를 할 필요도 없지만, 로매니의 가장 중요한 고객인 하회탈을 이런 식으로 갑작스레 소개해달라고 하는 건, 이 바닥에서 상도의가 아니었다.
- 그 이메일 주소를 알려······.
“그것도 물어보겠습니다.”
로매니는 짧은 말과 함께 자신의 주변을 맴돌던 전화기 모양의 홀로그램을 주먹으로 움켜쥐었다. 통화가 종료됐고, 로매니는 불쾌한 감정을 얼굴 위로 드러냈다.
왠지 자신만의 배우였던 하회탈이 이제는 자신만의 배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불쾌함.
그러나 이내 그 불쾌함은 씁쓸함으로 바뀌었다.
‘이번 영상만 공개되면, 아마 하회탈하고 작업하고 싶어 하는 메이저 제작사들이 줄을 서겠지.’
< 51화. 고대의 힘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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