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얼어붙은 땅 (2). >
3.
얼어붙은 땅에 몰아치는 눈보라는 침입자들의 눈을 멀게 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강력한 한기가 엄습합니다. 모든 능력치 10퍼센트 감소합니다.]
[19분 후 동상에 걸립니다.]
[강력한 한기의 엄습에 갑옷의 내구도가 줄어듭니다.]
[강력한 한기의 엄습에 감각이 둔해집니다.]
이제껏 워로드 어디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혹한은 상상 이상으로 무시무시했다. 그런 무시무시한 혹한을 지금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두 유저, 싱글레와 소행크는 무시했다. 그저 시세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값비싼 검으로 서로를 겨누고 있을 뿐.
그런 그 둘의 만남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물론 첫 번째 만남은 지금처럼 서슬 퍼렇지 않았다. 둘이 처음 만난 건 꽤 오래전…… 그 둘의 레벨을 합쳐야 간신히 100레벨을 넘길 수 있을 무렵이었다. 긴 만남은 아니었다. 그저 서로의 명성을 알고 있었고, 그 명성이 궁금해서 얼굴만 보고, 악수만 나눈 게 만
남의 전부였다.
그 이후 만남은 없었다. 30대 길드 중 대부분의 길드들이 핸즈 길드의 도움을 갈구하는 상황 속에서도 히드라 길드만큼은 핸즈 길드와 거래를 하지 않았다. 비밀 엄수와 정보 보안을 그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히드라 길드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의 만남에서 그 둘은 자질구레한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두 번째 만남에서 서로를 죽여야 하는 처지가 됐지만, 딱히 의구심을 가지진 않았다.
스트라이커.
언제나 최전선에서 가로막는 것을 뚫고 지나가는 그들에게 주변 상황을 신경 쓸 이유는 없으니까.
그들이 해야 하는 건 오직 하나.
‘죽인다.’
‘끝낸다.’
그저 자신을 가로막은 것을 죽일 방법을 강구하는 것, 그뿐이었다.
4.
얼어붙은 땅이 혹독한 이유 중 하나는 몰아치는 눈보라를 피할 장소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페널티를 받고, 심지어 동상에 걸리는 순간 HP도 감소하는 얼어붙은 땅에서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 손으로 눈보라를 피
할 장소를 만들어야 했다.
의외로 그 방법은 쉬웠다.
이글루.
눈을 잔뜩 모아 봉분을 만든 후에 그 안을 토끼처럼 파고 들어가 만든 굴은 생각 이상으로 아늑했다.
나탈은 그 아늑한 공간 안에서, 아늑함을 무색하게 만드는 유저와 함께 있었다.
‘빅스마일의 새로운 간부 아폴로…….’
나탈과 함께 있는 이는 아폴로였다.
‘초상화를 본 기억은 있는데, 설마 이런 재주를 가지고 있을 줄이야.’
당연한 말이지만, 나탈이 좋아서 아폴로와 단둘이 이글루를 쓰는 건 절대 아니었다.
히드라 길드가 테르베 성벽을 넘은 지 보름째가 되던 날, 빅스마일 길드가 히드라 길드의 꽁무니를 잡았다. 두 무리 사이의 거리가 24시간 안으로 좁혀졌다. 24시간이란 필드 리셋 주기를 말함이다. 즉, 히드라 길드가 눈밭 위에 남긴 흔적을 빅스마일 길드가 쫓을
수 있는 거리가 됐고, 그때부터 추격전은 사실상 끝이 났다.
‘보기에는 그냥 욕심 많은 돼지인데…….’
추격전이 무의미하고, 이제는 서로 충돌만이 남아있을 때, 두 길드는 길드전에 합의했다.
패배한 쪽은 노스랜스 탐사를 포기하는 것, 방식은 단 한 명만을 대표로 내세운 1대1 단판 승부였다.
특별한 경우는 아니었다. 본격적인 길드전…… 과거 빅스마일과 트리플윙이 길드의 운명을 걸고 벌이는 길드전은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 이런 식의 길드전은 30대 길드 사이에서 자주 있었다.
무주공산을 두고 서로 죽을 때까지 싸우기보다는 단판 승부로 무주공산의 주인을 가리는 게 이득이며, 동시에 30대 길드가 서로 피를 보면서까지 주인을 정한 상황에서 다른 제삼자가 이의를 제기하기란 쉽지 않았으니까.
모든 합의가 이루어지는 순간, 전투에 임할 둘을 제외한 나머지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대기했다. 전투를 가까이에서 지켜봐 봤자 불상사가 일어날 가능성만 높아질 뿐.
무엇보다 이런 전투는 대개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게 싸우는 자들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개인의 영광이 아닌 조직의 이익을 위한 싸움이니까. 승자에 대한 박수도, 패자에 대한 위로도 필요 없다. 그저 싸움의 결과만 기록으로 남기면 될 뿐.
‘추격의 귀재일 줄이야.’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나탈은 길드전, 소행크와 싱글레에 대한 생각보다는 아폴로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초상화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나탈은 아폴로란 인간이 빅스마일의 간부라는 사실도 몰랐다. 그리고 굳이 기억해두고 싶지도 않았다. 히드라 길드가 준 정보에 따르면, 특별할 것 없으니 신경 쓸 것도 없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아폴로가 이끄는 추격팀이 일주일이나 되는 히드라 길드와의 거리를 기어코 좁혔다.
나탈은 싱글레가 빅스마일 길드의 심볼을 가슴에 단 것보다 추격을 이렇게 빨리 당했다는 것에 더 놀랐다.
“새로운 간부이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
‘아폴로란 놈이 정말 추격의 귀재인지, 아니면 다른 놈이 추격의 귀재인지…… 알아둬야 한다.’
소행크가 길드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상황에서 나탈 역시 자신의 방법으로 싸워야 한다.
그런 나탈의 심중을 알 리 없는 아폴로는 대답 대신 입꼬리를 한쪽만 올린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웃음을 머금은 그 모습은 무척이나 거만했다.
‘뭔가 있는 놈인가?’
나탈은 그 미소에 오히려 긴장했다. 나탈은 히드라 길드의 여덟 번째 머리다. 그 지위와 명성은 빅스마일의 새로운 얼굴, 그것도 그다지 보기 좋은 것도 아닌 얼굴이 저렇게 거만하게 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달리 보면, 아폴로에게 그런 거만함을 품을 무언가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나탈은 화를 내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보다 재주가 대단하시더군요. 용케 우리들 뒤를 쫓아오셨습니다. 거리가 꽤 됐을 텐데.”
“자기 주머니 단속도 못하는 사람 뒤를 쫓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재주라고. 어려울 건 하나도 없었지.”
아폴로는 말과 함께 이번에는 노골적인 비웃음을 머금었다. 딱히 무언가가 있어서 짓는 미소가 아니었다.
‘히드라 길드도 별거 아니군.’
아폴로는 그저 히드라 길드의 머리를 상대로 콧대를 마음껏 높일 수 있는 상황에 기분이 좋을 뿐이었다.
‘주머니 단속?’
반대로 아폴로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탈의 어지럽던 머릿속에 새로운 의혹이 샘솟기 시작했다.
‘설마?’
5.
카앙!
몰아치는 눈바람이 무색하게.
콰앙!
몰아치는 눈보라가 초라하게.
새하얗던 눈밭은 소행크와 싱글레의 격렬한 전투 앞에서 넝마가 되어버렸다. 쿨타임이 끝날 때마다 검기가 흩뿌려지고, 땅을 부술 위력을 가진 검격이 바닥을 내리찍는 상황에서 제아무리 혹독한 대지도 고고함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했다.
하물며 혹독한 대지도 버티지 못한 그 공세 앞에서 둘의 무구 역시 멀쩡할 리 없었다.
둘의 방어구는 찌그러진 고철을 엮어 만든 것처럼, 온전한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면 다행이었다. 거듭된 공세에 노출된 팔과 어깨, 그 부분의 갑옷은 더 이상 갑옷이라고 부를 수 없었고, 투구 역시 있는 힘껏 찌그러지고, 갈라져 있었
다.
그런 와중에도 그들이 쥔 검은 멀쩡했다.
맨몸으로 싸울지언정, 무기만큼은 최고를 들겠다! 워로드 최고의 스트라이커다운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들을 가장 심각하게 괴롭히는 건 서로가 주고받은 데미지가 아니었다.
[동상 상태에 빠집니다. 체력이 빠르게 감소합니다.]
[10분 후 치명적인 동상 상태에 빠집니다.]
[한기가 온몸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20퍼센트 감소하고, 움직임이 느려집니다.]
사제의 버프, 치료 스킬 한 방이면 가뿐하게 해결됐을 상처들은 사제의 부재 속에서 치명적인 상처로 변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이번 전투를 앞두고 그 둘은 약속을 했다. 소모 아이템은 쓰지 않겠다고.
‘변수가 많은 무대에서는 시간을 끌어서 좋을 건 없어.’
‘괜한 운에 기댈 바에는 실력으로 끝낸다.’
그 둘은 운에 기대기보다는 실력으로 결판이 나기를 원하고 있었다. 자기 실력에 대한 자신감의 증거였지만, 동시에 상대방에게 운이 따를 경우 승산이 없다는 부담감의 증거이기도 했다. 운이란 건, 누구에게 미소를 지을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니까.
하지만 거듭된 전투 속에서 그 누구도 쉽사리 승기를 잡지 못한 채 한계에 봉착하자, 그 둘은 저도 모르게 운이 따르기를 기대하기 시작했다.
‘뭐든 좋으니 실수를 해라.’
‘여기서 절대 질 수 없어.’
그리고 어느 순간, 운이 따랐다.
카앙!
운이 따른 자는 싱글레였다.
서로가 검을 휘두르고, 그 검이 교차하며 쇳소리를 토해내는 순간, 두 검이 서로 이를 문 채 끼득끼득!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는 순간, 백중지세였던 소행크가 밀리기 시작했다.
왜 밀리는 걸까?
싱글레는 그런 의문 대신, 전력을 다한 기합과 함께 소행크의 검을 더 세게 밀어냈다. 소행크의 팔이 저도 모르게 뒤로 젖혀졌고, 싱글레는 훤히 드러난 소행크의 가슴팍을 향해 몸통 박치기를 날렸다.
꽈광!
굉음과 함께 소행크가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자빠진 소행크의 가슴팍을 싱글레가 제 발로 콱! 밟았다. 운치 있는 대화는 없었다. 싱글레는 검을 거꾸로 잡고, 검을 내리꽂았다. 검극이 향하는 건 소행크의 가슴 언저리였다.
끼이이!
갑옷이, 쇳덩이가 날카로운 것에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푹! 피륙이 뚫리는 소리가 났다.
한계에 다다른 실력자를 끝내는데 필요한 치명적인 일격은 단 한 번이면 충분했다.
‘이겼다.’
소행크가 게임오버를 당했고, 그것을 그 누구보다 먼저 알게 된 싱글레는 이 순간 만족했다.
‘드디어 명성을 손에 넣었다.’
마땅한 만족이었다.
힘겨운 상대를 이겼고, 그를 통해 원하던 바를 전부 손에 넣을 수 있게 됐다. 이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서 그토록 고생을 하고, 치열하게 싸웠는데, 만족하는 게 당연했다.
그 만족감은 곧바로 싱글레의 몸에서 긴장감을 빼앗아갔다.
‘춥네.’
느끼지 못했던 추위가 느껴졌다. 살이 베일 정도…… 그런 추위는 아니었지만, 기분 좋은 수준의 추위는 아니었다.
그 추위 속에 싱글레가 고개를 들어 휘날리는 눈보라를 봤다. 이제 이 눈보라를 뚫고, 되돌아가는 순간 펼쳐질 영광을 떠올렸다. 싱글레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싱글레의 눈앞이 검게 물들었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검게 물든 싱글레가 마지막으로 들은 건, 짤막한 문장이었다.
6.
두 가지 소식은 동시에 나탈과 아폴로에게 전달됐다.
나탈이 받은 건 소행크의 미안하다, 라는 말이었고 아폴로가 받은 건 싱글레에게 누군가에게 당했다! 라는 말이었다.
그 소식을 받는 순간 그 둘은 동시에 이글루를 부수고 나왔다. 이글루 밖으로 나오는 순간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나탈은 이를 꽉 물었다.
‘전부를 잃었다.’
소행크는 패배했다. 이제 히드라 길드는 얼어붙은 땅에서 물러나, 테르베 성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어떤 소득 하나 없이!
이번 탐사를 위해 한 투자와 시간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그저 속이 쓰린 수준에서 넘어갈 만한 손해가 아니었다.
“모두 모여!”
그 무렵 아폴로는 분노했다. 아폴로의 외침에 빅스마일 길드원들이 모였고, 아폴로는 나탈을 향해 들으라는 듯이 소리쳤다.
“감히 개수작을 부리다니!”
허탈감에 빠진 나탈에게 그런 아폴로의 반응은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승부는 우리가 이겼다! 그런데 대체 왜 응징을 했지?”
아폴로의 되물음에 나탈은 잠깐 고민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는 고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물론, 이 순간 아폴로에게 할 수 있는 질문 역시 제한될 수밖에 없다. 나탈은 짧은 시간 동안, 가장 담백하면서도 효과적인 질문을 떠올리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싱글레가 죽었나?”
“발뺌을 할 생각인가!”
아폴로의 분노에 나탈의 머릿속에서 엉망이었던 퍼즐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하하, 나탈이 실소를 지었다.
반면 아폴로는 당장에라도 이곳에서 소규모 길드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1대1, 정정당당한 승부에서 이긴 자가 제삼자의 개입으로 시체 꼴이 됐다.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나탈은 헛웃음을 전부 삼킨 채 아폴로를 향해 말했다.
“우리가 아니다.”
아폴로는 대답 대신 나탈을 노려봤다. 그러는 사이 아폴로의 말을 들은 빅스마일 길드원들이 무기를 꺼내고, 마법 캐스팅을 시작했다. 낌새를 느낀 히드라 길드도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패배자는 될지언정 비열한 패배자가 될 생각은 없다.”
“증거는?”
“증거?”
아폴로의 말에 나탈은 역으로 반문했다.
“그럼 우리가 싱글레를 공격했다는 증거가 있나?”
“정황상…….”
“정황만으로 판단을 내리고, 이미 합의된 내용을 깨면서, 우리를 공격하겠다?”
거기서 아폴로는 입을 다물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패배를 인정한다. 히드라 길드는 노스랜드에서 물러날 것이다.”
나탈의 거듭된 말에 아폴로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승자인 싱글레가 갑작스러운 습격을 당해 죽었다. 정황상으로는 히드라 길드의 수작일 가능성이 높다. 아폴로가 보기엔 히드라 길드가 그랬을 가능성이 99퍼센트다.
하지만 반대로 히드라 길드가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는 상황에서, 정황이 그렇다는 이유로 앞선 합의를 무시하고 히드라 길드를 먼저 공격하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다.
더욱이 먼저 공격한다고 해서, 이길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지금 두 길드는 에이스 카드를 잃은 상황이었고, 남은 것들은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수준 카드들뿐이었으니까.
결정적으로 아폴로는 일단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얻을 건 얻었어.’
히드라 길드를 상대로 길드전을 벌였고, 이겼다. 빅스마일 길드 내에서 아폴로의 입지가 달라질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무리를 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정말 아닌가?’
물론 의문을 들었다. 정말 히드라 길드가 패배에 대한 응징을 한 게 아니라면, 누가 싱글레를 죽였을까? 싱글레는 분명하게 자신이 공격당했다고 말했다.
몬스터의 공격? 그게 아니면 정말 제삼자의 등장?
아폴로의 고민을 풀어준 건, 나탈이었다.
“둘이 싸운 곳으로 가면 답이 있겠지.”
아폴로는 대답 대신 소리를 쳤다.
“쉬어!”
7.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던 장소는 전투가 잦아드는 순간 다시 눈으로 덮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히드라 길드와 빅스마일 길드가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그들의 눈앞에는 전투의 흔적은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두 구의 시체를 가지런히 바닥에 놓은 채, 그 시체를 지키듯 서 있는 한 명만이 눈에 들어왔다.
한 명…… 하얀 털이 가득한 가죽옷을 입은 탓에 눈보라 속에서 그 정체를 분간하기란 굉장히 힘들었지만, 나탈은 그 상대의 정체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하회탈이었군. 그래, 하회탈이라면…….’
워로드에 30대 길드를 상대로 농간을, 그것도 자력으로 벌일 수 있는 유저는 오직 한 명밖에 없으니까.
“누구냐!”
굳이 아폴로처럼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아도, 머리가 돌아간다면, 상황 판단이 된다.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닌데, 이쯤 되면 그냥 알아서 눈치채주면 이쪽도 편할 텐데 말이야.”
“하회탈?”
눈앞의 유저는 나탈의 예상대로 하회탈이 맞았다.
하회탈이 모든 걸 꾸몄다. 빅스마일과 싱글레, 히드라와 소행크를 보는 순간, 히르칸은 이 둘이 빨리 붙기를 원했고, 그 둘은 기대 이상으로 제대로 잘 붙었다. 그리고 원하던 것 이상으로 잘 죽었다.
여기서 아폴로와 나탈의 사고는 달리 움직였다.
“하회탈 네놈이 감히! 우리 빅스마일을 건드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아폴로는 분노했다.
반대로 나탈은 고민했다.
‘굳이 정체를 드러낼 필요가 없는데, 드러냈다는 건……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다는 의미겠지.’
고민하는 나탈 대신 히르칸은 분노하는 아폴로부터 상대했다.
“빅스마일하고는 관계가 많이 안 좋지. 거기 있는 양반, 예전에 날 엿 먹이려고 했었지? 그런데 이제 보니 빅스마일 출신이시네?”
히르칸의 손가락 끝에는 초우룽이 있었다. 투구를 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손가락질을 당한 초우룽은 저도 모르게 투구 속에서 시선을 돌렸다. 찔리는 게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히르칸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이며, 이번에는 아폴로를 가리켰다.
“그리고 저번에도 이미 한판 벌였고. 그때 쓴 시계는 좋은 일에 잘 썼어. 고마워. 번번이 기부만 받고, 미안해.”
“네놈이…….”
아폴로가 분을 참지 못한 채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런 히르칸의 손가락은 이윽고 자신 발치에 있는 싱글레를 향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번에 해치운 인간하고도 사이가 안 좋았지.”
나탈이 이 대목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싱글레를 말하는 건가?”
싱글레.
히르칸이 처음으로 싱글레의 캐릭터네임을 들었다. 히르칸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인간이 날 죽이려고 작정하고 덤볐는데, 내가 와치맨 스타일로 한방 먹였지.”
와치맨 스타일?
좌중이 그 단어를 저도 모르게 곱씹었다. 몇몇은 저도 모르게 표정으로 의문을 표현했다. 그 표정을 발견한 히르칸이 싱글레를 슬쩍 바라본 후에 대답했다.
“그게 뭔지는 당사자한테 물어봐. 아니지, 지금 대화를 현실에서 듣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싱글레, 그때 준 시계는 진짜 좋은 곳에 썼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아, 그리고 소행크 잡은 거 축하합니다. 이제 사인받기 힘들 정도로 유명해지시겠어요. 아이고 부러워라.”
이쯤 되면 히르칸이 지금 하는 말이 그저 단순히 상황 설명이 아니라는 걸 눈치 빠른 사람은 충분히 눈치챌 수 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돌아오자고. 아폴로, 조금 전에 빅스마일을 건드리고 무사할 줄 알았냐, 그렇게 말했지? 일단 이제까지 내 경험담을 비춰본다면 아쉽게도 난 빅스마일을 건드리고 꽤 무사했네.”
도발이다.
“그리고 솔직히 내가 이제부터 빅스마일을 안 건드린다고 해도, 빅스마일이 날 가만히 놔둘 생각도 없잖아? 아폴로, 당신 내가 옆에서 손가락 빨면서 지나가는데 가만히 놔둘 수 있어? 내가 그쪽 앞에서 해골 스무 마리랑 함께 비욘세의 싱글레이디를 춤춰도 그냥
지켜볼 수 있어? 응?”
“빌어먹을 새끼…….”
명백한 도발.
“내가 빅스마일을 건드리나 안 건드리나, 어차피 우리 관계가 크게 달라질 건 없지. 이 정도면 조금 전 질문에 대한 대답이 충분할 것 같군.”
히르칸은 지금 아폴로 그리고 빅스마일 길드가 자신에게 덤빌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있었다.
“당장 네놈을…….”
여기서 아폴로는 분을 참지 못하고 폭발할 기세였다. 그 폭발을 막은 건 다름 아닌 나탈이었다.
“하회탈, 당신과 우리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던 걸로 아는데? 내 착각이었나?”
“히드라 길드는 건드린 적 없어.”
나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히르칸이 설명을 추가했다.
“일단 소행크는 정정당당하게 패배했다. 그 사실은 소행크 본인이 증명해주겠지. 난 그 죽음에 개입한 적이 없다.”
히르칸 네놈이 우리와 빅스마일 길드를 붙게 만들었잖아!
……같은 소리를 나탈은 하지 않았다. 증거가 없으니까. 정황은 워로드에서 증거가 될 수 없다. 또한 그 전투를 선택한 건 히드라 길드다. 그 선택마저 강요 받은 적은 없다.
물론 나탈은 여기서 물러날 생각 역시 없었다.
“할 말은 그게 전부인가?”
나탈이 다시 한 번 히르칸을 자극했다. 나탈의 분위기는 그런 증거 같은 건 무시한 채, 처절한 응징을 보여줄 기세였다.
그런 나탈의 기세 앞에서 히르칸도 이제까지의 장난스러운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며 대답했다.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든다면, 좋아. 여기서 길드전을 신청하지.”
길드전 선포.
좌중이 이번에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으니까.
‘길드전이라고?’
‘하회탈에게 길드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내 좌중은 제 의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내놓았다.
‘아.’
‘맙소사…….’
하회탈이 말하는 길드전이 무슨 의미인지.
“전투 방식은 단체전. 무대는 이곳, 얼어붙은 땅. 패배한 쪽은 노스랜드에서 손을 뗄 것. 두 길드가 순서를 정해서 덤벼도 좋고, 손을 잡고 덤벼도 좋아.”
하회탈이 지금 혼자서 30대 길드를 상대로 길드전을 선포했다는 의미라는 것을, 좌중은 스스로 깨달았다.
때문에 히르칸에게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었다.
“승패는 어느 한쪽이 전멸할 때까지.”
스윽…….
그 말을 마지막으로 히르칸의 등 뒤에서, 눈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해골 전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49화. 얼어붙은 땅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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