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얼어붙은 땅 (3). >
8.
사고는 일순간에 일어난다.
“길드전을 수락한다!”
나탈이 히르칸의 숨겨진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고민하고, 나머지 인원들은 히르칸의 오만한 자신감의 위엄을 느끼며 긴장하고 있는 순간, 아폴로는 고민도 하지 못했고, 그 무엇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당장 자신의 감정을 내뱉었다.
“공격해!”
그의 이어지는 외침은 나름 결의에 차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아폴로의 외침이 남긴 건 몰아치는 눈보라마저 추위를 느낄 정도의 싸늘한 적막감 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 적막감은 꽤 길었다. 말을 뱉은 아폴로도 당황하게 할 정도. 물론 아폴로의 당혹감은 자신의 잘못된 행동, 실수를 자각해서 그런 건 결코 아니었다.
‘왜 아무도 안 움직여?’
명령을 내렸는데, 행동이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한 당혹감.
“길드전 수락하지.”
그때 히르칸이 말과 함께 양팔을 벌렸다.
‘그래, 아폴로. 나는 너를 믿었다.’
두 팔을 벌린 히르칸은 당장에라도 아폴로의 그 비대한 몸을 있는 힘껏 안아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아폴로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빅스마일 길드원 입장에서 두 팔을 벌린 히르칸에게서 볼 수 있는 건, 히르칸이 뒤집어쓰고 있던 하얀 털가죽 안의 갑옷이었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켰다.
히르칸의 갑옷, 대격전의 공포였던 백안의 기사 아가르도의 갑옷이었다. 잘못 봤을 리는 결단코 없다. 은빛 나신 같은 수려한 갑옷의 표면 위로 살아있는 잉어처럼 헤엄치는 얼룩무늬의 갑옷은 워로드에 오직 하나뿐이니까.
당연히 그 갑옷의 허리춤에 매달린 칼집, 그 안에 꽂힌 검 역시 아가르도의 검, 크라잉 소드일 터.
그 자체만으로도 위압감이 넘친다. 빅스마일 길드원들은 그런 위압감에 공포감마저 느꼈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군.’
‘젠장, 저 템세팅은 사기라고.’
빅스마일 길드는 아가르도와 상대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여기 모인 이들은 그 당시에 아가르도와의 결전에 참가했던 자들이다. 직접 아가르도와 부딪친 자는 없지만, 아가르도의 위용을 가까이서 보고, 느끼고, 들었다.
그 아가르도의 갑옷을 입은 하회탈…….
‘싸우기 싫어.’
‘먼저 덤비는 놈은 무조건 죽는다.’
어지간한 대형 보스 몬스터보다 더 무시무시한 괴물이나 다름없는 히르칸에게 일말의 망설임 없이 덤벼들 수 있는 유저가 과연 얼마나 될까? 하물며 아무리 모든 일에 희생양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 누구도 희생양을 자처하고 싶진 않은 법이다.
그 희생양을 자처하게 만들려면 카리스마와 존경심, 즉 리더십이 필요하고, 개중에 아폴로가 가진 건 단 하나도 없다.
‘안 덤비네?’
이 순간 히르칸은 얼어붙은 빅스마일 길드원들을 바라본 후에 곧바로 등을 돌렸다.
‘어?’
개전(開戰)이다.
이곳이 총이 있는 전장이었다면, 이미 총성이 빗발쳤을 것이다. 하회탈과 빅스마일을 서로를 향해 살의를 실천해도 된다.
그런 와중에 히르칸이 등을 돌리다니? 모두가 멍하니, 히르칸의 등을 바라봤고, 히르칸은 눈보라 사이에 자신의 모습을 감추었다. 해골 전사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뭐해! 잡아!”
아폴로가 재차 소리를 내질렀다.
“명령이다! 하회탈을 잡아! 명령에 따르지 않는 놈들은 페널티를 주겠어!”
이쯤 되면 명령이 아니라 협박, 빅스마일 길드원들이 하회탈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어영부영 이동했다.
그 모습을 보던 나탈은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까지도 계획한 건가?’
“시계를 챙겨라.”
“예.”
그 말에 다른 한 명이 소행크의 시체에 다가갔다. 소행크 그리고 싱글레의 손목시계는 멀쩡했다.
‘차라리 시계라도 가져갔으면, 그걸 빌미 삼을 수 있겠지만…… 그런 허점을 보일 리 없지.’
하회탈이 마음이 착해서 시계를 그대로 두었을 리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하회탈의 행동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준비된 것들이다.
“안 싸우실 겁니까?”
“누구랑?”
“그야…….”
여전히 적응하지 못한 눈보라 속 세상, 그 세상에서 하얀 털가죽이라는 보호색을 준비하는 준비성을 보여주며 예고도 없이 등장한 하회탈을 상대로 전쟁을 치른다?
“노스랜드 탐사는 포기한다.”
나탈은 하회탈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자신은 있어도, 이 전쟁터에서 승리할 자신이 없었다.
“무능함에 멍청함을 더할 필요는 없지.”
나탈은 말과 함께 싱글레의 시체 근처에만 선 채 버럭버럭 화를 내는 아폴로를 바라봤다.
‘추격의 귀재가 아니라 이용해먹기 딱 좋은 놈이었군.’
9.
히르칸은 눈밭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눈밭은 족적이 뚜렷하게 남기 때문에 추격을 당하기 쉽다. 예전에 스노우 필드에서 우레사냥꾼에게 당한 곤욕이 적지 않다.
하지만 눈보라가 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제한된 시야, 둔해진 감각, 혹한의 땅에서 짊어져야 하는 다양한 페널티…… 그런 요소 속에서 해골이 만든 족적과 히르칸이 만든 족적을 구분할 수 있는 유저가 과연 워로드에 얼마나 있을까?
하물며 히르칸의 해골 부하는 그냥 해골이 아니다. 뼈다귀만 있는 족속이 아니다. 일반 유저들도 입기 힘든 값비싼 아이템으로 무장한 전사들이다.
“젠장 해골 전사다!”
“주변 경계해!”
족적을 따라 조심히 접근했던 스트라이커와 탱커들은 기겁했다. 그리고 어쨌거나 해골 전사와의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
“습격이다!”
해골 전사들이 뒤에 대기하고 있던 사제와 마법사들을 덮쳤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일곱 번째 전투의 결과는 2대10. 해골 전사 열 마리가 박살이 났고, 빅스마일 길드원들 두 명이 게임오버를 당했다.
수적으로 본다면 명백한 승전. 하지만 빅스마일 길드원들의 얼굴 표정은 제 얼굴에 달라붙는 눈바람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이제 사제는…… 한 명 남았군.”
“한 명으로는 절대 남은 인원을 커버할 수 없어.”
“마법사도 넷밖에 없어.”
그들이 죽인 것 중에 하회탈은 없었다. 그 사실은 쿨타임과 마력이 해결되는 한, 그들은 이 전투를 죽을 때까지 치러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이야.”
서른 명 가까운 전력으로 한 명을 상대한다. 이보다 가소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하회탈과 맞서 싸우게 된 빅스마일 길드원들은 그 가소로움의 대상이 자신들이 된 것 같았다. 자신들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처지의 약자라고 생각됐다.
“아폴로 간부는 뭐라고 해?”
“무조건 잡으라고 지랄을 하는군.”
“그렇게 잡고 싶으면 본인이 잡던가. 심지어 스트라이커랑 사제 한 명을 그 인간 호위로 배치하는 바람에…….”
불리한 처지 속 약자가 내뱉을 수 있는 건 결국 푸념뿐. 하지만 얼어붙은 땅은 그들에게 푸념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 쿨타임이야.”
“쿨타임? 당장 동상 페널티에 걸리기 전이라고!”
“쿨타임은 나도 어쩔 수 없다고!”
사제가 한 명이 됐다는 건, 상태이상 저항 스킬을 받을 수 있는 숫자가 줄어든다는 의미.
그동안 사제의 버프 스킬 덕분에 동상을 비롯한 치명적인 페널티로부터는 버틸 수 있었던 그들에게 드디어 혹한의 땅이 진면목을 드러냈다.
“이대로 얼어 죽겠군.”
자포자기.
마음 같아서는 도망치고 싶지만, 길드의 페널티가 두려운 그들은 도망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사제와 마법사를 지키기 위해 그들을 중심으로 뭉친 채 이동하는 것, 그게 전부였다.
추적이 아닌 방황.
그런 그들에게 찾아온 건 파랑새와는 아주 거리가 먼, 활활! 불꽃으로 타오르는 거대한 와이번 파이어 골렘이었다.
“미치겠군!”
“실드! 실드 마법 써!”
허둥지둥,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공격에 제대로 대응할 줄 아는 이는 없었다.
콰앙!
와이번 파이어 골렘은 추락하자마자 곧바로 폭발했고, 고작 하나의 실드 마법만이 그 폭발을 막아주는 우산이 되었다. 그 우산의 덕을 본 건 마법사 두 명과 사제 한 명이 전부였다.
“젠장!”
의외로 사망자는 없었다. 파이어 골렘의 특수스킬, 사망폭발은 위력적이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 역시 160레벨 이상에 나름 준수한 아이템 세팅을 한 실력자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진형의 붕괴였다. 마법사와 사제를 구하기 위해 뭉쳐있던 진형이 말 그대로 퍼졌다.
“어때?”
“난 괜찮아!”
“죽은 사람? 다친 사람은?”
무너진 진형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데 시간을 썼고, 대기하고 있던 해골 전사들은 그 시간을 손에 쥔 본 스피어를 있는 힘껏 던지는데 썼다.
“본 스피어다!”
우왕좌왕, 파이어골렘의 자폭 공격 속에서 당황한 빅스마일 길드원들에게 날아온 본 스피어는 결국 그들을 공황 상태에 빠뜨렸다.
그 혼란의 도가니를 향해 오우거 골렘 한 마리와 두 마리의 해골 기사 그리고 열다섯 마리의 해골 전사들이 돌진했다.
“하회탈?”
“아…….”
그리고 이번에는 그 무리의 중심에 하회탈이 있었다.
일곱 번의 습격 동안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하회탈의 등장, 그것은 가장 확실한 승리 선언이었다.
10.
“대체 왜 스무 명 넘는 놈들이 하나를 못 잡는 거야!”
전멸.
그 말도 안 되는 결과를 죽은 이들로부터 통보받았을 때, 아폴로는 분노와 억울함, 우려와 걱정, 짜증 같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으로 감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아폴로 길드라는 제 이름을 딴 길드를 운영할 때보다 훨씬 더 높은 레벨, 뛰어난 실력자들로 구성된 서른 명 가까운 전력이 고작 한 명에게 이토록 무참하게 유린당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심지어 그게 저주할 정도로 싫은 하회탈이라는 사실에, 아폴로는 그냥 현실을 외면했다.
“30대 길드도 별거 없군. 고작 그딴 놈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전멸이라니.”
푸념을 토해내는 아폴로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 그를 호위하기 위해 남은 스트라이커와 사제, 개중 한 명인 초우룽이 눈보라 속으로 저 혼자 사라지려는 아폴로를 향해 외쳤다.
“어디 가십니까?”
“끝났는데 이 추운 곳에 있어서 뭐하게! 돌아간다!”
아폴로는 전투 패배를 받아들이고, 이 혹한의 땅을 그냥 이대로 떠날 속셈이었다.
그 순간 초우룽의 목구멍 근처까지 한마디 말이 올라왔다.
‘이번 전투는 전멸전인데?’
하회탈은 분명하게 말했다. 전투는 어느 한쪽이 전멸할 때까지 이루어진다고.
항복선언은 없다. 게임오버만이 유일한 항복 선언이다.
그런데 지금 이 무대를 떠나겠다고?
‘미친놈!’
떠나는 시도는 해도 좋다. 얼마든지.
하지만 과연 하회탈이 아폴로와 호위를 제 발로 가뿐하게 떠나는 걸 허락해줄까?
초우룽은 이를 꽉 물었다. 그가 아는 하회탈이라면 절대 아량을 베풀지 않는다. 이제까지 하회탈이 아량을 베풀었다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으니까.
그런 초우룽의 생각은 현실이 됐다.
11.
소식은 조용할 땐 꼼짝도 안 하지만,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퍼진다.
노스랜드 쟁탈전 역시 그랬다.
가장 먼저 들린 소식은 히드라 길드의 노스랜드 탐사 소식이었다.
- 히드라 길드가 노스랜드 탐사 최초로 시도
- 노스랜드? 거기 지금 못 넘어가잖아?
- ㄴ 테르베 성벽을 통해서 넘어갔어.
- ㄴ 이제 죄다 테르베 성벽 넘겠네.
노스랜드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노스랜드로 갈 수 있는 방법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히드라 길드의 행보는 과연! 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 빅스마일 길드가 히드라 길드를 상대로 노스랜드 쟁탈전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곧바로 이어진 충격적인 소식이 워로드의 모든 이슈를 집어삼켰다.
노스랜드 탐사, 그 우선권을 두고 히드라 길드와 빅스마일 길드가 길드전을 치렀다는 것도 놀라운 소식이지만, 그 전투에서 빅스마일 길드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은 더 충격적이었다.
- 소행크가 졌어!
- 맙소사, 누가 소행크를 잡은 거야?
- 이걸 빅스마일이?
심지어 1대1 대장전의 패자는 워로드를 대표하는 최강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인 두 번째 머리 소행크.
30대 길드 중 가장 밑바닥이라고 여겨졌으며, 개중에서도 강력한 에이스의 부재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빅스마일 길드의 승리는 빅스마일 길드의 운명을 바꾸기에 부족함이 없는 계기였다.
- 싱글레? 누구야?
- 또 뉴페이스네?
빅스마일 길드의 주가가 가파르게 올랐다. 노스랜드 탐사가 세 번째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의 시발점이 되리라고 대부분이 예상하는 상황 속에서 그 주도권을 빅스마일 길드가 가장 먼저 잡은 셈이니까.
그리고 이 모든 걸 가능케 해준 싱글레의 명성에 사람들은 찬사보다는 긴장마저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한 유저의 존재감 앞에서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는 사건이 되었다.
- 하회탈이 빅스마일 길드와의 길드전으로 노스랜드 탐사 우선권을 손에 넣었어!
- 뭔 소리야? 길드전이라니?
- 대장전? 싱글레 대 하회탈?
- ㄴ 아니, 1대30
- ㄴ 1대30? 싱글레를 하회탈하고 해골 삼십 마리가 잡았다고?
하회탈, 그가 노스랜드의 주인이 됐다.
12.
손목시계와 재료 코인 및 보석으로 가득한 주머니를 짊어진 해골 전사의 걸음이 멈추었다.
주인이 걸음을 멈춘 탓이었다.
그 주인은 고개를 들어 몰아치는 눈보라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어둠을 바라봤다.
어둠의 정체는 성벽이었다. 마치 세상을 반으로 가를 것처럼 그 길이는 가늠하기 힘들었고, 몰아치는 눈보라마저 고개를 숙일 정도로 높이 역시 고개를 들어 성벽 끝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았다.
히르칸은 그 압도적인 위엄을 자랑하는 성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히르칸이 발걸음을 다시 내디디자.
[얼어붙은 왕국의 국경에 입장합니다.]
알림이 들렸다.
[타이틀 ‘얼어붙은 왕국의 방문자’를 획득하셨습니다.]
[타이틀 ‘노스랜드의 위대한 탐험가’를 획득하셨습니다.]
[타이틀 ‘시대개척자’를 획득하셨습니다.]
테르베 성벽을 떠난 지 20일째, 히르칸이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알려주는 알림이었다.
< 49화. 얼어붙은 땅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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